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香山 신종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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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철학의 진수는 '변화의 묘'를 이해하는데 있다.
대개 동양사상은 후행적이고, 복고적이며, 진취성이 부족하다고 여기지만,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특히 사서오경중의 하나인 '주역'에는 이러한 '변화'의 정신이 압축되어 있다. 주역은 늘 변화를 말한다. 하지만 주역의 변화는 역사발전을 전제로 한 헤겔의 변증법과는 달리 소극적 '순환론'에 입각해 있다는 오해를 자주 받는다.
하지만 그것은 커다란 오역(誤譯)이다. 주역은 러시아 인형처럼 선천 후전의 변화의 커다란 우주관속에 작은 세계관을 거미알처럼 품고 있다. 마치 '프랙탈 이론'처럼 큰 것과 작은 것의 이치가 같아 보이는 것일 뿐, 주역이 우주만물의 변화를 폐쇄적 순환론에 가두어 두고 있다는 인식은 실로 치명적이다.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변화는 그 크기가 너무 커서 오히려 제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지구가 자전하는 거대한 소음을 인간이 인식하지 못하는 것 처럼 우리의 인식체계속에 그것을 받아 들이기가 어려운 탓일 뿐이다. 김일부 선생이 주장한 '정역'이나 민간의 정감록 뿐 아니라, 공자가 주석을 단 '주역'에서도 언젠가는 선천의 시대가 끝나는 후전의 시대가 도래 할 것임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 '후천개벽'의 사상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변화'는 우리가 관념적으로 말하는 '변화'와는 그 맥이 다르다, 먼저 변(變)은 양이고 화(化)는 음이다. '변'은 나아감이고, '화'는 물러섬이다,
즉 주역이 말하는 변화는 늘 나아감이 아니라, 먼저 나아가고 다음에는 아우름이 있다는 의미이다. 이말은 이제 지난 5천년간의 양의 시대(선천)가 끝나고 음의 시대(후천)가 다가오며, 남성성(근육)의 시대에서 여성성이 시대(다짐)가 다가온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주역의 변화는 이제 '변'의 시대에서 '화'의 시대를 준비할 것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점이 서양의 변증법적 세계관과의 결정적 차이다,
서양의 '변화'는 '응축'과 '분출'의 개념, 즉 갈등과 조율속에 늘 다른 변화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지만, 동양의 변화는 이루고, 아우르고, 나아가고, 다지고, 만들고, 기르는 양과 음의 조화를 변화의 핵심으로 꼽는 것이다.
그래서 서양철학의 관점에서 변화는 늘 '변화' 자체에 함몰되어, 늘 나아가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서양은 늘 앞만 살피고 뒤를 돌아보지 않으며, 돌이킴은 '퇴보'라고 여겼다. 그래서 '변화'는 이치가 아니라 '구호'가 되었고, 따름이 아니라 '강제함'이 되었다, 그래서 서양식 경영의 가장 큰 미덕이자 한계는 바로 이 '변화'에 대한 지나친 강박과 자의식'에 존재한다.
서양문명은 진보를 위한 파괴를 전제한다. 그래서 서구식 변화경영은 늘 변화를 강박하고, 그 변화는 '늘 다름'을 상정한다. 때문에 서구경영의 아킬레스건은 바로 그 '변화와 혁신' 이라는 말에 역설적으로 존재한다. 변화 자체가 변하지 않는 것. 다시 말해 변해야 한다는 인식자체가 바로 가장 변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서구식 경영의 시선은 늘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과거를 부정하고 미래를 상정한다,
하지만 동양적 세계관은 맥락이 다르다, 동양적 세계관 역시 '변화'를 이야기 하지만, 겉으로는 늘 정체되고 제 자리에 머물러만 있는 듯하다. 때문에 지난 200 년간 현대산업 사회가 극적으로 발화하는 시점에서 동양문명은 상대적 퇴보를 거듭한 것으로 여겨졌다.서구는 늘 발전하고, 동양은 늘 정체되어 있다는 인식은 우리들에게 혁신에 대한 강박관념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해다,
동양의 변화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세계관이다. 그것은 때로는 아우르고, 때로는 물러서며, 또 때로는 멈추기도 하지만, 결국은 나아감을 전제로 한다는 틀에서 '변화'를 이야기한다. 그것은 음과 양, 강과 유의 조화이며, 사람과 기계, 자연과 문명이라는 대립물들의 균형을 중시한다,
그래서 서양문명은 기계문명으로 동일시되고 그 결과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질주했다. 그러나 그러한 질주의 결과는 참혹한 것이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는 폭주는 빙산이 녹고, 흙이 병들며, 대기가 파괴되며, 인간성이 말살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기업은 실적이 악화되면 제일먼저 기계가 아닌 사람을 희생하고, '이익'을 늘리는 가장 확실하고 빠른 수단은 '인간'을 배제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한 이기적 변화의 한계가 우리를 위협하고, 그에 대한 반성으로 기계가 아닌 사람, 문명이 아닌 자연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세기가 도래하고 있다. 이것은 주역이 말하는 후천개벽의 시작 일 수도 있고, 기술에 대한 사람의 반란 일 수도 있다.
우리는 지금 이 새로운 변화의 시작점에 서있다.
'변화'하자, 그러나 그 변화는 질주에 대한 반성을 바탕으로 나아감보다는 아우름으로, 이기보다는 이타로, 개인보다는 집단으로, 엘리트 보다는 보편으로 나아가는 보다 큰 맥락의 변화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또 바로 그점에서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바이오, 환경, UCC. 웹 2.0 의 열풍들이 바로 새 시대를 알리는 나팔소리라는 점도 기억하자.
2007/03/28 시골의사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시골의사, 박경철씨의 최근 블로그 글입니다. 동서양의 비교와 주역에 대한 그만의 이야기가 마음에 드네요. 여기에 퍼나르는 이유는 변화에 대한 절묘한 시선이 좋았던 것이 한가지 이유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초아선생님께서 작업중인 주역 이야기에 어떤 실마리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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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동양사상은 후행적이고, 복고적이며, 진취성이 부족하다고 여기지만,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특히 사서오경중의 하나인 '주역'에는 이러한 '변화'의 정신이 압축되어 있다. 주역은 늘 변화를 말한다. 하지만 주역의 변화는 역사발전을 전제로 한 헤겔의 변증법과는 달리 소극적 '순환론'에 입각해 있다는 오해를 자주 받는다.
하지만 그것은 커다란 오역(誤譯)이다. 주역은 러시아 인형처럼 선천 후전의 변화의 커다란 우주관속에 작은 세계관을 거미알처럼 품고 있다. 마치 '프랙탈 이론'처럼 큰 것과 작은 것의 이치가 같아 보이는 것일 뿐, 주역이 우주만물의 변화를 폐쇄적 순환론에 가두어 두고 있다는 인식은 실로 치명적이다.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변화는 그 크기가 너무 커서 오히려 제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지구가 자전하는 거대한 소음을 인간이 인식하지 못하는 것 처럼 우리의 인식체계속에 그것을 받아 들이기가 어려운 탓일 뿐이다. 김일부 선생이 주장한 '정역'이나 민간의 정감록 뿐 아니라, 공자가 주석을 단 '주역'에서도 언젠가는 선천의 시대가 끝나는 후전의 시대가 도래 할 것임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 '후천개벽'의 사상은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변화'는 우리가 관념적으로 말하는 '변화'와는 그 맥이 다르다, 먼저 변(變)은 양이고 화(化)는 음이다. '변'은 나아감이고, '화'는 물러섬이다,
즉 주역이 말하는 변화는 늘 나아감이 아니라, 먼저 나아가고 다음에는 아우름이 있다는 의미이다. 이말은 이제 지난 5천년간의 양의 시대(선천)가 끝나고 음의 시대(후천)가 다가오며, 남성성(근육)의 시대에서 여성성이 시대(다짐)가 다가온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주역의 변화는 이제 '변'의 시대에서 '화'의 시대를 준비할 것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점이 서양의 변증법적 세계관과의 결정적 차이다,
서양의 '변화'는 '응축'과 '분출'의 개념, 즉 갈등과 조율속에 늘 다른 변화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지만, 동양의 변화는 이루고, 아우르고, 나아가고, 다지고, 만들고, 기르는 양과 음의 조화를 변화의 핵심으로 꼽는 것이다.
그래서 서양철학의 관점에서 변화는 늘 '변화' 자체에 함몰되어, 늘 나아가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서양은 늘 앞만 살피고 뒤를 돌아보지 않으며, 돌이킴은 '퇴보'라고 여겼다. 그래서 '변화'는 이치가 아니라 '구호'가 되었고, 따름이 아니라 '강제함'이 되었다, 그래서 서양식 경영의 가장 큰 미덕이자 한계는 바로 이 '변화'에 대한 지나친 강박과 자의식'에 존재한다.
서양문명은 진보를 위한 파괴를 전제한다. 그래서 서구식 변화경영은 늘 변화를 강박하고, 그 변화는 '늘 다름'을 상정한다. 때문에 서구경영의 아킬레스건은 바로 그 '변화와 혁신' 이라는 말에 역설적으로 존재한다. 변화 자체가 변하지 않는 것. 다시 말해 변해야 한다는 인식자체가 바로 가장 변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서구식 경영의 시선은 늘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과거를 부정하고 미래를 상정한다,
하지만 동양적 세계관은 맥락이 다르다, 동양적 세계관 역시 '변화'를 이야기 하지만, 겉으로는 늘 정체되고 제 자리에 머물러만 있는 듯하다. 때문에 지난 200 년간 현대산업 사회가 극적으로 발화하는 시점에서 동양문명은 상대적 퇴보를 거듭한 것으로 여겨졌다.서구는 늘 발전하고, 동양은 늘 정체되어 있다는 인식은 우리들에게 혁신에 대한 강박관념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그것은 오해다,
동양의 변화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세계관이다. 그것은 때로는 아우르고, 때로는 물러서며, 또 때로는 멈추기도 하지만, 결국은 나아감을 전제로 한다는 틀에서 '변화'를 이야기한다. 그것은 음과 양, 강과 유의 조화이며, 사람과 기계, 자연과 문명이라는 대립물들의 균형을 중시한다,
그래서 서양문명은 기계문명으로 동일시되고 그 결과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질주했다. 그러나 그러한 질주의 결과는 참혹한 것이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는 폭주는 빙산이 녹고, 흙이 병들며, 대기가 파괴되며, 인간성이 말살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기업은 실적이 악화되면 제일먼저 기계가 아닌 사람을 희생하고, '이익'을 늘리는 가장 확실하고 빠른 수단은 '인간'을 배제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러한 이기적 변화의 한계가 우리를 위협하고, 그에 대한 반성으로 기계가 아닌 사람, 문명이 아닌 자연의 중요성이 부각되는 세기가 도래하고 있다. 이것은 주역이 말하는 후천개벽의 시작 일 수도 있고, 기술에 대한 사람의 반란 일 수도 있다.
우리는 지금 이 새로운 변화의 시작점에 서있다.
'변화'하자, 그러나 그 변화는 질주에 대한 반성을 바탕으로 나아감보다는 아우름으로, 이기보다는 이타로, 개인보다는 집단으로, 엘리트 보다는 보편으로 나아가는 보다 큰 맥락의 변화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또 바로 그점에서 지금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바이오, 환경, UCC. 웹 2.0 의 열풍들이 바로 새 시대를 알리는 나팔소리라는 점도 기억하자.
2007/03/28 시골의사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시골의사, 박경철씨의 최근 블로그 글입니다. 동서양의 비교와 주역에 대한 그만의 이야기가 마음에 드네요. 여기에 퍼나르는 이유는 변화에 대한 절묘한 시선이 좋았던 것이 한가지 이유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초아선생님께서 작업중인 주역 이야기에 어떤 실마리가 되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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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아
주역은 <The Book of Changes>라 하여 변화를 근본으로 하는 책입니다. 변화의 시점,방법, 종류를 설명하고, 지혜로운 삶의 지혜를 가르친 책입니다. 익혀 깨달으면 자연히 미래와 현재의 현상이 보이니 그것이 점(占)입니다. 깨달은 이들이 자신의 주역 공부방법을 후학을 위해 가르친 것이 주역의 주석서입니다. 주석서 중에 제일 크고 근본이 되는 것이 십익(十翼)입니다. 그들은 모두 다른 방법으로 주역의 해석에 접근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 겸양의 예(禮)를 갖추었기에 이를 공자십익이라 합니다. 십익의 문체를 보면 저자는 모두 다른 사람입니다. 약간의 한학을 공부한 분이면 주석서를 쓴 분이 모두 다른 사람이라는 걸 알수 있는데도 기여히 공자십익이라 한 이유는 공자님같은 훌륭한 학자가 쓴 것, 그것을 높인 것일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의 동양학자는 모두다 표절하고, 인용하고, 흉내낸 책들 뿐입니다. 그리고 앞뒤가 맞질 않는 글을 쓰고도 부끄럽지 않는지 모를 일입니다. 정말 개탄스럽습니다. 무려 그런 확고한 주역에 대한 자기 철학이 없으면서 TV까지 출연하여 개똥철학을 강연하니 현대의 젊은이가 주역을 지향하고 공부하려 하겠습니까...
향산선생!
주역에서는 후천세계, 선천세계, 개벽은 없습니다. 동약학을 공부한 신비주의자가 스스로 앞날을 예언하고 주역의 애기라고 더붙이니 주역의 예언서에서 나온 말인줄 알지만 그들의 세계와는 다른 것입니다. 시간이 있으면 내가 준 나의 책을 읽어보세요. 글을 읽으니 아직 저의 책을 읽지 아니한 모양입니다.
향산은 지금부터 동서양의 철학서를 많이 읽으세요. 사부님은 니체철학의 기류를 자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많은 공불하고 깨달아 현대인에게 자신의 새로운 리즘을 던지세요. 그것이 글의 완성과 만인을 이끄는 작가의 중대한 좌표일 것입니다. 열심히 노력하시는 모습이 너무 좋습니다. - 초아 -
향산선생!
주역에서는 후천세계, 선천세계, 개벽은 없습니다. 동약학을 공부한 신비주의자가 스스로 앞날을 예언하고 주역의 애기라고 더붙이니 주역의 예언서에서 나온 말인줄 알지만 그들의 세계와는 다른 것입니다. 시간이 있으면 내가 준 나의 책을 읽어보세요. 글을 읽으니 아직 저의 책을 읽지 아니한 모양입니다.
향산은 지금부터 동서양의 철학서를 많이 읽으세요. 사부님은 니체철학의 기류를 자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많은 공불하고 깨달아 현대인에게 자신의 새로운 리즘을 던지세요. 그것이 글의 완성과 만인을 이끄는 작가의 중대한 좌표일 것입니다. 열심히 노력하시는 모습이 너무 좋습니다. - 초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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