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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7월 18일 00시 39분 등록

스무 살 초반 명상 프로그램에 참여 했을 때의 일이다. 아빠의 권유로 참여하게 된 명상 프로그램이었기에 별다른 생각도 없었다.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명상의 시간을 피하기 위해서 나는 언젠가 산책을 나가버렸다. 날은 매우 추웠지만 따뜻한 실내에서 별로 마음이 편하지 않았기 때문에 추위에 약한 나라도 견딜만했다. 몸을 잔뜩 웅크리고 산책로를 따라 걷다가 어느 평평한 바위에 앉았다. 앉아 있다보니 얼마 전 헤어진 그의 생각이 났다.

그때는 정말 사랑한다고 생각했었기에 그와 헤어진 일은 나에게 큰 아픔이 되었다. 사랑은 미움이 되고 애정은 분노가 되었다. 헤어지고 나서 나는 한 동안 그 사실을 믿지 못했고, 일상에서 문득 떠오르는 그의 생각에 나는 짜증이 날만큼이었다. 마음이란 놈은 시시때때로 아파왔고, 그런 내가 싫어서 친구들과 술 마시고 노는 것에 열중하기도 했다.

가만히 앉아 그의 생각을 하면서 ‘그래 넌 좀 나빴잖아. 니가 나한테 그렇게 할 수 있는건 아니었지.’ 라며 결론을 내리던 순간이었다. 문득 그가 그렇게 나쁜 사람이었을까? 원래 그놈은 그리 거짓말을 잘 하던 놈이었나? 그가 나에게 늘어놓았던 거짓말들은 어쩌면 내가 불러일으킨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갑자기 든 생각에 별로 할 일이 없던 나는 그 생각을 이어갔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지난추억이 찾아들었다. 우리가 좋았던 때부터 우리가 삐그덕 거리기 시작한 순간까지. 몇 번이고 그는 나에게 사실을 얘기하기 위해 노력했다.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 면은 애써 보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가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게 나는 그를 옥죄어 갔다. 그것이 사랑이라 생각하며 나는 그를 구속하고 그가 나에게 내가 원하는 말들만을 늘어놓게 만들었다. 그를 그렇게 포박하면서도 나는 그를 사랑하니까 그걸로 모든 것이 면죄부가 되는 듯이 생각했다. 그런 사이에 그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아마 나는 그를 사랑했던 것이 아니라 그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내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그 환상을 깨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 사이에서 그는 많이 힘들어 했을 것이다. 결국 그런 관계는 서로에게 상처가 되었고 나는 그를 저주하면 다시 만나게 될 때에는 멋진 여자가 되어서 후회하게 해줄거라며 이를 박박 갈게 되었다. 그런데 그의 잘못이라고 생각했던 깨어짐이 결국은 나의 잘못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봐도 그의 잘못으로 헤어진거라 생각했는데 나는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를 그렇게 못되게 만든 내가 그에게 너무 미안했다.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었을텐데.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그에 대한 미안함에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나는 그렇게 바위에 앉아서 펑펑 울기 시작했다. “미안해,”를 몇 번이나 중얼거리면서.

날씨가 추워서 다행히 산책로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실컷 울고 바위에서 일어섰다. 전에 없이 마음이 편안했다. 이제는 그와의 추억의 무게가 조금은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결코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이었는데 생각해보니 그를 용서할 것도 없었다. 그저 추억이 남았다. 이제는 그를 다시 마주쳐도 그때 내가 화려한 모습이 아니어도 그와 악수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스피노자는 믿었다. 미움이란 어떻게든 사랑하려고 애를 쓰는 마음이라고.

그는 말했다. ‘바르지 못한 보복적인 증오로써 복수하려는 자는 비참한 생활을 할 것이다. 그러나 미움을 사랑으로 쫓아버리려는 자는 기쁨과 확신으로 싸운다.’

어떻게든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사람, 니가 잘 살 것 같냐며 이를 박박갈게 만들었던 사람을 이해하고 용서(?)하고 나자 나의 마음에는 평온이 찾아들었다. 미움이 나의 생활을 갉아먹고 있었던 것이다. 즐거운 일을 봐도 웃지 못하게, 신나는 일을 보아도 신이 나지 않게, 친구들 사이에서도 고독하게. 결국 미움은, 그를 향한 저주는 그를 향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나에게로 향해 있었던 것이다. 그를 저주한 만큼 나는 피폐해젔고, 그를 미워한 만큼 나는 처량해졌다.

물론 그가 모든 것을 잘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도 잘못을 했다. 하지만 나에게도 잘못은 분명히 존재했다. 나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를 이해하고 나자 나에게는 새로운 것들이 보였다. 그와 헤어질 때 나는 다시 그를 만나면 너 따위는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주듯이 잘 살거라고 다짐했다. 하지만 내 생활은 그렇지 않았기에 자꾸만 짜증이 났었다. 그리 하지 못하는 내 자신이 못나 보여 자꾸만 짜증이 났고 그러다보면 또 새로이 그가 미워지곤 했다. 하지만 그렇게 그에게 사과를 하고 나자 내 마음은 정말 그에게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의 행동과 말들이 더 이상 나에게 상처를 주지 못했다. 그와의 추억이 나를 갉아먹지 못했다. 정말 미움은 아무런 해법이 되지 못했다.

그를 위해서 그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다. 나를 위해서 그를 용서해주는 것이다. 그보다 더 소중한 나를 위해서 말이다. 그를 용서하고 보냄으로써 나는 온전히 나로 돌아올 수 있었다. 마음 한구석에 못난 감정들을 몰아내고 다시금 깔깔웃는 이루미로 돌아올 수 있었다.

흔히 용서란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내가 베풀어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용서의 의미는 그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를 위해서 내가 나에게 베풀어주는 최상의 것이다. 그것은 타인을 용서하는 듯한 모습을 띠지만 결국은 내 안에서 나를 묶고 있는 사슬을 풀어 내가 나로써 훨훨 날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다.

IP *.23.188.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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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18 02:26:58 *.139.110.78
공감이 많이 가는 글이다. 나도 나를 갉아먹는 것도 모르고
그 인간에 대한 분노로 내 마음을 가득채웠던 순간들이 있었는데..
결국 나를 살리기 위해 그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마음이 편해졌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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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
2011.07.18 08:05:37 *.38.222.35
언제부터인지 기억이 잘 나지는 않지만, '미워해서 뭐하나.. 나한테 남는 것도 없는데'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

그러면서, 아무리 나한테 ㅈㄹ 을 해대도, '그래, 넌 짖어라, 나는 별 감흥 없다'라는 자세로 일관하곤 했었던듯..

화가 날수록 포커페이스가 되고, 더 정중해지더라고.. (물론 화가 정말 났을 때 상대에게 너무 정중하게 대하고 나면 약간은 손해보는 느낌이 나기도 하지만..ㅋㅋㅋㅋ.. )

시동걸었으니 훨훨 멀리 멀리 자유롭게 날 수 있으리라 믿소!!! 화이팅!! !^______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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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갱
2011.07.18 08:52:38 *.166.205.132
미워하기도 전에 피해버리는 내 성향은
미움을 사랑으로 바꾸는 연금술을 경험하기 어렵게 하는것 같다.
루미의 용기는 그것을 대면하게 해서 뚫고 지나갔구나.
'미움이란 어떻게든 사랑하는 마음' 이라니, 어찌 이런 경지까지 갈 수 있단말이냐.
멋진 루미! 멋쟁이 루미! 스타일짱 루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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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18 13:53:57 *.124.233.1
루미큐브 ^^

"미움이란 어떻게든 사랑하려고 애를 쓰는 마음이다"
나 이 구절을 방금 수첩에다 아주 천천히 적어 보았다.

바위에 앉아 펑펑 우는 대목에서 내 코끝도 찡해졌어.
스피노자로 우리 통해부렀다. 그자 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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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훈
2011.07.18 14:08:55 *.111.205.251
스피노자를 읽으면서 물음표를 붙여 둔 부분이다.
나는 지금도 그것이 가능한 것인가 생각해본다.
미움을 사랑으로 바꾸는 것이.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탓하지 않고 사랑하는 것이 더 낫다라는 것이.

관계에 있어서 시간이 지나면 별 것 아닌 것들이
왜 그 당시의 시간에는 한발짝도 물러설 수 없는 저항에 부딪치는지...
자기방어라는 일차적인 답을 얻었지만
과연 원망과 미움을 어떻게 그 순간에 누그러뜨릴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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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18 14:25:16 *.45.10.23
아픔을 사랑으로 승화시키기 
루미는 보이는 것 보다 더 깊은 사람 같아 ^^ 
또 배움하나가 늘었다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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