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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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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5월 13일 08시 59분 등록
1. 물가를 떠나서


한 달 동안 새벽 4시에 일어나 서울로 출근했고, 12시 다 돼서 돌아와 1시 반쯤 자는
생활을 했다. 운전을 하면서 눈뜨고 자는... 그런 날들이었다. 그래도 별 불만이나 힘들다는 생각은 없었다. 사는게 다 그러려니...
연구실을 정리해서 펜션의 손님을 받게 하고 나는 안채로 책과 시설들을 옮겼다.
책상과 책장만 정리해 둔 채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아직 정리가 되지 않은 채 보따리들이
방안 여기저기에 널려 있다. 그만큼 머릿속이 어수선하다는 생각이 든다.

회사에 상근하기 위해 서울에 방을 얻었지만 수요일 저녁에는 안성으로 간다.
목요일엔 천안과 안성의 대학에 강의를 가야한다. 흔히들 말마따나 보따리 장사를 가야한다. 머리속도 정리할 겸 가르치는 것이지만 회사에 상근을 하게 되어 그만 두어야 하는데 작년 겨울에 이미 결정된 일이고 해서 번복하기도 그랬다.

2. 도시 속으로

광화문에서 금화터널을 지나서 세브란스 병원과 연세대학교 앞을 통과하고
수색 쪽으로 가는 큰길에서 모래내 시장 쪽으로 빠져나오면 얕으막한 산비탈에
빼곡하게 들어찬 주택들이 보인다, 그 사이로 난 2 차선 길은 명지대 앞을 지나서 흥은동 쪽으로 이어지는 명지대 후문 쪽 큰길로 연결된다.
그 중간 쯤에 아파트 단지가 하나 있고 그 곁에 다세대 주택이 있는데 그 곳에
방 하나를 얻었다. 곧 재 개발하기로 결정되어 있는 구역이다.
굳이 신촌의 회사 사무실 근처에 방을 얻지 않고 이곳에 얻은 것은 적당한 거리고 안성에 쉽게 가고 올 수 있어서였다.
안성에서 서해안 고속도로를 타고 들어와 성산동 고가 밑으로 빠져나오면
모래내 천변길을 따라 3분이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중에 시간이 되면 스승님께 가기 편한 곳이어서였다.
젊은 복덕방 중개사는 깨끗한 작은 마티즈를 타고 모래 내에서 명지대 후문
까지의 골목들을 누비고 다니며 내게 여러 곳을 안내 해 주었다.
그가 소개할 때마다 더 좋은 조건이 없는 좋은 방이라고 하는 바람에
나는 그를 별로 신뢰하지 않았다. 그의 깔끔한 외모나 조심스럽고 예절바른 말투에 대해 느낌이 좋기는 하지만 그의 표정이나 말의 내용에는 공감이 가지 않았다. 이럴 땐 남의 마음을 옅볼 수 있다는 것이 상당히 불편한 것이 된다.
네 차례에 걸쳐 일고 여?h 군데 쯤을 방문하고 난 뒤에야 나는 결정을 해야만 했다.
그것도 방이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고 실험실, 회사, 안성으로 이어지는 시간이
잠자는 시간을 너무 많이 깎아 먹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바빠도 쫓기지는 않지만 일들은 나의 피곤함을 고려 주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러 번 길 위에서 눈을 뜨고 자면서 목숨을 건 드라이브... 염라대왕하고 한 판 붙자는 이야기인데... 장기전은 곤란하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은 해서는 안되는 법이지...


3. 버스 정류장

빼곡히 집들이 들어차서 자세히 들여다 보기 전에는 언덕 진 것 조차도 알 수 없는 산 비탈, 그 사이로 난 도로들로 인해서 겨우 언덕짐을 알 수 있는 ... 그런 모래네 시장 모퉁이의 새로 짓는 아파트 단지 앞을 지나 휘어진 길 옆구리에 내리막으로 길이 하나 붙어 있다.멀리 홍은동, 북악터널로 이어지는 북부간선도로 고가가 보이고 연신내 쪽으로 흐르는 그 아래 개천 옆길에서 부터 곧게 이편으로 뻗어 올라 온 길이 보인다.
버스 정류장은 거기에 있다.
사람들은 그러거나 말거나 별관심이 없지만 이렇게 삼거리 길이 맞닿은 곳에 정류장이 있는 곳은 보기 드물다. 아니 예전에는 본적이 없다. 애매모호하고 비좁은 2차선 길이라 정류장을 여기에 둘 수 밖에 없을 법도 하다.

“학생! 차비가 얼마야? ”
‘.... 900원... 돈으로 내시면 1000원 일거예요’ 오랫동안 시내 버스를 탄적이 없는 나의 질문에 목 단추 하나 풀고 폼나게 교복을 입고 서 있던 학생은 묘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대답했다. 그 눈 빛...

모처럼 만에 좀 일찍 퇴근해서 길가에 개구리 주차를 하고 잠좀 실컷 자고 났더니, 아침에 나와 보니 차가 없다. 허! 참,, 멍청하게 서 서 한 참을 생각했다. 내가 차를 다른 곳에 세웠나... 늦은 밤에 차를 세우는 지라 주차할 자리가 없어 결국에 생각해 낸 것이 길모퉁이에 애매모호한 공터가 있는 인도 같지도 않은 인도 위, 전봇대 옆에 차를 절반쯤 올려 세웠는데,... 썩 좋은 차는 아니니 어느 놈이 들고 가지는 않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견인? ..... 치이...

그렇게 오랜 만에 나는 시내 버스를 타게 됐다.

버스 정류장이 묘하게 자리 잡고 있어서 평소 운전하다 신호등에 걸리거나 멈추어선 버스 때문에 비켜갈 수도 없는 교차로라서 희안한 삼거리라고 생각한지라 이리 저리 두리번 거리며 노선 팻말을 보고 있는데 정류장 뒷 편의 낮은 건물 입구 안 쪽에서 남자의 언성 높인 목소리가 들려오고 여자의 울음섞인 성난 목소리가 이어서 들려왔다.
아침나절에 듣는 울음 섞인 목소리에 마음 한 켠이 우울해졌다. 울음소리.... 시끄러워진 내 머릿속을 휘젓고 있는데 내 나이보다 좀 젊어 보이는 여자가 눈물을 훔치며 신호등을 무시하고 길을 건너 모퉁이를 돌아 내려간다.
멍하니 서서, 휘청거리며 걷는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가슴 한 편을 크게 멍들게 했던 깊은 상처를 건드린 듯... 그렇게 울적한 기분에...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싸우지 말고 잘 살지...

4. 버스를 타고...

천원을 넣고 운전 기사 뒷 편, 앞 바퀴위에 놓인 의자에 앉아 거리를 바라보고 있다. 녹색으로 구분된 버스는 외양과는 달리 안은 별로 깨끗하지 않다. 특히 기사 옆에 붙어있는 분리대에 다닥 다닥 붙은 회수권 박스, 거스름돈 박스, 전자체크 박스... 복잡하게 배선들이 엉켜있고, 청소하기가 영 불편하겠다 싶다. 아직 8시가 채 안되고 종점에 가까운지라 차안에는 사람이 별로 없다. 모르겠다. 어쩌면 버스를 타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은지도... 어린시절 콩나물 시루처럼 빽빽한 버스로 오르던 기억을 하면서 운전기사 옆 쪽 앞 유리창으로 거리를 보고 있는데 흠,,, 버스는 좁은 2차선 도로로 난 모래내 시장 옆을 빠져나와 큰 길 중앙에 정류장이 있는 6차선도로로 나아갔다.

버스가 성산동 고가 밑의 정류장에 섯을 때, 왠 젊은 여성이 환한 웃음으로 올라타더니 운전 기사 옆 쪽에 서서 연신 기쁘다. 보통, 버스를 타는 사람들은 무표정하기 때문에 단박에 눈에 띄었다. 빽미러에는 짧고 단정한 머리에 래이밴 디자인의 멋진 선글라스 를 쓰고 있는 젊은....기사양반이... 서른이 채 안 됐지 싶다. 그의 가지런한 이빨이 훤하게 드러나며 미소가 얼굴에 넘친다. ^^
도란 도란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린다. 고의로 듣는 것은 아니지만 자꾸 귀가 기울여진다. 무슨 소리를 하나... 하고... 남자는 버스기사들의 운전 요령과 자기 생각을 간단간단하게 이야기하면서 자랑스러워하고 여자는 연신 신기하다는듯이 들어주고 고개를 끄덕이고 눈을 맞추어 미소짓고 있다. 참 정겨운 표정이다. 버스가 연대앞 신호등에 멈추어서 있을 때 여자는 슬그러니 핸드백에서 뭔가를 꺼내서 건네준다. 주위를 인식하며 수줍은 그 표정... 그래도 기쁜... 그 얼굴 표정,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서로 어루만지듯 눈길을 보내고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그 모습들이 선량해서 나도 모르게 빙긋이 웃고 있었다.
나는 금방 내려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버스가 세브란스 병원 앞 굴다리를 지나 신촌 역앞에서 멈추어 서 내가 내리고 나면 이내 분리대에 바짝 붙어서 있는 그녀가 앉을 수 있기 때문이다. ^^
갑자기 아침이 새로워졌다. 젊고 건강한 ... 그리고 요즈음 보기 드물었던 착실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가벼워진 걸까....

나는 버스에서 내려와 성큼성큼 길 모퉁이를 돌아 사무실로 오르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홍은동 견인차량 보관소란다... 그래... 그래도 어느 놈이 들고 가서 없어진 것보다야 낫제... 돈내러 가리다...

그렇게 그 날 아침 나는 출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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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
때때로 그렇게 출근하는 것도 괜찮을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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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로
2007.05.13 16:04:21 *.145.231.168
가끔 서울 바닥에 혼자 남겨졌다고 느낄 때
소주잔을 나홀로 비우기가 참 그렇더만...
인자
형님 있는 곳 알았으니 간혹 밤늦게
일잔 합시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기다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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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석
2007.05.13 23:45:09 *.209.120.3
모처럼 이해할 수 있는 글을 올려주셔서, 반가운 마음 그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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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
2007.05.14 00:50:15 *.131.127.23
반갑네... 자로...
한선생님 감사합니다.
전 이 곳에서 항상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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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동
2007.05.14 10:03:13 *.219.66.78
출퇴근 길에 주위를 둘러보던 일이 아주 오래된 장면으로 남아 있습니다. 사람으로 빼곡하게 차 있는 지하철 내에서 마음 가볍게 출근하기란 쉽지 않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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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7.05.14 12:25:27 *.75.15.205
명지대 정문앞에 닭꼬치 파는 손수레 아직도 있나요? 부부가 하시는데 맛이 제법 괜찮을 거에요. 매운맛에 겨자소스발라서 먹음 우후! 진짜 맛있는데...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를 걸요.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드셔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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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장
2007.05.14 14:26:57 *.103.178.123
잠을 고마이 자고 어찌 살 수 있당가요?
진정한 고수는 누워자지 않는다고 하던디,
암튼, 새로운 생활 재밌게, 서울-천안-안성 노선에 차질 없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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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
2007.05.15 00:08:33 *.131.127.23
재동, 오랜세월을 일찍 일어나서... 차안엔 사람이 별루 없었네..^^
좀 부대끼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써니님 기회가 되믄 가 보겠습니다.
천장님 마~ 죽기 아니믄 까무라치기 아닌기요? 할라믄 확실히 하고
아니믄 말고 .... ^^ 좋은 한 주일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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