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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女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인간이 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와 죽음을 기다리는 자. 전자를 인간이라 하고, 후자는 뱀파이어라고 불린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죽음을 피해 달린다. 그들에게 죽음이란 만화영화 소재로 가끔 등장하는 그림자 떼기 게임이다. 골목길을 걷다가 페인트모션으로 그림자를 따돌리고 모퉁이를 돌아 내빼는 것이다. 그들은 세월의 그림자를 멋지게 따돌리는 상상을 하며 혼자 피식거리곤 한다. 빙신들. 지 애미의 자궁에서부터 생명과 죽음이 자웅동체로 함께 했음을 그들이 모를 리 없다. 그러나 아는 것과 각인하는 것은 다른 법. 앎이 행동이 되려면 DNA라는 필름에 빛을 쪼여야 한다. 빛은 학습이다. 반복하고 반복해서 자동 빵으로 연쇄반응이 일어나기 전에 인간의 ‘안다’를 믿어선 안 된다. 물론 단 한번의 경험으로 지워지지 않는 낙인이 찍히는 경우도 있다. 나의 이마를 보라. 주홍글씨처럼 선명하게 불멸(不滅)이라는 화인(火印)이 보이지 않는가. 자궁에서 태어난 인간들은 가시광선 영역 밖의 것들은 볼 수 없지만 뱀파이어들은 불멸의 냄새를 본다. 냄새를 본다고? 그렇게 말할 밖에. 그들의 주 감각기관은 후각이다. 후각은 보통의 인간들이 갖고 있는 오감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들은 색맹이다. 눈은 동족인지 아닌지를 구분하는 정도다. 흑백을 가리는 일은 인간들이 우위에 있을 지 모른다.
나는 뱀파이어다. 인간의 연령으로 치면 이백 살 가까이 살았다. 정확한 출생연도는 모르겠지만 순조의 장자(長子) 효명세자가 승하했을 때 저잣거리에 나가 국상을 구경했다. 세자의 죽음이 안쓰러워 멀리 남대문 밖까지 상여행렬을 따라갔던 기억이 난다. 스물을 갓 넘겨 불멸의 삶을 얻은 후로 안쓰러움은 부러움으로 바뀌었다. 끝이 있다는 건 아름다운 것이다. 상춘객들은 꽃이 피기 무섭게 바람에 날리는 벚꽃을 보며 인생의 무상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어제와 같은 오늘이 내일이 된다면 그들은 살아낼 수 있을까. 명절이면 으레 애매한 방송시간대를 점령하는 영구 시리즈 조차 참아내지 못하면서. 생명의 오묘함을 찬미하며 링클프리 화장품을 발라 대는 인간들을 나는 신뢰하지 않는다. 그런 부류의 피는 신선도가 떨어질 게 분명하다. 오늘은 나의 냉소를 여기까지만 하자. 원래 이 이야기를 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낮에 미술관을 다녀온 후 나의 인종 분류방식에 혼란을 겪고 있다. 인간, 뱀파이어 외에 내가 알지 못하는 호모 사피엔스 종족이 있는 게 아닐까.
담배가게 아저씨. 그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걸까. 두 손을 번쩍 든 채 대리석 조각에다 대고. 정신이상이라고 하기에 편의점에서 마주치는 그의 모습은 지극히 정상이었다.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 그에게서는 피비린내 대신 계피를 발효한 냄새가 났다. 헤모글로빈 수치로 따지면 그는 빈혈로 인해 쓰러졌어야 맞다. 낮은 헤모글로빈 수치에 옅은 복사꽃 향내를 풍기는 뱀파이어들과는 다른 피다. 그를 생각하느라 지하철 탈 생각을 못 하고 걷는 바람에 점심시간을 넘겨 사무실에 도착했다. 주위에서 모아지는 시선을 연출된 표정으로 가뿐하게 반사한 후 자리에 앉았다. “미스 리, 어제 맡긴 신용카드 전표는 처리했나?” 사무실에서 나는 방년 스물 두 살 우유빛깔 미스 리이다.
男
나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1세다. 나는 서른 셋의 나이에 종신통령으로 선출되었고 서른 다섯에 프랑스 제1제정 황제이자 이탈리아 왕에 올랐다. 스페인에서 동쪽의 프러시아, 오스트리아, 북해의 노르웨이가 나의 令에 무릎을 꿇었다. 러시아를 거쳐 극동을 바라보던 나의 비전은 아쉽게도 1821년 세인트헬레나에서 최후를 맞았다. 아들 로마왕이 마음에 걸려 눈을 감지 못했다. 나는 1970년 한국의 화순 운주사 근처에서 환생했다. 본디 운주사의 스님이었던 아버지는 우연히 절을 찾은 어머니와 눈이 맞아 환속한 후 주지스님의 배려로 寺畓을 부치는 농사꾼이 되었다. 아버지는 1980년 5월 광주에서 숨졌다. 어머니는 친할머니에 이어 과부가 되었다. 아들이 귀한 나의 가계에서 남자들은 대대로 명이 길지 못했다. 증조부는 만주에서, 할아버지는 6.25직전 여순에서 명을 달리 했다. 외아들인 아버지가 중이 되겠다고 했을 때 할머니는 충격으로 실신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본래 생각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는 시대의 곡절에 휘말려 요절한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생에 대한 의문을 차곡차곡 쌓아갔다. 그 물음들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초가지붕을 뚫고 방구들로 쏟아진 것이 出家였다. 어머니의 출현은 과거의 시간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의식의 방향을 일순 전환시켰다. 짐작하건대 어머니와의 만남을 계기로 아버지는 조상들의 세계로부터 빠져 나와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 그러나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반골의 피는 어찌하지 못했다.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집을 나간 아버지는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나는 본디 强骨이다. 강건한 체력과 뜨거운 피는 아버지의 유산이다. 중학교 때는 무쇠 주먹에 의지해 살았다. 타고난 머리는 있었는지 간신히 인문계 고교에 진학했다. 세계사 시간, 나폴레옹이란 이름 넉자가 졸음에 겨운 봄바람을 타고 귓가에 전해졌다. 그리곤 영영 전설이 되었다. 다비드 作 ‘알프스를 넘는 백마 탄 나폴레옹’을 보는 순간 잎사귀 하나가 가슴에 맺혔다. ‘백마가 아니라 노새였는데’ 머릿속에 수만 대군을 이끌고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의 이미지가 흐릿하게 떠올랐다. 호기심은 몰입이 되어 고교를 졸업할 무렵에는 나폴레옹이 별명 아닌 별명이 되었다. 기억의 해방은 돌로부터 왔다. 전경이 던진 짱돌에 머리를 맞고 삼일 만에 의식을 되찾았다. 의식이 돌아온 나는 더 이상 20세기의 내가 아니었다. 19세기가 20세기를 잠식한 것이다. 사람들은 나폴레옹 1세를 자처하는 나를 외면했다. 서른 무렵 운명의 부름을 따라 브뤼셀을 찾았다. 공기 흡입구를 타고 유럽 의회에 입장한 나는 유럽연합의 창시자로서 제국으로의 회귀를 명하였다. 그 사건으로 인해 나는 정신병원에서 10년을 보냈다. 이제는 어머니의 전 재산과 맞바꾼 편의점에 내 작은 육신을 묻기로 했다. 현실로 다가오지 않는 인생을 현실인양 살아내기로 했다. 나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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