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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0월 13일 18시 50분 등록

업무상 자주 이용하는 기차지만 객실에 들어설 때마다 묘한 설렘이 있다. 청춘의 끝자락을 가슴에 묻어두는 나이가 되었지만 낯모르는 이성과의 야릇한 상상을 꿈꾸는 사뭇 기대감이 있어서이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그 기대감은 할아버지, 할머니, 펑퍼짐한 몸매의 아줌마들의 출현으로 인해 번번이 무너진다. 그럼 그렇지. 전날 피로가 쌓인 상황에서 다시 지방으로 내려가는 그날도 오늘처럼 눈꺼풀이 절로 내려오는 날이었다. 그런데 역사 문 쪽에서 우연히 누군가를 마주하자 바닥을 쳤던 삶의 의욕이 세록 솟아난다. TV 브라운관을 후끈 달아오르게 하는 여자 연예인이 특유의 상큼한 미소를 날리며 홍보 현수막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 게 아닌가.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쳐져있던 눈에 스파크가 틔고 얼굴에 미소가 환하게 퍼진다. 잠시나마 삶의 무게가 사라짐에 나도 똑같은 그렇고 그런 남자인가 보다.

 

생각지도 않았던 등장. 아가씨가 옆자리에 앉아있다. 이게 웬일. 시선이 절로 가지만 자리에 앉아 하얀 백지와 볼펜 한 자루를 꺼내 열심히 생각의 흔적을 잡아끈다. 덜컹거리는 대중교통 안에서의 향유는 남다른 매력이 있다. 바깥으로 흘러가는 외부의 풍경을 보기도 하지만 절대적인 내면의 바라봄의 시간에 빠지기도 한다. 빠르게 지나가는 세상과 사람들의 모습들 속에 침잠하다 보면 불쑥 떠오르는 사고의 조각들이 흩어져간다. 그것을 펼치고 낚아채어 몰입과 행위가 연계되면 생명으로써 부여된 고고의 글이 된다.

 

부스럭부스럭. 그녀는 내내 신문을 크게 펼쳐 뒤적이며 열중이다. 기사에 줄을 치고 스크랩을 한다. 무엇하는 사람일까. 여러 생각이 동한다. 지나치는 한 모습에서 사람의 성격을 엿보기도 하기 때문이다. 기자인가. 그러다 다본 신문을 얼추 접어 그물망 안에 휙하고 던져 넣는다. 일반적인 여성의 섬세함과는 다른 스타일. 남의 시선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아 보인다. 안내 방송이 나온다. 목적지에 다다르고 있다는 신호이다. 빈종이의 여백에 빽빽이 차지한 공간의 사물들을 주섬주섬 챙기다보니 그녀가 먼저 말을 건넨다. 나의 행위에 호기심이 들었던 것이다.

“무엇을 그리 쓰세요.”

아마도 신기했던 모양이다. 그렇기도 하리라. 빠름의 세상 속에서 사람들은 그 속도에 쫓아가고 질주를 한다. 전철을 타노라면 모두들 자신만의 세계에 열중하고 있다. 커다란 헤드폰으로 음악을 듣고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고 뉴스를 보고 쇼핑을 하고 그 기구에 자신을 내맡긴다. 그러다보니 책장을 넘기는 몇몇 사람들의 모습마저 조금은 색다른 정경으로 다가오는 작금. 익숙했던 장면이 낯섦으로 다가올 때의 느낌은 어떤 것일까. 변화의 바람을 쫓아가지 못함인지 아니면 그 속의 그리움의 발로인지.

 

“그냥 떠오르는 것들을 적어보는 거예요.”

수컷의 동물적 본능이 살아난다. 젊은 여인과의 대화가 얼마만이던가. 짧은 찰나지만 서로의 통성명이 오갔다. 나는 명함을 건네었고 자신은 여대생이라고 소개를 한다. 여대생. 그 한마디에 오늘 하루 다가올 업무의 노고가 앞서 씻겨나간다. 우습다. 그러다 그녀가 스크랩한 신문기사가 눈에 띄인다. 자료에 대한 욕심이 많은 터이기에 말을 이어갔다.

“보신 신문이라면 제가 가져가도 될까요.”

그녀는 순순히 건넨다. 감사함에 혹시 연락을 주시면 식사 한번 대접하겠다는 그렇고 그런 작업의 멘트를 날린다.

 

따르릉. 울리는 핸드폰을 받으니 낯선 여인의 목소리다. 이 늦은 밤에 누구일까. 기억을 더듬어 보지만 가물가물하다. 용량의 한계인가. 뇌의 퇴화인가. 잊어버린다는 건 불편한 점도 있지만 반대의 잇점도 있다. 과거의 기억들이 퇴화된다는 건 현재 당면의 상황에만 온전히 몰입되어 질 수 있다는 역설이기도 하기에.

“저예요. 그때 기차에서 만난…….”

아, 그제야 그녀의 자태가 어렴풋이 떠오른다.

“예, 어쩐 일로…….”

당황이 되었다. 함께 사는 마눌 님의 눈치가 보여 방문을 걸어 잠근 채 숨죽이며 전화를 받는다. 죄지은 것도 아니건만 켕기는 이 같은 마음은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온 남자의 학습된 본능이다.

“밥 사주신다면서요.”

이런, 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 어쩐다. 달력을 꺼내 일자를 정한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때 뵙죠.”

통화를 마치고나서의 머릿속은 복잡해진다. 뭐지 이 느낌은. 어린 시절 남의 집 초인종을 무작정 누르고 도망가는 게임을 할 때의 살 떨림. 아니면 미성년자 입장불가라는 간판에 굴하지 않고 몰래 숨어 들어가 성인영화를 볼 때의 드라마틱함. 호기심, 짜릿함. 침이 입안에 고인다.

 

약속 장소. 그런데 얼굴을 기억할 수 있으려나. 시계를 바라보는 순간 한 여인이 눈앞에 나타나 인사를 건넨다.

“잘 지내셨어요.”

그녀다. 마른 체격 화장기 없는 얼굴에 찰랑거리는 긴 머리가 성숙한 여인의 리얼함을 그대로 나타내준다. 긴 머리카락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사춘기도 아닌 터에 얼굴 색깔이 발그레해진다. 무얼까. 여성의 성적 매력의 표상 또는 어린 시절 동경의 향수 탓일까. 아마도 집안에 여성이 있었음에도 그런 모습을 좀체 보지 못했던 것에 대한 호기심 탓이 크리라. 초등학교 6학년 나의 첫사랑도 그러하였었다. 그 애의 별명은 말꼬리. 나 자신 붙여준 별명으로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의 윤기가 하늘빛에 하늘거리노라면 말 그대로 순진무구한 소년의 가슴은 두근반 세근 반이다. 문제는 나처럼 그 애를 넘보는 아이들이 많았었다는 점인데, 수줍고 내성적인 성격의 극치를 달렸던 나로서는 그 전쟁터에서 조용히 물러나있는 수밖에 없었다. 그랬다. 소녀에 대한 환상이 내안에는 잠재되어 있었다. 이것은 생존의 무게를 짊어지며 삶의 일터로 날마다 출근함에 따른 어머니란 모성의 부재와, 남성적인 성향이 강하였던 누나에 대한 자연스러운 역발상의 결과였으리라. 그래서인가 언제가 부터 나는 알퐁스 도데 <별>속의 목동이 되어 스테파네트 아가씨를 염원하는 꿈을 꾸게 되었다.

 

‘아가씨는 훤하게 먼동이 터올라 별들이 해쓱하게 빛을 잃을 때까지 꼼짝 않고 그대로 기대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잠든 얼굴을 지켜보며 꼬빡 밤을 새웠습니다. 가슴이 설렘을 어쩔 수 없었지만, 그래도 내 마음은, 오직 아름다운 것만을 생각하게 해주는 그 맑은 밤하늘의 비호를 받아, 어디까지나 성스럽고 순결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식사를 하고 반주로 곡차 한잔을 나누었다. 그 또래가 그렇듯 그녀는 낯선 남자 앞에서도 쉴 새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재잘댄다. 늦은 나이에 대학원을 다니고 있고 여행을 좋아한단다. 자연스레 방문한 지역에 대한 화제가 나왔고 내가 가본 곳의 인상들을 이야기 하다 보니 나도 그녀의 공간으로 함께 한다. 어느 한구석 얽매이거나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그녀의 생활에 부러움을 표하다 보니 괜스레 나의 현실이 돌아봐진다. 여느 직장인들이 그러하듯 반복되는 일상생활이 때로는 버거움과 지침에 허덕이게 하지만, 여러 제약조건으로 인해 혹은 익숙한 곳으로서의 탈출이란 용기 부재가 나의 발목을 부여잡고 있는.

 

시간이 저물자 그녀는 왔던 곳을 되돌아 다시 뒤를 돌아봄 없이 처음상태의 자기의 길을 걸어간다. 그녀의 뒷모습이 어둑해질 즈음 뒤늦은 취기가 올라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향하는 가운데 피식 웃음이 나오는 나. 오늘 내가 뭘한거지. 그녀는 누구였던가. 중년 남성의 마음속 로망의 실현인가. 아니면 내가 만들어낸 동상이몽 이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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