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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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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3월 25일 01시 09분 등록
나는 톱니바퀴 속에서 살고 있다. 커다란 틀 속에 크기도 다르고 모양도 다른 톱니바퀴들이 여러 축들에 연결되어 뒤엉켜 있다. 각자 하는 일에 따라 다른 톱니바퀴가 맞물려 있는 경우도 있고, 어떤 톱니바퀴들은 멀리 떨어져 홀로 있는 경우도 있다. 가끔 내 주위를 살펴보면 이 세상이 복잡한 것 같으면서도 일을 처리하고 수많은 톱니바퀴가 맡은 바 업무를 수행하는 것을 보고 놀라울 때가 많다. 참으로 정교한 시스템이다. 나는 89년 3월 1일에 이곳으로 왔으니 17년이 지났다. 3년만 더 근무하면 강산이 두번 바뀐다는 20년이다. 세월이 어떻게 흐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냥 다른 톱니바퀴들이 뒤에서 계속 밀어서, 밀려왔다고 해야하나? 최근에 구본형 선생님의 책인 코리아니티 경영이라는 책에서 나에 대하여 표현한 구절이 있어 뜨끔했다. “10년간의 경험을 쌓았다고 해서 꼭 무언가를 터득한 것은 아니다. 1년의 경험을 10번 되풀이 하는 사람들도 많다.” 1년의 경험을 17번이나 한 나는 도대체 무엇을 한 것일까?

톱니바퀴의 생활은 단조롭지만 업무가 힘든 날이나, 고독감이 들면 여기를 떠나고 싶다는 유혹이 생겨날 때도 있었다. 이 일을 시작한 초반에 그런 생각이 들었는데, 시간이 흐르다보니 그런 생각을 언제 했었는지 기억조차 감감하다. 이 곳을 떠나고 싶다고 주위 톱니바퀴들에게 조언을 구해본 적이 있었다. 어떤 이는 배부른 소리라며 그 튼튼한 철밥통으로 만들어 놓은 든든한 세상에서 왜 나오려는지 묻는다. 내 대답은 늘 그렇다 “그렇게 살면 재미가 없잖아요? 한번밖에 살지 못하는데,” “그럼 너는 세상을 재미로 사냐?” 는 염장 지르는 소리에 나는 더 이상 할 말도 없고, 말 할 기분도 싹 사라진다. 그럼 세상을 재미가 아니면 무엇으로 살까? 시울라 교수가 말한 개미처럼 죽어라 일만 하다가 죽는 건가?

톱니바퀴 세상 속에 있다보면 여러 가지 경험을 하게 된다. 즐거운 일은 좀 더 큰 톱니바퀴로 갈아타는 것이다. 크기가 좀 더 커지고 톱니수도 많아지고 맞물림도 늘어나고, 밑으로 거느리는 톱니바퀴들도 늘어난다. 이러한 일이 두 번 있었다 처음은 즐거운 마음에 축하 인사를 드리고 한 턱 내느라 분주하다. 뜨거운 축하의 열기가 식어갈 즈음이면 커진 톱니바퀴에 비례하여 더 빠르고 더 힘차게 일을 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내가 스스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종전보다 더 큰 톱니에 물려있는 것을 알게 된다. 큰 톱니바퀴로 갈아타는 것은 그 크기에 비례하여 해야할 일과 책임질 일이 늘어난다.

이렇듯 즐거운 일도 있지만, 종종 마음이 아플 때도 있다. 중간에 교체되어 가는 톱니바퀴를 볼 때이다. 약한 재질로 만들어져서 마모가 심하거나, 강한 재질로 만들어졌지만 능력 이상의 일을 하다 보니 예상보다 빨리 마모가 된 경우도 있다. 특이한 경우지만 한 구역의 톱니바퀴 축이 부러져서 그 충격으로 인해 주저앉는 톱니바퀴들도 있다. 가장 마음이 아픈 것은 원래 강한 재질로 일을 하다가 과로로 빨리 퇴출된 경우이다. 톱니바퀴 세상을 위하여 자기 몸과 딸린 식구들도 포기하고 열심히 일만 했는데, 돌아오는 것은 폐기 처분되고, 그 자리에는 튼튼한 다른 톱니바퀴로 교체되고 만다. 여기저기에서 “안됐다” 라는 동정을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똑같은 일상으로 돌아간다.

교체 대상은 아니지만 가끔 상태가 좋지 않으면 정비소에 가게 된다. 밤새 돌리게 하고 이것저것 부려먹어서 생긴 증상인데도, 관리하는 톱니바퀴가 문안을 가서 하는 말이 걸작이다. “그래 내가 뭐라고 했어, 톱니의 상태는 누가 챙겨주는 거 아냐, 각자 알아서 챙겨야지” 그야말로 기가 막힌 경우이다.

늘 단조로운 생활이지만, 가끔 비상이 걸리는 경우도 있다. 가장 큰 톱니바퀴가 다른 톱니바퀴로 바뀌는 경우이다. 가장 큰 톱니바퀴가 바뀌면 그야말로 정신이 없다. 새로운 톱니크기를 맞춰야 하고 축도 수정을 해야 회전속도도 변경해야 한다. 여기저기서 톱니들의 위치가 바뀌고 가장 근접한 톱니들도 바뀌게 된다. 그야말로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전에 했던 작업들은 없어지고, 다시 새로운 작업을 수행하게 된다. 아주 가끔 무서운 일도 있다. 최근 정보통으로 소문난 톱니바퀴를 만나 얘기를 들어보니, 바로 옆 동네에서 자발적으로 일정수의 톱니바퀴를 밖으로 내보낸다는 소식이었다. 톱니바퀴 세상 중에서도 가장 단단하다고 소문난 우리 세계가 이런 지경까지 온 것을 보니 세상의 변화 속도가 만만치 않은 것 같다.

17년 동안 톱니바퀴 속에 있으면서 나름대로 자긍심을 느끼면서 신나게 일한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따뜻한 동료애나 다른 톱니바퀴들에 대한 배려가 줄어들고 있다. 회전하면서 동력을 전달하는 단순한 업무임에도 성과를 측정하고 평가를 한다고 분주하다. 승진과 두둑한 연봉을 받는 잘 나가는 톱니바퀴들도 있지만, 그와는 반대로 승진에 누락되고 적은 수입에 허탈해 하는 톱니바퀴들도 많다. 또 업무는 계속 증가하고 있는 반면, 재미는 점점 더 없어지고 삭막해진다. 앞으로 이런 추세는 점점 더 심해질 것 같다.

가끔 정해진 기간을 훌륭하게 채우고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가는 선배들도 보았는데, 처음에는 그 모습이 자랑스럽게 느껴졌으나, 아무런 준비 없이 톱니바퀴 세상을 떠나서 지낸다는 것이 그리 쉽지 많은 않았다. 나는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 것이며, 또 어떠한 모습으로 나가게 될 것인가 생각해 본다. 여기를 벗어나는 상상을 하면 가슴이 뛴다. 이 톱니바퀴속의 복잡함과 끌어당기는 중력이 강하지만 이것을 탈피하는 힘을 길러 이곳을 벗어날 것이다. 앞으로 이곳을 벗어날 용기와 에너지를 배울 것이며, 다른 세상을 열어가는 기술과 방법을 배울 것이다. 그리하여 비상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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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
2007.03.26 00:29:59 *.75.166.69
영훈 아우, 글 잘 읽었습니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군요...
그리고 현명한 표현, ^^
비상할거라 믿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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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희
2007.03.26 10:28:47 *.114.56.245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이번 기회가 모두에게 비상의 기회가 되길 바래봅니다. 저는 사실 '일' 이라는 일상의 생활에는 다소의 구속감을 느끼고 있지만 하루하루가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습니다. 할 일 또한 왜 이렇게 많은 지요. 음악, 여행, 글쓰기와 읽기, 와인과 함께 이야기 나누기, 영어공부하기. 어느 하나 재미있지 아니한 것이 없습니다. 작은 가지치기를 시도 했으나 --- 어느 한가지 버리질 못했어요.
아무튼 몇 주간 우리 모두행복했습니다. 제안하신 것 처럼 이것이 시작이길바래봅니다. 선생님께서 불러주시던 아니불러 주시던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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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화
2007.03.26 10:34:40 *.180.46.15
공장의 기계에 속도를 맞춰야 하는 노동자만 톱니바퀴가 아닌가 보네요.
가끔은 그 좋은 톱니바퀴 자리를 두고 나오는 사람도 있죠.
비상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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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찬
2007.03.26 22:25:37 *.140.145.63
톱니바퀴들의 이야기.. 너무 적절해서 더 슬프고 안쓰럽고 가슴한켠이
아리는 글이로구만.. 영훈이가 한참동안 묻어 두었다가 표출한 글이라
서 그런지 버릴 대목이 하나도 없구만 그래.

넌 진정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굴리는 멋진 톱니바퀴로 다시 태어나게
될꺼야. 너를 기점으로 펼쳐질 아름다운 톱니바퀴들의 향연을 기대해
볼께. 고생많았고 이제는 너의 색깔을 세상에 확실히 드러내 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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