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희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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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저자에 대하여
지식 + 예술적 감성 = 지성인을 깨닫게 해준 저자, 아르놀트 하우저:
예술가는 계획이나 체계 없이 세상을 체험하고, 말하자면 스쳐지나가면서 경험의 재료라든가 생할의 특징들과 데이터를 수집한다. 그는 그것들을 가지고 돌아다니며 저절로 자라고 성숙하도록 내버려두다가, 어느 날엔가 이 창고에서 예기치 않은 미지의 보물을 꺼내게 되는 것이다. 학자는 이와 반대의 길을 걷는다. 그는 하나의 문제와 더불어, 즉 자기가 아무 것도 모르는 사실이나 또는 자기가 정말 알고 싶은 바로 그것을 알지 못한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한다. 자료의 수집과 취사 선택, 즉 취급하려는 인생 부문과 가깝게 친숙해지는 일을 문제설정과 동시에 시작하는 것이다. 학자는 체험을 통해서 문제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문제에서 체험에 이른다 (110).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미래를 ‘지식 산업의 시대’라 생각했는데, 이젠 그 말을 ‘지성인의 시대’라 바꾸고 싶어 졌다.
지식인과 지성인의 차이가 무엇일까? 아마도 지식인들이 그 탁월한 지식에 예술적 감성을 더했을 때 도달할 수 있는 단계가 지성인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점점 더 과학 문명이 발달해가는 현대 사회에서 왜 지식인이 아닌 지성인일까? 우린 그에 대한 해답을 이미 드러커 교수와 카프라에게서 들어 알고 있다.
인문학의 통섭. 이것이 단지 지식으로만 가능한 일일까?
만약 인문학의 통섭을 지식적으로만 하려 든다면, 아마 그것은 쓸데없이 수많은 데이터를 잔뜩 쌓아 놓고 단 한 줄도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는 통계학자와 다를 바 없게 될 것이다. 통계란 그 양이 얼마냐에 상관없이 누군가가 주제를 정하고, 그 주제에 따라 분석하고 정의내릴 때에만 그 의미를 지니게 된다.
지식 역시 그와 별반 다르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단순한 지식축적은 단순한 정보 수집과 하등 다를 바 없음이다.
하루가 다르게 과학이 발전해 가는 현대 사회에서, 지식의 한계를 누구보다 정확히 짚어준 스승이 다름 아닌 카프라이다.
현대 물리학의 한계. 그 한계가 신비주의 동양 사상과 맞닿아 있다는 것은 자랑스러움 이전에 놀라움이고 충격이었다 (동양인인 내가 서구인보다 그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 오히려 부끄러웠다).
물론 여기서 내가 주장하려는 지성인이 반드시 동양 사상에의 통찰과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너무나 똑똑한 지식인들이 지성인으로까지 한 단계 더 발전하기 위해서는 예술적 감성이 필요함을 하우저 교수에게 배웠다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인류 역사를 문화, 예술의 측면에서 바라보고 해석하다보면, 각 시대의 정치, 사회 양산들이 한 걸음 더 깊이 보인다. 예술가는 그런 족속들이기 때문이다. 배가 고파도, 사회적으로 내동댕이 쳐져도 자신들의 가슴에 품은 그 뜨거움을 발산하지 않고는 살지 못하는 인간들. 참으로 내 마음까지 그들의 처절한 삶이 젖어든다…
17살에 이미 천재적 능력을 인정받고도 37살 젊은 나이에 고통 속에 죽어간 천재 시인 랭보. 인생 자체가 절규와 몸부림의 연속이었던 고흐와 고갱. 그들의 영혼을 그 누가 감히 쉽게 이해한다 말할 수 있을까…
너무나도 잘난 현대인들의 지식 위에 그들의 핏빛 영혼을 아주 조금이라도 떨어뜨릴 수만 있다해도 현대 사회가 이 보단 촉촉한 감성의 물결로 젖어들 것이다.
단순히 수박 겉핡기 식의 지식적 방법론으로 장난치는 잔꾀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인문학의 통섭을 이루어낼 수만 있다면, 그 과정에서 각자의 영혼 속에 내재한 예술적 혹은 심미적 감각을 조금이라도 드러내어 내 안에 내재된 지식에 영혼의 숨결을 불어 넣을 수만 있다면, 드러커 교수가 말한 진정한 지성인이 되어, 아딸리가 말한데로 미래 사회를 이끌어가는 리더의 모습이 아닐까 상상해보았다.
지식과 지성의 다리가 되어 줄 있는 예술, 이것이 내가 이번 주, 하우저 교수에게 배운 가장 중요한 깨침이다.
3부 내가 저자라면
하룻 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감히 4편을 선택하다:
일반적으로 이렇게 시리즈로 되어 있는 책의 경우, 대체로 1편부터 시작하는 게 지금까지의 내 성격과 맞는 일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과감히 4편을 골랐다. 왜?
현대에 가까운 시대의 사조가 너무도 궁금해서. 그리고 혼줄이 났다 ^^:::
하우저 교수의 책은 너무 깊고 어려워서, 4편부터 읽어서 이해할 수 있는 그런 류의 책이 결코 아니다. 지난 2주 동안 <국화와 칼>과 <컬쳐 코드>가 쉽다고 방방뛰는 나를 따부님께서 커다란 몽둥이로 내리치시면서 “맛 좀 봐라!”하시는 것 같았다. ㅋㅋㅋ
하우저 교수가 설명하는 인상주의가 이해되지 않아, 또 다시 네이버에서 찾고… 그래도 결국 이해되지 않다가, 뒤에서 다시 설명이 나오면 좀 알 것도 같고, 여전히 모르는 것 같고. 내심 속으로 1~3편 시대까지는 어느 정도 안다는 자만감에 4편을 고른 이유도 있어, 한주일 내내 얼마나 후회하고 또 후회했는지. 그러면서 100페이 읽은 게 아까워 1편부터 다시 시작하지도 못하고 ^^::::
결론은, “솔직히 이 책은 전부 소화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 연구원 끝나고 1편부터 제대로 재도전하겠습니다!!” ^^:::
사실, 내게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는 엄청 중요한 분야이다. 내가 고전 읽기를 꺼려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다름 아닌 배경이 되는 시대의 정치, 사회사를 모르는 상태에서 잘못 접근했다가 중간에 포기하는 경우가 몇 번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도대체가 언제, 어느 시대부터 시작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 난해함.
올해 연구원을 하면서 가장 많이 언급되었던 고전 작가는 역시 셰익스피어와 톨스토이가 압도적이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드디어 나는 고전 문학 세계를 인도해줄 출중한 길잡이 스승을 만나게 되어 무척이나 기쁘다.
이번에 1권부터 읽기 시작했으면 좋았겠지만, 내년에 차분히 다시 시작해야겠다. 그 깊고 넓은 고전의 세계로 말이다. 이 4권만 제대로 이해하고, 여기에서 제시되는 고전만 따라 읽더라도, 아마 문학과 예술 분야는 고대에서 20세기까지 아우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나의 문화적 이상과 인간적 이상:
그들 (지식인들)의 문화적 이상은 계몽주의적, 자유주의적인 것이며, 인간적 이상은 인습과 전통에 속박받지 않는 자유로운 진보적 인간성의 개념에 기초를 둔 것이다 (164).
우선 나의 인간적 이상은 어떠할까? 19세기 중엽의 지식인들에 공감할 수 있을 것 같다. 특히나 니체씨를 만난 이후로 나는 인간을 통치하기 위한 모든 규범과 인습은 예전보다 더 갑갑해져 버렸다.
나의 인간적 이상. 그것은 참다운 나를 매일 만나는 것. 그래서 그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라 생각된다.
나의 문화적 이상은 나뿐만이 아니라 타인들 역시 각자 자신의 본성을 찾고, 그 속에서 자신만의 문화적 코드와 세계를 만들어 갈 수 있도록 옆에서 응원하는 일이다. 근원적으로 인간에의 따듯한 사랑으로 말이다.
나는 누구의 눈을 통해 세계를 보고 있는 걸까?
한 작가의 세계관을 결정하는 것은 그가 누구의 편을 드느냐보다는 오히려 그가 누구의 눈을 통해 세계를 보느냐에 하는 데 있다 (180).
지식인 계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러나 그들은 쉼없이 변화하는 사회라는 거대한 물결 앞에서 지치고 기운이 빠진 영혼들이다.
불투명한 미래에, 오늘 더욱 더 치열하게 경쟁해야 하는 이들. 심신이 조금씩 지쳐가는 이들이다.
하지만 그러한 그들을 진실로 옥죄는 것은 위의 경제적 여건이 전부가 아니다. 실상 그들을 진실로 얽어매고 있는 것은 그러한 경제적 덫에서부터 절대 빠져나올 수 없게 교육된 사회적 시스템이다. 본인들 스스로도 자신들이 어떤 덫에 걸려 있는지 절대 알 수 없는.
난 그런 이들의 눈으로 세계를 보고 있고, 그런 이들의 눈이 되어 진정한 세계를 보여주고 싶다. 알고 있다. 절대 쉽지 않은 일임을.
누군가의 가슴은 이미 너무 얼어버려서 나의 작은 외침에 끄떡도 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의 마음은 이미 세속의 달콤함에 너무 많이 길들여져서 나의 작은 외침이 꿈꾸는 몽상가의 헛된 소리로 들릴 것이다.
누군가의 눈은 이미 오랜 관습의 덫에 너무 심하게 눌려 있어서 나의 작은 외침이 뚫고 들어갈 틈이 없을 것이다.
그래도 나, 내 생명이 살아 있는 한,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은, 나의 스승이 그러하듯이 나 역시도 사람들이 자신들의 본성을 찾고, 거기서부터 진실되고 아름다운 관계를 맺으며, 자신들만의 제국을 건설해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고 싶다.
나의 스승이 내게 그러하셨듯이…
관찰자로는 부족한 문학작가:
그(도스또옙스끼)는 “나를 심리학자라도들 말하지만 그건 틀린 말이다. 나는 더욱 높은 차원의 리얼리스트일 뿐이다. 즉 나는 인간 영혼의 심층을 속속들이 그리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187).
인간 영혼의 심층을 속속들이 그리는 리얼리스트.
심리 소설이 영국이나 프랑스가 아닌 19세기 러시아에서 그 꽃을 활짝 피우는데, 정작 작가 본인은 자신은 리얼리스트라 표현한다. 인간 영혼의 심층을 그리는 리얼리스트. 멋진, 참으로 멋진 표현이 아닐 수 없다.
흔히들 작가를 일컬어 사회의 거울이니 관찰자니, 라고들 표현하지만, 이 책을 일고, 나 역시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정한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사람들 내면의 세계 혹은 영혼의 세계에서 어떤 갈등이 일고 있는지, 어떤 처절한 투쟁이 벌어지고 있는지까지 작가 스스로 느끼고, 표현하고, 비록 정답이 아닐지라도 나름의 방향성까지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기위해선 우선 작가 스스로 자신을 버려야 하지 않을까…? 자신의 에고를 강하게 끌어 안고 있는 자가 어떻게 타인의 내면과 하나될 수 있을까. 사실 관찰자라는 위치는 상당히 주관적인 입장을 포함하고 있는 관점이라 어떤 면에선 작가가 지닐 관점으로서는 오히려 위험할수도 있는 거 아닐까…?
자신을 오롯이 내려놓고, 시대에 맞춰, 상황에 맞춰 고통받고 신음하고 있는 영혼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이들. 시대를 초월한 진정 위대한 문학작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뛰어난 극소수의 인물들이 아닐까 싶다…
러시아의 대문호들: 도스또옙스끼, 톨스또이 & 체호프:
사실 톨스또이 한 사람만으로도 러시아를 유럽의 선진국들을 제치고 문학사에서 우뚝 솟게 하고도 남음이 있는데, 러시아는 동시대에 도스또옙스끼와 조금 뒤 체호프를 통해 인상주의 역시 유럽을 물리치고 문학사에서 자리매김을 한다.
대단하다…
우리가 흔히 알기에 프랑스는 사상의 대가들이 모인 곳이요, 독일은 철학자의 고향이라고까지 일컬어지지만, 사실 세계 문학사에서 영국의 셰익스피어가 아니었다면, 아마 러시아 대문호들의 독보적인 존재나 너무도 눈이 부셨을 것 같다.
사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만해도 톨스토이와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도스또옙스끼에 대해서는 많이 알지 못했는데, 이 책을 다 읽고 난 지금은 두 대가들의 작품을 시대별로 읽고 싶은 욕심까지 생겨버렸다.
호메로스이 서사시처럼 흐르는 톨스토이의 작품은 어떨지, 심리학을 뛰어넘어 스스로를 영혼의 리얼리스트라고까지 묘사하는 도스또옙스끼의 작품은 또 어떨지, 문학쪽으로 문외한이었지만, 연구원이 끝나면 반드시 셰익스피어와 톨스토이 작품을 읽어야 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도스또옙스끼의 작품도 추가해서 읽어보고 싶어졌다.
내가 대 문호들의 작품을 익히 읽고 이 책을 읽었더라면 훨씬 더 많은 것을 흡수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지만,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오히려 설명을 먼저 듣고 작품을 읽어도 시대적 작품 배경이 이해되어 훨씬 편하게 몰입할 수 있을 것 같아 마냥 기대가 된다.
얼른 러시아의 대문호들을 만나 도대체 어떻게 그들이 그다지도 쟁쟁한 프랑스 작가들을 제치고 유럽 문학사에서 러시아 입지를 구축할 수 있었는지 느껴보고 싶다…
결론:
우선 많이 어려웠는데, 예술이란 분야가 내겐 아직도 참 생소한 분야여서 이기도 하겠고, 그러면서도 4편에서 소개하는 유럽의 경우는 역사 부분도 친근하지 않아 이중으로 어려웠던 것도 같고.
그런만큼 이해할 수 있는 만큼 이해하는데 중점을 둔 북리뷰였던 것 같다. 그리고, 이 한번으로는 감히 많은 것을 이해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현재로서는 문학과 예술사에서 좋은 길잡이 스승을 만난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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