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용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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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부터 숲 속 사무실로 출근하고 있습니다. 사무실은 여우숲 층층나무관 1층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사무실은 그 어느 전망 좋은 호텔의 방보다도 아름다운 풍경을 조망할 수 있습니다. 이 방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작업을 하다 보면 많은 공사업체들을 상대하며 쌓인 영혼의 찌꺼기가 씻겨 내려가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렇게 여우숲의 시설을 완공하고 숲학교 교실과 사무실을 오가며 하루를 보내기 까지 참 많은 사람과 업체들을 상대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책 한 줄 제대로 읽지 못하고, 글 한 줄 마음을 다해 쓰지 못할 만큼 건조한 영혼을 붙들고 꼬박 일년의 세월을 보낸 것 같습니다. 그날들의 대부분은 맑은 마음 지니고 살지 못하는 숲 속의 삶을 홀로 슬퍼한 날들이었습니다. 이 숲에는 지금 막 생강나무의 꽃망울이 터지고 있습니다. 곧 봄 올 모양입니다. 사무실 너른 창 귀퉁이에 걸린 층층나무와 느티나무 어린 가지에도 새싹이 돋아날 테고 탁해진 내 영혼도 점점 제 빛을 찾게 되겠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도시와 조직을 떠난 지 5년이 되었건만 공사업체를 상대하기 시작하자 조직원 본능이 되살아나고 마음이 점점 더 치열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어떤 업체는 형편없는 수준의 실력과 태도로 이 현장의 공사에 임했고, 어떤 업체는 실력은 쓸만하지만 걸핏하면 현장의 열악한 조건을 핑계로 일을 중단하곤 했습니다. 실력과 태도가 형편 없는 업체를 상대하면 화가 났고, 열악한 조건을 내세우는 업체에게는 요구 조건을 해결해주기 위해 하루를 열흘처럼 뛰어다녀야 했습니다.
주변 정리를 빼면 여우숲의 마지막 작업은 도로와 시설 내에 설치할 간판을 제작 설치하는 일이었습니다. 마을의 몇 분이 같은 값이면 우리 지역에서 간판사업을 하는 이웃사람에게 맡겨달라고 청해왔습니다. 이미 뛰어난 전문가에 의해 디자인이 돼있는 것이었기에 그분들의 청을 따랐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여우숲 조성사업을 관리감독하는 관공서에 제출해야 하는 공사완료보고 시한을 한 달이나 앞두고 제작을 의뢰했는데, 완료시한 열흘을 앞둔 어느 밤에 자신은 제작 기일을 지켜줄 수 없으니 다른 곳을 알아보라고 했습니다.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기한 내에 완료하지 못하면 간판 제작비로 책정한 예산을 고스란히 지자체에 반납해야 하는 것이니까요. 그 사실을 몇 번이고 주지시킨 뒤 발주를 했건만, 무책임하게도 그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그 밤에 나는 여우숲의 간판을 제작해 줄 업체를 수소문했습니다. 몇 곳을 거쳐 대구의 한 업체와 연락이 닿았습니다. ‘정동나무공작소’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그 업체는 딱한 사정을 듣고 쉽지 않은 결정을 내려주었습니다. 자신들에게 밀린 일도 많고, 간판으로 쓸 나무를 말리는 데만 열흘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라고 말하면서도 다른 간판을 제작하기 위해 건조 중인 나무를 먼저 사용해서 상황을 도와주겠다고 안심시켜 주었습니다. 그렇게 며칠간 야간 작업을 하여 간판을 만들고 먼 이곳에 와서 언 땅에 간판을 심어주었습니다. 다섯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발전기까지 싣고 와서 불을 밝혀가며 1박2일로 언 땅을 파고 간판을 심던 그날은 낮 기온이 영하 17도였습니다. 나는 정동나무공작소의 대표로부터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아, 저 분이 장인이구나.
상대의 요구를 충족할 실력이 없으면서 무언가를 팔겠다고 나서는 이를 아마추어라 하고, 실력은 출중하되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거나 말거나 상관없다는 방식으로 일하는 이들을 프로라 한다면, 상대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주는 실력과 태도를 갖춘 저런 분을 이 시대의 장인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여우숲의 예쁜 간판을 볼 때마다 나는 자랑을 하게 됩니다. 그 분이 장인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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