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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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후반부에 대한 구상은 ‘창조’와 ‘커뮤니티’로 축약된다. 이는 ‘혼자 놀기’와 ‘함께 놀기’라고 바꾸어 말해도 좋을 듯하다.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들이 입을 모아 하는 말, 삶에 실망할수는 있어도 너무 심각해지지는 말아라. 인생은 한 바탕 놀이라는 말에 공감한다. 잘 노는 사람들이 잘 사는 사람들이다.
나는 변화경영연구소를 통해 좋은 커뮤니티가 무엇인지를 알았다. 사람마다 관심분야에 따라 다양한 커뮤니티를 택하겠지만, 좋은 커뮤니티를 이루는 요건은 비슷하리라 생각한다.
좋은 커뮤니티가 되려면 우선 구성원의 자기실현을 돕는 프로그램이 있어야 한다. 인간은 무의식중에 늘 나아지기를 원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소모적인 여흥에는 한계가 있다. 프로그램은 조금도 심오하거나 복잡할 필요가 없다. 프로그램의 제안자와 참가자간에, 선배와 후배 간에 진실된 방향성이 있으면 충분하다.
연구소에서는 1년간의 자기학습을 통해 2년차에 자신의 책을 출간하는 목표를 골간으로 한다. 단순할 정도로 명쾌한 이 목표를 위해서도 해마다 몇 십명의 지원자가 몰린다. 1차 서류심사는 스무 페이지의 ‘나의 이야기’이다. 그 정도 분량을 꾸려낼 수 있는 기본적인 성찰능력을 본다고 할까.
그 다음 최종심사는 몇 주에 걸친 인턴기간이다. 약 한 달간 지원자들은 한 주에 한 권의 필독서를 읽고, 리뷰와 함께 그 책에서 건진 주제를 가지고 한 편의 컬럼을 써야 한다. 그런데 그 책들이라는 것이 평소에 자주 접하지 못한 철학, 경영서로 꽤 두껍고 딱딱하다. 책깨나 읽어왔다는 사람들도 재미가 없어서 ‘구토가 날 지경’이 되기도 한다. 게다가 그렇게 어려운 책을 소화하기도 버거운데, 주제 하나를 채택하여 컬럼을 쓴다? 미처 소화시키지 못한 이론을 펼쳐놓느라 어깨에 힘이 바싹 들어가고, 마치 덜익은 밥처럼 문장이 서걱거린다. 대부분 직장인인지라 주말을 다 바치고도 모자라 밤을 새우기가 일쑤이다. 맘에 드는 문장 하나를 얻기위해 동네를 몇 바퀴 돌기도 한다. 그러면서 자기 안에 이런 열정이 남아있는 것을 감탄하고 무한한 몰입과 성취감을 맛보게 된다. 그런데 지원자들은 결코 다른 지원자들과 경쟁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바로 ‘어제의 나’와 경쟁을 한다. 따라서 현재 도달한 수준보다도 얼마나 변화에 절실한가가 당락기준이 되기도 한다.
3기 연구원의 커리큘럼은 더러 얇은 시집이나 가독성이 높은 책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어려운 사회과학 서적이다. 직장과 병행하며 1주일에 한 권 이런 책을 읽으려면, 거의 여유시간을 갖지 못하게 된다. 책에서 읽은 주제를 어떻게 일상생활과 연결시켜 글감을 찾을까 끊임없이 궁리해야 한다. 그런 후에 또 쓰기연습. 연구원들은 이렇게 1년간 읽고 쓰는 훈련을 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훌쩍 크게 된다. 이제 어지간한 책은 조금도 겁나지 않는다. 뚝딱 읽고 리뷰 한 편, 컬럼 한 편을 써 낼 수 있게 된다. 연구근육이 강화된 것이다. 그리고 조금씩 좁혀온 자신의 관심사를 확정짓고, 자신의 책을 갖기 위한 싸움에 돌입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2007년 2월부터 연구원 출신 저자의 책이 세상에 나오기 시작했다. 연구소에서는 누군가 한 사람이 일방적으로 수업을 하지 않는다. 연구원은 스스로 공부하는 습관을 통해 스스로 커 나가며, 평생 혼자 갈 수 있는 훈련을 하게 된다. 자기목표가 뚜렷한 사람들의 자기학습을 통해 자기실현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첫 번 째 책의 출간’ 같이 분명한 목표도 필요하다. 그 후로도 계속해서 1년에 책 한 권씩 출간한다는 지속적인 성장목표가 있다. 자기실현 프로그램은 어렵거나 대단할 필요는 없지만, 자체적으로 완결적이며 지속적일 필요가 있다.
연구소가 뛰어난 점은 단지 지적 연구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사람이 살아있다는 점이다. 이는 구본형의 철학에서 시작되어 일거수일투족에서 완성되는 알짜배기 생활원칙이다. 어떤 목표, 어떤 활동도 그 이전에 사람이 먼저라는 것. 이 때의 사람중심이란 추상적인 인본주의가 아니라, 바로 눈 앞에 서 있는 구체적인 인간을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절대로 타인을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포용하는 구본형의 생활철학은 그대로 연구원들에게 전이된다. 그 결과 실로 다양한 사람들이 연구소에 포진하게 되었다. 어떨 때는 인종전시장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연령과 경험, 관심과 기질이 다른 사람들이 모여있다.
특이한 것은, 지적인 사람과 감성적인 사람이 제각기, 개방적이거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 제각기, 20대의 대학생과 환갑의 역학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자신의 존귀함을 증명받으며 제 목소리를 내고있다는 사실이다. 적지않은 나이에 흔치않은 경험을 한 나역시 이 곳에서 부딪치고 깨지며 나의 고질적인 습관을 버릴 수 있었다. 사람을 평가하고 분류하고 좋은 사람만 좋아하는 버릇을 놓고 비로소 사람을 있는 그대로 껴안을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전적으로 개인 구본형의 라이프스타일 덕분이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재료로 실험하며, 그 결과를 프로그램화한다. 시처럼 살고싶다는 신조를 조용히 전파한다. 요컨대 종이 위에는 아름다운 싯귀를 쓰고, 거리에 침을 뱉는 류의 사람이 아니다. 그는 사람과 더불어 사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줌으로써 나를 항복시켰다.
이렇게 해서 내가 생각하는 좋은 커뮤니티란, 자기실현을 위한 방향성과 관계맺기의 훈련이 되는 시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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