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혜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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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놀트 하우저 (Arnold Hauser, 1892 - 1978)
문학사가, 예술사회학자.
1892년 5월 8일 헝가리 티미쇼아라에서 태어났다.
독일계 헝가리인으로, 오랜 기간 동안 영국에서 살면서 미술사, 정신분석학, 예술 이론, 미학, 사회사, 문화사, 미술심리학 등의 여러 학문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1차 대전을 전후한 시기에 부다페스트와 베를린, 빈, 파리 등지의 각 대학에서 문학사와 철학 및 미술사를 전공했다.
예술 사회학, 곧 예술사를 사회학적으로 접근한 그의 연구 방법은 1910년대 말에 형성된 부다페스트의 ‘일요서클’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인 루카치(G. Lukács, 1885-1971), 헝가리 태생의 사회학자이자 지식사회학의 모태가 된 <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의 저자, 만하임(K. Mannheim, 1893-1947) 등이 중심이었던 이 서클은 현대 문학과 예술은 물론 문화 전반에 대해 고민하는 모임이었다.
그는 부다페스트대학 교수로 잠시 재직한 뒤, 1921년부터 베를린 대학에서 경제학과 사회학을 수학, 헝가리 소비에뜨정권 붕괴 이후 빈으로 망명했고, 20세기를 살아간 유태인 학자들이 그러하듯, 그도 1938년 나치가 빈을 점령하자 1951년 영국 런던으로 이주해 1951-1957년 까지 영국 리즈 대학에서 강의했고, 그 뒤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1978년 1월 28일 부다페스트에서 사망했다.
하우저는 영국에 머문 1950년대에, 선사 시대부터 근대까지의 문학·미술·음악·건축 등 거의 모든 예술 장르를 망라하는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1953)를 썼다. 그는 예술 작품이란 사회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사회적 힘의 산물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예술사를 고차원적 이념에 억매이거나 단일한 예술 양식으로 압축해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예술 작품이 사회의 산물이고 사회의 영향을 받아 탄생하더라도, 온전히 사회와 맥을 같이한다고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예술의 형식적인 면에 가치를 두었으나, 사회역사적인 관점에 대해서도 예술사회학자로서 관심을 가졌다. 포괄적이고 상세한 예술에 대한 지식과 오랜 기간 동안의 영화산업에 있어서의 활동은 그가 예술에 대하여 한편으로는 자율적으로, 다른 면으로는 사회 현상으로 보게 해 주었다. 냉전 시기의 서방(형태에 내재한 해석)과 동방(예술의 사회적 한계) 사이의 미술에 대한 논쟁 속에서 그는 중간에 있으려고 했다.
저서로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1953)외에 <예술사의 철학>(1958) <예술 연구의 방법론>(1960) <현대 예술과 문학의 근원>(1964) <매너리즘 연구>(1968) <예술 사회학>(1974) <루카치와의 대화>(1978) 등이 있다.
2. 내 마음을 무찔러 드는 글귀
제1장 르네쌍스
중세와 근대의 실질적인 전환이 이루어진, 역사적으로 결정적인 경계는 아마도 중세의 전반부와 후반부의 사이, 즉 화폐경제가 다시 활기를 띠고 새로운 도시들이 생겨나며 현대의 시민계급이 뚜렷한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12세가 말경으로 잡는 것이 좋을 것이다. (13)
부르크하르트는 르네쌍스를 묘사할 때 자연주의 정신을 특히 강조하면서 체험을 통한 현실세계로의 전환과 ‘인간과 세계의 발견’을 ‘재탄생’(르네쌍스라는 말의 본래의 뜻)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로 들고 있다. (14)
고딕의 자연주의는 예술적 묘사가 상징에만 치우치던 것을 그만두고 초경험적인 세계와는 아무런 관련 없이 단지 현세적 사물을 있는 그대로 묘사함으로써 새로운 의의와 가치를 얻으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5)
고딕의 자연주의와 비교해 보면 르네쌍스가 시작하면서 일어나는 변화란, 형이상학적 상징이 완전히 사라지고 그 대신 예술가의 목적이 점차 더 단호하게 그리고 더 의식적으로 감각세계의 묘사로 좁혀지고 있는 데 불과하다. 사회와 경제가 속박에서 벗어나는 정도에 비례해서 예술 또한 점차로 아무런 스스럼없이 직접적인 현실세계로 눈을 돌리게 된다. (15)
르네쌍스에 의한 자연의 발견이란 19세기의 자유주의가 지어낸 것이다. (15)
르네쌍스에 와서 자연주의가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났다는 이론은 권위와 위계질서의 정신에 대한 투쟁, 양심과 사상의 자유라는 이념, 그리고 개인의 해방과 민주주의 원칙이 15세기의 소산이라는 주의 주장과 그 근원을 같이하고 있는 것이다. (15)
발전 속에서도 이른바 변화하지 않는 요인들이란 따지고 보면 십중팔구 그에 앞선 역사적 단계의 잔재이나, 아니면 아직 연구되지 않았지만 앞으로 충분히 밝혀질 수 있는 역사적 조건을 설명하기 위한 성급한 대용물이기 일쑤이다. (20)
르네쌍스 초기 예술가 중에서 이 ‘이상양식’에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사람은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예술관의 본질은 통일성의 원칙과 전체 효과에서 나오는 힘이라는 데 있다. 아니면 적어도 통일성을 추구하는 경향이며, 아무리 풍부한 내용과 색감을 활용하더라도 하나의 통일된 인상을 불러일으키려는 노력이 시도된다는 데 있다. (21)
중세 말기의 예술 작품에 비할 때 르네쌍스의 예술작품은 언제나 하나의 판에서 나온 것 같은 혼연일체감이 있다. 어떤 일관된 통일성이 작품에 흐르고 있고, 아무리 내용이 풍부할지라도 그 표현은 근본적으로 단일하고 동질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21/22)
고딕 예술은 보는 이로 하여금 그들의 시선을 한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 옮아가도록 만들며 한 묘사에 나타난 개개의 부분들을 하나씩 뜯어볼 수 있도록 만든데 비해, 르네쌍스 예술은 절대로 세부적인 묘사에 머물지 않고 한 부분을 전체에서 떼어낼 수 없게 만들 뿐 아니라 모든 부분을 동시에 파악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22)
이딸리아에서 새로운 예술문화가 싹튼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로는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해 고대의 문화적 유산이 잘 보존되어 여기저기 산재해 있었기 때문에 고대 전통과의 관계가 완전히 두절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25)
외부적,역사적 영향이 결코 정신적 변화의 최종적인 원인이 될 수 없다는 사실, 하나의 외부적 영향이 그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외부적 영향을 수용할 전제조건이 아미 주어져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바꾸어 말하면 외부적 영향과 함께 여러 현상들이 현실로 나타나게 되는 근거는 일어나는 외부적 영향 그 자체만으로 해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왜 이러한 현상이 어느 시기에 와서 현실화되느냐 하는 문제, 즉 현실성 그 자체가 밝혀져야만 한다. (25)
예술의 규범이 되는 통일성의 원리, 통일적 공간 감정, 비례의 통일적 기준, 하나의 모티프에 집중된 묘사의 제한, 한눈으로 파악할 수 있는 구도의 통일적 조합은 이러한 합리주의 정신에 상응하는 것이다. 예술작품의 이러한 원리들은 또한 그 당시 노동의 조직화, 교역기술, 신용제도, 복식부기 그리고 국가통치, 외교, 전쟁수행 방법에서 관철되고 있던 동일한 정신의 소산이다. (27)
개개의 부분이 전체와 논리적으로 합치되고, 관계가 수적으로 표현될 수 있을 만큼 엄격한 조화를 이루며, 인물과 공간의 관계에서 모순이 배제되고, 그리고 공간부분들 상호간에도 모순이 배제될 때 비로소 사람들은 ‘아름답다’는 미적 감정을 갖게 된다. (27)
르네쌍스 경제의 새로운 점은 합목적성 그 자체라든가 한층 더 목적에 부합되는 더 나은 생산방법이 알려지는 즉시 재래적인 생산방법을 포기할 태세가 되어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재래의 전통까지도 주저없이 희생시키는 그 철저함과 일체의 경제생활의 요인을 수적으로 계량화해서 장부에 기입하는 비정할 정도의 객관성에 있다. (37)
상업화과정의 본질은 기업가의 활동에서 점차 손으로 하는 일이 적어지고 그 대신 계산적이고 추론적인 요소가 우위를 차지하게 된다는 사실뿐 아니라, 기업가가 새로운 가치를 만들기 위해서는 꼭 새로운 상품을 만들 필요가 없다는 자본주의 경제 원칙을 인식하고 있다는 데 있다. (37)
보다 발전된 문화에서는 상이한 계층과 이 계층에 의존하고 있는 상이한 예술가, 세대가 다른 예술소비자와 생산자, 젊은 세대와 구세대, 선구자와 낙오자가 어디서나 항상 병존하게 마련이다. (40)
순수한 예술품과 가구 공예품 사이에 거의 구분할 수 없을 정도의 동질성이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동질성에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는 것은 고도로 무목적적이고 비실용적인 예술의 독자성이 점차 인식되고, 그 독자성이 공예품의 기계적 성격과 대조되면서부터이다. (49)
르네쌍스 문화의 주역을 담당한 계층은 당시의 인문주의적, 신플라톤주의적 정신조류와 관련된 계층, 즉 대체로 동일한 사고방식과 단일성을 지닌 지식인계층으로서, 이러한 단일성은 전체적으로는 중세의 성직자 집단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르네쌍스의 중요한 예술품들은 이러한 계층을 대상으로 만들어졌다. (73)
예술가들은 교회와 길드로부터 독립하고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의 향상 및 세간의 갈채와 명성을 얻는 대신에, 결국 인문주의자들을 예술문제의 심판자로 인정하는 댓가를 지불해야만 했다. (74)
스승과 제자들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결합 가능성과 또 장인, 조수, 도제들이 자주 똑같은 작품을 두고 함께 일을 하기 때문에 때로는 매우 분석하기 힘들 정도의 양식 혼합이 생겨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로 인해 개인적인 차이가 실질적으로 융화된 하나의 공동형식을 낳는데 이러한 공동형식에서는 무엇보다도 수공업적 전통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76/77)
처음부터 일이 끝날 때까지 혼자서만 작품을 완성하고자 하고 제자와 조수들과는 도저히 같이 일할 수 없다는 생각은 미켈란젤로에 와서 비로소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이 점에서도 미켈란젤로는 최초의 현대적 예술가인 셈이다. (77)
기업의 성격을 띤 공동체 작업 형태 이외에도 꾸아뜨로첸또에 볼 수 있는 것은 대체로 아직도 나이가 젊은 예술가가 독자적인 아뜰리에를 경영할 경제적 능력이 없기 때문에 두 사람이 힘을 합쳐 동지적 관계에서 하나의 작업장을 만드는 경우이다. 이렇게 우리는 예술적 노력의 개별화를 막는 초개인적인 작업형태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정신적인 공동체로의 이러한 일반적 경향은 평면적으로뿐만 아니라 수직적으로도 작용하고 있다. 당대의 대표적인 예술가들은 스승과 제자라는 일련의 긴 계보를 이루고 있는데 이러한 계보에 의해서 일관된 예술형식의 전통이 이어지며, 또 이와같은 전통 속에서 발전의 주류가 뚜렷이 부각된느 것이다. (78)
예술가들인 길드에서 독립하게 된 것은 그들의 높아진 자존심 때문이라거나, 시인 또는 학자들과 동렬에 서겠다는 그들의 주장 때문에가 아니라, 사회가 그들의 봉사를 필요로 했고 또 그것을 확보하고자 노력했기 때문이다. 요컨데 당시 미술가의 자존심이란 다름 아닌 그들이 지닌 시장가치의 한 표현이었던 것이다. (83)
스승들의 모방 대신에 자연의 연구를 내세워 이론적으로 처음 정리한 사람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인데, 물론 그것은 실제로는 이미 오래 전에 이루어진바 전통에 대한 자연주의와 합리주의의 승리를 표현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 자연연구를 기초로 해서 성립된 그이 예술이론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그사이에 완전히 바뀌었음을 알려준다. (86)
다 빈치의 주장에 의하면, 회화는 한편으로는 일종의 정밀한 자연과학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학문의 위에 군림하는 것인데, 그 이유는 학문이 ‘모방되어 질 수 있는 것’ 다시 말해서 비인격적인 것인데 반해 예술은 개인 및 개인의 타고난 재능에 직결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다 빈치는 회화가 ‘기본 학예’의 하나로 인정되어야만 한다는 요구를 정당화하면서 예술가의 수학적 지식뿐만 아니라 시인의 천재성에 필적할 만한 재능까지도 화가가 가지고 있다는 주장을 내세운다. (88)
그는 그림을 ‘손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머리로’ 그리는 것이라고 주장했고, 단순히 자기 비전의 마력에 의해 대리석 덩어리로부터 온갖 형상들을 창조해내기를 원했다. 그것은 예술가의 자부심이라든가 자신이 장인이나 엉터리 예술가들, 시정배들보다 자신이 높은 존재라는 의식만이 아니고, 평범한 일상적인 현실과 접하는 데 대한 일종의 불안감마저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처음으로 자신 속의 어떤 마력적인 힘에 쫒기는 고독한 근대적 예술가, 즉 자신의 상념에만 사로잡혀 있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거들떠 보지 않으며 자신의 재능에 대해 깊은 책임감을 느끼고 자신의 예술가적 사명 위에 어떤 높은 힘이 군림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예술가를 대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이르러 예술가는 더없이 높은 지위를 달성하는데, 이에 비하면 지금까지의 예술적 자유라는 일체의 개념은 유명무실한 것이 된다. 이댸 비로소 예술가의 완전한 해방이 이루어지고, 예술가는 르네쌍스 이래로 우리가 알고 있는 '천재'가 된다.(93)
사람들은 오랫동안 예술 속에서 개성의 표현을 찾고 이를 높이 평가하던 끝에야 비로소, 예술이 더 이상 객관적인 ‘무엇’이 아니라 주관적인 ‘어떻게’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95)
종교가 더 이상 정신활동의 모든 영역을 지배·통일하지 못하게 되자 곧 온갖 정신적 형식들의 자율성이라는 개념이 대두 했고 그 자체로서 의미와 목적을 지닌 예술이라는 하나의 형식도 상상할 수가 있게 되었다. 예술도 포함한 모든 문화현상을 종교적 측면에서 설명하려는 그 후의 온갖 시도에도 불구하고, 중세문화의 단일성을 회복하고 예술로부터 그 자율성을 완전히 박탈하려는 시도는 결코 성공하지 못했다. 이때부터 예술은 비록 그것이 예술 이오의 목적에 사용된 경우에라도 그 자체로서 즐길 수 있고 또 의미가 있는 것이 되었다. (96)
소묘나 스케치는 르네쌍스인들에게는 예술적인 형상화라는 면에서뿐만 아니라 하나의기록으로서, 즉 예술적 창작과정을 나타내는 기록으로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97)
19세기에서는 예술은 세계인식의 수단이었고 인생을 경험하고 인간을 분석·해명하는 하나의 형식이었다. 그러나 객관적인 인식에 주안점을 둔 이러한 자연주의는 그 근원을 바로 15세기에 두고 있는 것이다. 15세기에서 예술은 처음으로 과학적 훈련을 받았고, 오늘날까지도 예술은 어떤 의미에서 이 시기에 투자해 놓았던 자본금으로 살아가고 있다. (103)
르네쌍스 전성기 예술에서 가장 특징적이고 또 이 시기의 예술양식의 형성에 결정적인 사실은 미켈란젤로는 거의 전적으로, 라파엘로는 많은 부분을 바티칸을 위해서 일을 했다는 사실이다. 르네쌍스 전성기의 ‘위대한 양식’은 오로지 바티칸을 위한 예술활동 속에서만 발전할 수 있었고, 다른 곳에서 형성된 여러 예술경향은 이 ‘위대한 양식’에 비하면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예외없이 촌스러운 성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로마 이외의 어느 곳에서도 우리는 이처럼 고상하고 배타적이고 교양과 학식이 철저히 배어 잇고 또 세련화된 형식문제들만을 위해 철저하게 몰두하고 있는 예술양식을 찾아보기도 힘든 것이다. (115)
고전주의의 가장 중요한 개념 중의 하나인 ‘모든 부분의 조화’라는 미에 대한 규정은 이미 알베르띠에서 공식화되었던 것이다. 그는 예술작품이란 것은 전체의 미를 손상하지 않고서는 전체작품에서 어느 한 부분을 떼어낼 수도 없고 무엇을 첨가할 수도 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117)
예술을 통해 ‘보다 높은 법칙성’을 표현하고 그리하여 세상에는 보편적이고 확고부동하며 침해될 수 없는 기준과 원칙 및 불변하는 절대적 의미가 지배하여 또 이러한 의미를 인간들이-비록 모든 인간들을 아니지만-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예술형식은 이러한 사회의 이념에 부합해서 규범적이 되어야만 하고, 또 당대의 지배체제가 원하는 바대로 궁극적이고 완결된 인상을 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122)
예술에서 보이는 조화는 현실생활의 모든 투쟁이 배제된 유토피아적 이상이며, 그것도 민주주의적인 원칙이 아니라 전제주의적인 원칙의 지배 결과로 생겨난 이상인 것이다. 그 작품들은 삶의 무상성과 일상성을 벗어난 고양되고 세련된 현실을 표현하고 있다.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양식 원리는 이들 작품들의 묘사가 본질적인 것에 한정된다는 점이다. (123)
르네쌍스 이후 우리들은 하나의 회화나 조각품을 단 하나의 통일된 관접에서 파악한 현실의 집약적 표현, 다시 말하면 광법위한 세계와 여기에 맞서 대항하는 하나의 통일체로서의 주체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관계로부터 생겨나는 하나의 형식구조로 이해하게 되었다. 예술과 세계 사이의 이러한 대극성은 대로는 약화되기도 하였지만, 그 후로는 한번도 소멸되지 않았다. 바로 여기에 르네쌍스의 진정한 유산이 존재하는 것이다. (127)
제2장 매너리즘
매너리즘의 고전주의적 예술 모방이 다가오는 혼돈으로부터의 도피이고, 매너리즘의 형식에 나타나는 지나친 주관적·신경질적인 긴장은 형식이 삶과의 투쟁에서 무력해지고 예술이 영혼없는 아름다움으로 전락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의 표현이라는 것을 파악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코 매너리즘을 이해할 수가 없을 것이다. (141)
혼합된 현실상에 가장 가까운 것은 꿈인데, 꿈은 현실의 여러 관계를 폐기하고 사물들을 추상적인 상호관계 속에 넣으면서도 동시에 개개의 사물을 가장 선명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하기도하는 것이다. 매너리즘의 이러한 꿈과 같은 세계는 현대의 초현실주의를 상기시킨다. (144)
고딕이 인간의 형상에 영혼을 불어 넣음으로써 근대적 표현주의 예술의 발전에 커다란 첫걸음을 내디뎠다면, 이제 매너리즘은 르네쌍스의 객관주의를 해체하고 그 대신 예술가의 개인적인 입장을 강조하며 관중의 개인적인 체험에 호소함으로써 그와 같은 발전을 향한 두 번째의 큰 발걸음을 내디뎠던 것이다. (147)
종교개혁운동의 변질은 만인이 보는 가운데서 진행되었고, 그것도 인쇄술이 발명되어 팜플렛이 마구 쏟아지고 많은 사람들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정치적 판단을 할 수 있는 시대에 진행되었다. (155)
정치적 현실주의의 이론과 강령을 최초로 전개한 사람은 니꼴로 마끼아벨리이다.
당시의 중·소 군주들은 모두가 이미 완전한 마키아벨리주의자들이었던 것이다. 단지 마끼아벨리에 의해 이러한 정치적 합리주의의 이론이 공식적으로 표현되었고 이 이론의 의식적·계획적·현실주의적인 실천을 최초로 냉철하게 옹호한 것이 그였을 뿐이다. 그러니까 마끼아벨리는 그가 설던 시대의 대표자이자 대변자였을 따름이다. (162)
지배자와 피지배가, 주인과 종, 착취자와 피착취자가 존재한 이래로 언제나 힘있는 자와 힘없는 자를 위한 두 개의 상이한 도덕적 기준이 있어왔다. 마끼아벨리는 단지 이러한 도덕적 이원성을 사람들에게 인식시키고, 국가의 정사에서는 사생활화 다른 행동기준이 통용되며 무엇보다도 성실과 정직이라는 기독교적 도덕원칙이 국가와 군주의 행동기준을 절대적으로 구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정당화하려고 한 최초의 인물이었을 뿐이다. (163/164)
예술가들은 설령 신앙심이 깊은 독실한 기독교인인 경우라도 현세적이고도 이교도적인 예술적 전통의 요소를 쉽사리 포기할 수 없었다. 그들은 그들의 표현수단이 지닌 상이한 요소들 사이의 내적 모순을 아직 해결하지 못했고 해결할 수도 없는 성질의 것으로 받아들여야만 했다. 이러한 갈등의 중압감을 견뎌낼 수 없었던 사람들은 기교적 세련에 도취하거나 아니면 미켈란젤로와 같이 ‘그리스도의 품안’으로 도피하였다. (171)
중세 예술가들에서는 그들의 종교적 감정이 깊으면 깊을수록 그들의 예술적 창조의 영감을 얻어내는 원천도 깊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이 충실한 기독교 신자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동시에 진정한 창조적 예술가였기 때문이었다. 중세에서는 한 예술가가 창작을 그만두는 순간 그는 정말로 별 볼일 없는 인간이 되었다. (171)
예술가들로 하여금 그들의 세계상을 다시 정립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던 16세기의 정신적 변혁기에서, 그들은 외부로부터의 지도를 그대로 따를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완전히 다신들의 내면적인 충동에만 의존할 수도 없었다. 그들은 자유와 강제의 틈바구니에서 찢겨졌고, 또한 정신적 세계의 질서를 위협하는 혼돈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이들에게서 처음으로 우리는 현재적 의미의 예술가, 즉 생에 굶주려 있으면서 동시에 현실도피적이며, 역사적으로 구속되어 있으면서 겁 없이 반항적이고, 노출증에 가깝도록 자신을 내세우는 주관주의와 더불어 마지막 비밀은 끝까지 감춰두는 폐쇄성을 지니는 동의 내적 분열로 신음하는 예술가의 등장을 보게 되는 것이다. (172)
르네쌍스에서 자연은 예술적 형식의 근원이었고, 예술가들은 자연에 산재하고 있는 미의 요소들을 수집·정리하는 ‘종합’의 행위를 통해 형식을 획득하였다. 그러니까 예술의 패턴은 비록 주관에 의해 조직되지만, 그 원형은 이미 객관 속에 있었다. (173)
예술가들의 이러한 신분상승과 상류층의 예술계 참여는, 비록 우회적으로나마 개개 예술에서의 기술의 독자성을 지양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나아가서는 예술은 원칙적으로 하나라는 이론을 낳게 하였다. (178)
“공간은 그 장소에 가져다 놓은 물체보다도 먼저 있다.” - 뽐뽀니우스 가우리꾸스 - (181)
셰익스피어의 경우에 가장 문제가 된 것은 당대 최고의 문학자였던 그가 또한 가장 인기있는 극작가였다는 사실이나 오늘날의 우리들에게서 가장 사랑을 받는 작품들이 또한 그의 동시대인들에게서도 가장 성공적인 작품이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광범위한 관객층이 경우에는 교양있는 계층이나 전문가라는 사람들보다 더 정확히 작품을 평가했다는 사실이다. (212)
셰익스피어가 상대하던 관객은 경제적으로나 신분·교양 면으로나 매우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즉 그의 관객 속에는 선술집을 찾는 사람들과 교양있는 상류층 사람들, 그리고 특별히 교양있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완전히 무식하지도 않은 중산층의 사람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213)
극장에서 사회의 여러 계층이 하나로 묶일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사회생활의 역동적인 성격 때문이었다. 계급과 계급간의 경계선이 유동적이 됨으로써, 비록 객관적인 차별은 없어지지 않았지만 주관적 개체들은 한 범주에서 다른 범주로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었던 것이다. (215)
전후사정을 두고 보면 왜 중세에는 비극이 없었고, 왜 고대의 비극도, 그 종말이 비극으로 끝나는 우리들이 생각하는 바의 비극과 근본적으로 다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바에 상응하는 비극적 드라마의 형식이 발견되고 극적 갈등이 주인공의 행동으로부터 주인공의 깊은 내면세계로 옮겨지는 것은 정치적 현실주의의 시대에 이르러서이다. 왜냐하면 직접적 현실에 바탕을 둔 현실주의적 행동의 문제점을 파악할 수 있는 시대만이 비로소 이념에는 어긋나지만 현실상황에 부합하는 행동에 도덕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217)
제3장 바로끄
바로끄시대에 와서는 예술은 엄격한 의미에서 어떠한 통일적 성격을더 이상 가지지 않게 된다. 이제 예술은 자연주의적이면서 동시에 고전주의적이고, 분석적이자 종합적인 것이다.(234)
공간의 깊이를 나타내기 위해 바로끄 예술이 가장 즐겨 사용하는 방법은 전경을 지나치게 크게 그리고 전경의 인물들을 보는 사람의 바로 눈 앞에 돌출하도록 하며, 배경의 사물은 원근법적으로 급격하게 축소시키는 것이다. 그 결과 공간은 그 자체가 움직이고 있는 것이란 인상을 줄 뿐만 아니라, 보는 사람은 화면에 극히 가까운 시점이 주어짐으로써 공간이 자기 자신에 종속되어 있고 자신에 의존하고 있으며 자신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형식이라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절대적인 것을 상재적인 것으로, 엄격한 것을 자유스러운 것으로 대치하려는 바로끄의 경향을 가장 뚜렷하게 나타내는 것은 ‘개방적’인 비건축적 형식을 즐겨 쓴다는 사실이다. (237)
뵐플린의 말에 따르면 “궁극적으로 바로끄가 지향하는 바는 화면을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독립적 세계가 아니라, 그냥 스쳐 지나가는, 그러나 관람객이 한순간이나마 참가할 수 있는 영광을 지니는 장면으로 보이게 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화면 전체를 의도가 없이 그리 된 것으로 보이도록 할 것을 노리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바로끄 예술은 ‘영화적’이다. (238)
르네쌍스가 예컨대 건물의 각층을 수평선에 의해 서로 분리시킨 반면에 바로끄는 이를 관통하는 둥근기둥과 벽기둥 양식을 통해 통일시키고 있는 것처럼, 회화에서도 각 구성부분들을 주요한 모티브에 종속시키고 하나의 주된 효과에 초점을 맞추어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회화의 구도는 흔히 단 하나의 대각선이나 하나의 색체부분에 의해 지배되고 잇고, 조각형식은 하나의 곡선에 의해서, 음악작품은 전체를 주도하는 하나의 솔로음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240)
정신적 분석과정을 촉진하는 발전은 동시에 문화적 생산품을 보급하고 상이한 문화영역 간의 상호영향을 용이하게 함으로써 각국의 정신적 활동을 끊임없이 통합하는 일에도 공헌했다는 사실을 도외시하고서라도, 바로끄시대의 가장 중요한 문화창조의 하나인 새로운 자연과학과 자연과학적 지향을 지닌 새로운 철학이 처음부터 국제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 새로운 학문에 표현되었던 보편적인 세계감정은 또한 당대의모든 복잡다기한 예술생산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242)
예술은 ‘가르침’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감동’ 시키고자 하며 예술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는 이성의 태도가 아니라 ‘감정’의 태도라고 처음으로 강조한 사람은 두 모스(Jean-Baptiste Du Mos, 1670~1742)였다. (269)
18세기에 와서야 비로소 누구든지 전문가에 대한 비전문가의 우월성을 내놓고 주장하게 되었고, 끊임없이 한가지 일에만 종사하는 사람들의 감정은 둔화되기 마련이며 반대로 애호가나 문회한의 감정은 언제나 신선하고 자연스럽다는 견해를 표명하게 되었다. (269)
3. 내가 저자라면
‘아, 이거 예술이다..’
감동적인 영화의 한 장면을 보면서, 기막힌 의술을 펼치는 의학 드라마의 한 장면을 보면서, 아이디어가 기발하고 예쁜 디자인 제품을 보면서, 하물며 친구들과 밥을 먹다가 그 기막힌 맛에 반해도 우리는 마치 유행처럼 예술이라는 단어를 별 생각 없이 시도 때도 없이 들먹이고 있다. 별난 상품이나 소음, 공연들까지도 순수예술로 대량 영입되는 현상을 두고 일각에서는 우려를 표하기도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사실 무엇이든지 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예술 개념은 유럽인들이 창안해낸 것으로, 르네상스 시대의 회화들은 액자에 끼워져 박물관 벽에 걸려 있거나 강의실 스크린 혹은 미술책, 팜플렛, 도록에 등장하고 대중적인 역사책이나 박물관 전시, 교향악단의 프로그램, 문학전집들도 과거의 모든 것이 현재에 속한 것처럼 보여지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예술이란 단어는 일상적인 사용에 있어 시각예술만 뜻하거나 하나의 집단으로서 순수예술을 지시하기도 하지만, 영어 ‘art'는 라틴어 ars와 그리스어 techne에서 파생한 단어다. 아르스와 테크네는 말 조련술, 시 짓기, 구두 제조, 꽃병 그림, 통치술을 비롯한 인간의 모든 기술을 뜻하는 말이었다고 한다. 예술이란 단어가 지니는 이러한 다양함과 모호함 덕에 고대의 예술 개념 가운데 일부는 오늘날에도 남아서 예술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늘어가고, 예술과 생활이 합쳐지면서, 우리가 의술이나 요리 같은 기술 분야를 거론할 때도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제2의 르네상스
르네상스 시대에는 그리스, 로마의 미술과 문학이 재음미되었고 인체와 생태계에 대한 과학적 탐구가 이루어졌으며, 자연의 형태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려는 경향이 팽배했다. 해부학과 같은 새로운 기술의 도움으로 화가들은 초상화, 풍경화, 신화나 종교내용을 주제로 한 회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으며, 이러한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예술가의 지위도 상승하여 르네상스 전성기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같은 거장이 탄생하기도 했다. 한편 신대륙의 발견이나 과학적인 탐구로 인간이 스스로의 능력에 자신감을 가진 반면, 종교 개혁으로 인해 교회는 뿌리째 흔들리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신이나 절대자에 대한 관심이 점차 식게 되고 인간에 대한 탐구가 활발해졌다.
이렇게 르네상스가 남긴 의미와 가치가 신에 종속된 존재에서 인간 그 자체의 존재 가치를 확인하는 것이었다면, 창의성과 개성을 바탕으로 한 지식과 정보, 물질적인 욕구의 충족보다는 광범위한 수준에서 삶의 질을 강조하는 문화를 표방하는, 오늘날의 이러한 변화를 제2의 르네상스라 부르는 이들도 있다. 이러한 변화가 바로 사회문화적 변화로, 이것이 신문화를 만들어내기를 기대한다.
창의성 발현
미술가들을 바라보는 시각도 시대에 따라 많이 달랐다. 어떤 때는 길드라는 조합에 묶여 작품을 생산해내는 수공업자로, 어떤 때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독특한 작품을 내놓는 유별난 존재로 여겨졌다. 중세야말로 미술이 사회와 가장 잘 어우러졌던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비해 미술가에 대한 처우는 형편없었다. 힘든 투쟁을 통해 지위를 얻고, 의뢰인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작품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창작의 자유를 얻은 대가로 이들은 점점 사회와 동떨어진 존재가 되어갔다. 이들 중 몇몇은 천재로 추앙받았지만, 특이하게 행동하고 외톨이를 자처하는 예술가들은 소수에 불과했는데도 예술가들은 좀 변덕스럽고 자기중심적이라는 편견을 갖게 되었다.
예술가들은 사회와 타협하기도 했고, 거부하여 맞서 싸우기도 했고, 개종을 하거나 국가의 공식 종교를 순순히 따르기도 했다. 이처럼 시대상, 사회 분위기에 따라 상황은 많이 달랐다.
인간관계가 중요시 되면서 필요에 따라 조합에 가입하기도 했다. 일단 조합에 소속되면 정해진 규칙에 따라 작업을 해야 했고, 재료든 아름다움의 기준이든 조합의 주문을 따라야 했다. 그래야만 보수를 받고 이름도 알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시대에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이때부터는 미술가들이 그나마 개인으로서 존중받고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마음껏 펼쳐 보일 수 있었다. 그러면서 경쟁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했다.
다양성의 조화
인류 역사상 가장 찬란했던 시대가 르네상스였다는 데는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화가, 조각가, 과학자, 시인, 철학자 등 100년에 한번 나올까말까한 천재들이 문학, 예술, 과학의 새로운 다양한 사람들이 얽히고설키면서 찬란한 문명을 이루었다.
이러한 것을 가능케 했던 것 중의 하나는 예술가들에게 재정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메디치가의 역할이 컸다. 메디치가는 단테, 갈릴레오,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마키아벨리 등 당대의 과학자, 문화, 예술인, 작가, 철학자 들을 적극 후원하였으며, 이들의 활약으로 피렌체는 르네상스라는 찬란한 꽃을 피울 수 있었다.
당대의 예술가, 조각가, 과학자, 시인, 철학자, 금융가 등 다양한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껏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재정적인 지원을 해준 것 외에도 이들이 함께 어울려 교류하고 토론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주었다. 여기서 융합한 에너지가 활짝 꽃을 피운 것이 바로 르네상스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이질적인 요소들이 다양하게 얽히고 설켜 큰 에너지를 분출하는 것을 메디치 효과라고 부른다고 한다.
그래서 요즘은 기업에서도 다른 성향의 인재들을 다양하게 배치하고 있고, 한 사람의 지시에 의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수직적인 조직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이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는 수평적인 조직으로 서로 다른 기질, 서로 다른 재능과 성향을 지닌 이들, 다양한 요소들이 어울려 새로운 아이디어, 새로운 에너지를 분출하는 이 효과를 잘 활용한다면 우리도 다양성의 조화 속에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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