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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카멜레온의 도발
정말 지긋지긋 하게도 비가 내린다. 올해 집중적인 여름 장마로 인해 몇 년 동안 내릴 비를 앞서 한꺼번에 보는 것 같다. 오늘 아침 출근길도 벌써부터 걱정이다. 장대같이 내리는 폭우로 인해 우산을 쓰더라도 별로 소용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역시 몰아치는 비로인해 애써 닦아 놓은 구두와 정장 바지가 금세 젖고 만다. 그렇다고 신사 체면에 겹겹이 바짓단을 위로 접어 올리고 다닐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런데도 이런 비와는 상관없이 늠름하고 우아하게 대로를 활보하는 이들이 있으니. 바로 여성들이다. 맨다리에 짧은 스커트나 하의실종 패션으로 출근하는 그녀들을 보면 어떨 땐 부럽기 짝이 없다. 맵시를 드러낸 탓도 있겠지만 남자도 이런 날에는 정말 편한 복장으로 출근 하였으면 이라는 상상이 스멀스멀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애꿎은 남녀평등을 속으로 외치기도 한다. 남자도 여름철에는 출근 복장에 대한 자유를 달라!
특히나 올해 눈에 띄는 것 중에 하나는 레인부츠이다. 레인부츠? 단어만 들으면 왠지 섹시한 느낌이 들지만 사실은 우리가 코흘리개 어린 시절 비가 오면 장구질 하며 놀던 새까만 장화를 새롭게 디자인하여 상업화한 상품이다. 장화라는 단어와 레인부츠라는 단어는 본질은 똑같을지언정 외부로의 형상은 전혀 다르게 포장된, 말 그대로 마케팅의 힘에 의해 탄생된 것이다. 그럼에도 지방 출장길 고속버스를 기다리고 있던 와중 마흔은 넘었음직한 여성 한분을 눈여겨보게 된 것도 세련된 복장과 선글라스 센스가 있었지만, 무엇보다 보라색 레인부츠로 한껏 멋을낸 탓이었다. 이른 새벽이라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덕분에 침을 흘리며 바라보았다. 참 멋있게 사는구나.
반면 남성의 패션은 연출의 폭이 어느 정도 한정이 되어 있다. 요즘은 젊은 세태에 의해 달라지긴 했지만 그래도 정통 코디의 비즈니스맨 정장 표준은 어두운 색이 주류를 이룬다. 직업적 커리어를 강조하는 전문직 종사자들 자가용 색깔이 검정 계통의 대세를 이루는 것처럼. 거기다 외국계 보험 업종에 종사하는 이들은 계절을 불문하고 고전적인 하얀색 와이셔츠를 고집한다. 아무래도 고객과 상담하는 서비스 업종이다 보니 단정하고 깔끔한 이미지의 하얀 색을 선호하는 듯 한데 그래도 더운 여름철 긴 옷은 조금…….
어쨌든 이 같은 단조로운 남성 복장에 비해 여성들의 옷차림은 아가씨, 미씨, 아줌마를 가리지 않고 다이내믹하다. 때때마다 여성의 마음을 자극하는 신상품이 쏟아지는 탓도 있겠지만 그녀들은 항상 백화점 카탈로그와 유행을 눈여겨본다. 덕분에 알록달록 새롭게 디자인된 옷의 향연에 뭇남성들의 눈은 여름이면 더욱 황홀해진다. 나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원래 의복에 별로 관심이 없는 터라 한번 옷을 사면 특별히 떨어지거나 유행에 뒤지지 않으면 줄기차게 입고 다니는 것과는 달리, 마눌 님은 함께 맞벌이를 한다는 이유도 있지만 일반 여자들처럼 종종 쇼핑하기를 즐긴다.
“옷장에 옷이 넘쳐 나는데 또 옷을 사는 이유가 있니?”
“입을 옷이 마땅찮아서.”
입을 옷이 마땅찮다? 그럼 옷장 가득 걸린 저 옷은 뭐란 말인가.
이런 행태를 두고 혹자는 이렇게 이야기를 한다. 남성들이 지긋하게 일관된 행동의 예측될 수 있는 패턴을 유지해 가는 것과는 달리, 여성들은 천방지축 하루에도 열두 번씩 변하는 감정의 사이클이 있어 외부로 나타나는 표징도 형형색색 이라고. 하지만 아시는지? 이런 외부 자극에 다양하게 표현하는 여성들의 속성이 현대를 살아가는 경쟁력의 요소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1. 나는야 우직한 돌쇠
남성은 자기를 인정해 주는 사람에 의해 자리가 좌우되기도 한다지만 직장생활을 하는 샐러리맨의 경우에는 아무래도 월급에 목을 매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인가 이런 남성들의 삶을 경주마에 비견하기도 한다. 출발선상에 각자의 트랙에 따른 여러 경주마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그네들은 자신들 나름대로 평소에 열심히 체력을 쌓았고 훈련을 해왔다. 긴장되고 초조한 입장에서 오로지 목표점을 노려보며 출발 신호를 기다리다가 스타트. 힘차게 경쟁을 하며 달려 나간다. 무조건 코뿔소처럼 앞만 보고 죽을 둥 살 둥 결승선을 향해 달려 나간다. 아니 옆을 볼 수가 없다. 앞만 향해 볼 수 있도록 눈가리개를 해놓은 탓이다.
한 달마다 돌아오는 월급에 의한 힘은 생각 외로 막강하다. 여덟 시간 근로기준법을 - 별로 지켜지지 않은 경우가 태반이지만 - 어떻게든지 사수해 나가면 주5일제에다 크든 작든 꼬박꼬박 통장으로 들어오는 금액은 말 그대로 색깔도 당도도 선명한 당근의 형태를 띠고 있다. 그러다 나이가 먹어가고 앞서 걸어간 인생 선배님들의 한숨소리를 듣게 되면 이렇게 살면 안 되잖아 라는 생각이 번쩍 들기도 한다. 거기에 자신의 길을 씩씩하게 개척해 나가는 프리 에이전트를 살아가는 소수의 분들을 보면 한없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이것도 잠시. 어떻게 되겠지, 아직 창창하잖아 라는 여유로움(?)이 금세 단순한 머리의 남자를 덮친다. 물론 목숨을 걸며 현상을 지키고 있는 이유로는 아무래도 가정 경제의 깃발을 쥐고 있는 것이 어찌 보면 불쌍한 남자이기에 때문인 탓도 있을 것이다.
타인과는 다른 생각, 다른 행동, 남들이 가지 않는 소수의 길을 선택하는 것에는 굉장한 용기가 요구되어 진다. 이에는 위험적인 리스크 외에 소속된 단체로부터의 따돌림을 받지 않으려는 무의식적인 속성이 한몫 자리를 하고 있다. 어릴 때부터 우리는 남과는 다른 밖으로 튀는 개인을 집단 및 공통체내에서 좀체 용납하기가 쉽지 않은 획일화된 교육을 받아왔다. 오전반 오후반의 코흘리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하면 정형화된 까만색 교복과 모자, 가방, 명찰이 까까머리 포스를 자랑하는 사춘기 여드름 녀석들을 기다리고 있었고, 한창 혈기왕성한 이십대 초반의 남성들을 한 공간에 밀어 넣고 3년간의 국방색 똑같은 복장으로 단합됨의 극치를 불어넣게 하였다. 그러다보니 남자는 오로지 하나로 통일된 단순함이 최고 야라는 방식 사고를 지배 받게 되었으니. 거기다 역사적 사명으로 분열이 아닌 통일의 숙원사업을 안고 태어났으니 두말하면 무엇 하랴.
다르다는 것은 지금 시대에 또 다른 차별화 일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거기에 학습이 되어있는 대한민국 남성들에게는 버거운 과제임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것은 나의 사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최근 들어 유전적인 탓도 있지만 시간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는 듯 하얀 세치가 듬성듬성 까만 머리의 영역을 잠식하고 있다. 이를 본 회사 동료들은 이야기한다.
“어이, 염색좀 하지.”
서글픔이 밀려왔다. 이 나이에 벌써 염색이라. 그러다 도발적인 생각이 번쩍 들었다.
‘백구로 밀어봐. 아니면 젊은 애들처럼 샤프하게 알록달록 파란색 내지는 노란색으로 염색을 해볼까.’
하지만 떠오르는 것은 이렇게 출근을 했을 때 나에게 쏟아지는 주위 분들의 이상야릇한 따가운 시선이다. 상상은 상상일 뿐. 오늘도 나는 비가 오는 가운데 틀에 박힌 무거운 검정색 구두끈을 하루의 치열한 각오를 되새기며 불끈 동여맨다. 가만있어보자. 저녁에 부서 회식이 있다는데 무엇을 먹을까. 따로 국밥이 땅기기는 하는데……. 그래도 같은 것을 시켜야 되겠지.
2. 카멜레온의 도발
“우와 시원해 보이네요.”
마흔 살이 가까워오는 차장님 한분이 흔히 말하는 민소매 옷차림의 복장으로 사무실 출근을 하였다. 부럽다. 더운 여름철에도 외근직인 나는 와이셔츠에다 넥타이, 양복 윗저고리까지 갖추어 입고 땀을 뻘뻘 흘리며 다니는데. 우이씨.
지하철 출근길 풍경. 이른 아침이라서 그런지 용감한 대한민국 여성들은 맨 낯을 드러내며 미술 공부에 여념이 없다. 손가방 하나가 통째로 예술 전시장이다. 마스카라, 파운데이션, 파우더, 립스틱. 또 다른 모습으로의 연출을 다듬기에 정신이 없다. 그 순서도 순서지만 늠름하게 카멜레온으로 변신해가는 과정이란…….
변화의 시대 창의력의 시대라고 한다. 그러다보니 경쟁사에 대비해 기발한 아이디어를 짜내어 도출하라는 지시를 매번 주간 회의 때마다 받곤 한다.
“이런, XX. 매일 똑같은 환경에 똑같은 업무를 하는데 무슨 아이디어는 아이디어?”
그래서 적당히 예전 것을 카피하고 조금 변용해 제출을 하기도 한다.
창의가 나오기 위해서는 모방이 필요하다.
창의가 나오기 위해서는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낸다는 전근대적인 방식은 이젠 통하질 않는다. 하면 된다는 어쩌면 무소불위의 정신도 사라진지 오래다.
좀 더 신축적이고 좀 더 유연 적이며 좀 더 가변성을 가미한 부러지기 쉬운 강한 대나무 보다는, 휠지언정 결코 쓰러지지 않는 부드러운 갈대가 필요한 시대가 도래 하였다.
그녀들의 다양한 헤어스타일을 보라. 아이 출산 후 머리 손질할 시간이 부족하여 관리하기 편한 아줌마 파마를 고집하는 분들도 있지만, 그래도 단조로운 남성들에 비하면 그 가짓수가 벌써 압도를 하고도 남는다. 기껏해야 숏컷트나 파마를 하는 남성들에 비해 그녀들은 프리밍 스타일, 매직 스트레이트, 볼륨 파마, 핑클 파마, 세팅 파마, 아이롱 파마, 웨이브 커트 등등 종류 자체도 손가락으로 헤아리기 힘들다.
여름철 즐겨 신는 샌들도 그러하다. 빨간색, 노란색, 파란 색등 어떻게 보면 무지개 채색을 갖추어 놓고 요일마다 새롭게 신고 나오는 듯하다. 거기다가 페디큐어는 어떠한가. 출근길 지하철 남성들의 천편일률적인 구두 패션에 비해 그녀들의 오색찬란한 수박모양, 물방울무늬 빛깔은 번잡한 도심의 지하철 공간을 한편의 갤러리 현장으로 변신을 시키는 듯하다. 낯 뜨겁지만 속옷 색깔도 마찬가지다. 한분의 마눌 님이랑 사는 통에 다른 여인들은 볼 겨를이 없지만 우연찮게 출근길 대중교통 안에서 그녀들의 아슬아슬한 노출된 뒤태를 보노라면 어디로 눈을 돌려야 할지 모를 때가 있다. 가끔은 수컷의 원초적 본능에 의해 슬금슬금 음흉한 눈으로 훔쳐보기도 하지만.
아침마다 얼굴의 추상화를 통해 칸딘스키의 작품을 응용하는 그녀들.
기다란 킬 힐의 굽 높이로써 세상을 오만하게 내려다보는 그녀들.
손톱, 발톱까지 덧칠을 하여 외부로의 세상과 오감의 커뮤니케이션을 시도하는 그녀들.
나이를 떠나 요일마다 바뀌는 패션 감각을 통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한껏 드러내는 그녀들.
머리카락을 길게도 짧게도 볶기도 지지기도 알라딘의 마법램프처럼 팔색조를 드러내는 그녀들.
짙은 색 정장에 짙은 구두, 짙은 양말, 짙은 넥타이에다 한결같은 패션을 자랑하는 남성들 앞에 그녀들의 도전은 이미 시작되었다.
카멜레온의 원뜻이 고대 그리스어로 '땅위의 사자' 라는 것을 아는지.
새날에 대한 갈망과 창출은 이미 그녀들의 본성이요 태생이요 본능이다.
어쩌면 벌써 게임은 끝났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제는 그런 그녀들에게 남성들이 빌붙어야할 시대가 온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