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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2월 22일 08시 08분 등록
  로고.jpg   심스홈 이야기 16



 부티크 호텔의 매력을 끌어들이다 1

 ‘엄마와 딸의 여행’


처음이었다. 엄마와 두 딸의 여행이.


“언니, 이번엔 엄마도 함께 갈까”

모녀지간의 여행은 나보다 훨씬 속 깊은 동생의 제안으로 이루어졌다. 평생을 전업 주부로 살아오신 엄마에게 가끔 현실을 잊게 할 만한 탈출의 시간을 만들어 드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단다. ‘기특한 것..’


엄마는 남자 둘을 놓아두고 여행을 갈 경우 벌어질 여러 가지 소동들이 떠올라 처음엔 망설이셨다. 여행가는 그날까지 ‘간다 안간다’ 를 수십 번 반복한 끝에 “엄마랑은 뭘 못해. 외할머니랑도 그래서 여행 한번 못 갔잖아요.” 결국 큰 딸의 날 세운 한 마디를 듣고서야 엄마는 마음을 굳히셨나 보다.


그렇게 어찌어찌해서 3년 전부터 우리 집 세 모녀는 여름휴가를 조금 앞당겨 함께 여행을 하고 있다. 밥벌이를 하면서 원하는 때에 원하는 곳으로 자유롭게 여행을 떠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만큼, 1년에 많아야 겨우 일주일정도 쉬는데 유럽이나 미국은 너무 부담이 됐다. 그래서 첫 여행의 목적지는 짧은 일정으로 부담 없이 훌쩍 떠날 수 있는 여자들의 도시, 홍콩.


집 꾸미는 일을 하는 내가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다. 내가 홍콩에서 가장 눈여겨보는 것은 바로 호텔, 데커레이션의 총체라 할 만한 호텔과 독특한 숍이나 레스토랑의 인테리어를 감상하면서 나는 일적인 아이디어를 많이 얻곤 했다. 나에게 호텔은 언제든 흥미가 솟아나는 존재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던가. 집 꾸미는 언니를 둔 탓에 나름의 안목(?)을 내세워 클릭품에 일가견 있는 동생이 점찍은 곳은 바로 ‘럭스 매너(The Luxe Manor)라는 이름의 호텔. 한집 건너 한집이 호텔일 만큼 많은 호텔이 있는 홍콩에서 언니가 여지껏 경험한 호텔들과는 전혀 다른, 가장 핫하고, 독창적이면서, 획기적인 콘셉트의 부티크 호텔이라며 적극 추천한 곳이었다.


규모는 작아도 자기만의 고유한 개성을 담고 있는 부티크 호텔이라.. 음.. 흠.. 작은 기대를 품고서 도착한 호텔 앞, 비교적 젊잖은 외관에서 연상되는 분위기와는 달리 육중한 빨간색 문을 밀고서 마주한 호텔 로비는 마치 초현실의 미스터리한 세계로 들어선 기분을 선사했다. 밟아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거대한 시계, 거꾸로 떨어지는 사람, 사람 얼굴을 하고서 아무렇지도 않게 웃고 있는 태양 그림 등 현실 공간에 비현실적인 것들을 섞어 신비롭고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 로비 벽과 바닥의 모자이크 타일 장식은 나의 기대(?)를 결코 저버리지 않았다. 블랙 타일과 붉은색 커튼으로 온통 반짝이는 로비, 핑크와 레드가 섞인 카펫, 복도 끝에 걸려있는(?) 거울 등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았다.


로비 한 가운데 놓여있는 독특한 의자는 나중에 알고 보니 홍콩인에게 인기 있는 중국 만화 캐릭터를 프린트해 디자인한 것으로 홍콩에 단 한점만 있는 귀한 아이템이라고 했다. 오호.. 클래식한 앤틱 의자에 일상 속 만화를 가지고 대중에게 다가간 팝아트를 응용하다니.. 믹스&매치적인 굿 아이디어다.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어버린 1인용 소파에 귀여운 옷을 입혀 아이 방이나 개성남녀가 주인인 공간에 놓아두면 딱! 이겠다. 암튼.. 중국 만화에, 초현실 세상에, 무협지와 판타지 소설 좋아하는 자기 취향에 맞게, 호텔을 골라도 꼭 지 같은 것을 골랐다. ㅎ


드디어 호텔방에 들어선 나의 첫 반응은 ‘허걱..’, 객실 문을 열었을 때 내 눈에 확 쏟아져 들어온 것은 지브라 패턴의 카펫이었다. 아프리카와 모로칸의 이국적인 열정을 콘셉트로 했다는 룸은 여느 사파리를 연상케 했다. 


“언니~, 웰컴 투 더 정글..”

“웰컴은 무신.. (여행 내내 그것도 아침저녁으로 표범 등가죽을 밟고 지내야하다니.. 으---)”

“여기, 큰 딸 분위기는 아니다. 우리 딸은 J 부티크 취향인데.. 그런데 재미난 게 많네.”


예전에 묵었던 페닌 슐라, 만다린 오리엔탈, 지아 부티크 호텔처럼 클래식하면서, 모던하면서, 감각적이면서, 이국적인 정서와 재치가 품격 있고 편안하게 조화된 곳들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에 잠시 당황했지만 곧 ‘허.. 흐..’ 하며 싱겁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미술사조 중에서 내가 가장 공감하지 못하는 초현실주의적 디자인이 객실에도 듬뿍 녹아들어가 있었기 때문이다.

 

침대 위 벽에 섬세하게 그려 넣은 거울 프레임과 액자, 미니바가 숨어있는 3단 서랍장, 실제로 불을 지필 수는 없지만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 벽난로, TV가 감춰져 있는 커다랗고 화려한 주물 장식의 거울, 옷장 표면을 장식한 몰딩 등은 모두 실제가 아닌 그림이었다. 욕실의 샹들리에, 복도에서 본 공주풍의 거울, 레스토랑 벽의 책장, 역시 멀리서 보면 진짜라는 착각을 충분히 일으킬 만한 일명 페이크(Fake), 시쳇말로 짜가지만 프린트, 시트지, 페인팅 기법을 활용한 재치 있는 아이디어가 단연 돋보였다. 아, 잘만 응용하면 돈도 무쟈게 절약되겠다. 눈속임일 뿐이라 치부될 수도 있는 페이크를 역으로 응용, 발상의 전환을 통해 차별성과 새로운 가치를 이끌어낼 수 있음을 일깨워주는 듯 했다.


창에 드리워진 오렌지색 실 커튼은 집에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아이템이라고 생각해 그냥 흘려버렸는데 작은 공간에, 코지 코너에 활용하면 충분히 감각적이면서 포인트가 될 수 있겠다. 꽃 자수가 수놓아진 1인 체어는 가죽에 자수라.. 무쟈게 깜찍한 아이디어다. 침대 헤드에, 스툴에, 슬립 커버나 천갈이할 때 고려해 봐야겠다. 고풍스런 앤티크 화장대를 보니 괜히 앉아서 머리를 빗고 싶어졌다. 마치 그림책에서 튀어나온 듯한 동화적인 감성의 인테리어와 위트가 어우러져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내 느낌엔 아기자기하고 기분 좋게 유치한 것이 여성의 마음을 꿰뚫는 묘한 매력이 느껴지는 부티크 호텔이었다.


호텔 전반은 유러피안 감각에 홍콩스러운 분위기가 더해진 느낌이랄까. 다른 특급 호텔들이 자랑하는 멋진 전망을 기대할 수는 없었지만 화려한 유럽풍의 앤티크 가구, 오리엔탈 하면서 모던한 장식품 등 상반되는 오브제들이 한 곳에 어우러져 사이좋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호텔 로비는 물론 복도, 룸과 레스토랑, 곳곳에 톡톡 튀는 재치가 숨어 있고 초현실주의적인 디테일은 장식적인 인테리어와 함께 오히려 유머러스한 분위기를 뽐내고 있었다. 같이 조합하면 영 따로 놀 것 같은 서로 다른 성격의 아이템들이 의외로 기가 막히게 궁합이 잘 맞을 수 있음을 실감했다. 자칫하면 너무 안전하다 못해 고루할 수 있는 호텔 이미지에 약간의 위험 요소를 던져주어 맘껏 대담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듯 했다. 


집이라는 공간에서 오랫동안 질리지 않는 편안함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나 자신조차 지루함을 느낄 때가 많고, 간혹 새로운 시도를 간과할 때도 있는데 이 정도의 과감함을 보고 나면 다시 용기 낼 수 있겠다. 나는 머리에서 전구가 깜빡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솔직히 우리 엄마 말씀처럼 딱 내 집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만큼 내 맘에 쏙 드는 호텔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려 깊은 동생의 배려(?)로 나의 안전한 시각을 반성하게 하는 다채로운 컬러와 독특한 소품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나의 취향이 아닌데도 호텔 구석구석에 나의 잠재된 창의력(?)을 한껏 자극하는 요소들이 가득해서 어디를 가나 내 눈에는 하트 표시가 그려졌다.


입 안을 행복하게 해주는 갖가지 먹을거리와 최신 트렌드를 찾아 떠나던 홍콩 여행은 언젠가부터 패션을 넘어서 인테리어와 라이프스타일로 진화하고 있는 듯 했다. 엄마는 어릴 적 우리들처럼 아이같은 얼굴로 어디를 가도 방실방실 웃으시며 맛있다, 재밌다 하셨다. 딸들의 손을 붙잡고, 팔짱을 끼고, 딸들의 취향에 어깃장을 놓는 일도 없이.. 엄마와 딸의 여행에서는 마치 내가 엄마고, 엄마가 딸이 된 것 같았다. 


“우리 큰 딸은 애성 많은 네 외할머니를 닮아서 다행이다. 엄마가 함께 왔으면 참 좋아하셨을 텐데..” 가족에 대한 건 아름다운 기억들이 훨씬 많지만 자꾸 곱씹게 되는 건 짠한 기억들인 것 같다.


가끔씩 나도 모르게 힘든 날들을 투정하는 내게 엄마는

“그러게.. 누가 하래니.. 사서 고생이다.”

“아, 또 그 소리.. 안하면요? 엄마하고는 말이 안 통해.”


내가 안쓰럽게 느껴지셨기 때문일 텐데.. 딸이 그저 편하고 곱게 살기를 바라는 엄마의 속내를 모르는 것은 아닌데.. 좀 분주하고 피곤하긴 하지만 그렇게 사는 게 나는 재밌는데.. 곱게 사는 일이 오히려 얼마나 힘든 일인지.. 나도 한살한살 나이를 먹어가면서 어느 순간 엄마의 눈으로 세상이 보일 때가 있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여행의 진정한 가치는 무언가 깨달음이 있었느냐가 아닐까 싶다. 뭐랄까.. 웃고 즐기는 여정 가운데 내 안의 어느 것 하나를 건드릴 수 있는 그런 계기가 있는 여행이 좋았다. 당장은 느끼지 못해도 시간이 좀 지나 생각해보면 나에게 미세한 변화를 만들어 준 여행이 기억에 남았다. “진정한 여행이란 새로운 풍경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가지는 데 있다”고 했던 프랑스의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말처럼 엄마와의 여행은 엄마에게도, 동생에게도, 나에게도, 타인의 취향을 나누는 소중한 경험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마음을 열어 애정을 가지고 관심을 기울이니 서로의 시선과 마음이 만나는 교차점이 찾아왔다.


짧은 일정에 가지고 있는 에너지를 다 쏟아 붓고 돌아오는 밤, 비행기 안에서 한잠 달게 주무시고 기내식까지 깔끔하게 비우신 엄마가 말씀하셨다.


“니 아빠보다 딸들이랑 다니니까 훨씬 좋더라.”


엄마다운 매력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하면서 나와 동생은 서로 눈웃음만 교환했다. 이렇게 일년에 한 번 우리 세 모녀는 여행을 하면서 깊은 추억을 만들고 서로를 기쁘게 하고 있다.


IP *.40.22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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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석
2010.12.22 10:03:38 *.108.49.54
나도 집구경 엄청 좋아하는지라 재미있게 읽었어요.
페이크를 역으로 응용하는 식의 독창성, 내가 아주 좋아하는 방식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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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24 07:53:19 *.40.227.17

명석 선배님~

안녕하세여.. ^^

그쳐.. 발상이 참..
전 처음에.. 장난하나.. 했는데여.. ㅎ

가까이서 보면.. 무쟈게 섬세한 것이.. 공을 들인 흔적이 너무나 느껴져서.. 반성했자나여.. ㅎ
아이디어 충전 차원에서라도.. 고루한 생각 깨트리려면.. 마이 다녀야 할 거이 같아여..

오늘이.. 클스마스 이브네여..
송년회날.. 선배님의.. 구여운 빨간 쉐타가.. 생각나여.. ^^
재미난 이브.. 즐거운 성탄.. 보내세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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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옥
2010.12.24 08:13:46 *.10.44.47
선배님, 글치 않아도 선배님 글 기다리고 있었어요.
봄쯤에 좀 다채로운 컨셉을 가진 새집을 꾸며볼까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워낙 미감이 둔한지라 혼자서는 엄두가 안난다 싶을 때 떠오른 선배님의 얼굴!
조만간 연락드려도 될까요? 고객자격으로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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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30 08:35:10 *.40.227.17

미옥 님~ ^^

집을 꾸밀 계획이시라구여.. 
근데여.. 숍 겸 작업실 삼아 쓰고 있는 거라서.. 쪼그마해서..  
그다지.. 볼건 없을지도 몰라여..

그래두 괘한다면.. 놀러 오세여.. 
부담없이.. 편하게 와서.. 얘기 나눠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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