- 박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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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는 톱밥과 두루마리 화장지 심과 양말 한 짝과 쳇바퀴로 구성되어 있다. 나의 이름은 엠페도클레스, 혀가 꼬인다면 간단히 햄스터라고 불러 달라. 하지만 잊지는 말 것. 만물의 근본이 흙·공기·물·불로 구성되었다는 명쾌한 우주론을 펼친 이가 바로 나였다. 種은 바뀌었지만 난 여전히 세계의 본질을 읽는데 일가견이 있다.
나는 환생했다. 나의 神性을 입증하기 위해 에트나 화구에 몸을 던졌다. 끈적거리는 용암에 나의 위대한 두뇌가 잠기기 직전 돈오돈수의 깨달음이 왔다. 말하자면 나는 서양인 최초의 부처였다. 나의 멘토 석가모니 싯다르타가 나의 시대에 함께 했다면, 그래서 나의 신성이 이 글을 읽는 당신의 깨달음으로 더욱 빛날 수 있음을 알았다면 애꿎게 용암 천지에 뛰어들어 “I’ll be back”을 외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내가 인간이었을 시절, 불생불멸불변(不生不滅不變)의 4원소는 사랑과 투쟁의 힘에 의해 결합·분리되고 그에 따라 만물이 변형된다고 한 것을 기억하는가. 세계는 사랑이 지배하는 시기, 투쟁의 힘이 증대하는 시기, 투쟁이 지배하는 시기, 사랑의 힘이 증대하는 시기의 4기(四期)가 끊임없이 반복된다고 했었지. 나는 이렇게 읊었었다.
우선 들어라, 만물의 네 근원을 : 빛나는 제우스(불)와, 삶을 가져오는 헬레(흙)와 아이도네우스의 눈물(바람)로써, 지상의 샘을 적시는 네스티스(물)를
만물은 사랑의 힘으로 결합되고, 미움에 의해 분리된다. 이 커다란 두 원리로 인해 세계는 끊임없이 결합, 분리를 반복한다고 했었지. 내가 햄스터로 환생한 것도 이 원리에 따른 것이다. 나는 낮에는 양말 속에서 수면을 취하고 저녁이 되어야 어슬렁어슬렁 밖으로 나온다. 사람들은 천적들을 대적하기 두려워 해 내가 낮을 피하는 것으로 알지만 사실 나는 사람들이 모두 잠든 밤을 이용해 아이도네스의 쳇바퀴를 돌린다. 불을 쥔 神에서 흙에 선 철학자로, 이젠 저승의 신 아이도네스(하데스) 순풍을 받아 쳇바퀴를 돌리는 햄스터가 나다.
어젯밤에도 여느 때처럼 쳇바퀴를 돌렸다. 쳇바퀴는 나에게 놀이라기 보다는 경건한 의식의 제단이다. RPM은 120~130회를 유지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세계와 나를 연결하는 주파수 연결이 끊겨 세상이 혼란에 빠질 수 있다. 나에게 주어진 2분33초의 시간을 쳇바퀴 속에서 온전히 몰입하고 당진 사는 강아지 오리오에게 바통을 넘긴다. 녀석은 나보다 조금 긴 3분 33초의 시간 동안 달밤에 체조를 한다. 뒷다리를 벌린 채 천정을 우러러 보는 것, 그것이 오리오가 세상과 교신하는 방식이다. 그 다음은 보스포러스 해협의 괭이 갈매기다. 흰 몸 색깔에 갈매기치고는 특이하게 왼쪽 눈이 얼룩인 갈매기 조나단은 토프카프 궁전을 왼쪽으로 끼고 마르마라해를 향해 수평으로 날다가 보스포러스 대교를 지나자 마자 300미터를 수직 상승한다. 토프카프 궁전의 궁륭과 다리의 각이 정확히 90도가 되었을 때 조나단은 좌측으로 선회해 반경 300미터의 원을 그린다. 이제 안심이다. 우리의 조그만 노고 덕분에 지구는 중력가속도를 유지했고 사람들은 갓 데워진 아침을 선사 받았다. 하데스의 세계도 무너지지 않고 깊은 침묵 속으로 빠져 들었다.
오늘 아침은 유난히 피곤했다. 검은색 양말 속을 비집고 들어가 톱밥이 주는 아늑함에 몸을 맡겼다. 위대한 미션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밤 9시부터 명상단계인 베타파 상태에 진입해야 한다. 주인집 아들래미가 톱밥더미에 묻힌 채 돌돌 만 나의 몸을 젓가락 쥐 듯 들어올려 비행시키지만 않았어도 평온한 일상이 전개되었을 것이다. 녀석은 나를 수평으로 두 번, 수직으로 두 번씩 비행을 시키고 나와 눈을 맞춘 채 한동안 미소를 짓더니 원래 있던 자리에 내려놓았다. 이빨간 지가 꽤 돼서 손가락을 어흥~ 깨물까 생각했다가 어른 체면에 이러는 게 아니지 하는 생각에 마음을 접었다.
단잠을 깨고 보니 녀석의 비행 궤적이 계속 머리에 남았다. 갑작스러운 공중부양에 정신줄을 놓고 버둥거리고 있을 때 녀석이 뭔가 중얼거렸던 것 같은데…
사라....사라. 돈 주고 뭘 사라고 했을 리는 만무하고. 녀석의 발음이 시원치 않아서….사라…
그래, 녀석은 “살아”라고 말했다. 녀석은 허공에 커다란 창문을 그리고 창문을 연 후 나를 창문 안으로 집어 넣으며 분명 그렇게 말했다.
사지를 말고 정적에 싸인 나는 녀석에게 주검이었던 것이다. 창문 너머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요즘 아이들의 정신 세계는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은 알겠다. 이제 네 번째 파도를 타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 아이는 나에게 네스티스의 샘물이 되었다. 세계의 구원을 위해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속도로 쳇바퀴를 돌리는 일은 고단한 일이다. 이렇게 라도 나의 하루가 뜻밖의 사건들로 채색되지 않았다면, 지구를 지키는 일이 제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나는 설치류의 하루를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네 번째 윤회를 준비할 때다. 이 생의 기억을 안고 나는 이제 무엇이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