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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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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6월 4일 14시 48분 등록

“이보게. 웬만큼 마시게나.”

앞에서 중저음의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쳐다보았다. 짧게 다듬은 턱수염이 중후한 멋을 풍기는 중년의 남자였다. 낯익은 얼굴을 기억해내느라 잠시 머뭇거렸다.

“어, 라교수님. 안녕하세요.”

대학교 은사님이었다. 졸업 후 처음 뵈었다. 졸업식날 사진을 찍으면서 자주 인사드리겠다고 약속하였건만 밥벌이에 쫓겨 전화조차 드리지 못했다.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학교를 다닐 때 존경하던 분이라 반가운 마음이 들었지만 우연치고는 뜻밖의 장소에서 만나게 된 것이 조금 의아스러워 안부인사도 드리기 전에 질문부터 하였다.

“몰랐나? 연실장과는 대학동창이라네. 자네 소식은 연실장으로부터 가끔 들었지. 그래서 한 눈에 알아봤어. 나도 한잔 주게나.”

그동안 약속은커녕 잊고 지냈던 자신이 부끄러워 소주를 따르는 손이 떨렸다.

“인사를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안부 전화라도 자주 드렸어야 했는데……”

“괜찮네. 무소식이 희소식 아닌가. 직장생활 잘 하고 있다는 말을 연실장으로부터 듣고 있어서 오히려 내가 고맙더군. 제자가 사회에 나가 자기 몫을 잘하고 있다는 말을 다른 이로부터 들으면 오히려 선생이 더 뿌듯하지 않겠어. 미안해할 필요없네.”

라교수님의 너그러움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방황하던 학생시절 까칠했던 유연을 저 너그러움으로 감싸주었기에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요즘도 수업시간에 알쏭달쏭한 나르키소스 이야기를 하시나요?”

갑자기 옛날 수업의 추억이 떠올라서 유연은 물어보았다.

“아직도 기억하나?”

“물론이죠. 지금도 그 이야기는 생생합니다. 그 이야기가 계기가 되어 교수님과 진로에 대해, 삶의 대해 많은 대화를 나누게 되었죠.”

“기억해주어 고맙군. 지금도 자주 애용하지. 모든 것은 그것과 비슷한 것이 아니라 상반된 것을 필요로 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지.”

“하지만 아직도 가슴에 뿌리내리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자주 잊어버리게 되죠.”

“걱정 말게. 아마도 연실장의 죽음이 그 계기를 마련해줄테니. 삶은 죽음을 통해서 살아나게 되지. 그러니 죽음을 통해 자네의 삶을 다시 들여다보게 될 걸세. 거울처럼 말이야. 그런데 중요한 점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삶의 모습을 온전히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는 거야. 그래야 새로운 삶이 펼쳐질 수 있지. 자네가 연실장의 죽음에 애통해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는 것은 잘 알아. 거기서 끝나면 연실장의 죽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네. 연실장이 죽기 전 나를 자주 찾아왔지. 회사의 혁신때문에 깊은 고민을 나와 많이 상의했지. 자네와 갈등도 일부이더군. 하지만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어. 그보다는 정치가 난무하는 현실에 더 괴로워했지. 이제야 그 고민에 대한 실마리를 찾았는데 아쉽게 연실장이 먼저 가버렸으니 그것이 너무 안타깝네. 가족 여행을 떠나기 며칠 전에 낮술까지 마셨는데……”

말이 끝나기 무섭게 라교수는 소주 한잔을 벌컥 마셨다. 평온했던 라교수의 얼굴에 주름골이 패이며 안타까움과 수심이 번졌다. 그동안 연실장과 라교수는 회사의 구조개혁에 대해 많은 고민과 대화를 나눈 모양이었다.

“그랬었군요. 정이 많은 분이 거친 업무를 맡아서 마음고생이 심했을 겁니다.”

“그랬지. 직원들에게 미안하지만 편한 길을 택할 수도 있었지. 하지만 연실장은 그렇게 하지 않았어. 고통없는 변화, 직원을 희생시키지 않으면서 회사를 살리려는 힘든 길을 택했지. 그것은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으려는 무모한 길이었으니 오죽 힘들었겠나. 그런데 연실장이 택한 길이 결코 무모하지만은 않음을 최근에 알게 되었네. 이 깨달음을 연실장에게 들려주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서글프고 안타깝네. 이 친구가 그토록 찾고자 했던 길이었는데……”

“고통없는 변화요?”

“그래,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택하기 힘든 딜레마에 직면했을 경우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이분법적인 사고를 하게 되지. 무의식적으로 말이야. 그러나 연실장과 나는 두 가지를 동시에 만족시키는 방법에 대한 연구를 해오고 있었지. 그 연구의 결과가 이제 막 나오기 시작했는데……”

라교수는 그동안 연실장과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고자 고민했던 시간들이 떠올랐는지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유연은 라교수가 술을 전혀 못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라교수는 연신 술잔을 비워도 말투에 한 점 흐트러짐이 없었다. 술보다 오랜만에 나누는 편한 대화에 더 취한 유연은 라교수의 리듬에 덩달아 술잔을 비웠다.

“라교수님, 면목이 없습니다. 연실장님의 죽음에 저도 한 몫을 한 셈입니다. 저는 그것도 모르고 계속 브레이크만 걸었거든요. 제발 쉬운 길로 가자고요. 그러다 우리만 다친다고.”

“마음고생이 컸어도 자네에 대한 원망은 전혀 없었다네. 그러니 죄스러워할 필요없네.”

“하지만 그런 뜻을 모르는 대다수의 직원들은 연실장에게 고운 시선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여기 장례식장에서도 심한 말을 서슴지 않으니 정말 괴롭습니다.”

“알고 있네. 그것은 시간이 해결해줄 걸세. 이제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니 조금씩 잊혀지겠지. 그보다 남겨진 가족의 생계가 더 시급한 문제일세.”

“저도 그 점이 걱정이 되어 백방으로 뛰어보았지만 별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배신감에 미칠 것 같습니다.”

“진정하게. 자네가 힘을 많이 써주었다고 부인한테 들었네. 고마우이.”

라교수는 유연의 한 손을 꽉 잡으며 그간의 노고에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별말씀을. 오히려 더 이상 해줄 일이 없다는 점이 절 더 괴롭힙니다.”

“아니네. 나도 여기 저기 알아보고 있으니 무슨 방법이 있을 거야. 참, 이제 가봐야겠네. 그 일로 누구를 만나기로 하였거든. 나중에 한번 봄세. 꼭 전화 주게나”

그렇게 말하면서 명함 한 장을 주고 서둘러 나갔다.


IP *.215.12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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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
2010.06.05 01:39:39 *.131.127.50
흠~~

나는 왜 이렇게 쓸 수 없을까?

어쨋거나 난 지금 다음이 궁금해,
기다려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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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해
2010.06.07 12:53:42 *.93.112.125
그곳 날씨는 어때요?
여기는 벌써 여름입니다.
가만히 앉아있어도 땀이 나네요.

형님의 성실함, 꾸준한 관심에 감사해요.
건강 잘 챙기시고 (물론 잘하시겠지만 ㅎㅎㅎ)
술 한잔할 날 고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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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10.06.05 10:59:40 *.219.168.123
시종일관 긴장이 흐르게 이끄는 군. 짧막한 글 속에서 반전을 예고하며 계속 다음편을 기다리게 만드네.

그런데 독자가 너무 머리 쓰며 읽어야 하는 거 아냐? ㅎㅎ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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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해
2010.06.07 12:56:26 *.93.112.125
복잡하지 않으니 그냥 편하게 읽어주세요.
물론 관심은 놓지 마시고.....

이전과는 다르게 글쓰기가 새롭게 다가오네요.
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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