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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2월 7일 17시 30분 등록
건망증에 대하여, 샘터 12월 , 2003

옛날에 난 똑똑해 보이고 싶었습니다. 바보처럼 보인다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니까요. 그때 반짝반짝거리는 것은 참 멋졌으니까요. 그런데 요즈음은 그냥 생긴대로 삽니다. 반짝인다고 다 금이 아니 듯이 똑똑해 보인다고 다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된대는 사실 속사정이 좀 있습니다. 똑똑하게 보일래야 절대 그럴 수 없는 사건들이 자주 생기기 때문에 똑똑함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약간 멍청한 것을 즐기게 되었습니다.

그 사건들의 주범은 바로 건망증입니다. 무언가를 잊은 것은 분명한데 그게 뭔지 전혀 알아 낼 수 가 없습니다. 갑자기 부엌 한가운데 서 있는 나를 발견하지만 무슨 일 때문에 거기 그렇게 서 있는 지 생각나지 않습니다. 필사적으로 기억해 내려 하지만 그래서 더욱 알아내기 어렵습니다. 허무하게 발길을 돌려 나올 때, 당혹감이 휘몰려듭니다. 이 당혹감이 바로 마흔이 익어가는 증상이기도 합니다.

당혹감은 과거와의 연속성이 깨짐에 따라 생겨납니다. 아침에 한 것을 금방 생각해 낼 수 없기 때문에, 그 당연한 기억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과거와 나 사이에 순간 스위스 치즈처럼 구멍이 뻥하고 뚫리게 됩니다. 불과 몇 초 전의 나와 지금의 나를 연결하는 시간의 끈이 절단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불쑥 어떤 끈으로도 과거와 연결되지 않은 채 지금이라는 무대에 등장하게 되는 것이지요. 냉장고 문을 열고 있다가 목표를 잃어버리고 멈추고 마는 나, 할인매장의 지하 주차장 한 가운데서 차 둔 곳을 잊고 내동댕이쳐져 있는 나를 본다는 것은 꽤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똑똑한 척을 할 수 있겠어요.

이윽고 나는 마흔 살 10년이 끝나갈 무렵에 건망증과 더불어 잘 지내는 방법을 찾아내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 돌연한 과거의 상실을 즐기기 시작합니다. 과거의 끈으로부터 갑자기 자유로워진 나를 상상합니다. 오늘 아침에 한 일이 잘 생각나지 않기 때문에 나는 기억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나를 묶어 맨 과거로부터 자유로운 아주 새로운 인간이 됩니다. 지금의 나를 돌연히 존재하는 인물로 가정합니다. 그러니까 터미네니터들이 지구상에 도착할 때의 그 모습처럼 느닷없이 현재로 던져지는 몇초 몇분을 즐기는 것입니다. 내가 자동차 열쇠를 가지러 다시 돌아 왔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는 것, 살면서 이 놀라운 일을 종종 예기치 않은 순간에 만나게 된다는 것은 대단히 흥분되는 일입니다. 과거와의 연결, 심지어 미래와의 연결도 가끔 끊어 버리고, 이 돌연한 시간적 격리를 휴가로 즐길 수 없다면 그게 바로 바보입니다. 나와 나의 불일치, 시간적 흐름에 대한 일탈과 소거는 아주 유쾌한 지구 탈출 같은 것입니다.

나는 내가 비관적인 상황 속에서 곧잘 낙관적인 정신적 전환에 성공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마 이것이 나의 강점 중 하나 일 것입니다. 문제가 생기는 것을 원하지 않지만, 문제에 끌려 다니는 사람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는 문제를 일상에 던져진 어떤 예기치 않은 모험과 수수께끼로 인식하곤 합니다.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다 보면 세상의 어떤 새로운 단면과 만날 수 있게 됩니다. 내가 그 문제의 최선의 해결책에 도달하는 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문제가 던져주는 여러 상징을 해석하고 가능한 여러 해결 방법 중에서 내게 적합한 방법 하나를 찾아내려 합니다. 그러나 모든 문제들이 다 풀리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를 안고 살아야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게 무슨 대수겠습니까 ? 그저 그렇게 안고 살면 되는거지요.

낯선 길을 갈 때 지도를 봅니다. 그러나 가끔 헤매기도 합니다. 헤매는 것을 두려워하면 낯선 길로 갈 수 없습니다. 더욱이 미래는 지도에 표시되지 않는 곳입니다. 헤매는 것을 즐기는 것이 오히려 현명한 태도인 지 모릅니다.

한해가 저물면서, 일년 전에 주어졌던 한 살의 나이를 다 쓰고 나서, 더 많은 것들을 잊어 버렸습니다. 과거의 것들을 더 많이 잊어 버렸기 때문에 더 많이 낯선 것들을 즐기게 되었습니다. 건망증의 덕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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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9.02 14:17:14 *.212.217.154

비관 속의 낙관적 시선,

삶의 여유가 없다면 힘들겠지요.

많이 배우고 또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오늘은 또 어떤 익숙함을 잊어버리고, 

어떤 새로움이 나를 찾아올까요?

설래이는 하루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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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8 09:37:01 *.212.217.154

선생님의 글을 많이 읽었기 때문일까요?

저도 어느순간,

스스로가 비관적 상황을 낙관적인 정신적 전환을 즐기는 사람이라는것을 깨닫습니다.


변화와 불확실성을,

위기가 아닌 모험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삶은 조금 더 흥미진진해 지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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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18 10:30:52 *.212.217.154

99도,

물이 끓기위한 마지막 1도가 남아있는 온도이지요.


변화에도, 변화에 성공하기 위한 끓는점이 있다면,

지금 저의 온도가 99도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마지막 1도의 고민을,

두려움 없이 묵묵히 받아들일 수 있기를 기도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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