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jeiwa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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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자에도 없는 골프채를 처음 잡은 건, 십 여 년 전 이었다. 싱가포르 사람인 보스가 고객과 긴밀한 영업관계 위해 골프는 필수라고 강권했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대부분 해외 한국인 주재원은 ‘특별히 선발된’ ‘선민의식’ 때문인지 몰라도, 두 명 이상 모이면 그 ‘격’에 맞는 골프로 화제를 삼았다. 고수가 따로 없었다(실제로 허풍이 좀 세다). 어쨌든 생존 위한 ‘촌놈’의 ‘사치스런’ 운동은 그렇게 시작 되었다. 재미도 배가시키고 승부욕도 돋우기 위해 소액으로 ‘내기’ 게임을 하곤 했는데, 매번 자진 헌납해야 했다. 하수 (下手 )인 데다, '까칠한' 고객을 의식하고 잘 쳐야겠다는 부담감때문인지 제대로 맞을 리가 없었다. 금액은 얼마 안되지만, 매번 지기만 하니 울화도 났다. 골프가 스트레스 수준까지 되어갈 무렵, 골프를 마음에서 내려 놓았다. 그냥 마음 편하게 즐기기로 했다. 그랬더니 기대이상으로 좋은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남을 의식하고 잘 쳐야겠다는 그 마음은 다름 아닌 탐욕이었다.
최근에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를 읽었다. 친구 지간인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의 이야기가 나온다. 득도 위해 두 친구는 수행에 열중했다. 박박이는 어느 날 한밤 중, 산중 자신의 처소를 찾아와 하룻밤 신세를 지려는 여인의 요청을 단호히 거절한다. 성불 위한 일념에 매몰차게 문전 박대한다. 반면, 부득은 중생의 요청을 따름도 하나의 보살행위로 보고 처자의 요청을 받아준다.
심지어 산기가 있는 그녀의 출산을 도와주기까지 한다. 나중에 그녀가 관음보살의 화신 임을
알게 된다. 박박은 ‘ 나는 마음속으로 가린 것이 있어 서’ 성인을 알아보지 못함을 뒤늦게
깨우친다. 박박의 득도를 향한 그 마음도 분별 심에서 나온 것 같다.
도를 위해 곤궁에 처한 여자의 간절한 요청을 외면한 것은 도를 이루려는 ‘나’의 탐욕이 앞섰기 때문이다. 선사 (禪師)들은
예기했다. 도를 닦는 ‘나’가
사라질 때 어느 날 갑자기 그 경지에 들어선다고. 그것이 무위 (無爲)가 아닐까 한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인생이란 무대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른다. 관중과 대중을 의식해 ‘개 폼’ 잡고 쓸데없는 기교를 부린다. 그 속에 진정한 감흥이 없다. 물론, 무희들의 육감적 몸매와 선정적인 춤에 넋을 놓고 자지러지는 것도 감동이라면 감동이겠다. 여운 없는 일회성 쾌락을 줄 뿐이지만 말이다. 각자가 만들어내는 춤과 노래는 다양하고 독특하다. 그것에 만족을 하면 살아가면 어떨까 한다.
무엇이 되겠다는, 무엇을 해야겠다는 바람 또는 탐욕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소중한 것을 놓쳐버리거나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것 또한 불행한 일일 것이다. 마치, 기록에 너무 신경을 쓴 나머지 달리기가 재미가 없고 고통스러운 레이스가 되는 거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