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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4월 18일 05시 11분 등록

작은 여자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초등학교 입학 당시에 15킬로그램 밖에 나가지 않을 만큼 작고 가늘었다. 아토피가 있는 피부는 항상 아이를 아프게 했다.

아이가 좋아하던 것은 책읽기였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초입 부분이 아이가 가장 좋아하던 자리였다. 그 계단의 두 번째에서 세 번째 계단 그 곳에서 아이는 책을 읽는 것을 좋아했다. 적당히 어둡고 적당히 밝은 계단의 그 부분에는 작은 창이 하나 있었다. 그 창으로는 집 뒤에 있는 낮은 동산이 보이곤 했다. 아이는 그 자리에서 소리내어 책을 읽기를 좋아했다. 누군가가 듣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아이는 그저 소리 내어 책을 읽는 것을 매우 좋아했다. 따옴표 안의 글씨를 읽다가 보면 아이는 마치 자신이 책안에 존재하는 듯한 느낌을 받곤 했다. 그 느낌은 아이가 매우 좋아하던 것이었다. 집에 손님이 오는 경우가 있어도 아이는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그 행위는 아이에게 즐거운 일이었고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쓸만한 어떤 이유도 찾지 못했다. 당시 아이가 즐겨 읽던 책은 대부분이 어린이들을 위한 소설책이었지만 만화 삼국지도 있었고 안나 파블로바의 이야기도 있었다.

아이는 하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도 많다고 생각했다. 아이는 글을 빨리 읽기 시작했고 셈이 빨랐다. 작지만 달리기도 제법 잘했다. 간호사, 선생님, 화가. 항상 변하긴 했지만 아이에겐 꿈이 있었다.

어느 날 아이가 꾸던 작은 꿈들이 깨어졌다. 하고 싶은 것들을 많이 준비해 두었었는데 그 것이 깨어졌다. 아이는 3년 간 해오던 국악부를 나와야 했다. 제 손으로 파트장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고 국악 중악교에 진학하고 싶다는 꿈을 깨야 했다. 아이는 방송부를 나와야 했다. 아침 명상의 시간을 진행하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5학년 이던 아이는 다른 사람들이 진행하는 것만을 지켜본 채 다른 아이에게 그 자리를 양보해야 했다. 졸업식에 읽고 싶어 했던 송사의 꿈도 건너갔다.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아이는 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아이는 더 이상 소리내어 책을 읽지 않았다.

지난 3월. 헤세의 데미안을 소리 내어 읽었다.

도대체 몇 년 만인걸까? 지금이 서른 살이니 아마 못해도 15년은 지났겠지. 정말 오랜만이다. 책을 소리내어 읽는 것은. 어렸을 적에는 이걸 꽤나 좋아했었는데. 그만둔건 언제쯤이었더라? 무언가 비밀이 생기기 시작하면서 였던가? 이야, 정말 오랜만이구나.

새벽시간이었고, 정말 오랜만의 일이었다. 내 목소리는 예전만큼 거침없지 못했다. 낭랑하지는 못했다. 잠에서 깨어난지 얼마되지 않아 많이 잠겨 있었고 저쪽 방에서 자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니 목소리가 점점 작아 지곤했다. 그냥 읽으면 잠이 오지 않을까 싶어서 한 번 해본 일이었다. 처음에는 조금 바보같이 느껴지기 시작하더니 점차 익숙한 느낌이 나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시간이 달려가고 있었다. 책장 역시 날아가고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의 겨울 방학에 나는 전학을 갔다. 그럼으로 인해서 내가 나름대로 노력해서 얻은 것들을 많이 잃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확실한 꿈은 없었지만 많은 것을 꿈꾸며 즐겁게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것들이 사라졌다. 무대에서 춤을 추는데 음악이 끊기고 조명이 꺼진 기분이었다. 나를 비추던 스포트라이트가 다른 곳을 비추기 시작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유지하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나를 더 무력하게 만들었다. 나는 어렸고 당연히 부모를 따라서 이사를 가야만 했다. 나는 그 상태로 한참을 웅크리고 있었다.

나는 아이에게 손을 내 밀어 본다. 아이가 손을 잡는다. 아이를 꼭 안아 준다.

혼자서 이런 곳에서 얼마나 외롭고 쓸쓸했을까. 그래, 네 잘못은 아닌데. 좀 더 일찍 찾아와서 너를 안아줬어야 했는데. 어려서 서툴렀을 뿐이고,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몰랐을 뿐인데 여기서 꽁꽁 숨어있어야 했구나. 이제 괜찮아. 나는 이제 방법을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어. 이제 이 구석에서 웅크리고 있지 않아도 돼. 이제 더 이상 어린아이인 채로 여기서 울고 있지 않아도 돼.

전학을 오고 나서 나는 쉬이 적응하지 못했다. 내가 알던 세상 밖으로 나온 기분이었다. 예전에는 사원아파트 단지에 살아서 모든 것이 거의 비슷비슷했는데 여긴 모든 것이 달랐다. 불량식품도 오락실도, 학교가는 골목길도 낯선 풍경들이 천지였다. 더군다나 나는 나를 꾸며주던 꾸밈말을 모두 내려 놓은 채로 서 있어야 했다. 그 꾸밈말들은 나였다. 나는 마치 벌거벗은 기분이었다. 무엇이든 찾아야 했다. 새로운 꾸밈말을 찾아서 나에게 붙여야 했다. 나는 나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화려한 모습도 좋았다. 멋진 남자친구도 좋았다. 무언가를 나의 옆에 가져다 놓아야 했다.

꾸밈말들이 나였다. 그것이 떠난 나는 마치 내가 아닌 것 같은 이질감이 느껴졌다. 그것들이 떠난 나는 참으로 마음에 들지 않는 존재였다. 별것 아닌 존재처럼 보였다. 오랜 시간을 그렇게 살아왔던 것이다. 내가 가진 것들이 마치 나인양 착각하고 살았던 것이다. 그래서 내가 가진 것들이 떠나고 나자 나는 참 볼품없는 존재처럼 느껴진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 나를 표현하는 것이 아닌데. 그 꾸밈말들은 항상 변할 수 있는데. 나는 그 가변적인 것들에 나를 이입시켜왔다. 그래서 나는 항상 변했고, 그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순간에 나는 항상 힘들어 했다. 마치 바퀴의 테를 잡고 있는 것과 같았다. 나는 오르락 내리락 했고 그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라며.

하나씩 하나씩 나는 꾸밈말들을 벗는다. 내가 욕심껏 붙여 놓은 그래서 덕지덕지 붙어 있는 그 꾸밈말들을 한꺼풀 한꺼풀 벗어나간다. 나는 이제 그 꾸밈말들이 나를 꾸며줄 수 없음을 알고 있다.

아이야, 걱정하지마. 다시 네가 구석에 웅크리고 있어야 하는 일은 없을 거야. 너는 이제 어여쁘게 자라나도 된단다. 나는 아마 다시 소리 내어 책을 읽을 수 있을 거야.

아이의 성장을 바라며.

IP *.23.188.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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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경
2011.04.18 05:47:58 *.35.19.58
예전에 좋아하던 일을 다시 시작했다는 것은 루미가 다시 그 마음을 찾아가고 있다는 증거는 아닐까?
국악부를 나오고, 방송반을 그만 두어도 네 안에 그것들은 고스란히 남아 있을거야.
이제 무거운 옷들은 벗어 던지고 훨훨 날아보렴.
루미의 낭낭한 책 읽는 소리를 기대하고 있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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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미
2011.04.19 04:36:33 *.23.188.173
오랫만에 가야금을 봐서 생각이 났던건가봐요
아직도 예전의 감각이 생각난다는 게 신기하기도 했고
언니 말처럼 날아보아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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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
2011.04.18 06:26:40 *.246.71.33
끝까지 읽는데 왠지 가슴이 찡하네..
이미 웅크리고 있던 몸은 한번 쫙 펴진 것 같아염.
같이 가면 어린 시절처럼 손잡고 마냥 신나게 방방 뛰면서 걸을 수 있지 않을까??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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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미
2011.04.19 04:37:57 *.23.188.173
쫙 폈는데.....
어라? 조금 짧다.............ㅋㅋㅋ
나는 참 그렇게 걷고 싶었거든
뮤지컬의 여주인공처럼 가볍고 경쾌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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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늑대
2011.04.18 09:20:53 *.219.84.74
잃은 것을 애석해하지 말자.
칭얼대는 작은 어깨의 그 아이를 감싸 주고 싶다.
기왕에 가진 것부터 소중하게 보듬자. 

너의 낭랑한 목소리가 구성지게 들린다.
너는 너를 통해서 충분히 아름답다. 
그리고 같이 놀수 있으니 이제 외롭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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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미
2011.04.19 04:41:12 *.23.188.173
가지지 않는 것을 얼마나 원해 왔던지 생각했어요.
정말 원해서라기보다는 잃어버려서 그냥 원했던 것 같아요
마치 가지 않은 길처럼 그냥 좋아보였던 거겠죠.
이제 조금씩 내가 가는 길의 소소한 아름다움이 보이기 시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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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희향
2011.04.18 09:39:02 *.98.16.15
루미야.. 비가 온다.. 대지가 촉촉히 젖는 것 같아..
비가 오면 비내리는 공기의 운치에 젖고
비가 걷혀 햇살이 내리쬐면 그 때의 밝음을 누리고..
비개인 하늘의 밝음이 더욱 밝을 수 있는 건, 아마 비가 와서이겠지..
깊은 죽음을 맞았으니, 이제부터 한걸음 한걸음씩 지상 세계로 천천히 너만의 영웅여정을 만들어갈것을 믿고 있다. 보이듯, 보이지 않게 그 곁 함께할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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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미
2011.04.19 05:02:07 *.23.188.173
그럼요~ 언니는 항상 제 곁에 있는 걸요
지중해의 맑은 하늘은 겨울을 지나고 맞이해서 더 예쁜 거겠죠.
그런 하늘을 맞이하도록 노력할께요
계속 함께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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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경수
2011.04.18 12:38:23 *.111.51.110
너를 꾸며주던 것들이 떠난 자리에
남아있는 참된 자신.
그것을 인정해주기 시작했구나.
스스로에게 '쓰는 편지글이 잔잔하게 공감을 일으킨다.
웅크렸던 아이에게 손을 내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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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미
2011.04.19 05:06:10 *.23.188.173
가장 먼저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아마 제일 궁금했나봐~ㅋㅋㅋ
다들 손을 뻗어줘서 이제 일어나기만 하면 되나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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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18 18:13:27 *.124.233.1
자신이 오롯이 담겨있는 글만큼 아름다운 글은 없는 것 같아
루미는 시간 여행을 할 수 있는 마법을 가지고 있구나
과거로 달려가 외로워 하는 아이를 감싸주고 용기를 불어 넣고..
아이는 이제 용기를 내어 다시 재잘재잘 책을 읽을 거야.
시간여행을 할 수 있는 마법사 루미
네 미래는 어떤 모습이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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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미
2011.04.19 05:10:46 *.23.188.173
오라버니가 아름답다 해주니 부끄럽~
발그레 발그레~
칭찬을 들으니 힘이 솟아요
칭찬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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