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희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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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아름다운 춤을 추고 싶었다.
햇살 가득 받으며, 따스한 햇살 아래 몸을 내맡기고 하늘하늘 가벼운 옷차림에 가벼운 신발을 신고
쉬임없이 그냥 그렇게 햇살을 받으며 행복하게 춤을 추고 싶었다..
그러나.. 내 세상은 어두었다..
캄캄하여 앞이 보이지 않았고, 그 곳은 마니 춥고 마니 외로웠다..
살기 위해, 살아야 하니까 두터운 옷으로 무장하고 어두운 곳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온 신경을 곤두세워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나를 맞추고저 사력을 다했다. 살아야 했으니까..
그렇게라도 살아남아야 했으니까..
아무리 떠돌아도 미로 속 어둠은 걷히지가 않았다.
영혼의 블랙홀과도 같은 그 곳, 그 시간들.. 지옥은 사후세계만이 아니었다..
두려움에 나의 몸은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나의 세계는 늘 슬픔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기도..
그랬던 것 같다.
삶의 생명력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시간 속에
영혼 깊이 살아 숨쉬는 내 마지막 생명의 불꽃이 기도를 했던 것 같다..
빛이다..
오랜 세월 어둠에 익숙해져 잘 보이지 않지만, 저 멀리 어딘가에서 한 줄기 빛이 보인다..
그 빛을 타고 다가온 공기의 느낌..
지금까지의 축축함이 아닌 살아있는, 생명의 그 무언가가 느껴진다..
저 빛을 따라가야만 하는데..
천 년이란 긴 세월을 갇혀있어서 일까. 몸이 너무 무겁다..
겨우 일으켜 한 걸음을 내디디려 하면, 가느다란 그 빛을 누르고 들려오는 세상 소리들이 너무 커진다.
무섭다. 다시 그 자리, 내가 늘 있던 바로 그 자리로 돌아가야만 할 것 같다..
한 걸음 내딛고 세 걸음 미끄러지며 겨우 블랙홀에서 빠져 나왔는데..
내 앞에 펼쳐진 건 사막이다.. 이럴수가..
이건 너무 가혹한거 아닐까..
사막을 통과하라 하시다니.. 내겐 그럴 힘이 남아 있지 않은 걸..
저게 뭐지..
저기 멀리.. 저만치 멀리서 별이 빛난다. 북극성이다..
아.. 블랙홀을 비춰주던 그 한줄기 빛이 사실은 북극성이었구나..
예쁘다..
어쩐지 따스할 것도 같고..
그래 이 느낌인데.. 이 따스함.. 생명받기 이전부터 내가 꿈꾸던 바로 그거..
뒤돌아보니 발밑에서 방금 빠져나온 블랙홀이 시커멓게 입을 벌리고 나를 쳐다본다.
눈 앞에는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이 펼쳐져 있다.
그 때였다.
잠깐, 아주 잠깐이지만 저기 멀리 보이던 북극성이 커다란 태양처럼 나를 덮친다.
그 강렬함. 데일 것만 같은 열기.
찰나에 불과했지만 여직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그 무언가가 나를 이끈다..
발이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라 하지 않았거늘, 한 걸음 내딛는다. 북극성을 향하여..
걷고 있다.
뒤 돌아보지 않고 사막 모래 위를 걷고 있다..
사막 모래 폭풍이 나를 휘감아 올린다.
물기 하나없는 건조한 모래밭이 내 안의 수분조차 앗아간다..
물이어라..
인간이자 암컷이었다. 암컷 인간은 물처럼 살라한다..
사막 모래 깊은 곳으로 살며시 스며들어 적셔주는 물처럼..
내 눈물, 내 슬픔은 따스한 물빛이 되어야 한다고..
심장에서 한 방울 따스한 눈물이 사막 모래 위에 떨어졌다.
신기하다.. 몰랐는데 내가 걷고 있는 황량한 사막이 황금빛 모래바다로 출렁인다..
아름답다..
낮이면 금빛 모래바다가 출렁이고, 밤이면 별빛바다가 쏟아져 내린다..
들린다. 별들의 소리가..
그들의 아름다운 선율이 내 마음을 적셔, 보이지 않던 많은 것들을 볼 수 있게 해준다..
아직 걷고 있다..
그러나 이제 난 이 사막여행을 사랑하게 되었다..
사랑..
그 위대한 아름다움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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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은 제게 연구원 3년차이자, 단군의 후예 3백일을 동시에 시작하는 또 하나 중요한 의미를 지닌 해입니다.
"변화라는 뿌리를 딛고, 관계라는 줄기를 타고, 문화라는 제 꽃을 피우겠습니다.."라고 되뇌였습니다..
"천직이란 내면과 외면의 조화를 이룬 진정성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라는 말씀만을 지니고
천복에서 천직으로의 길 걷겠습니다.
부지런히 자아성찰을 이어가 스러지는 낙엽이 아닌 별을 마음에 품고 살겠습니다.
부지런히 천복을 연마하여 천직이 일상의 업으로 퇴색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세상과 아름다운 접점을 만들어 가겠습니다.
그 접점이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제게 다가올지는 모르겠지만
이젠 슬픔보단 기쁨으로, 두려움보단 설레임으로 기다리겠습니다..
꺼져가는 생명의 불꽃을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슴에 별을 품고 살겠습니다..
함께 밥한끼 하지 못하고 내려오는 길 많이 아쉬웠습니다.
설레고 낯설고 반갑고 아쉬운 날이였습니다.
밥을 먹어야 정이 드는데.... 담에 기회 함 주실꺼지요?
얼굴뵈면 할말이 많을것같았습니다. 너무 많았나 봅니다. 말문이 막히 더라구요..
수희향님의 수련과정들, 단군의 후예를 기획한 과정, 칼 융, 캠벨, 헤세, 최근 이부영의 '분석심리학',
영혼을 맑게 해주는 영화등에 대해 이야기 하고싶었어요.
어디서부터 공부를 해야할지 어디서부터 감을 잡아 나가야할지 많이 궁금했는데..
가슴가득 안고 그대로 내려와버렸네요.. ^^
사실, 구수한 경상도 여자가 세련되고 이쁜 서울말씨에 기가 죽어버렸기도 했습니다. ㅎㅎㅎ
<앨리사의 북살롱>을 통해서 수희향님을 아는일이 불편하게하는건 아닌지 조심스럽다가도
오픈해놓으신걸 뵈면 한걸음 다가가기에 용기가 나기도 합니다. 많은 도움 받고 있어요.
온몸으로 감사함을 전해요~~~ 또 뵈는 날이 있겠지요?
행복 가득한 가슴안으시는 날 되어요..
저도 마니마니 아쉬워 잡은 손 놓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저 역시 혜진님이 낯설지 않았습니다. 아마 글로 이미 혜진님을 알아가고 있어서였겠죠..
저도 언젠가 혜진님과 이야기를 나누면 오래도록 이야기를 할 것 같다 생각했었는데.
어젠 그렇게 짧게 마음 나누는 걸로 시작했네요..^^
무슨 그런 말씀을요~ 혜진님의 단아한 분위기에, 그리고 부족원들 하나하나 책갈피를 만들어오신 고운 솜씨에 제가 반했는걸요~ ㅎㅎ
그럼요. "앨리사의 북살롱"은 오픈공간인걸요. 되려 관심가져주시는 혜진님께 제가 감사할 일이죠^^
이제 이렇게 인연이 시작되었으니, 천천히 그러나 오래 좋은 인연이 이어지기 소망합니다.
밥 한번이 아니고, 오래 가끔 밥도 먹고 차도 마시는 그런 인연이요..^^
혜진님도 조용한 경주에서 햇살만큼 마음도 따사로운 봄날 맞이하시고요..^^
이번 세미나를 통해선 가능한 많은 3기분들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좋았다.
서로 질문도 주고받고, 그러면서 우리 모두 각자의 생각들을 정리해 볼 또 하나의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지금 어디쯤 와 있는 것 같느냐는 질문이 가장 다가왔다.
지금 난 어디쯤에 있는걸까..?
거듭 묻고, 대답하는 질문이지만, 이제는 천복을 넘어 천직으로 가는 길을 걷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2백일차때까지만해도 천복을 심화하고 또 심화하는 과정이었다면
이젠 그것을 어떻게 천직화할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는 중인 것 같다.
그렇다. 천복은 연구원 시절, 아니 꿈벗에가서 이미 거의 윤곽을 잡았다.
하지만 심화하고 숙성하고 확신할 시간이 필요했다.
외부에서의 확신이 아니라, 내 스스로 이것이야말로 세상 그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하는데
연구원 시절과 작년을 고스란히 바쳤다.
누군가에게 천복은 그리 간단히 발견되는 것이 아닐뿐더러
무언가 실마리를 잡고 확신하는데도 시간과 정성 그리고 자기확신에 이르는 인내가 필요하다.
이제 천직으로의 길 위에 있다.
천직으로의 길 위라 하여 수련을 멈춘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천복에의 확신이 든 지금, 그 어느때보다 수련에 집중한다.
드디어 나의 천복이 나의 필살기가 되어 천직을 받쳐줘야 하기 때문이다.
천복을 찾고 천직으로 향하는 길에서
연구원 이후, 가장 기본 바탕이 되어 준 것이 단군의 후예이다.
어쩌면 진정 내가 가장 필요로 해서 기획했을거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왜?
실행해야 했으니까.
막연히 천복을 심화하고 일만시간을 채우고.
머리로, 이론으로 아무리 듣고 알고 있다고해서 내 삶에서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다.
일단 그렇게 변화를 시도할 실행의 무언가가 필요해 기획하게 된 것이 단군의 후예이다.
책읽기와 글쓰기.
철학과 스토리가 있는 프로그램 혹은 비즈니스 기획.
사람들과의 연계.
나의 천복이다. 내향이지만, 사람들을 무척 좋아함도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이고, 그것이 참으로 기쁘다.
끝없이 읽고, 쓰고, 기획하고, 생각하고, 사람들과 나누며
이제 그 끝에서 나의 천직을 만들어간다. 어떻게..?
지금부터 하나씩 세상과 아름다운 춤을 추는게다..
무의식이 도대체 천직과 무슨 관계가 있길래 이렇게 파고들어야 하는걸까..?
천직으로 향한 여정을 걸으면서도 여전히 무의식 세계가 중요한 것은
"내가 만든 세상"으로 시장의 호응을 끌어내고 싶기때문이다.
나의 세상으로 세상을 유혹하려면
내 안에 내 세상이 만들어져 있어야 하기에.
아니, 어쩌면 이미 타고 태어난 그 세상을 이제는 그만 세상 밖으로 표현해주어야 하는건지도.
외부에서 나를 끌어당기는 힘은 강하다.
그러나 융은 우리의 내적 에너지 또한 그에 못지 않게 강하다고 한다.
그래서 우린 아름다운 접점을 찾아 균형잡힌 삶을 추구할 수 있는건지도 모른다.
모든 사람들이 무의식 세계에 자신의 자아를 오롯이 내어준 천재들의 길을 걸을 필요는 없다.
그렇다고 인생 후반을 내면의 소리를 알아듣지 못하여 정신적 아픔에 쩔쩔매며 살 필요도 없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안에 자기정화작용 에너지를 충분히 지니고 있다고 한다.
내가 만든 세상으로 외부세상을 매혹하는 거, 그게 천직이다.
내 안의 심오한 세계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음이다..
천복은 원석이다.
가능성의 씨앗이고, 보다 고태적이고 그래서 뜨겁다.
생명의 원동력을 잉태하고 있는데, 그 숨결이 뜨겁지 않을 수 없다.
천직은 보석이다.
인고의 시간을 거쳐 다듬고 또 다듬어져 정제되었다.
원석의 거친 열기는 잦아들었지만, 보석의 영롱함은 더욱 빛을 발한다.
천복에서 천직까지는
수많은 실험과 고독 그리고 인내의 길이 연결되어 있다.
때론 다리가 끊어진 것 처럼 보이기도 하고, 때론 다리가 낭떠러지로 연결된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천복은 거기에 부응하여 시간과 밀도있는 정성을 들이면
저 스스로 조금씩 길을 만들어 앞으로 나아간다.
지루하리만큼 조금씩 그러나 꾸준히..
천직은 꽃이다.
내 안에 어떤 꽃의 원형을 품고 있는지는 우리 스스로도 알지 못한다.
거대한 운명의 수레바퀴 아래 씨앗이 가루되어 부서지지 않고, 꽃으로 피어나기만을 간절히 염원할 뿐.
신은 우리에게 묻는다. 꽃을 피우고 싶으냐고.
거기에 만약 네,라고 대답하면, 그에 응당한 삶의 몫 또한 짊어져야 한다.
네, 아니오 어느 쪽도 삶에 정답은 없다. 각자 선택할 뿐.
천직은 꽃이다.
처연한 아름다움이다..
# Book review 93- 이부영의 자기와 자기실현 읽기 완료
자기실현을 하는데 어째서 꿈이 중요한걸까.
이 책에 와서 비로소 더 명확히 이해하게 된 것 같다.
그저 육신의 피로를 푸는 것으로만 알았던 잠이었는데
무의식은 꿈을 통해 우리에게 많은 것을 보여주고 이야기한다.
나와같은 비전문가가 꿈을 속속들이 해석한다는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주의깊게 관심을 기울이다보면 아주 큰 현상들은 맥락을 짚을수 있다고 한다.
전문적인 분석가들에 비해 우린 스스로의 세계를 느낄 수 있는 본성이 우리 안에 있기 때문에 말이다.
이부영 교수님의 분석심리학 책을 읽을 때만해도 무의식의 구조에만 관심을 두었었는데
그림자, 아니마와 아니무스 그리고 자기와 자기실현까지 읽기를 진행해오면서
비로서 의식과 무의식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이해하게 된 것 같다.
그러나 무의식의 의식화 작업은 비록 꿈을 들여다보고 무언가를 느낀다고 해도
매우 어려운 작업임에는 틀림이 없다.
칼 융의 자서전 "기억, 꿈, 사상"
그가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회고한 기록이라 한다.
한번 읽었으나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거의 흡수한 것이 없지 않나 싶다.
분석심리학의 사이클을 융의 자서전으로 마무리하고, 헤세의 유리알 유희를 읽는 것으로
이번 겨울의 자기탐구 독서를 일단락지으려 한다.
마음같아서는 융을 계속 더 파고 싶지만
일생을 연구대상으로 삼아도 될 대가이다.
이쯤에서 잠시 다른 바람을 쐬는 것도 좋을 듯 싶다..
# Book review 94- 칼 융의 자서전, "기억, 꿈, 사상" 읽기
인용문 정리하고 북리뷰를 하여 기록으로 남겨야 하는 책들이 조금 쌓여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분석심리학 탐구의 종착역과도 같은 융의 자서전에 저절로 손이 간다.
특히 이미 한번 읽었던 책이었는데, 그때는 기초 공부를 하지 않고 읽었기에
두 번째는 어떤 느낌일지 넘 궁금했다. 연필이 아닌 연두색 색연필을 들고 책장을 넘겼는데..
어떤 사람의 경우 두 번째 읽으면 밑줄이 준다고 한다.
나의 경우는 반대.
연필로 밑줄 그은건 그야말로 기본핵심이고, 거기에 연두색 밑줄이 더해진다.
그러면서 자칫 연필로 밑줄그은 부분보다 그 다음 문장이 더 중요한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때는 아마 그 뜻까지 헤아리기에는 역부족이었겠다.. 싶은 문장들이 책 속에 튀어나와 내게 다가온다.
생각컨데, 두 번째 읽으며 밑줄이 준다는 것은 내용을 완전히 이해한 상태에서,
정말 오래 기억하고 싶은 문장만 추리는 경우이고.
나의 경우, 처음 융의 자서전을 읽을 때는 그 내용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에,
두 번째 읽으면서 당연히 밑줄이 늘어나는 것 같다.
처음엔 분석심리학적인 이해에 따른 밑줄이라기보다는
내가 이미 알고 있던 내용들 중 공명이 가거나 하는 부분들에 특히 밑줄이 많이 그어진 것이 그걸 증명한다.
왜 이런걸 시시콜콜이 분석하고 있는걸까?
내가 사고형인간이라서?
그럴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보다는 책읽기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고 싶어서다.
융과 같은 대가의 자서전은, 특히 대가들이 죽음 얼마전에 인생을 정리하며 기록한 자서전일수록
한 사람의 인생과 사상을 다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나같은 평범한 사람이 한두번 읽어 전부 흡수할 수 있는 게 결코 아니다.
이제 겨우 그의 광활한 세계에 눈을 뜬 정도...라고나 할까..
그나마도 그 세계가 너무 넓고 너무 눈부셔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는 것 같다.
캠벨의 "신화의 힘"이나 융의 자서전, "기억, 꿈, 사상"과 같은 책들은
머리로 읽는 게 아니라 에너지로 읽어야 하는 책들이다.
이성으로 이해하는 게 아니라, 내면으로 대가들의 사상이 조금씩 흘러들어올 수 있도록 해줘야 하는 책들이다.
사부님께서 왜 다독보다는 좋은 저자의 책 한권을 반복해서 읽는 것이 좋다 하셨는지
연구원 3년차 융의 자서전에서 다시 한번 온 몸으로 느낄 수 있는 오늘이다.
왜 좋은 저자 한 사람을 만나면, 그 주변을 캐보라 하셨는지도 알 것 같다.
융에게로 가는 길은 거대한 돌문을 열어야 하는 것만 같다.
너무 크고, 너무 무겁게만 느껴지는 문이기에
그 문을 열기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하다.
헤세와 이부영 교수님의 책으로 준비하고 다시 와보니
이제 그 돌문이 스스로 한뼘 정도 열려 내게 그 안의 세계를 보여준다.
놀랍다.. 놀라울 뿐인 세계가 펼쳐지고 있으며, 잠시 들여다보는 것만으로 나의 세계가 움찔한다.
대가의 책들은 에너지가 깊고 엄청나다..
충실함, 특히 결혼 후 배우자에 대한 신의 라는 어원을 지닌 Fidelity.
프랑스 감독이 말하는 조금은 낯설지만, 그래서 더욱 그 근원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사랑과 결혼이야기
: http://blog.daum.net/alysapark
# Book review 91- 이 부영의 "아니마와 아니무스" 1장 인용문 필사 완료
융의 자서전 읽기 진도를 나가다가 다시 돌아와 "아니마와 아니무스" 인용문 필사를 했다.
왔다, 갔다 앞뒤로 융의 이야기를 읽고, 인용문 필사하며 느끼는건
다시금 아니마와 아니무스로 되돌아오니 처음 읽을 때는 그냥 스쳐지나갔던 것이 새삼 이해되는 부분이 있다.
남성 안의 여성성, 아니마. 여성 안의 남성성, 아니무스.
이해하기 결코 쉬운 부분은 아니지만, 그래서 더욱 내게 많은 가르침을 주는 부분이다.
열등기능인 그림자보다 조금 더 어렵지만, 조금 더 무언가가 느껴진다고나 할까..
왜 인류 역사상 탁월한 예술가들 혹은 심미적 분야에서 위대한 인물들은 여성보다 남성이 많을까?
불가에선 왜 여자 몸으로 태어나면 해탈의 길에 도달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했을까?
여성으로 태어나 자기실현의 궁극적인 단계, "지혜로운 여인"으로의 길을 걷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걸까?
내 안에 늘 존재하던 많은 물음에의 답을 주는 책이었다.
여성이 자기실현을 하는데 가장 경계해야 할 점은 다름아닌 여성안의 남성성인 아니무스의 외향화라고 한다.
페미니스트들이 들으면 펄쩍 뛸 일이지만, 사회활동 그 자체를 멈추라는 말은 결코 아니다.
세상 속에서 지혜로운 여성으로서 자기실현을 행하기 위해서 감성의 존재인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더 내적성찰을 기해야만이 여성 안의 로고스가 성숙할 수 있다고 한다.
여성성을 잃지 않으며 내적으로 사색하는 힘을 길러가는 여성..
참으로, 참으로 어려운 길이 아닐 수 없지만, 나의 부족한 부분을 다시 한번 점검해볼 수 있는 좋은 가르침이다..
안그래도 출석부랑 단군일지 보면서 장거리에 강하시다는 표현이 참 맞구나..했어요.
초반에 일본도 다녀오시고 해서 적응하기가 쉽지 않으셨을텐데 2차 부족회의도 참여하시고
스스로를 100일차 여정에 조금씩 적응시켜가는 모습 보기 좋습니다^^
그러게요. 창원이 아닌 수도권에 계셨더라면 진홍님도 그렇고 또 진홍님의 열정에 저희들도 좋았을텐데
저도 내심 아쉽다..하고 있었어요..^^
영남권에서의 단군 모임.. 좋죠..
무튼 이제 막 세상과 만난 단군의 후예인만큼, 가능한 모든 걸 열어놓고 가려 합니다.
지금 당장은 어려울지 모르겠지만, 미래의 가능성은 열어두도록 하겠습니다..^^
단군의 후예란 프로그램이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품고 꾸준히 지속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홍님의 방문과 댓글은 오늘 아침 제게 또 응원의 힘이 되는걸요~ 감사요^^
그럼 진홍님 남은 기간에 최선을 다하는 아름다운 모습 지켜보며 계속 응원하겠습니다.
진홍님 홧팅~! ^^
# Book reivew 94- 칼 융의 자서전 "기억, 꿈, 사상" 읽기
오늘은 단군 2기 천복부족의 세미나가 있는 날이다.
세미나 주제는 "나의 미래 이야기"
사실 우리 안의 본성 혹은 무의식은 길만 열어주면 나의 미래를 이끌어간다고 한다.
이것을 아마 캠벨은 우주와 천복이 공명을 하면, 우주가 문을 열어준다..라고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 같다.
이 때 그 길을 막는 게 무엇일까?
다름아닌 나의 "외적인격"
너무도 잘 훈련되고 길러진 우리들의 외적인격은 자기검열이 너무도 강하다.
그 중에서도 부모님께 인정받고싶은 것이 첫째이고 그 다음이 학교 그리고 사회로 이어지는 고리들..
본성을 일깨우는 일이 사회적 반항아가 되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스스로의 생각 속에서 잠시 그걸 내려놓으라는 말이다.
지금껏 열심히 세상에 나를 맞춰 살아왔으니
이제쯤 한번은 내 안의 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는 거.
내 안의 원석을 캐어내어 그것을 보석을 만들고, 나의 세상을 만들고..
나의 이야기가 곧 내 세상이 되는 거.
스승님께서 늘 힘을 불어넣어주시는 그 말씀. 바로 그 세상을 향해 오늘 우리는 모이는 게다..
부족원들의 만남은 늘 설레이고 가슴뛰고 기다려진다..^^
# Book review 94- 칼융의 자서전 "기억, 꿈, 사상"
드디어 다 읽었다. 뒤에 남은 부분에서 도저히 손을 뗄 수가 없어서 읽기를 완료했다.
긴 여행을 하는데 어쩐지, 어딘가에 도착하고 오늘 하루를 끝내고 싶은 느낌이랄까..
내가 융의 자서전을 얼마나 이해하고, 얼마나 흡수했을까.
감히 얼마라고도 말 할 수 없는 깊은 사상이다.
그저 마냥 끌려들어갔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엄청난 에너지를 지닌 책이라는 표현밖에는..
원형그대로의 울퉁불퉁한 커다란 돌 문.
융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이다..
영화리뷰: http://blog.daum.net/alysapark
그에 의하면 사랑은 위대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위대한 사랑이 일상의 소소함 앞에 무너진다고 하니..
융이 여성들에게 주는 말은 아니무스의 외향화를 경계하라는 말이다.
에로스, 즉 날때부터 감성적인 여성들은 로고스, 즉 이성을 내면에서 성찰하기가
이성의 남성이 감성을 키우는 일보다 어렵다고 한다..
나이가 들수록 자기 안에 스며들어 내적으로 로고스를 성장시켜 아니무스의 외향화를 경계하라..
참으로 중요한 가르침이다.
여성성을 잃지 않으며, 내적성찰로 인해 이성을 성장시켜 지혜로운 여인의 길을 가라는 말씀.
마음에 새기고 또 새겨본다..
# Book review 92- 헤르만 헤세의 "인생" 인용문 필사 & 북리뷰 완료
헤세의 예술, 사랑 그리고 인생 중, 세번째로 집어든 인생이다.
짧은 글귀들안에 그야말로 자기탐구의 대가가 살아온 인생을 잘 접어놓은 것 같다고나 할까..
헤세가 생각하는 인생을 한 마디로 정의하면 어떤걸까..?
수백번 가지가 잘려 나가도
나는 참을성 있게 새잎들을 돋아나게 한다
그리고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나는
미친 세상과 사랑에 빠져있다 (14쪽)
내면탐구의 대가이자 서정시인이기도 했던 헤세가 말하는 인생.
단 네 줄에 그의 치열함과 인생의 치열함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것 같다.
미친 세상이지만 사랑하며 살 수 밖에 없는 우리들의 인생 말이다..
그런가하면 오랜 시간 정리되지 않던 운명과 그것에의 극복이 어찌 이루어질지
아래 문장을 대하고 무언가 울리는 게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는 삶의 행로가 결정되어 있는 것 같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삶의 행로에는 언제나 인간이 스스로 개입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 변화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15)."
일본 대지진이 참 안타깝다. 늘 자연은 그 거대함을 우리에게 어떤 식으로라도 일깨운다. 마치 인간의 운명은 쉽게 제어할 수 있다는 것 처럼 말이다.
그러나 일본인의 대응 앞에 나는 다시 한번 놀라며 무언가 내 안에 불이 켜지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지금껏 거대한 자연재해 앞에서 인간의 힘은 너무도 미약하여 울부짖는 거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생각했다. 그런데 그들의 침착성 앞에 나는 숙연해질 수 밖에 없었다. 지상 최대의 재난과도 같은 가장 커다란 운명적 요인 앞에서도 여전히 인간으로서 우리가 개입할 요소는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숙연함 앞에 다시 한번 경의를 표하며, 일본인들이 지구 위 많은 사람들의 함께 하는 힘으로 어려운 시기를 잘 이겨내길 간절히 기원하는 마음이다...
다음으로 그렇다면 어떻게 거대하게 가로막는 운명 안에서 변화의 가능성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에 대한 물음에 대해 해세는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
"가능한 것이 생기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불가능한 것이 시도되어야 합니다 (17)."
내게 물어보았다. 넌 얼마나 시도해보았느냐고..
내게도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꿈꾸는 이상세계가 있다.
그런데 어쩌면 나는 꿈꾸는 것만 좋아할 뿐, 그것이 현실에서 시도되고 구현되어야 할 때는 스스로 불가능이라 지레 금긋기를 했던 것은 아닐까. 그 누구도 아닌 내 자신이 먼저 말이다..
"고독은 운명이 인간을 자기 자신에게로 이끌기 위해 거치게 하는 길이다 (56)."
헤세도 그러하고, 융도 그러하고, 대가들은 누구나 고독을 이야기한다.
한 인간이 자신 안의 본성을 찾아 그 길을 걷기 위해서는 고독한 시간을 피할 수가 없다고.
침묵하는 고독 속에 비로소 새로운 에너지가 흐르기 시작한다고..
그리고 그 에너지야말로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열정과 끈기의 근원이 되어 줄 것이라고..
그러나 늘 스승님이 반복하여 강조하시듯이, 고독의 길을 걷는 것이 이상의 늪에 빠지라는 건 결코 아니다.
"우리는 활동적 삶에서 관조적 삶으로 도망쳐서는 안되며, 그 반대도 안 된다. 그보다 두 가지 삶 사이에서 계속 왔다 갔다 하며 두 삶에서 모두 편안히 느끼고 둘 다에 참여해야 한다 (46)."
헤세 역시 이상과 현실을 잘 엮어서 만드는 작품이 아름답다 한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이 아니라 두 세계를 모두 깊이 몰두하여 참여하고, 그 안에서 내 삶을 길어올리는 것 말이다.
간단한 명구들로 채워진 얇은 책이지만, 그만큼 강한 임팩트로 다가온다.
아마 누구보다 자신과 그리고 세상과 치열하게 살았던 헤세의 삶이 그대로 담겨있어서인 것 같다.
아무리 세상이 고통스러워도 세상과의 사랑을 멈추지 않았던 헤세의 삶 말이다..
봄이 오려 한다.
겨우내 헤세에게 파묻혀 지냈으니, 그의 말처럼 이젠 그만 세상과 사랑할 때인 것 같다.
인생의 슬픔 속에서도 봄이면 어김없이 빛날 봄햇살을 맞으며 말이다..
# Book review 93- 이부영의 "자기와 자기실현" 인용문 필사 시작
아무래도 "자기실현"에 대한 이야기라 그런지 앞의 두 권보다 필사할 인용문이 좀 많다.
다시 요점을 읽어나가듯 천천히 해야 겠다.
책은 언제 내것이 될까..?
인용문 필사를 다 끝내놓고 리뷰를 하기 위해 내가 요점만 정리해놓은 인용문을 다시 읽을 때.
그 때 비로소 저자의 가르침이 내 안에 각인되기 시작한다.
얼마나 단단히 각인시켰는지는 리뷰를 써보면 안다.
오롯이 내 것이 되지 않은 것들은 나의 언어로 다시 표현되지 못한다.
아직 뭉게구름처럼 막연히 내 안 어딘가에서 뭉클뭉클 연기는 피워내지만
막상 글로 쓰려면 술술 풀어지지 않는다.
옛날에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참 맞다.
공부한 내용을 확실히 이해했는지를 확인해보려면
친구에게 말로 설명해보거나 글로 써서 자신이 다시 읽어보라고.
그래서 누군가의 글을 읽거나, 말을 해보면 우린 그 사람의 진정성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진정성이란 진정한 실력, 진정한 열정, 진정한 내공 등 많은 걸 담고 있겠지..
내면과 외면의 조화.
그것이 진정성이라 말씀하시는 사부님의 가르침이 다시 떠오르는 아침이다.
갈 길이 멀지만, 오늘도 더딘 한 걸음을 떼어놓는다..
그렇죠. 저도 어제 외출했다가 저녁때 디기 춥더라고요 ㅋ
그치만 경희님! 4월이 몇 걸음 뒤에서 자신의 예쁜 봄시간을 기다리고 있으니 슬퍼하지 마세요^^
경희님께서 저의 부족한 코멘트에 정리가 되셨다는건, 그만큼 평상시에 치열한 자기고민을 마니 하셨다는 반증이세요^^ 아마 경희님은 단군의 후예를 시작하기 전에도 나름 내면의 울림을 느끼고 무언가 계속 깊이 생각하시다 단군의 후예를 만나 불꽃이 점화되었을거라 생각하고 있었어요^^
제가 100일차 2차 부족회의에서 처음 그룹이 되어 공직자이면서도 자기성찰과 발전에 그리 깊이 관심을 기울이는 경희님이 정말이지 기쁘고 반가웠었거든요^^
자신감과 여유라니... 정말 아주 좋은 선물을 스스로에게 주셨네요^^
경희님 새로 시작하는 동영상 강의도 즐겁게 하시고요. 말씀처럼 건강은 넘 무리마시고요.
경희님도 늘 행복하고 충만한 시간들 보내시고 파티때 뵐게요^^
저야말로 경희님같은 분들께 에너지 얻으며 감사히 지내고 있습니다^^
경희님과 댓글로 이야기나누니까 마구 친해진것 같은 느낌이 들어 무쟈게 좋은데용~ 키키 ^^
# Book review 93- 이부영의 "자기와 자기실현" 요약정리 및 자가분석
1장. 왜 자기실현인가, 는 너무,너무 중요하다.
그 말씀들도 중요하지만, 그 동안 교수님의 책을 따라 읽으며 내 안에서 또 다시 내가 보인다.
나는 아무래도 작년과 올해에 걸쳐 내면탐구 2번째 사이클을 돌고 있는 것 같다.
그러면서 교수님의 책을 읽으며 어렴풋이 나의 그림자와 아니무스를 뿌옇게나마 볼 수 있었는데
이 책 "자기와 자기실현"에 와서는 나의 그림자가 더욱 정확히 보인다.
내 안에 무엇이 콤플렉스로 억눌려있는지, 그래서 그것이 나의 의식세계에서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
놀랍게도 나의 그림자 속에는 내 안에 억눌린 열망이 자리잡고 있으며, 만약 내가 그것을 불러내어 의식화하고 현실의 범주를 넓혀간다면, 내 삶 자체도 지금보다 성장하고 확장될 수 있을 것 같다. 무의식을 의식화하면 자아의 세계가 확장될 수 밖에 없다던 융의 말이 조금 이해되려는 순간이다.
내면탐구는 계속되어져야 한다.
나의 천복이 진정한 나의 천복인지 또한 계속 점검되어야 한다.
천복도 진화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천복이 필살기화가 되어야만 천직으로 변환할 수 있음도 깨달았다.
꿈벗에서 찾는 나의 동그라미 세 개 중, 두 개는 확실했었는데 하나가 희미했었다.
꼭 세 개일 필요는 없으니까..하는 마음에 그대로 두고 걷고 있었는데
"왜 자기실현인가?"라는 이 부분에서 비로소 나의 마지막 동그라미 하나가 선명해지기 시작한다.
더불어 동그라미 세 개 안의 교집합까지도..
수련시간내 1장을 읽고, 요약정리하며 많은 생각을 하였다.
읽고, 인용문 필사하고 다시 요약정리하고 생각하고.
참 많은 시간이 들어가는 일이다. 사실 어찌보면 세상에서 말하는 아웃풋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알고 있다. 이 시간들이 얼마나 필요한지. 왜 필요한지.
나의 천복이 진정한 천복인지 묻고 또 묻고 확인하고
그것이 필살기화가 되도록 할 때
그 때 비로소 천직의 문이 열릴 수 있음이다..
1장. 왜 자기실현인가? 요약정리: http://blog.daum.net/alysapark
300일차. 천복을 어떻게 천직화할지 무수한 고민을 하고 있다.
천복은 그것 그대로 바로 천직화할 수 없다.
천복이 필살기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천직을 생각해볼 수 있다.
"연금술의 변환과정은 대개 니그레도 (검게 됨), 알베도 (희게 됨), 루베도 (붉게 됨)의 세 과정에 치트리타스 (노랗게 됨)가 추가되어 네 단계로 알려졌으나 15, 16세기에 치트리니타스는 탈락되었다고 한다 (164)."
천복을 천직화하는데 필요한 원료는 무엇일까?
빠알간 열정과 그 열정을 지탱하는 푸르른 끈기.
그리고 그 붉음과 푸르름을 한데 엮어줄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 전에 우리는 검은 단계, 즉 어둠 속에서 고뇌하고 방황하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그렇게해서 버릴 것은 버리고 자신을 비워 스스로의 욕망이 아닌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백지상태에 도달했을 때, 그 때 비로소 붉은 꽃, 열정을 피워올릴 수 있다.
그러나 붉은 열정이 황금으로 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푸르른 끈기가 필요하다.
열정은 뜨겁지만 너무 변덕스럽다. 열정만으로 자기실현의 길 혹은 천복을 천직화할 수 없다.
반드시 서늘한 끈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끝으로 함께 할 사람들이 필요하다.
이는 특히 1인기업가들에게는 더욱 절실하다.
이미 시스템을 갖춘 조직의 일부로 사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1인 기업가들이라면
찰스 핸디가 말한 벼룩이들의 연대는 그 자체로 또 하나의 필수요건이다.
천복, 즉 나의 꿈을 찾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것을 명확히 하는데도, 즉 모든 세상적 불순물을 가라앉히고 하얀 상태가 되는 일도 힘들다.
하지만 어쩌면 그 때부터인지도 모른다.
정작 생명이 불꽃인 붉은 열정을 피워올리며 본격적으로 나의 세상을 만들어가는, 내가 스스로에게 직업을 부여하는 일 말이다.
검은 혼돈 속에서 하얀 빛을 따르고
붉은 열정에 푸르른 끈기를 더해 황금으로 변하는 길.
융이 말한 연금술사가 어떻게 천복에서 천직으로 이르며 자기실현의 길을 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어느 지점에 와 있는지 다시금 돌아보고 되짚어본다..
# 단군의 후예 1기- 3차 세미나를 끝내고..
기도를 마치고도 불을 켜지 않았다.
아마 어제의 여운이 아직 내 안에 머물러서인듯..
단군의 후예 3차 세미나.
지난 3백일을 함께 온 이들과의 마지막 세미나였다.
나의 3백일은 어떠했나..
고요한 어둠 속에 가라앉아 생각해보았다.
100일차..그 땐 만사가 허둥지둥이었던 것 같다.
200일차 들어 비로소 새벽기상이 내 하루로 들어오기 시작하고
무엇보다 어느날 "매일의 위대함"이 문득 깨달아졌던 것 같다.
깨달음이란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고 몸소 체험한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것 같다.
세상 수많은 가르침들을 중 부단한 시도 끝에 어느날 문득 내 안에서 울림이 터져 나올 때
그 때 그 가르침은 비로소 깨달아지고, 내 것이 되는 것 같다..
그리고 300일차..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공평하지만, 그 시간을 어떤 밀도로 채우는지는 우리 몫이라는 걸 깨달았다.
사람들 모두 하루 24시간을 살고 있는 게 아니다..
난 나의 새벽을 열정을 다하여, 생명혼이 깨어있는 시간으로 시작하고 싶었다.
수련을 하며, 잠 또한 그냥 단순히 육체에게 휴식을 주기 위해 버려야 하는 시간이 아니라
의식을 내려놓고 무의식의 소리에 귀기울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임을 깨달을 것도 3백일차에서였다.
새벽기상습관화를 만들고
매일의 위대함을 깨닫고
시간의 밀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체득한 요즘
난 문득 또 한가지 정말 소중한 가르침인 "함께 하는 힘의 위대함"이 내 안에서 터져나오는 걸 느끼고 있다.
나 혼자 피우는 꽃은 얼마나 심심할까..
그보단 차라리 무향, 무취가 되어 다양함을 피워올리는 것이 훨씬 좋겠다.
나를 비우고 또 비우는 것이, 나를 채우고 또 채우는 것보다 세상을 더 많이 품을 수 있기에 말이다.
나라는 한 사람의 삶에 누군가가 다가와 그 사람의 삶을 얹으면
거기 그 곳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나를 비우는 것이 나를 잃는 것일까.. 그렇지 않음이다..
호숫가에 달빛이 어린다고 호수가 사라지는 건 아닐테니 말이다.
책읽기를 좋아하고
기획을 좋아하고
무엇보다 사람을 좋아한다.
심한 내향형인 나는 세상 방식으로 사랑하지는 못한다.
서서히 다가가고.. 소리없이 가만히 보듬어주고 싶은게 내 사랑법이다..
관계맺기에 조금 긴 호흡이 필요하겠다..
현대판 샤먼, 문화기획자.
황금벼룩이로의 변신을 돕습니다.
나의 네이밍과 슬로건.
3백일이 끝난 내 앞에 드러난 내 모습이다.
빠알간 열정
붉은 열정을 지탱해줄 푸르른 서늘함의 끈기
그리고 사람들.
사람들이 함께 할 때
북극성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 마음의 별이 되고
하루하루 걷고 있는 이 사막이 황금빛 모래로 출렁이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 난 사막에서도 아름다운 춤을 출 수 있을 것 같다..
혹여라도 제 응원의 조금이라도 힘이 되었다면 그건 정말, 정말 감사하고 기쁜 일이에요^^
저도요. 아무래도 세미나를 진행하다보면 개인적인 대화시간이 길지 않아 헤어지고 나서 늘 아쉬어요.
다음에 1기분들과 그곳으로 MT를 가게되면 그땐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죠..^^
명희님 다시 뵈는 날까지 건강하시고요 (이거 정말, 정말 중요한거 아시죠..^^) 조금씩 수련모드를 서서히 끌어올리세요. 서서히.. 그래도 충분해요, 명희님이시라면요^^

일을 주도한 사람이 가장 많이 얻는다더니, 타인을 돕고 또 자신을 도운 셈이군요. 추카해요.
그날 세미나에서 수희향님이 해준 조언을 잊지 않으려고 해요. 끈기!
제가 다시 또 다른 걸음을 내 딛을 수 있게 된다면 그건 순전히 수희향님 덕분이예요.
세미나도 만남도, 그 무엇보다 나의 치열한 수련이 먼저 토대가 되어야 의미있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다음 만남에는 다른 모습으로 만날 수 있도록 애를 써야겠네요. 많은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헤어져서 아쉬웠지만 또 기회가 있겠지요. 힘을 내야겠네요.
# Book review 93- 이부영의 "자기와 자기실현" 중: 십우도에 나타난 자기실현의 길
이부영 교수님의 "자기와 자기실현" 3장 인용문을 정리하다보면 흥미로운 부분과 만나게 되는데 다름아닌 선불교의 수행과정 중의 하나인 "십우도"를 분석심리학의 관점에서 재해석한 것이 그것이다.
결국 진리에 이르는 길은 여러 길이지만, 궁극적으로 도달하고자 하는 그 곳은 한 곳인가..하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잠시 정리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제1도- 소를 찾다
"소를 찾는다는 것은 '자기'를 찾는 것이다. 나는 소를 융이 말하는 자기의 상징이라 부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소의 이미지가 가지고 있는 신화적, 상징적 의미뿐 아니라 불교적인 의미에서도 소는 인간의 본래 진면목이라 보기 때문이다 (277)."
가장 첫 단계가 소를 찾아 길을 떠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지금껏 바깥 세상으로만 뻗어있던 나의 관심을 내면으로 돌리는 자기탐구의 여정을 떠나는 것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건, 일단 이 시작하는 의지와 마음이 가장 중요한 단계라고 한다. 즉 한 사람이 자기실현의 길을 걷겠다고 뜻을 세우면, 그 때부터 그 사람의 세계는 이미 시작되었다고 한다.
제2도- 발자국을 보다
십우도가 선불교의 수행방식의 하나였던만큼, 우선 선불교에서 말하는 "발자국을 보다"라는 의미를 짚어보면 그건, 경전을 공부하며 앞서간 이들의 발자취를 더듬는다는 의미가 된다고 한다.
반면 분석심리학의 관점에서보면, 자신의 무의식의 발자국을 더듬어 보는 것이 그것이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스스로의 무의식의 발자국을 더듬어볼 수 있을까? 융에 의하면 꿈이 말해주는 것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라고 한다.
다만 한가지, 발자국만 쫓다보면 갑자기 소를 놓칠수도 있다는 경고에 주의하라 말씀하시는데, 때로 사람들이 목적과 수단을 혼돈하는 경우를 생각해보면 중요한 깨우침이라는 생각이 든다.
제3도- 소를 보다
소를 본다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건 '자기'를 본다는 것을 뜻한다고 한다.
"자기를 본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자기의 흔적이 아니고 자기의 본체를 본다는 말이다. 그것은 '자국'이 아니고 살아 있는 생명체이다. 분석이 진행되어 어느 날 불현듯 무의식은 살아 있다고 느끼는 순간이 온다. '무의식은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몸소 깨닫는 순간이다 (286)."
제4도- 소를 얻다
소를 얻다..? 설마 이쯤에서 해탈의 경지에 도달함은 아닐텐데.. 무슨 의미일까..?
"제4도의 단계에서부터 무의식은 그저 인식의 대상이 아니다. 함께 씨름하며 대면해야 할 삶의 일부가 된다. 소를 얻는다 함은 무의식과 함께 하는 삶의 시작을 말한다 (287)."
아.. 그런 의미구나..
그러니까 내 안의 열등기능인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힘들지만 그것들을 의식세계로 끌어내려는 노력, 내 안의 아니무스가 왜곡되지 않고 성장할 수 있도록 보살피고 가꾸는 노력.. 이렇게 서서히 무의식 세계를 인식하고 직접 부딪히기 시작하는 일들이 이 단계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제5도- 소를 기르다
이건 쫌 이해할 것 같다. 다름아닌 자아가 적극적으로 무의식 세계를 관찰하고 분석하고, 그래서 의식화 작업을 하는 단계. 아마 두세걸음 진행되면 한걸음 후퇴하는 지난한 과정이 행해지는 단계일 듯 하다.
제6도-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다
글쎄.. 무슨 뜻일지 조금 살펴봐야 할 것 같다.
"마음의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 분석심리학적 용어로는 자아가 자기로 돌아가는 것이다 (291)."
아.. 그러니까 무의식 세계가 드디어 의식화되기 시작하여 의식세계가 확장됨을 의미하는 것 같다.
무언가 의식세계의 범위와 에너지가 깊고 넓어지는 느낌이 든다..
제7도- 소를 잊고 사람만 남다 (집에 돌아와 소를 잊다)
소를 잊는다는 게 무엇을 뜻하는 걸까..? 선문답같은 이 단계가 무얼 의미하는지 궁금하다.
"이 망우존인의 단계는 아직도 사람이 자기 수행의 결과로 얻은 안락한 경지에 홀로 도취되어 있는 모습을 비판하는 뜻이 담겨 있다고 보았다 (292)."
아.. 그러니까 선불교에서 말하는 깨치지 않았으나 깨친 것같은 착각이 드는 단계라고 할 수 있겠다.
분석심리학적 관점에선 무의식에서 흘러들어온 에너지로 자아가 커진 단계, 즉 "자아팽창"의 단계라고 한다. 사람들이 자기실현의 길을 걷다 오만과 자만에 빠지는 경계해야 할 단계라고 한다.
제8도- 소와 사람 둘 다 잊었다
이제 다시 소도 잊고 사람도 잊는다 한다. 무슨 의미일까.. 단계가 높아질수록 점점 그 뜻을 헤아리기가 조금씩 버거워진다.
"여기서 말하는 '잊음'은 자아의 자기에 대한 집착, 자기실현을 꼭 완수해야 한다는 의지, 자기실현의 목표에 대한 집착을 잊는 것이다 (296)."
그러니까 자기실현을 이루고야 말겠다는 그 의지마저 버리는 단계라고 한다.
선불교에서 흔히들 말하는 "비움의 경지"라고나 할까..
제9도- 본래의 근원으로 돌아가다
문득 캠벨의 영웅여정이 떠오른다. 영웅도 늘 자기자신이 출발하였던 그 곳으로 귀환한다.
어쩐지 비슷한 이야기가 펼쳐질 듯 하다.
"제9도는 깨달은 사람, 즉 자기실현이 된 사람의 경지를 설명하는 듯하다. 있는 그대로 그렇게 거기 피어 있는 꽃, 흐르는 물, 산과 해가 지고 떠오르는 것처럼, '자기'또한 그 자체로 있는 자연이다. 자기는 우리의 무의식에 그렇게 있다 (297)."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 그곳에 깨달음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다고 한다. 온전히 "자기자신"이 되는 그 길 말이다..
제10도- 시중으로 돌아가 중생을 돕다
그렇다.. 깨달은 자는 나홀로 고고한 길을 가는 것이 아니다. 제9도에서 깨달음을 얻었다면, 이제 마지막 10도에서는 나눔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자기실현을 왜 하려는지에 대한 근원적인 답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어떻게 중생을 돕는지가 특이하다.
"저절로 고목에 꽃이 피게 한 것'이 중생을 돕는 길이다 (298)."
타인을 돕는 일에 있어서조차 그 어떤 강박관념이나 억지스러움이 베어 있지 않다.
타인 역시 있는 그대로의 자기실현에의 길을 돕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나눔의 길이라는 의미인듯 싶다.
"깨달은 자는 금기에 구애받지 않는다. ... 이 뜻을 이기영은 '아주 모르는 사이처럼 대할 수 있다면, 즉 '서로 이해에 얽혀 사랑과 미움의 난장판을 만들지 않는다면'의 뜻으로 해석한다. 깨달은 자의 '서늘한 인간관계'가 엿보이는 말이다 (299)."
"그러나 그 길은 고독한 자의 감상적 우수와는 전혀 달리 확고하게 대지에 발을 딛고 현실을 직시하며 살아가는 길이다 (304)."
세상 그 어떤 것에도 걸림없이 자유롭지만
홀로 고고히 외로운 길을 걷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사람들과 나누는 삶.
그것이 선불교에서 말하는 십우도를 분석심리학적 관점에서 바라본 자기실현의 길이라 할 수 있겠다.
어렵지만 멋스러운 인간적인 길이라는 느낌이 든다..
http://blog.daum.net/alysapark
# 새로운 사랑에 눈뜨게 해준 19세기 낭만주의 음악계의 거장, 슈만과 클라라 그리고 브람스의 삶과 사랑
: 영화 "클라라"

19세기 낭만주의 음악을 이끌었던 세 사람이 서로 사랑하고
그렇기에 보이지 않는 갈등과 고뇌 속에서 살아간 이야기.
어찌보면 천재들의 삶 또한 평범한 사람들과 다를바 없이 보이기도 하고
그런 가운데 또 그 나름 다른 것 같은 그들의 이야기.
영화나 책 혹은 그 밖의 예술을 통해 늘 대하는 같지만 다른 그들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매혹적이다..
어릴때부터 뛰어난 피아니스트의 재능을 보이던 클라라는 슈만과 사랑에 빠지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슈만은 6년이란 긴 세월을 법정투쟁까지하며 클라라와 겨우 결혼하게 된다.
9살이나 많은 슈만이 그때까지만해도 그다지 뚜렷한 성공을 이루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나 역시 천재는 천재가 알아본다고 했나. 클라라는 그의 천재성을 익히 간파하고 역사에도 남을 두 사람의 사랑이 시작되었고 결혼하게 된다.
영화는 그들이 결혼한 뒤 뒤셀도르프에 정착하는 걸로 시작된다.
이때는 이미 슈만이 명성을 얻은 뒤로서 음악가로서 절정에 이른 시기이지만
그 절정 속에 언뜻언뜻 그의 정신병 증상이 나타나기도 하는 시기이다.
그러던 어느날 슈만 부부는 우연히 브람스를 만나게 되는데
이번에도 역시나 클라라는 그의 천재성을 알아본다.
신화에서 보면, 영웅이 탄생하기위해 여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클라라는 슈만과 브람스라는 두 거대한 낭만주의 영웅을 세상에 인도하는 뮤즈와도 같은 존재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이다.
그렇게 슈만의 후계자로 지목되어 슈만의 집에 머무르게 되는 브람스.
그러나 그는 자신보다 훨씬 연상인 클라라를 흠모하게 된다.
"제겐 자유가 필요합니다. 고독할 수 있는 자유말입니다.."
처음 자신의 집에 머무르기를 청하는 클라라에게 브람스가 했던 말이다.
고독과 자유.
예술가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두 단어인건지..
그래서 어쩌면 그들은 일반인들과 다른 길을 때로는 그렇게 외로이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는건지도..
얼핏생각하면 스승의 부인을 사랑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 일일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세 사람은 서로가 서로에게 전부 우정과 애정을 품고 있다.
슈만은 아내 클라라를 사랑하고 그녀에게 인정받기를 원하지만
자신 못지않은 천재성을 지닌 제자, 브람스의 인정 또한 갈구한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아내를 흠모하는 그를 질투한다.
클라라는 누구보다 남편을 사랑하고 끝까지 남편 곁을 지키며 브람스와는 통속적인 그 어떤 관계도 맺지 않지만, 브람스에게 끌리고 슈만의 죽음 이후 브람스의 음악을 연주하며 피아니스트로 재기한다.
브람스는 당대 최고의 천재적 음악가인 슈만을 존경하고 끝까지 스승으로 모시지만
클라라에게 약속했던 것처럼 끝까지 독신으로 남아 사랑은 오직 클라라에게만 바친다.
이들 세 사람의 사랑이 왜 아름답게 느껴지는걸까..
그건 음악이라는 깊은 세계에 그들의 삶조차 내어주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들 어느 누구도 음악 앞에 자신의 삶을 주장하지 않았다.
그들이 사랑한건 슈만, 클라라, 브람스가 아닌
슈만을, 클라라를, 브람스를 에워싸고 있는 서로의 깊고 거대한 음악적 세계였을테니 말이다.
그럼에도 천재들도 살아내야했던 일상이란 현실 앞에 그들의 빛나는 재능과 노력마저 흔들리는 모습은 나처럼 일개 평범한 이들의 마음에 한없는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저들도 저러했을진대..
위엄있게 죽고 싶었던 슈만. 라인강에 투신하지만 자살이 실패하자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 자신, 슈만이나 브람스 못지 않은 음악적 재능을 지녔지만, 역시 19세기는 여성 음악가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날리며 슈만과 브람스 두 거장의 사랑으로 만족해야 했던 클라라. 어쩌면 그토록 뛰어난 음악가였기에 두 거장이 사랑하지 않을 수 없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비록 세 사람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슈만이 아닌 브람스도 아닌 "클라라"라는 제목에서, 영화감독도 두 거장을 뒷받침하는 그녀를 21세기에는 알아주고 싶었던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였다..
"많은 여인을 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일생 당신만 사랑하겠습니다. 당신이 죽으면 저도 같이 가겠어요. 그 어둠의 세계로 혼자보내지는 않겠습니다. 그래서 당신을 슈만에게 데려다 줄게요.."
슈만의 죽음 이후 실의에 빠져있는 클라라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브람스이다.
같은 여자로서 클라라의 삶이 재조명된것이 기뻤지만, 사실 내가 재발견한 인물은 브람스이다.
그는 내게 짧은 말과 그의 전 생애를 통해 사랑에 대해 또 다른 깊이를 일깨워주었다.
영성학자 데이비드 호킨스의 말처럼 인간의 행위에는 "의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인간이기에 때론 사랑보다 욕망에 따를 수 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혼의 사랑은 지키겠다고 한다. 영혼이 어디로 향하느냐에 따라 육체적 관계가 사랑이될수도, 욕망이 될수도 있는것을..
그렇게 지독히 사랑해서일까. 사랑하는 그녀가 혼자 어둠의 세계로 가게 하지는 않겠다고 한다.
그런데 그곳에 함께 가 슈만에게 데려다주겠다고 한다.. 나로서는 감히 상상하지 못했던 사랑이다..
사랑하면 함께해야 한다 생각했던 내게는 엄청난 충격의 한 마디였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시간과 공간을 함께 나누며 그것으로 인해 내 삶을 채워가면 좋겠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도 사랑할 수 있음을 배웠다.
내것으로 소유하지 않음은 물론이고, "우리"라는 단어 속에 함께하지 못해도 삶이 사랑으로 채워질 수 있음을 말이다..
상대방의 존재이유를 온전히 지켜주는 사랑.
어렵지만, 너무 깊지만.. 그래서 진정 사랑이 위대할 수 있음에 새로이 눈뜨게 해준 영화였다.
칼융이 말하는 자기실현의 길을 저만치 앞서 걸어간 이들.
그래서일까. 그들의 의식세계는 나와 같은 이에게는 무의식 세계인듯 깊고 오묘하게 나를 그들 세계로 이끌었다..
# 새벽 수련: 번역
오늘은 왼종일 호랑이 세미나가 있는 날.
그러므로 역시 새벽에 번역.
호랑이 프로젝트가 어느 정도 윤곽을 드러내서 그런지
그와 연관된 생각들이 많다.
천복을 찾는데 가장 큰 어려움은 사회적으로 내 안에 심어진 장벽을 허무는 일인 것 같다.
반면 어렵사리 찾은 천복을 천직으로 연결하는데 가장 큰 어려움은
천복찾기에서 내려놓은 그 현실을 다시 뚫고 나가는 일.
천직의 씨앗이 되는 천복을 찾으면, 그것을:
철학 x (천복이 필살기화 수준에 도달한) 컨텐츠 x 마케팅,이 이루어져야 한다.
호랑이 프로젝트는 위 공식 중, "마케팅" 부분에 집중하는 프로젝트이다.
오늘 하루도 충만히, 꼭꼭 채워서 홧팅이다..^^
머리가 붕..뜨는 느낌이 들면서 책도 읽을 수가 없다.
그때 영화를 본다. 사람들이 술이 땡기는 게 바로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싶다.
<덴마크 영화, "애프터 웨딩"+ 맘마미아>를 합친 것 같은 한국영화
신성우, 예지원 주연의 "결혼식 후에" 영화리뷰: http://blog.daum.net/alysapar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