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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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예정대로 라면 오늘 12시가 되기 직전에 올려야 정상인데 ...
이런 나를 잘 아니까 오늘은 그냥 후딱 써서 올립니다.ㅋ
막내로 너무 편하게 다녀온건 아닌가 싶기도 하고 ㅋ(군대에선 원래 막내가 모든 씨다바리를 다 해서리^^;;) 암튼 좋은 형님 누나들 알게 되서 너무 좋네요^^
선생님이 꿈벗이 좋은 답을 줄 수도 있고, 아니면 또 다른 질문을 줄 수도 있다고 하셨는데,
제 경우, 아직은 후자쪽인거 같지만서두 ^^;; 아무튼 일단 올립니다~
10대 풍광(2018년) - 유재완
첫번째 풍광
두번째 풍광
세번째 풍광
이제 블로그를 한지도 9년이 됐네. 처음엔 이렇게 됄지 전혀 몰랐다. 사실 내가 사회의 주목을 받게 된다는건 전혀 생각해 본적이 없었으니깐. 아니. 사실은 주저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세상의 바라보는 나만의 시각은 나만의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은 유명한 글쟁이들에 비하면 너무나도 설익은 것이라고 주저했다. 블로그에 올려서 비밀글로 쓰길 몇번. 지금도 기억한다. 2009년 1월2일. 처음으로 티스토리의 공개페이지에 나의 글을 올렸던 순간. 2008년의 다난했던 기억들이 하나씩 가라앉아 두꺼운 경험치가 쌓이던 그 임계점에 서 있었던 순간. 사람의 고민에 대한 나의 성찰은 이렇게 처음 사람들에게 내 이름을 알렸던 것 같다. 그리고 글이라는 것이 우리 삶에 미치는 존재에 대해 두번째 글을 썼고 그 마저도 많은 사람들의 피드백을 받았다. 아마도 너무 당연한 주제를 독특한 시각에서 바라본 것이 사람들의 마음에 공명을 일으켰던 것 같았고, 너무나도 다양한 의견들 속에서 나의 글들은 사람들에게 다소 익숙치는 않치면 색다른 객관성을 제공한 것 같다. 세상이 불확정해 질 수록 믿을만한 객관성을 찾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일테니. 모든 것은 기다리고 있는 것의 결과물이 아닌가. 처음은 이렇게 어려웠지만 블로그가 번창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한두명씩 자연과학도들이 모여들어 나의 글터에 또아리를 틀더니 인문학도들이 가세하기 시작했고, 그들은 일종의 갑론을박을 통해 어려운 글의 융합을 이루어 냈다. 그리고 블로그를 운영한지 9년째. 나의 블로그에서 출발하여 분화한 몇몇의 블로그들과 외부의 전문 블로그들이 연합한 연합블로그를 이끌고 있다.
결국 2013년 이렇게 나는 박사학위자가 되었다. 전공은 물리학이다. 사회학 분야의 저널에도 가끔씩 논문을 제출했지만 여전히 나는 물리학자였다. 사회적 관심을 나의 전공분야와 연결시키기에는 부족한 면이 많았지만, 일단은 나에게 무기를 갖게된 순간이었던 듯 싶다. 더불어 때마침 서서히 커가고 있는 인간공학회의 회원으로서도 활발히 활동하기 시작했었다. 뇌에 대한 연구도 2010년대가 되자 놀라울 정도로 진전이 되었고, 여러 방면의 전공자들이 모여서 인간에 대한 다각적인 연구가 이뤄지기 시작했던 때였던 것 같다. 그 흐름 속에 명함하나 내밀 수 있게 되었다.
다섯번째 풍광
지금껏 여행을 10번 했다. 처음엔 다부지 의도적이었지만 두세번정도 지나니 다소 자연스러워 지더라. 국제학회로 미국, 중국, 일본, 영국을 갔다. 도시의 역동성과 웅장한 자연경관을 동시에 전해준 미국 샌프란시스코는 신선한 경험이었다. 막 달리기 시작하는 경주마 처럼 모든 것이 시작점에 서 있었던 베이징 시내는 가능성이라는 기운을 느끼게 해준 경험이었고, 한국인과 비슷한 듯하지만 보이지 않는 장벽도 존재함을 체감했던 일본인과의 만남도 내 기억속에 자리잡고 있다. 경험이란 내가 내 인생에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 아니던가. 예전의 사진이 지나온 추억을 선물하듯이, 지금 생각해 보면 10번의 여행은 나에게 10번의 다른 삶을 선물해 준것 같다. 대부분의 지리한 내 삶에서 마치 균형이라도 맞추려는 양 10번의 여행은 그 동안 나의 삶에 나름의 의미로 남아있는 듯 했다.
여섯번째 풍광
2018년 지금까지 3권의 책을 썼다. 하나는 처음 블로그가 무르익기 시작했던 2011년 출간이 되었다. 사회문제를 푸는 물리학자라는 타이틀로 나왔고, 기대만큼 베스트 셀러가 되지는 못했지만 신간리뷰에 언급될 정도로 대중성을 획득했다. 그 이후 인세라는 것을 받았었고, 컨텐츠가 충실하다면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수익모델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책을 전문적으로 쓰는 사람이 되긴 원치 않았다. 그땐 내가 너무 부족하다고 생각했고, 더구나 책을 쓰는 글쟁이가 나의 메인잡이 되기에는 무언가 아쉽다는 느낌을 지울수 없었다. 다만 내 글이 남에게 줄만큼 여물었다고 생각했을 때, 그 때가 되면 출간하는 것이 그때로서는 더 낫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덕분이었는지 블로그의 글들은 더욱 자유로워지고 알차졌고, 책을 출간했다는 타이틀과 맞물려 나름 유명한 메인 블로그가 되었다. 그곳에 오고간 수많은 얘기들, 때론 복잡하지만 가벼운 접근들, 가볍지만 복잡하고 그속에서 다른 시선을 끌어내는 자취들은 내가 낸 3번째 책의 씨앗들이 되었던 것 같다.
일곱번재 풍광
지난 10년간 수영과 테니스를 배우고, 피아노를 배웠다. 수영은 익사하지 않기 위해 꼭 필요한 도구라고 생각했기에 배웠지만 이내 내 삶의 큰 즐거움이 되었다. 대학에 들어갈 때 부터 꼭꼭 운동 하나와 악기 하나씩 배워야 한다고 결심했지만 대학졸업할 때까지 내가 한건 배드민턴, 탁구 뿐이었다. 그래서 작정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대학원 들어가서 무작정 체육센터에 가입했던 기억이 난다. 사실 그때 그러지 않았다면 지금까지 난 물속에서 개헤엄만 쳤을 것이다. 얼마나 아쉽겠는가. 물속에서 자유로운 지금의 나를 바라보면 맥주병이 된 나는 참으로 딱할 것 같다. 수영을 배우는 과정은 물론 힘들었다. 자전거를 배우는 것과는 달랐고, 물을 한달간 실컷 먹고 나서야 제대로 숨을 쉴수 있었던 기억이 난다. 수영에 비해 테니스는 배우기 쉬웠다. 1년정도 수영을 배워 익숙해 질 무렵 테니스를 배우기 시작했고, 배드민턴과 탁구엔 능숙해서 그런지 테니스는 반년만에 난타전을 할 수 있을정도의 실력이 돼었던 것 같다. 지금도 삶이 늘어질 때나 울적할 때 수영장이나 테니스장을 찾곤 하는데, 만일 그것들을 배워두지 않았다면 삶이 얼마나 무료하고 답답해 질까하는 아찔함도 느끼곤 한다.
여덣번째 풍광
퇴근해서 집에 오니 벌써 자정이 넘었다. 오랫만에 늦게 집에 와서 그런지 얘들이 아빠 기다리다 잠들었다고 한다. 새근새근 잠자는 선진이와 진선이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벌써 첫째도 내후년이면 초등학교에 입학하는구나. 순간 첫째를 갖었을 때의 감동이 떠오른다. 이 아이에게 세상을 푸르게 보여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이 어설픈 아빠에게 그 흔치 않은 운을 달라고 한참을 기도했던 걸 난 아직도 기억한다. 밤새 우는 통에 잠 한숨 못자고 출근해서 피로에 휘청하다가도 퇴근해서 새근새근 웃는 아이를 보노라면 전날의 기억은 차라리 행복이었다. 옆집 부부는 주말마다 아이에게 영어유치원을 보낸다고 자랑했지만, 우리 부부는 주말마다 시간이 허락하는 한 아이와 시간을 보내도록 노력했다. 7살이 되기 전까지 아이에게 최대한 자유롭고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게 해주도록 아내와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때론 수목원으로, 북한산으로, 대도시의 붐비는 거리도 가감없이 아이와 동행했고, 끊임없이 나오는 아이의 궁금증에 친절히 답해주었다. 아이가 경험했던 그 시간들이 나중에 그 아이에게 세상을 자유롭게 살아가는 밑바탕이 될 것이라고 다짐하면서 말이다. 소곤소곤 잠들어 있는 아이얼굴을 보며 지난 몇년간의 추억을 회상하는 동안 아내가 아이방으로 들어왔다.
아홉번째 풍광
벌써 아내와 결혼한지도 7년째다. 그 동안 아들, 딸 하나씩 낳았고, 2번의 부부여행을 다녀왔다. 결혼하고 2년에 한번씩 여행을 가겠다는 약속을 했지만 아이들 때문인지 계획이 미뤄지더니 결국 2번밖에 못갔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내후년 결혼기념일엔 조금 무리가 되도 동유럽여행을 다짐하고 있다. 그녀의 자고 있는 얼굴을 보며 추억을 회상해 본다. 친구같이 다정하고, 어머니 같은 든든하고, 때론 어설프지만. 그 모든게 너무 사랑스러워 종종 싸우다가도 그냥 안아주곤 했다. 따로 일을 하면서도 얘들 일이라면 죽어라 책임지고 해내는 아내를 보면 좀 미안하기도 했었다. 얘들이 이렇게 잘 자라준 것도 다 아내 덕분이리라. 지금까지의 시간들에 감사하다가, 삶이 늘 그러한지는 아닌지라 앞으로의 자취들이 다소 걱정이 들기도 하네. 그러다가도 이 복잡한 시류속에서 내 가족들 잘 지켜야 하겠다고 굳게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오늘 하루도 감사하다.
열번째 풍광
그날 이후 벌써 10년이 흘렀다. 꿈벗가족들은 저마다의 자리에서 하나씩 일을 내기 시작했다. 한명씩 대중 앞에 나서기 시작했고, 대중들은 그들 각자의 메시지에 주목했다. 티비에 귀연누나가 보였다. 벌써 몇번째인지 모르겠다. 요즘은 교양채널만 서른개가 넘어서 책소개 코너만 있으면 누나가 보인다. 나는 지금 연구소 입사 6년차 책임연구원이다. 여전히 물리학자이다. 동시에 유명블로거이기도 하다. 둘 중 어느길이 더 길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나를 만족한다. 사실 예전부터 논문 하나를 두고 질근질근 준비하고 있긴 한데, 그 두 길이 만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10년전의 내가 어디로 갈지 몰랐듯이 지금의 나도 똑같다. 그래도 인생이란 흘러가고 나서야 알 수 있는 것. 이미 그것을 잘 알기에 그렇게 조급하진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