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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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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5월 25일 21시 52분 등록
저녁 식사를 하기 전에 아내가 CD케이스를 하나 내밀었다. 컴퓨터에 넣고 틀어보라 한다. 산부인과에서 준 CD였다. 케이스 뚜껑을 열어보니, 우리 아이의 초음파 사진 몇 장과 CD한 장이 들어 있었다. 몇 주 전에 찍어왔던 사진에서는 콩 만하던 녀석이 벌써 많이 커서 제법 사람 티가 났다. 냉장고 문짝에 붙어 있는 사진을 한 번 쳐다보고, 이번에 가져온 사진을 번갈아 쳐다보니 정말 그 새 많이도 컸다. 안 그래도 요즘 부쩍 아내의 배가 나오는 것이 똥배가 아닐까 의심스러웠는데, 그런 나의 의심을 어느 정도는 해소시켜주는 사진이었다.

TV에서나 봤지 실제로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동영상이 재생되는 몇 분 동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 자그마한 녀석이 엄마 배 속에서 참 부산하게도 움직이고 있었다. 기분이 좋은지 손을 들었다 놓았다 하기도 하고, 다리를 쭉쭉 뻗어보기도 한다. 사실 얼굴은 잘 뵈지도 않는데, 내 눈에는 사진 찍는 것이 신이 나서 '까르르' 웃는 듯이 보였다. 아직은 다리가 그리 길지 않아, 아기집의 벽까지는 닿지도 않건만 발을 마구 굴러대고 있었다. 나에겐 마냥 신기한 장면이었다. 사실 지난번에 찍어온 초음파 사진 속의 모습은 '아내의 배 속에 아기가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 벌써 많이 자라기도 했고, 세상이 좋아져서 동영상으로 보니 역시 뭔가 달랐다. 4차원 영상이라고 해서 오른쪽, 왼쪽, 위로, 아래로 이리저리 돌려가며 아이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심장소리도 쿵쾅쿵쾅 거리는 것이 아주 스펙터클하고 흥미진진했다.

난생 처음으로 느껴보는 기분이니, 그 때의 기분을 뭐라 표현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동영상 중간에 몇 초 정도 나오는 아기의 심장소리를 듣고는 내 머리가 쭈뼛쭈뼛해지는 걸 느꼈다. 경이로웠던 것일까? 아내는 옆에서 기분이 어떠냐고 자꾸 묻는데, 아무 대답을 못했다. 사실 무슨 기분인지 잘 표현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때의 감정을 멋들어진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내가 답답했다. 역시 난 멋대가리 없는 놈인가 보다. 그래서 그냥 계속 컴퓨터 화면만 쳐다보고 말았다. 몇 분간 몸이 찌릿찌릿 감전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마음 속으로는 '만나서 반갑다. 건강한 모습으로 보자꾸나. 나중에 아빠가 제대로 한번 안아 줄게' 라고 말했다. 그리고 '엄마 힘들게 하지 말고 얌전히 있다 나오렴' 하는 부탁도 잊지 않았다.

다음날 아내가 출근하고 난 후, 컴퓨터를 다시 켰다. 혼자서 조용히 다시 한 번 보고 싶었다. 다시 틀고 가만히 보고 있자니, 또 기분이 이상해졌다. 다리를 쭉쭉 뻗어대는 모습은 암만 봐도 신기하고 웃겼다. 자그마한 놈이 뭐가 그리 신나 발길질을 해대는 것인지. 잠시 후, 괜스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나도 이제 아빠가 되나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가 옆에 없어 다행이었다. 눈물 흘릴 때 옆에 있으면 쪽팔린다.

찔끔거리는 눈물을 닦고 나니, '이 녀석은 남자일까? 여자일까?' 부터 시작해 수많은 궁금증과 질문들이 머릿속을 날아다니기 시작한다. 난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을까? 아빠가 하는 일을 나중에 좋아할까? 이 녀석은 어떤 기질과 강점을 가지고 있을까? 하워드 가드너가 말하는 다중지능 중 어떤 지능을 가지고 있을라나? 등등을 떠올리다 보니, 아직 배 속에 있는 아이를 두고 이런 것들을 궁금해 하고 있는 내 자신이 좀 모자란 아빠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읽는 것들이 죄다 그런 책들이다 보니 또 나도 모르게 오버를 했다.

아기에게는 임시로 '튼튼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그저 이 세상 모든 부모들이 그렇듯이 아이에게 바랄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저 건강하게 자라는 것 일뿐. 어머니는 아기 이름이 촌스러워야 아기가 건강하다 하시면서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하셨다. 혹시 진짜 이름도 그런 식으로 짓기를 주장하는 건 아닐지 잠시 걱정스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몇 달 있으면, 나에겐 '아빠'라는 엄청나게 큰 역할이 주어진다. 아직 정말 아무것도 모르지만, 어쩌면 고되기도 하겠지만, 한없이 행복할 것 같은 그 역할이 주어진다. 내가 아빠가 된다니, 거참. 주변에 철딱서니 없어 뵈는 친구 놈들도 자식 잘 낳고, 잘 키우고 있는 거 보면 별 것 아닌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역시나 아직 준비된 게 별로 없는 나 자신이 걱정이다. 사부님은 첫 출근하는 딸을 위해 책을 한 권 쓰셨으니, 난 세상으로 처음 나오는 귀여운 녀석을 위해 꼭지글이라도 하나 써놔야겠다는 생각이 스친다.

"아가야. 엄마 배 속에서 박박 기어라, 그리하여 세상에 나와 빛나는 별이 되어라". 이렇게 시작하는 글 말이다.

아내는 매일 자기 전에 아기에게 말한다. 아빠 닮은 사람이 되라고. 그 소리가 듣기 싫지 않다. 나도 내심 '남자건 여자건 나 닮은 놈이면, 괜찮은 놈이다.' 라는 발칙한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나한테도 꼭 한마디씩 하라고 시킨다. 왠지 배 속에 있는 아이에게 말하는 것이 낯설어 쭈뼛거리다 겨우 한마디 한다. "튼튼아! 아빠가 무지하게 사랑한다. 건강하게 잘 놀다 나오렴." 어떤 녀석이 나올지 무척 궁금해진다. 그저 이 세상을 최고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녀석이면 좋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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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우
2008.05.26 13:14:55 *.122.143.151

지환아, 목요일의 사부님 강의가 꽤 기억에 남았나부다..

푸핫~!!

"아가야. 엄마 배 속에서 박박 기어라" 라니... 큭큭큭...

중간중간 넣는 추임새가 꽤나 재기발칙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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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5.26 19:37:30 *.41.62.236

그 느낌 경험 안해본 현정인 모를 것이다.
현정씨. 느껴보삼. 지환씨,튼튼인 연구소의 기대우량주라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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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암
2008.05.26 19:41:06 *.244.220.254
"아이에게 이 세상 최고의 영웅은 바로 아빠다."- 영화'로드 투 퍼디션'

이제 지환이가 진정 영웅의 길로 들어서겠구나~ 이제 신께서 주신 '책임감'이라는 선물을 함께 짊어지는 당나귀가 되야지~ ^^ 귀환을 축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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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환
2008.05.27 09:23:18 *.34.17.163
저두 이제 어른인가요?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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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산
2008.05.27 10:22:02 *.97.37.242
좋겠다!...
신기하지? 흥분되지? 기쁘지? 그 생각만 하면 막 웃음이 나지?
나도 그랬다. 글구 그게 사랑이란걸 알았어. 세상에서 제일 큰, 조건없는 사랑.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느끼는 사랑. 바로 부모의 자식사랑.
지환아 튼튼이가 나와야 어른 되는거야. 아직은 반 어른?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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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은
2008.05.27 11:09:55 *.51.218.187
괜히 눈시울이 뜨끈해지네.

그런데 박박기는 건 아이가 아니고 엄마 아빠가 될 걸!!
그녀석 나와봐라, 다시 들어가 있는 게 편하겠단 말이 절로 나올 걸..
그래도 자식을 나아봐야 철이 들지.
부모들이 하던 말이 다 진리야.
아이들이 가르치는 게 우리가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보다 많지.
그리고 온전한 희생이 뭔지 알게 될거야.
목숨을 주어도 안 아까운 사랑이라는 것도...
와, 아가야 보고싶다.

아빠 닮은 아기가 되라고 기도하는 지혜, 너무 엉큼, 발랄, 그리고 또한 너무 지혜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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