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경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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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열기로 한창이던 지난해 이맘때 부서사람들과 호프집에 모여 우리나라 경기를 보는 자리, 좋은 슈팅기회를 놓친 선수를 보며 한 상사가 이야기 한다. "아! 어이 없어! 저걸 못 넣냐! 저러고도 축구선수야? 밥만 먹고 축구만 한 거 맞아? 저 정도는 넣어 줘야지!" 나는 속으로 생각한다. '차장님도 밥만 먹고 회사 다닌 지 저 선수들 보다 오래 되셨잖아요. 그런데 차장님은 국가대표 수준으로 일 잘 하시나요?' 그 질문은 나에게도 유효했다. '그러게. 너도 회사 다닌 지 5년이나 되었는데 네 수준은 어디쯤 와 있니?' 부끄러운 마음에 혼자 쓴 웃음을 지으며 애꿎은 맥주만 연신 들이켰다.
미국의 저명한 교육심리학자 하워드 가드너는 자신의 저서 <열정과 기질>에서 예술과 학문 분야의 위대한 거장들 - 프로이트, 아인슈타인, 피카소, 스트라빈스키, 간디 등 - 이 자신들의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10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는 '10년의 법칙'을 주장한다. 그 10년을 시간으로 환산하면 하루 3~5시간씩 총 1만시간 정도 걸린다는 의미에서 '1만 시간의 법칙'이라 부르기도 한다. 다시 말해 평범함에서 비범함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자신의 전문분야에서 1만시간의 수련을 거쳐야 한다는 의미다.
만약 이 이론이 사실이라면 회사에서 하루에 10시간 이상 일해온 나는 만 5년이 지난 지금 대략 1만 3천시간 같은 일을 하며 보냈다. 그렇다면 나 또한 대가가 되어있어야 마땅한 것 아닌가? 또한 나보다 10년 이상 먼저 입사한 상사들은 1만시간을 넘어 벌써 2만, 3만 시간에 육박했을 것이다. 심하게 비약한다면 10년 이상 운전한 택시 기사는 카레이서 수준의 운전실력을 가져야 할 것이고, 10년 이상 영어공부를 해 온 우리나라 학생들은 원어 민 수준의 영어를 구사해야 함이 타당하다. 그러나 보다시피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그런 의미에서 1만 시간의 법칙은 대가가 되기 위한 양적인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닌 셈이다.
그렇다면 내가 보낸 1만 시간과 대가들이 보낸 1만 시간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나의 이 질문에 대해 하워드 가드너 보다 앞서 '10년의 법칙'을 주장한 스웨덴 스톡홀름 대학의 심리학 교수인 엔더슨 에릭슨이 이미 그 해법을 제시해 놓은 바 있다. "세계적 수준의 운동선수, 예술가들을 조사해보니 그들이 많은 훈련시간을 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전문성의 본질적인 차이를 설명해주지는 않는다. 그들은 통상 하루에 3~5시간 정도의 연습을 하는 것이었지만 훈련의 질이 달랐다. 핵심은 단순 반복 식의 훈련이 아니라 내적 목표를 세워 난이도를 높이고 점진적 과부하를 줌으로써 집중과 내적 긴장을 유지하는 가운데 ‘실전과 같은 연습’을 하는 것에 있었다. 생각 없이 천 번, 이 천 번씩 횟수를 늘려가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각성된 가운데 목적의식이 분명한 훈련을 해 온 것이다."
10년의 법칙, 1만 시간의 법칙으로 상징되는 수련의 양적 측면의 중요성. 그리고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수련의 질적 측면. 저명한 학자들이 오랜 경험적 연구 끝에 내린 결론은 이른바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속담처럼 너무나 당연한 말처럼 들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험적 연구의 가치는 그 당연한 것들에 권위와 신뢰를 부여한다. 중요한 것은 이론에 대한 깨우침에 머무는 것이 아닌 내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하여 이론을 내 것으로 체화시키는 일이다. 다시 말해 훌륭한 가르침이 삶의 실패 경험에 대한 해답을 제공해 준 것이라면, 그것을 내 삶에 적용시킨다는 것은 실패 경험에 대한 오답 노트를 만드는 것과 같다. 이는 삶의 다른 국면에서 같은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함이다. 그리하여 내게도 꽤 많은 시간이 주어졌지만 대가로 거듭나지 못하고 평범함에 머무를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몇 가지 실패 경험을 통해 되돌아보고자 한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실패의 경험은 대학입시에 여념이 없던 수험생 시절이다. 그땐 정말 지독하게 공부를 많이 했었다. 불필요한 것들에 한눈 팔지 않고, 정말 착하고 성실하게 공부만 했었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가 원하는 대학에 입학하지 못했다. 당시에는 그저 운이 없었다고만 생각했었는데,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에 와 드는 생각은 그때 실패는 지극히 당연한 결과였다는 생각이 든다. 양적인 면에서는 하루 12시간 가까이 공부를 했고, 풀어낸 수험서의 권수만 보더라도 정말 어마어마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결정적으로 놓치고 있었던 부분은 바로 공부의 질적 측면이었다. 나의 목표는 주로 정해진 기간 안에 몇 권의 문제집을 풀겠다는 식의 양적 목표였다. 그래서 풀다가 막히는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쉽게 해답집을 펼쳐 읽고 이해하는 식으로 정해진 기간 안에 목표를 달성했다.
'쉽게 해답집을 펼쳐 읽는 것' 바로 거기에 가장 큰 실패 이유가 있었다. 해답을 읽으면 마치 내가 이 문제를 해결하고 명쾌하게 이해한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그건 그 순간 뿐이다. 진짜 그 문제를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이 걸리고, 머리에 쥐가 나더라도 끝까지 끈질기게 내 힘으로 답을 이끌어 냈어야 했던 것이다. 즉 나는 주어진 기간 안에 정해진 분량을 달성해야 한다는 양적 목표에 천착한 나머지 어떤 단계와 수준을 뛰어넘을 수 있게 하는 깊이와 근성을 놓쳐버린 셈이다. 나는 이 사실을 회사에 들어와 알게 된 내가 좌절했던 문턱을 넘어본 똑똑한 친구들을 보며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주어진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않고서는 결코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않았다. 선배들에게 물어보면 손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임에도 미련하리만치 집착하여 스스로 해결하려고 노력했다. 답을 얻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대신에 그들은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통해 생각을 확장시키고 해결과정 자체를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었다. 내가 그 문제를 기계적으로 해결하는 수준에 머무를 때, 그들은 한 단계 레벨업 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셈이다.
또 다른 실패의 경험은 밥만 먹고 일만 했는데도 불구하고 국가대표가 아닌 평범한 직장인으로 머무를 수 밖에 없는 바로 오늘의 나 그리고 나의 상사들의 모습이다. 지금 내가 회사에서 하고 있는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제대로 몰입해서 공부한 것은 처음 1~2년 차 때였다. 마치 스폰지가 물을 빨아 들이 듯 열심히 배웠다. 굳은 일도 마다하지 않고, 선배 옆에 귀찮으리 만치 바싹 붙어 배우고 익혔다. 그러나 그렇게 익혀 놓은 일은 그 부서에서 일을 하기 위해 누구나 갖추어야 하는 기본 도구였을 뿐 일을 뛰어나게 할 수 있게 하는 차별적 기술은 아니었다. 핑계이겠지만 그렇게 익힌 기술을 밑천 삼아 매일 주어지는 루틴하고 행정적인 일을 처리하는 데만도 하루가 다 지나가버렸다. 그렇게 매일 반복되는 일에 함몰되어 나에게는 5년이라는 시간이, 나의 상사에게는 1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간 것이다.
매일 반복되는 일을 하다 보니 일의 패턴도 알게 되고 처리하는 속도도 빨라져 시간적 여유가 생겼다. 그렇게 생긴 빈 자리를 더 많은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기라도 한 듯 더 많은 루틴한 일로 채워 넣고는 거기에서 우월감과 성취감을 느꼈다. 그러나 내가 오랜 시간 들여 해온 일들이 나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하고 차별적인 일이 아닌, 시간이 좀 걸릴 뿐이지 누구나 와서 인수인계 받으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허무해졌다. 결국 일을 처리하는 방식만 세련되어졌을 뿐, 내 수준은 처음 일을 배웠던 1~2년 차 수준에 머물렀던 것이다. 이는 보여지는 양적 성취에만 천착한 나 자신에게도 문제가 있지만, 기계적인 프로세스에만 의존한 나머지 개인에게 스스로 더 높은 수준을 요구하지 않게끔 방치한 조직에게도 책임이 있다. 안타깝게도 이것이 오늘의 나와 나의 상사들, 그리고 그 전처를 밟게 될 후배들이 처한 현실이다.
마지막으로 아직 실패라 할 수는 없지만 지난 1년간 내가 몸소 체득한 경험이다. 지난해부터 매일 글쓰기와 매주 한 권의 책 읽기를 실천해오고 있다. 매일 하루에 2~3시간을 뽑아내 독서와 글쓰기를 통해 짧게는 5년 길게는 10년 안에 몸담고 있는 조직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밑천으로 삼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1년여의 시간을 보냈으니, 거기에 들인 시간은 약 1천 시간이 된다. 그래서 나는 지인들에게 1만시간의 1/10을 채웠노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했었다. 질적인 가치의 중요성을 깨달은 지금,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보낸 1천 시간 중 제대로 수련하는 데 보낸 시간은 얼마나 되는가? 1년간 50권의 책을 읽었지만 제대로 생각나는 책은 5권도 채 되지 않는다. 그리고 1천 페이지 이상의 글을 습작했지만 제대로 된 꼭지 글은 정작 얼마 되지 않는다. 나는 또다시 과거에 저질렀던 실수와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 하고 있었다.
매일 반복되는 규칙적인 독서와 습작은 비범함으로 도약하기 위한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그리고 그렇게 반복되는 양적인 수련이야 말로 세월의 힘을 얻어 나를 키워낼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단순반복 되는 하루 3~4시간과 그것이 누적된 1만시간, 10년만 가지고서는 결코 비범함의 경지에 오를 수 없다. 반복의 힘뿐만 아니라 수련의 질이야 말로 비범함으로의 도약을 위한 또 다른 기둥이라 할 수 있다. 매일 하되 제대로 해야 한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것을 습관화 하는 것도 중요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얻은 소중한 시간 동안 같은 활동을 되풀이 해서 연마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그러나 제대로 연마 해야 한다. 단순한 양적 성취에 함몰되지 말아야 한다. 하나의 작은 목표가 성취되기 전에 더 높은 난이도의 목표를 세운다. 그리고 그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머리를 따끈하게 하는 점진적 과부하와 약간의 긴장감을 유지해야 한다. 그렇게 깊이를 더해가는 뻐근함 없이는 결코 제대로 성장할 수 없다.
책을 읽더라도 그저 몇 권 읽었다는 성취감을 위해 먹어 치우듯 읽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저자를 내 사람으로 만들고, 써 먹을 수 있는 문장 몇 개는 반드시 건져낼 수 있어야 한다. 글쓰기도 마찬가지. 몇 페이지를 썼다는 성취감에 함몰되어 자화자찬할 것이 아니라, 세상에 내 놓을 수 있는 글이 몇 꼭지나 되는지가 중요한 품질 기준이 되어야 한다. 되풀이 되는 습작이 아닌 당장 2시간 뒤 출판사에 넘길 수 있는 수준의 글을 쓴다는 생각으로 임해야 한다. 그렇게 독서와 글쓰기 모두 뼛속에 아로새길 수 있는 실전과 같은 훈련이 되어야 한다. 밥만 먹고 공만 찬다고 국가대표가 되는 게 아니다. 밥만 먹고 일만 한다고 국가대표 직장인이 되는 게 아니다. 평범함에서 비범함으로 도약하기 위한 1만시간을 위한 게이지는 그런 제대로 된 수련을 통해서만이 채워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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