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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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시절, 나는 왜소한 체격 때문에 싫은 소리를 많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생각했다. '축구는 체격으로 하는 게 아니라' 라고
대학팀도 사정을 다르지 않아 다 퇴짜를 맞았다.
우여곡절 끝에 명지대에 어렵사리 진학했다.
그때까지의 내 인생은 늘 그랬다.
남들 눈에 띄지 않으니 깡다구 하나로 버티는 것이었고,
남이 보든 안보든 열심히 하는 것을 미덕인 줄 알고 살았다.
난 그렇게 보잘 것 없는 나의 조건을 정신력 하나로 버텼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눈에 띄지 않는 정신력 따위를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부상으로 탈의실에 앉아 있던 내게
히딩크 감독님이 통역관을 데리고 다가왔다.
박지성씨는 정신력이 훌륭하대요.
그런 정신력이면 반드시 훌륭한 선수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말씀하셨어요.
그 말은 다른 사람이 열 번 스무 번
축구의 천재다 신동이다 하는 소리보다
내 기분을 더 황홀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월드컵 내내 그날 감독님이 던진
칭찬 한마디를 생각하면서 경기에 임했다.
그리고 월드컵에서 골을 넣었다.
오래 전 모 방송국의 짧은 다큐멘터리에 소개된 축구선수 박지성의 이야기이다. 인류는 충분한 영감을 받기만 하면 신들과 동일한 위대성의 수준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윌 듀런트의 말을 듣고나니, 머릿속에 문득 떠오르는 것이 이 다큐멘터리였다. 너무나 평범했지만, 영웅으로 거듭난 한 축구 선수의 이야기.
매주 반복되는 일이지만, 오늘도 하루종일 글 재료를 찾아내기 위해 신경을 곤두 세우고 있었다. 다른 연구원 형님, 누님들이 들으면 "예끼! 이놈!" 하겠지만, 나도 인생을 적잖이 산 사람인데 매주 '내 안에 이리도 글 재료들이 없는 것인가?'라고 생각하면 허탈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을 차리고 나 자신에게 말을 한다. 나는 내 안에 수 없이 많은 재료들이 쌓여 있음을 확신한다. 난 단지 그것들을 제때에 적절히 끄집어내 이용할 줄을 모를 뿐이다. 그래서 이렇게 연구원 생활을 선택했고, 매 주말마다 날씨가 화창하건 비가 오건, 몸이 상쾌하건 불쾌하건, 기분이 째지도록 좋건 꿀꿀하건 상관없이 이렇게 책과 컴퓨터를 앞에 두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아니던가.
머리 속에서 무엇인가를 끄집어내야 하는 수많은 상황들을 만날 때면, 항상 내 안에 들어있는 재료들이 너무도 부족한 것이 아닌가하고 의심하게 된다. 특히 말이 느리기로 유명한 나로서는 말을 할 때 수많은 예와 스토리를 적절히 섞어가면서 맛깔스럽게 이야기하는 달변가들을 보고 있노라면 '내 안에는 왜 저런 것이 없는가' 하는 좌절감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릴 때도 있다.
요즘 나는 사람들의 마음속을 헤집고 다니는 일에 빠졌다. 마음이라는 말보다는 내면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듯하다. 재미있기도 하지만, 나에겐 먹고사는 일이다. 남들의 내면을 헤집고 다니며, 감춰진 욕망을 찾아내고, 그것을 이뤄낼 수 있는 능력과 가능성, 성공의 단서들을 찾아 보여주는 것이 나의 임무이다. 그러고 나서는 "자! 보시오. 당신 안에 이런 것들이 있지 않소. 이렇게 뻔히 이런 것들이 있는데, 왜 그동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듯이 살아왔소? 그리고 이렇게 할 수 있는 재료들을 제대로 갖추고 있건만, 왜 당신은 그저 못 한다 못 한다 해왔는가요?"하고 말한다. 사람들은 "아! 그렇군요. 제 안에 이런 것들이 있었다니, 잘 몰랐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사실 알면서도 모른 척 해왔는데, 당신이 또 이렇게 끄집어내 보여주니 어쩔 수 없군요.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하겠소"라고 대답한다.
다른 사람들을 상대로 이런 것을 해야하니, 내 속을 헤집고 다니는 것은 밥을 먹듯이 매일 해야 하는 일과가 되어버렸다. 단지 매주 써야 하는 컬럼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가장 손쉽게, 그리고 확실히 할 수 있는 최고의 임상실험이요 트레이닝이기 때문이다. 마치 그동안 기억상실증이 걸린 듯이 내 안의 귀중한 보석들을 모두 잊은 채 살아왔으나, 이렇듯 나의 속내와 차분히 대화하는 시간이 많아지니 차츰 그것들을 되찾아가게 되었다. 때로 혼자있는 방에서 나만의 트레이닝을 하고 있을 때면, 나는 그가 되기도 한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서 나를 내가 아닌 그로 바라보는 연습. 그래서 그의 과거를 거슬러가 보기도 하고, 지금 기분이 좋으면 왜 좋은지, 나쁘면 왜 나쁜지, 두려운 것이 있으면 무엇이 두려운 것인지 낱낱이 파헤치게 된다. 나를 재료로 삼은 이러한 임상실험을 통해 알아 가는 것들은 곧바로 내가 살아가는 데에 크나큰 힘을 실어주는 강점들로 변모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알아가는 나에 관한 데이터가 많아질수록, 내 안에도 영웅이 있을 것 같다는 조심스런 상상을 해보기도 한다.
나는 그 어떤 위대한 영웅도 그 위대함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그저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인간이었음을 늘 기억하려 애쓴다. 나 역시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것을 잊고 살았다. 우리 인간의 능력이 마르지 않는 샘과 같은 것이라는 것을. 어릴 적 시골에서 물 한 바가지를 넣고 열심히 펌프질을 하면, 다음부터는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는 펌프와 같은 존재가 인간이라는 것을 잊고 살았다. 우리 모두의 내면 속에 커다란 영웅이 한 놈씩 잠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그 순간이, 바로 우리가 영웅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순간일지도 모르겠다.
IP *.34.17.93
하지만 나는 생각했다. '축구는 체격으로 하는 게 아니라' 라고
대학팀도 사정을 다르지 않아 다 퇴짜를 맞았다.
우여곡절 끝에 명지대에 어렵사리 진학했다.
그때까지의 내 인생은 늘 그랬다.
남들 눈에 띄지 않으니 깡다구 하나로 버티는 것이었고,
남이 보든 안보든 열심히 하는 것을 미덕인 줄 알고 살았다.
난 그렇게 보잘 것 없는 나의 조건을 정신력 하나로 버텼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눈에 띄지 않는 정신력 따위를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부상으로 탈의실에 앉아 있던 내게
히딩크 감독님이 통역관을 데리고 다가왔다.
박지성씨는 정신력이 훌륭하대요.
그런 정신력이면 반드시 훌륭한 선수가 될 수 있을 거라고 말씀하셨어요.
그 말은 다른 사람이 열 번 스무 번
축구의 천재다 신동이다 하는 소리보다
내 기분을 더 황홀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월드컵 내내 그날 감독님이 던진
칭찬 한마디를 생각하면서 경기에 임했다.
그리고 월드컵에서 골을 넣었다.
오래 전 모 방송국의 짧은 다큐멘터리에 소개된 축구선수 박지성의 이야기이다. 인류는 충분한 영감을 받기만 하면 신들과 동일한 위대성의 수준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윌 듀런트의 말을 듣고나니, 머릿속에 문득 떠오르는 것이 이 다큐멘터리였다. 너무나 평범했지만, 영웅으로 거듭난 한 축구 선수의 이야기.
매주 반복되는 일이지만, 오늘도 하루종일 글 재료를 찾아내기 위해 신경을 곤두 세우고 있었다. 다른 연구원 형님, 누님들이 들으면 "예끼! 이놈!" 하겠지만, 나도 인생을 적잖이 산 사람인데 매주 '내 안에 이리도 글 재료들이 없는 것인가?'라고 생각하면 허탈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을 차리고 나 자신에게 말을 한다. 나는 내 안에 수 없이 많은 재료들이 쌓여 있음을 확신한다. 난 단지 그것들을 제때에 적절히 끄집어내 이용할 줄을 모를 뿐이다. 그래서 이렇게 연구원 생활을 선택했고, 매 주말마다 날씨가 화창하건 비가 오건, 몸이 상쾌하건 불쾌하건, 기분이 째지도록 좋건 꿀꿀하건 상관없이 이렇게 책과 컴퓨터를 앞에 두고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아니던가.
머리 속에서 무엇인가를 끄집어내야 하는 수많은 상황들을 만날 때면, 항상 내 안에 들어있는 재료들이 너무도 부족한 것이 아닌가하고 의심하게 된다. 특히 말이 느리기로 유명한 나로서는 말을 할 때 수많은 예와 스토리를 적절히 섞어가면서 맛깔스럽게 이야기하는 달변가들을 보고 있노라면 '내 안에는 왜 저런 것이 없는가' 하는 좌절감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릴 때도 있다.
요즘 나는 사람들의 마음속을 헤집고 다니는 일에 빠졌다. 마음이라는 말보다는 내면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는 듯하다. 재미있기도 하지만, 나에겐 먹고사는 일이다. 남들의 내면을 헤집고 다니며, 감춰진 욕망을 찾아내고, 그것을 이뤄낼 수 있는 능력과 가능성, 성공의 단서들을 찾아 보여주는 것이 나의 임무이다. 그러고 나서는 "자! 보시오. 당신 안에 이런 것들이 있지 않소. 이렇게 뻔히 이런 것들이 있는데, 왜 그동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듯이 살아왔소? 그리고 이렇게 할 수 있는 재료들을 제대로 갖추고 있건만, 왜 당신은 그저 못 한다 못 한다 해왔는가요?"하고 말한다. 사람들은 "아! 그렇군요. 제 안에 이런 것들이 있었다니, 잘 몰랐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사실 알면서도 모른 척 해왔는데, 당신이 또 이렇게 끄집어내 보여주니 어쩔 수 없군요.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하겠소"라고 대답한다.
다른 사람들을 상대로 이런 것을 해야하니, 내 속을 헤집고 다니는 것은 밥을 먹듯이 매일 해야 하는 일과가 되어버렸다. 단지 매주 써야 하는 컬럼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가장 손쉽게, 그리고 확실히 할 수 있는 최고의 임상실험이요 트레이닝이기 때문이다. 마치 그동안 기억상실증이 걸린 듯이 내 안의 귀중한 보석들을 모두 잊은 채 살아왔으나, 이렇듯 나의 속내와 차분히 대화하는 시간이 많아지니 차츰 그것들을 되찾아가게 되었다. 때로 혼자있는 방에서 나만의 트레이닝을 하고 있을 때면, 나는 그가 되기도 한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서 나를 내가 아닌 그로 바라보는 연습. 그래서 그의 과거를 거슬러가 보기도 하고, 지금 기분이 좋으면 왜 좋은지, 나쁘면 왜 나쁜지, 두려운 것이 있으면 무엇이 두려운 것인지 낱낱이 파헤치게 된다. 나를 재료로 삼은 이러한 임상실험을 통해 알아 가는 것들은 곧바로 내가 살아가는 데에 크나큰 힘을 실어주는 강점들로 변모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알아가는 나에 관한 데이터가 많아질수록, 내 안에도 영웅이 있을 것 같다는 조심스런 상상을 해보기도 한다.
나는 그 어떤 위대한 영웅도 그 위대함을 드러내기 전까지는 그저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인간이었음을 늘 기억하려 애쓴다. 나 역시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것을 잊고 살았다. 우리 인간의 능력이 마르지 않는 샘과 같은 것이라는 것을. 어릴 적 시골에서 물 한 바가지를 넣고 열심히 펌프질을 하면, 다음부터는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는 펌프와 같은 존재가 인간이라는 것을 잊고 살았다. 우리 모두의 내면 속에 커다란 영웅이 한 놈씩 잠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그 순간이, 바로 우리가 영웅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순간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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