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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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남씨 보세요
분례에요. 잘 지냈어요? 물론 잘 살고 있을 줄 알지만 뻔한 질문을 하고 싶네요. 사계절이 지났을 뿐인데 당신 얼굴이 좀처럼 떠오르질 않아요. 그래서 종이 위에 쓱쓱 그려보기도 하고 지나가는 뭉게구름에 이목구비를 넣어 보기도 해요. 떠오를 듯 하다가 흩어지는 얼굴과는 달리 까칠한 턱수염이며 묵직한 목소리는 오늘처럼 생생해요.
그날 잠든 당신에게 인사를 건네고 밖으로 나섰죠. 아침햇살에 눈이 부셔 툇마루에서 넘어질 뻔했어요. 정수리에 머무는 햇살을 느끼며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어요. 산골의 아침은 느릿느릿 흘렀어요. 멀리 외딴집 지붕위로 새들이 날고, 굴뚝에서는 하얀 연기가 피어 올랐어요. 이슬을 머금은 잎갈나무 숲길을 따라 한참을 걸었어요. 풀어진 등산화 끈을 묶고 일어서는데 촘촘히 어깨를 맞댄 나무들 사이로 난생 처음 보는 세계가 드러났어요. 나무들이 창살무늬로 공간을 나눈 숲이 아니었어요. 안개로 허리를 감싼 채 장대한 위용을 뽐내던 숲이 신비한 기운이 깃든 나무 하나하나로 살아 움직였어요. 남몰래 새벽 짐을 싸야 하는 슬픈 운명을 잊을 만한 광경이었어요. 그 경이로움을 이끈 게 뭔지 아세요. 굴참나무 잎이었어요. 길게 늘어진 가지에 잎들이 잠자리처럼 날개를 펼치고 있었어요. 그 사이로 들여다 보자 패턴에 가려져 있던 잎갈나무 삼형제가 미소 짓고 있었어요. 익숙한 풍경들이 관점을 바꾸자 새로운 세상을 열어 보여 줬어요. 굴참나무 가지가 마법의 창이었던 거죠. 알에서 깨어난 기분으로 두 갈래로 갈라진 오솔길을 만났어요. 예전 같으면 일단 멈춰서 감각의 안테나를 세웠을 거에요. 하지만 그날은 이상했어요. 안개가 자욱한 길로 자연스럽게 방향을 잡았어요. 보이지 않는다는 게 마음을 유혹했어요.
그걸 계기로 이곳에서 사진을 배우고 있어요. 집이며 아이들이며, 황혼이 지는 강변, 이른 새벽의 산책길을 찍어요. 빨래방망이를 든 억센 팔뚝, 주름진 촌부의 얼굴, 버스를 기다리는 엄마와 아이의 뒷모습을 담고 궂은 날씨에는 담배 갑이며 백마 탄 나폴레옹도 찍죠.^^ 부유하는 냄새들을 좆아 낯선 길에 들어섰다가 계단을 만나거나 막다른 골목에서 예기치 않은 길을 찾으면 가슴이 콩닥거려요. 이야기가 먼저 말을 걸거든요. 귀퉁이 어디선가 튀어나온 이야기가 이야기하는 걸 듣고 있자면 시간이 훌쩍 지나가요. 그런 날은 만선으로 귀항한 배처럼 넉넉해져 관에 들어갑니다. 다양한 배역으로 살아온 나 같은 이에게는 사진이 취미로 제격인 것 같아요. 언젠가 내가 찍은 사진들을 보내 줄게요. 그 중엔 1시간 간격으로 내 관을 찍은 것도 있어요. 아끼는 사진이죠.
그날 당신이 내어준 밥은 최고의 상찬이었어요. 굳이 품평을 하자면 당신은 일등급 찰진 피를 지녔어요. 당신은 허기에 지친 떠돌이의 배를 채워줬어요. 무엇보다 뱀파이어는 무엇으로 사는가에 대해 깔끔한 답을 주었죠. 경을 칠 뻔 하긴 했지만. 일단 맛을 보면 끝을 봐야 하는 게 우리 세계이니 너그럽게 이해해 줘요.
손바닥에서 떨어진 한 방울을 흡입하는 순간 느꼈어요. 당신을 받아들이며 알았구요. 靑年, 당신의 이름이에요. 당신에게는 불완전한 것들의 고통을 즐기는 힘이 있어요. 불완전함 속에서 너울거릴 때 당신은 아름다워요. 날마다 아름다운 당신을 그리워 하며.
청년 김봉남
인적이 끊긴 오르막길은 적막 그 자체다. 나는 여전히 편의점을 운영하고 있다. 꽁지머리를 하고 오늘은 특별히 야간 드라이빙에 나서기 위해 가죽 재킷과 바지를 착용했다. 박 군에게 편의점을 맡기고 시동을 걸었다. 주택가를 빠져 나와 강변도로에 진입하자 엑셀을 힘차게 돌렸다. 애마 ‘포데로사’가 괴성을 지르며 차들을 앞질러갔다. 한강을 가로 지른다리 곳곳에 조명빛이 그득했다. 서해로 빠지는 강물을 따라 나도 흐른다. 포데로사 그 떨림으로 이 길을 달린다. 신나게 맞바람을 즐기다 보면 그 옛날 분례를 태운 나룻배가 나란히 강물을 가른다.
세상은 적막하다. 적막 속에서 간간이 반짝이는 빛은 추억과 추억에 반응하는 나의 내면이다. 부활의 인연으로 환생한 나폴레옹과 뱀파이어 미스 리가 만났다. 나폴레옹은 한 물 간 배역을 고지식하게 고집했고 미스 리는 뱀파이어보다는 똑순이가 어울렸다. 매니지먼트 회사가 후졌거나 배역복이 없었거나. 이도저도 아니면 그들은 삼류 연기자였던 거다. 덕분에 그들은 속앓이를 표현하지도 못하고 관객들로부터 외면당했다. 대신 배역으로 만나 현실에서 로맨스에 빠졌다. 그렇다. 나는 가을에서 봄까지 주어진 배역에서 아직 빠져 나오지 못했다. 그 빈자리를 감당하지 못해 오늘 밤 바다가 바라보이는 지점까지 달려볼 참이다. 육지는 거기서 막을 내리지만 포데로사는 계속 달릴 것이다. 태평양을 건너 남미대륙에 입을 맞출 것이다. 전 주인이 그랬듯이 풍상을 거친 몽상가는 길에서 인생을 찾아 혁명가로 거듭날 것이다. 이번에는 진짜 분례가 무대에서 나를 기다리게 할 것이다.
청년 김봉남이 쓴 첫 소설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담배가게 아저씨 나폴레옹>을 그대로 쓰는 게 괜찮을 것 같다. 미옥이가 지적한 것처럼.
생각해 보니 '청년 나폴레옹'에서는 인건이가 얘기한 대로 환생의 메시지가 드러나지 않아
오해가 생길 수 있겠다.
제목이 정형적이거나 딱딱한 느낌을 주지 않도록 의도한 것이었는데, 그렇다면 아래 제목들도
정형적인 느낌에서 그리 벗어나지 못한 것이겠지?
<나폴레옹 환생기>, <나폴레옹의 부활>, <나폴레옹, 두 번 살다>
구성, 표현, 주제, 인물 등 영역에 제한없이 코멘트해 주시면 북페어에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