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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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서 늙은 호박이 6개나 왔네요.
가을의 정취를 물씬 풍기는 둥글넓적한 모양이 아니고 길쭉하여 모양새는 좀 빠지지만 먹기에는 지장이 없을 꺼예요. 하나를 잘라서 두 번 끓이면 딱 맞겠습니다.
저만 그런가요? 호박죽…. 하면
대단한 별식처럼 들리지만 하기 참 쉬워요. 껍질을 벗겨서 토막내어 푹 끓이니 다음 믹서로 갈고, 은근히 졸여주다가 쌀이나 밀가루를 넣어 주면 되지요. 찹쌀도 좋고
맵쌀도 좋고, 갈아서 넣어도 되고 그냥 넣어도 되고, 팔팔
끓을 때 밀가루를 개어 부어 주면 그 또한 별미지요. 취향에 따라 소금과 설탕으로 간 맞춰주고.
어제 아침, 한 번 해 먹고 남은 호박이 마르기 전에 끓여 놓으려고
호박죽을 젓고 있는데, 보기만 해도 윤기가 흐르는 황금빛 찐노랑색의 위력인지, 단순노동의 정화력인지 마음이 서서히 가라앉는 것이 느껴지더라구요. 끓게
내버려두고 가끔 저어줘도 되는데 내내 손을 놀리며 오늘 할 일을 궁리하는 마음이 참으로 편안했어요.
“습관의 동물이 되어라. 오늘
하기로 한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해 내라!”
구선생님은 물론 허영만이나 하루키…. 처럼 일가를 이룬 사람들이 입을 모아 강조하는 말이네요. 정규직을 그만 둔 지 7년이 되어서야 이것이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으니 저도 참 늦되지요. 어차피 놀면서 불안해 하지 말고, 나도
그 ‘좋은 습관’의 동물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에, 지금도 나쁘지 않지만 나는 점점 더 좋아질 거야. 갈수록 창조성이
신장될 것이며, 남들이 못 가는 길을 감으로써 삶에 유용한 지도 하나 만들 수 있어! 하는 자신감이 황홀했습니다.
그러면서 조금은 귀찮아했던 집안일에도 모락모락 애정이 솟고,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더 좋게
만들어볼 생각이 핑핑 돌아가고, 이 모든 일이 감사하니, 이제야
삶에 익숙해지나 봅니다. 오래 살아보아 삶에 익숙한 사람들이 그만한 목소리를 못 내고 오히려 빠른 속도로 밀려나는 작금의 풍토를 바로 잡을 기운마저 솟으니, 순전히 호박죽의 마력은 아니겠으나 참으로 고마운 일이었습니다.
그 순간이 얼마나 고마웠으면, 호박죽을
여러분과 나눠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니까요.^^ 각자 좋아하는 음식 한 가지씩 싸 들고 와 나눠 먹으며, 근황을 나누고, 음악도 듣고…..
좋은 평을 들은 음식은 살롱9에서 채택해도 좋겠구요.
살롱9에서 주최를 해 줘도 좋겠고, 변경연 2.0 의 문화팀에서 멍석을 깔아줘도 좋겠네요. 비슷한 자리가 있으면
먼 길 마다않고 호박죽 싸들고 가겠습니다. 가을이 깊고 생각도 깊어지는 이맘때 따뜻한 모임이 많아지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