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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 18일 15시 39분 등록
어린 시절 내 추억의 페이지를 채우고 있는 곳, 삼양동.

초등학교 입학 이전 임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 그 풍경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때가 있다. 단 칸 방 월세. 공동부엌과 세면시설을 두고 있었기에, 세면을 하기 위해서는 서로 방에서 나오지 않기로 약속을 해야만 했다고 한다. 2층 집에는 주인 집이 기거하고 있었고, 동화 속 이야기처럼 주인집 아들의 텃세를 아직도 서럽게 기억하고 있다. 나이는 어리지만, 부(富)의 중요성과 그 위대성에 대해 일찍 눈을 뜬 것 같다.

그 시절 포장마차에서 파는 튀김가루가 맛깔스럽게 뿌려져 있는 핫도그와 튀김들은 삼양동 달동네 아이들에게 선망의 음식이었다. 그래서 난 지금도 핫도그나 튀김을 판매하는 곳을 쉽게 지나치지 않는다. 불포화 트랜스지방이 문제라고 떠드는 뉴스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즐겨 찾는다.

어린 시절의 아련한 추억은 뒤로 하고……

그 시절 삼양동 달동네에는 유독 많은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무당과 점(占)집이다. 지금은 무당들의 소멸로 점집의 전문화(專門化)가 진행되었지만, 그 시절 무당들은 굿과 더불어 길융화복에 대한 예언의 업무를 동시에 하였다. 아직까지 유명한 점집들이 현재에도 삼양동에 기거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물론 비즈니스가 번창해 돈을 번 점주(?)들은 이미 자본주의의 주류 영역으로 자신의 영토를 넓혔지만 말이다.

그런데 얼마전 동료 지점장에게 재미있는 일화를 들었다.

삼양동에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는 점집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점을 신뢰하지 않는 그였지만, 너무나 궁금한 마음에 고민고민하다 삼양동 그 유명한 점집을 찾아갔다고 한다. 그는 최근 비즈니스의 어려움으로 대단히 힘들어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새로운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던 심정이었다고 한다.

처음 점집을 방문했을 때, 그는 이상 야릇한 불상들과 묘한 토속적 디스플레이에 긴장이 되었다고 한다. 잠시 후 그는 점쟁이와 독대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점쟁이는 카리스마 섞인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 동안 침묵이 흘렀다. 짧은 침묵이었지만, 업겁의 시간처럼 길게만 느껴졌다고 한다. 그는 점쟁이의 첫마디를 기대하고 있었다. 이윽고 점쟁이가 말문을 열었다.

“지금까지 많이 힘들었지?”

그 점쟁이의 첫 마디는 영험하고, 신비스런 말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지점장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파란만장한 삶과 힘겨움들에 대해 남김없이 토로하게 되었다고 한다. 점쟁이는 한참을 그의 이야기에 대해 인내심있게 듣고만 있었다고 한다. 간혹 고개 끄덕이며 함께 눈물을 훔치기도 하면서, 오래된 친구처럼 그의 이야기에 경청했다고 한다. 그의 이야기를 다 들은 후 점쟁이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앞으로는 걱정하지마! 오늘로써 자네에 씌어져 있던 모든 나쁜 귀신들은 달아날꺼야! 내가 부적을 하나 써줄테니까, 항상 몸에 지니고 있어. 그럼 모든 일은 잘 풀릴거야.”

그 유명한 점쟁이와의 만남은 그것으로 끝이 났다.

그 일화를 곰곰히 듣고 있던 나는 무릎을 치며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이 세상에 힘들지 않은 삶이 어디 있으며, 눈물로 시(詩)를 써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없겠는가? 점쟁이를 찾아가는 사람들은 이미 자신이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을 위로해 주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 줄 어린왕자와 같은 청자(聽者)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 점쟁이는 이러한 심리적 구조를 정확히 갈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훌륭한 대인관계를 유지하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유능한 관계형성 능력은 모든 비즈니스 성공의 핵심이다. 몇 년 전 허브코헨의 <협상의 법칙>과 같은 의사소통이 센세이션을 일으킨 적이 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든, 의미 있는 삶을 위해서든 훌륭한 의사소통을 꿈꾼다.

그런데 성공적인 의사소통은 그다지 멀리 있지 않다. 물론 의사소통의 해답이 정해져 있지도 않다. 다만 사람들은 해답을 찾기 위해 자신의 어려움을 이야기하지만, 이미 그들은 자신들의 해답(解答)을 알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그저 말없이 들어줄 수 있는 따뜻한 친구가 필요한 것이다. 인디언 말로 ‘친구’는 어려움과 힘겨움을 함께 짋어지고 가는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자신의 길을 찾아 헤매이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누군가 영적 구루에게 인생의 해답을 듣고 싶은가?

당신은 이미 자신의 내면 속에 그 해답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말없이 미소 지으며 함께 걸어갈 친구가 아닐까.
IP *.179.70.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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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정
2008.05.18 18:16:43 *.72.227.114
맞아..오라버니가 드디어 깨달음을 얻으셨구먼..
삼양동 점쟁이보다 내면 속의 점쟁이가 더 우위인 줄 아셨구먼..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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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5.18 18:44:39 *.36.210.11
<자신의 길을 찾아 헤매이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누군가 영적 구루에게 인생의 해답을 듣고 싶은가?

당신은 이미 자신의 내면 속에 그 해답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네.
네.

끄덕.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두 다리와 마음이다.^^


제목이 재미있어서 클릭하게 되었네.
거암일까 아닐까를 생각하며 또 나를 돌아보았네.


1980 년 대 어느 날, 희극인 심철호씨가 이끄는 <지금의 사랑의 전화 복지재단>에서 서울대 교수로 재직하던 정원식 선생으로 부터 상담의 기초학을 배우며 볼룬티어로 활동할 때, 당시에 그분께서 가장 중요하게 강조하신 점은 수용과 경청이었다. 어떤 문제를 해결해 주고 답을 제시하려 들기보다 그저 들어주고 있으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화자 스스로가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해 가기도 하니 조급해 하지 말고 그 상태를 수용해 주라는 것이다.

상담에서 뿐만이 아니라 늘 가슴에 새기며 환자를 대하려고 생각해 보기도 했다.

1990 년대 후반에 다시 음악치료학을 접할 때에 외국에서 오랜 유학생활을 하고 돌아와 뽐내며 가르치는 교수는 어느 날 우리들에게 가장 상담을 잘하는 사람이 누구일까를 질문한 적이 있다. 자신의 견지에서는 '술집 아가씨'라고 하면서.

술집에 가면 하염없이 그네들(손님)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고개를 끄덕이는 아가씨들의 행동이야말로 상담의 기본적 태도라는 강조였다.

그렇다. 오늘처럼 봄비가 주저리 내리는 날에 혼자 비를 맞고 걸어가고 있는 이에게 목례정도로만 눈 인사를 나누며 함께 우산을 씌어주며 걷는 이가 있다면 그 사람은 비에 젖더라도 덜 외로울 것이다.

2008년 어느 날의 칼럼에서 사부께서는 좋은 상사/ 인간 관계란 함께 우산을 쓰며 가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다. 함께 우산을 나누어 쓰고자 하는 사람은 씌워줘야 하는 사람 때문에 자신은 많이 젖게 되어있다. 하나의 우산을 둘이 나누어 쓰면 현상은 둘 다 젖는다. 그러나 그 사이 서로가 부딪히는 좁혀진 간격에는 서로에게서 모락모락 따스한 김이 피어난다.

하지만 이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행여 알코올?이 들어가지 않은 날에도 깜박 깜박하는 치매끼가 있는 것은 현실적 삶에의 방탕한 중독성인가 미완의 인생길을 꿈꾸는 나그네 길인가.

그대에게 오래오래 함께 우산을 나누어 쓰고자 하는 벗들이 많이많이 들러붙기를 바라며.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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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환
2008.05.18 22:18:00 *.34.17.93
형. 상당히 INFJ다운 글인데요? ㅋㅋ
좋다는 말입니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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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암
2008.05.19 10:15:37 *.244.220.254
현정~
이제 나를 가르치는구나~ 그런데 반박을 못하겠네~ ㅎㅎㅎ
네 열정과 추진력~ 보기 좋더라. 우리 나중에는 맑은 술로 한잔 하자.^^

지환~
지난번부터 내가 INFJ에 가깝다는 말에 상당히 껄쩍지근해 하는 것 같은데~ 3기 승오도 INFJ란다! 언제 사회 부적응자들(?)끼리 함 봐야지~

써니누님~
이런 장문을.....술집 아가씨들, 커뮤니케이션의 기본을 아는 분들이죠.
우산을 함께 쓰고 갈 수 있는 사람, 아니 비를 함께 맞고 갈 수 있는 사람. 그리고 밤새 술잔을 기울이고서 갈 수있는 사람이라면 더욱 좋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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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19 12:39:01 *.41.62.236

근데 부적응자 절대 아닌데. 지난번 행사 주관하고 다 챙기고
4기를 멋지게 대표해줬삼.든든해 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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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우
2008.05.19 18:38:28 *.122.143.151

"우워~어억흐으~가알흐쑤흑~ 쿠리이~조흐아으흐지이어~"
(우와~ 갈수록 글이 좋아져~)


"커아으우므~ 머허어지아앙~ 이흐우~"
(거암, 멋쟁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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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19 18:42:46 *.123.204.215
그렇게 영업기밀을 누설하면 점쟁이들은 뭐먹고 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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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산
2008.05.20 11:55:51 *.97.37.242
난 상담심리학을 전공하던 친구에게 배운 경험이 있지.

내가 상담을 요청한 것도 아니었는데, 그냥 대화 중에 우리집안 문제로 그 친구와 두어시간 쯤 얘기하게 됐어. 내가 주로 말하고 그 친구는 거의 듣기만하고, 가끔 질문을 하고. 근데 다음날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 지를 결정 할 수 있었지.
고민이 해결 된거야. 그 친구에게 고맙단 말을 했더니, 그 친구말이 거암이 글에 써놓은 얘기를 하는거야.

대부분의 성인은 문제의 해결책을 이미 자기 안에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헌데 문제라는게 대개 복잡한 양상을 띄고 있어서 엉킨 실타래 처럼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를 잘 모른다는것. 상담심리학자는 잘 들어주면서 본인 스스로 그 실타래를 풀어낼 수 있도록 적절하게 질문을 던진다는거지. 상담자가 질문을 어떻게 하는 지는 모르겠는데, 여하튼 그걸 잘 하는 사람이 유능한 상담자란 것.

경청이란게 쉽지 않은건 상대방으로 하여금 어떤 생각이나 느낌 또는 결정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경청이어야 하기 때문인 것 같아. 말 그대로 적극적 경청이지. 점쟁이들도 그들의 다양한 인간 경험을 바탕으로 그런 걸 잘 하는 사람들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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