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콩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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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시 남산
K2 노랑셔츠를 입었어요. 현관문을 향해 돌려놓은 빨강 런닝화를 염두에 두고 부지런히 움직입니다. 난 좀 나서기가 싫어요. 꿈지럭거릴 일이 집 안에 많이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엇 차가워! 신발장 앞이 흥건하네요. 오전에 급히 나가면서 스파티필름에 물을 주고서 욕실에 놓았다 물받침대로 옮겼는데 덜 빠졌나 봐요. 분홍색 걸레를 가져다 물 위에 놓았어요. 우리집 걸레는 모두 분홍색입니다. 청소에는 유능함도 윤리성도 없는 인류이기 때문에 이쁜 색깔 걸레라도 사서 맘 달래보려구요. 내친 김에 푹 무질고 앉아 스파티필름 숱을 좀 쳐주었어요. 요즘 들어 지는 꽃을 따내고, 식물 가지 치는 거에 미안함, 두려움이 좀 적어졌어요. 뿌리에 주는 부담이 줄고, 나머지 것들에 많은 영양분이 갈테니요. 안에 빼곡이 난 것들도 좀 솎았어요. 동물은 몇 가지 절지 동물을 빼고는 끊고 자르면 장애를 입거나 죽지만 식물은 그렇지가 않아요. 계속 새 싹으로 되태어나요.
다른 식물들을 둘러보러 베란다로 가요. 남동쪽 미닫이 문을 활짝 열어요. 출근할 때 문 열어놓는걸 잊어먹었어요. 바람길이 막혀 다들 답답했을 것 같네요. 벤자민 나무에 물을 한 대야 부어주었어요. 노랑 잎이 지는 건 과습때문인지 건조때문인지 모르겠어요. 이런 고민이 들 때 이 나무와 같이 살기로 결정한 나의 욕심을 반성해요. 잎 뒷면에 물방울 검은 얼룩이 졌던 뱅갈고무나무는 어떤가 자세히 들여다 봐요. 그 물점이 좀 작아진 것도 같아요. 새로 나는 연두색 애기 잎들을 하나하나 살펴 봐요. 물끄러미 폴리셔스의 자리로 비워둔 데를 쳐다봐요. 폴리셔스는 스투키, 자마이카와 함께 다음 주쯤 올거예요. 자리 옮기는 걸 싫어하고 습한 걸 싫어하는 까다로운 식물이라네요. 폴리셔스 자리는 저기가 괜찮을 것 같아요. 환하긴 하니까요. 내가 이렇게 미리 자리를 만들어 놓고 기다린 줄 알면 까다로운 그녀가 좋아하려나요? 이상하게도 폴리셔스는 ‘여성적’으로 느껴지고요, 뱅갈고무나무는 ‘남성적’으로 느껴져요. 뱅갈고무나무는 뱅갈만, 뱅갈호랑이와 연상이 되어서 그런 듯 해요. 새 식구가 오면 둘이서 사이좋게 지내라고, 부탁한다고 미리 뱅갈고무나무에게 언질을 둡니다. 공중습도를 좋아하는 안시리움, 아레카야자, 문라이트, 후마타에게 스프레이질을 합니다. 이 식물들이 스프레이를 좋아하는게 아니라 내가 스프레이질을 좋아한다 했지요. 아침에 일어나서 스프레이질이예요. 나는 왼손 악력이 제법 세요. 식물은 나에게 하는 최고의 사치입니다. 이건요 엄마를 보면서 힌트를 얻고 유배지의 빌려쓰는 땅에 다산초당을 가꾼 정양용에게서 배운 건데요, 엄마는 불두화, 연산홍, 붓꽃, 앵두나무를 심어 기르기 위해 30년을 기다렸거든요. 나는 땅을 사고, 집을 지을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화분에 나무부터 심어 기르고 싶어요. 그것들은 나를 부유하게 할 겁니다.
애기 주먹만한 참외 두 개를 버적버적 깨물어먹으면서 퇴근을 했어요. 구로역을 지나면서 깜빡 선잠이 들었고요. 이런 잠이 얼마나 단지요. 내 머릿 속에서 자글자글 나를 공격하는 말들이 계속 올라오는 걸 봐요. 주민을 굶기고 학대하는 정부의 대민 선전용 방송처럼 멈추지 않아요. ‘나쁜 년’ ‘위선자’ 이런 비난일 때가 많아요. 오늘도 역시 더 듣고 싶지 않은데 계속 틀어대네요. 나는 아이들에 대해 이런 죄책감을 많이 느껴요. 오늘 또? 네, 오늘 또.
눕혀서 쉬를 뉘어주어야 하는 아이를 안아서 바닥에 눕혔어요. 쉬통에 조준을 잘 못해서 속옷을 버렸어요. 그래도 아이의 몸을 가려서 해야잖아요? 다른 아이들은 모두 자기 자리로 가서 음악을 듣는데, 저리 가라 몇 번 말하는데도 끝내 안가는 아이가 있었어요. 오늘 이 아이와의 국지전이 벌써 여러 개 있었어요. 젖은 속옷을 갈아 입히자면 옷을 벗겨야 해서, 먼저 그 아이 손을 잡아 자리로 앉히려는데 그 아이는 내 손에 달랑 매달려 버렸어요. 그 아이에게 버럭버럭 화를 냈어요. 뭐라 뭐라 잔소리를 해 대는데 문 밖에서 아이 아버지가 듣고 있었어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중증 아이들을 용변을 도울 수 있도록 가림막 같은게 있어야 하는건데 그런게 없는게 이유겠지만요.
고추모종이 축 쳐져 있어요. 두 번째 고추모에는 연두색 진딧물이 다글다들 붙어있어요. 어디서 생겨나는 걸까요? 이런 벌레들은요. 나는 마치 딸램이 머리에 이를 잡아주는 엄마처럼 물묻은 휴지를 뽀족하게 만들어 들고는 진딧물을 살살 거둬서 퇴치해버렸어요. 내 피부와 머릿속이 근질거리는 것 같아요.
바깥의 어스름 기운이 나를 재촉합니다. 이 시간대는 내가 새벽푸른빛 다음으로 좋아하는 시간입니다. 개와 고양이의 시간, 낮도 밤도 아닌 시간, 헤카테여신이 검은 개들을 몰고 산책을 한다면 지금 딱 집 문을 나설 것 같은 시간, 집에 앉아서도 어딘가 집에 있을 그사람에게로 돌아가야 할 것 같은 그리움과 귀소본능에 들썩거리고 서성이게 되는 시간, 나를 밖으로 부르는 시간. 운동화를 신고서 계단을 내려갑니다. 그리고 어제 갔던 길로 달려갔어요. 집에서 용산도서관 지나 계단으로 남산도서관까지 가는데 10분. 가는 길에 참외트럭이 앞에 서 있는 횡단보도 금은시계방에서 손목시계의 약을 넣었어요. 시계방 주인은 목디스크가 있는 지 목에 보호대를 댔고요, 손가락 마디가 하나 없는 안중근 의사의 족자가 있던데 무슨 뜻인지 한자를 읽을 수가 없었어요. 그의 시계방과 진열된 탁상시계들은 낡았지만 깨끗이 청소되어 있고 쇼윈도우도 오늘 아침에 새로 닦은 듯 깨끗했어요. 수리비를 거스름돈 받지 않고 주고 싶어서 주머니 속 돈을 몽창 꺼내 만지작거렸어요. 만원 짜리 한 개, 오천 원짜리 한 개, 천 원짜리 네 개.
어제처럼 남산도서관 뒤로 돌아가지 않고 횡단보도 건너 왼쪽 옆 석탄재 길을 달려 작은 터널을 지났어요. 남산공원 입구의 한정식집 냄새가 작년에 여기서 비빔밥을 먹던 날을 떠올리게 하네요. 웨버님네 회사에서 연구원 수업을 하고, 걸어서 여기 왔었지요. 흰지팡이를 짚은 시각장애인 몇 분이 오늘 또 보였어요. 4명의 외국인이 땀으로 얼룩진 등을 보이며 떠들면서 지나갑니다. 남자들의 나이는 한 40대 후반인 듯 했어요. 군살없이 건강해보였고, 짱구인 작은 머리가 코코넛처럼 이국적이고 동그랬어요. 내 눈이 두꺼운 근시 안경을 쓴 여자 한 명의 등을 따라가요. 민소매 운동복에 드러난 어깨근육이 달릴 때마다 실룩거렸어요. 나도 그녀 같은 짧은 달리기 바지를 하나 살까 봐요. 허벅지가 바지단에 쓸리지 않는 걸로요. 노을 달리기로 나를 초대하는 전령관, 동기유발자입니다. ‘저 사람처럼 되고 싶다’는 것보다 더한 매혹이 있을까요? 책 중에는 하루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최고에요.
어제 이맘때 먼 산 위에 있던 커다란 붉은 태양은 오늘 못 봤어요. 그 그림 때문에 오늘 나왔지요. 나는 노을이 질 때 나무 있는 곳을 걷거나 달리길 늘 소원해왔어요. 집 근처에 달리고 산책할 만한 큰 나무 로드나 공원이 있는 곳에 살고 싶었고요. 10대 풍광에다 적어두었지요. 근데요 꿈을 꾸고, 상상을 하고, 그리고 적어두기만 했는데 그게 주술효과가 있나 봐요. 지금 이렇게 멀쩡히, 거짓말처럼 그 장면 속으로 달려 가고 있으니까요. 오늘은 혼자 달려서 더 기쁘고 은근히 자랑스럽네요. 그는 왜 나더러 '모두가 일정한 속도와 보폭으로 갈 수 있도록 모범을 보이라'고 했을까요? 아, 그건 페이스 메이커가 되라는 말이구나, 나더러 1등을 하라는 말이 아니구나, 5시간 30분 완주를 목표로 하든, 4시간 30분 대로 들어오든 어쨎든 풍선 달고 뛰는 페이스 메이커 옆에서 달리면 믿고 완주가 가능하지, 내 속도로 완주하는 페이스 메이커가 되라는 거구나, 혼자 묻고 혼자 대답해요. 이건 오늘치 추정 답안입니다. 이 물음은 앞으로도 많은 잠정적인 대답들을 양산하겠지요.
내친 김에 연구원 칼럼 게시판에 글을 올리기가 망설여지는 이유를 생각해봤어요. 영번째는 내 칼럼을 읽을 그가 없기 때문입니다. 텀블링 생쇼를 지그시 보아줄 사람 말입니다. 커다란 허허로움입니다. 다른 사우들의 그물망으로 대체되기 전까지는 그럴 것 같아요. 첫째는, 내가 지금 쓰는 칼럼들은 첫 책 목차나 꼭지글과는 아무 상관없는 것이기 때문이에요. 첫 책을 쓰는 게 목적이 아니라 ‘1주 1책, 1칼럼, 1일 1문장’을 목표한다고 했는데요, 거짓말이었어요. 자꾸 제대로 못하고 있는 모습을 숨기고 싶고요 멋지게 제 궤도를 잡은 뒤에 짠 나타나고 싶어요. 근데 그럼 나는 궤멸될 것 같거든요. 둘째는 초고로 던지는 내 칼럼과 내 삶의 괴리 때문이예요. 직장에서의 지루함, 어떤 인간관계에서의 실패 같은 것들이 신경 쓰여요. 글과 삶이 다르니까요. 특히 그 두 사람이 내 글을 읽으면 ‘웃기고 있네’ 할 것 같거든요. 내가 읽은 최초의 글쓰기 책은 이오덕선생의 것이었어요. 그는 ‘글짓기’가 아니라 ‘삶을 가꾸기 위한 방편으로서의 글쓰기’라고 명확히 성격을 말하고 있었지요. 나는 그의 말에 설복당했고 이걸 받아들였어요. 내 삶이 비루하지만 그걸 가꾸기 위해서 읽기와 쓰기를 하려고 하는 거지 삶과 유리되고, 삶으로 증명할 수 없는 걸 짓고 싶지는 않거든요. 망하지 않으려면 계속, 매일 걸어야 할텐데 말입니다. 초고로 던지지 말고 한 번이라도 퇴고를 한 다음에 올리는 걸 해보면 어떨까 싶으네요. 그리고 글쓰기의 발을 걸고 있는 직장의 일과 인간관계를 좀 해결해야할텐데요. 그럼 더 쓰는게 즐거워질텐데요. 하루키씨는 달리기는 하늘같아서 여러 가지가 흘러가는 담백한 공백을 달리는 거라고 했거든요. 이런 잡념들도 지나가는 거겠죠.
어제보다 녹음이 더 짙어진 것 같고요, 아카시 나무는 어디 숨어있나 봐요. 향만 바람에 실어보내고 잘 안 보이네요. 노란 붓꽃을 봤고, 개울물 소리를 오늘 또 들었죠. 녹색 터널은 날마다 더 두터워질 것 같아요. 머리에 닿게 내려쳐진 나뭇가지가 길을 막아오면 일부러 내 머리로 박치기를 위로 하면서 달렸어요. 느티나무 닮은 나무와 수작합니다. 사람들이 많아요. 퇴근길인지 정장을 입고 가는 이, 현란한 등산복 차림인 이, 같은 옷을 맞춰 입고 달리기 연습을 하는 이가 눈에 띄어요. 수줍게 손을 잡고 가는 여러 연령대의 남녀들을 보면서 ‘저이들이 부부일까? 연인일까?’ 궁금해졌어요. 그리고 느닷없이 불온한 상상을 해 봐요. 어떤 거냐고요? 남편이 다른 여자를 사랑하면 나는 어쩌나, 그녀와 손을 잡고 산책하는 그의 표정이 내가 본 적 있는 행복한 표정이고, 같이 산 사람의 직감으로 '저 두 사람이 진짜 사랑하는구나' 싶은 장면을 보게 되면 어쩌나 하는 상상이예요. 뜬금없어서 웃겨요. 헤라여신이 움직이나봐요. 나는 요즘 내 안에서 5월 녹음처럼 짙게 자라나오는 ‘헤라여신’ 땜에 즐겁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해요. 새로 이사온 이 여신은 나에게 자신의 영지와 합당한 대우를 당당하게 요구합니다. 헤라여신은 결혼의 수호신이었지요. 합법적인 아내의 지위와 역할을 자기 정체성의 핵심으로 쳤던 여신. 바람쟁이 제우스 땜에 강짜의 여왕이기도 했고요. 그녀는 혼자 있을 때마다 제우스의 다른 사랑과 연애를 상상하고, 보복을 시물레이션했을까나요? 암튼 나는 요즘 그녀에게 쩔쩔 맵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고요하고 명상적인 헤스티아, 또는 간밤의 꿈을 건져 관찰하던 헤카테여신과 지내던 새벽시간보다 남편 옆에서 그가 원하는 대로 시간을 보내고 싶어하는 욕망을 주고요, 그녀다운 강렬함으로 세게 주장을 해대어 분란을 일으킵니다. 게다가 남편을 거둬 먹이려는 데메테르와 결탁해서는 아침밥을 짓는 일을 내 모든 것들보다 우선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본능적인 것들은 그닥 지혜로운 방식은 아닌 듯 합니다. 내가 그보다 1시간 일찍 출근을 해야 하는 것, 새벽에 내가 해야 할일이 많은 거, 그리고 상대가 아침밥 먹기보다는 1시간 더 자는 걸 좋아하고 그게 그의 생채리듬에 맞다는 걸 고려하지 않거든요. 맹목적인데 에너지가 커요. 이런 걸 관찰하는 재미가 았어요. "결혼해서 이사왔어요"라는 말을 이웃에게 하면서 기뻐하는 것도 그녀겠지요. 근데요 7시 남산에 러너 여자로 자주 출몰한다면 내 안에서 사냥의 여신 아르테미스의 야생성이 눈부시게 자라나오겠지요. 이 여신은 인생 전반전 동안에는 내 안에 잠복해 있었어요. 나는 방안 퉁수니까요. 이제 내가 의식적으로 '아버지의 딸'에서 엄마를 되찾아가는 과정에 있으니까요 쉬기 위해 여자들과 만나 수다를 떨고, 냇가에 나가서 밤에 골뱅이를 잡고, 산을 돌아다니며 다래순, 고사리를 따야했던 엄마와 닮은 부분 (나는 그게 아르테미스 부분이라고 생각해요)이 어떤 식으로든 재조명되고 복원될 거라 기대하고 있어요. 비 오는 날 우산 없이 함께 비를 맞으며 걷고 싶다던 로망도 이루어질테구요. 마라톤을 완주한 날 완주메달을 벗지않고 24시간을 보내겠다던 것도요. 개똥이와 노을이도 어쩐지 만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이런 저런 조정과정을 거쳐 나의 타고난 정체성에 맞게 살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딱 어제 갔던 그 자리, 방울다발처럼 생긴 꽃이 있는 데까지 달렸어요. 남산한옥마을로 내려가는 팻말이 보이는 갈림길 말이예요. 오른쪽 무릎 안쪽이 좀 시큰거리는 것 같았어요. 버스들이 터널에 막혀 꼼짝없이 서 있는 잼 옆을 나는 달려 지났어요. 계단을 내려가서 작은 카페 여주인이 피곤한 얼굴로 밖으로 내놨던 테이블을 치우는 걸 봤어요. 어제 열려있던 떡볶이 가게는 문이 닫혀있었어요. 집까지 와서 우리 동과 옆 동의 크기를 비교하느라 한참 서 있었어요. 문은 똑같이 여섯 쪽인데 크기가 좀 차이가 나는 것도 같기도 하고 아닌 것도 같고요. 땀은 별로 안 났어요. 겨드랑이가 젖는 정도.
갑자기 어떤 여자가 나더러 “거기서 뭐 하세요?” 물었어요. 소리는 옆동 2층에서 났어요. 베란다에 서서 담배를 피우던 여자였어요. 가느다랗고 섬세한 선을 가진 사람입니다. 어릴 때부터 여기 살았다는 그녀와 이야기를 한참 했어요. 자주 이사다니면 살림이 상한다며, 이 동네 살기 좋으니 오래 살라 합니다. 나는 그녀에게 웃으면서 ‘네’ 했고요. 그녀는 나에게 '다음에 또 이야기해요' 했어요. 이 순간의 그녀와 내가 그런 마음인 거겠지요. 집에 돌아와 빨래건조대의 작은 빨래들을 갰어요. 정리정돈도 내가 아주 못하는 분야의 일이에요. 근데 달리고 오면 이런 게 쉬워지곤 했어요. 대추방울토마토와 애기 참외를 씻어서 소쿠리에 받쳐놓고 오가며 껍질채 깨물어 먹었어요. 맛이 기똥찼습니다. 나쁜 정부의 비난 방송이 그쳤네요. 어떤 원리로 그리 되는 지를 알고 싶은 것보다 다음번에도 달리고 오면 그쳐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커요. 오늘 달린 시간 1시간 5분.
전 글쓰기책으로 안정효의 <글쓰기 만보>를 봤어요. 거기서도 글쓰기는 인생 그 자체라고 얘기해서 저는 글을 쓸 때 많이 찔려요. 이런다, 저런다해도 저의 제일 가까운 사람, 생물학적으로, 사회적으로도 가깝다고 지목되는 그 사람들이 제가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데 는 아무런 관심도 없고, 무엇을 그리는지 도통 이해도 못하고, 뭘 잘해도 잘하는지도 모르는 그런 사이라서 가끔은 제가 뭔짓을 하나 생각하곤 합니다. 둘의 관계가 바뀌지도 않는데.... 그래서 초라한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머리 속이 시끄러우면 몸을 움직이면 좋죠.
헤라 멋져요.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