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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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두 살 분례
“당신은 죽었어요. 해운산 정상이 고별 무대였어요. 의도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당신이 최후를 준비하고 있음을 알았어요. 딸꾹. 당신의 눈에 핀 열꽃 뒤에서 허무를 봤죠. 그것은 감정의 퇴적층에 빠지지 않고 포함된 성분인 듯 했어요. 당신은 최후의 일격을 가할 먹이를 발견하곤 허무를 차곡차곡 장전해온 거에요. 불꽃놀이는 멋졌어요. 신파극처럼 눈물샘을 자극하거나, 하드보일드 소설처럼 건조한 문체 뒤에 나약한 자신을 숨기지 않았죠. 땀과 피에 전 육신이 사냥개들에 떠밀려 하늘로 날아올랐어요. 마지막치곤 괜찮은 몰락이었어요. 하지만 그대로 끝났다면 많이 슬펐을 거에요. 난 대책 없는 비장미를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요. 영화와 삶의 차이점이 뭔지 알아요? 영화는 엔딩 타이틀이 오르며 클라이맥스에서 끝나지만 삶은 그 후에도 지난한 이야기가 남아 있다는 거죠. 딸꾹. 이 백 년을 살아 보니 그래요. 당신이 그린 탈출로를 따라 하산하다가 ‘이 게 뱀파이어다운 삶인가?’라는 의문이 들었어요. 까짓 수모 좀 당했다고 희생양을 두고 돌아선 게 영 마뜩잖았어요. 그래서 눈을 감고 몸이 이끄는 대로 내버려둬 봤어요. 긴긴 세월 나를 지탱한 건, ‘내 몸이 이끄는 대로’ 이었거든요. 눈을 떠보니 당신의 피에 개들의 침 냄새가 방향타 역할을 하고 있었어요. 정상에 도달했을 때 개 한 마리가 당신에게 달려들고 있었어요. 나도 달려 들었죠. 생각할 겨를도 없이. 추락하는 당신을 안고 한참을 떨어졌어요. 절벽 중간에 튀어나온 작은 돌부리들이 디딤대 역할을 하지 않았더라면 우리 둘은 갈기갈기 찢기는 신세가 됐을 거에요. 딸꾹. 참 성가시네요. 딸꾹질. 한동안 피 맛을 못 봤더니 뱃속에서 헤모글로빈을 달라고 난립니다. 아까부터 당신 손의 피딱지에서 눈을 뗄 수가 없어요. 나도 모르게 입이 벌어지며 목젖에서 그르렁그르렁 피를 갈구하는 소리가 납니다. 고백하자면 배고픔을 못 이겨 딱 한번 피딱지를 핥기도 했어요. 내 속에서는 두 가지 욕망이 사납게 싸우고 있어요. 당신의 눈에 비친 나를 보고 싶다는 기대와 당신이 이 대로 잠들어 죄책감 없이 배를 채우게 됐으면 하는 바람. 그러니 나를 오래 기다리게 하지 마세요. 누구에게나 인내에는 한계가 있으니까요. 딸꾹.”
데드 마스크 같네요. 당신 얼굴이. 힘든 하루를 보냈는데 악몽이라도 꿔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마 나도 그런 표정일 테죠. 오래 전 그녀는 잠버릇이 고약한 아이였어요. 창문 쪽에 머리를 두고 누웠는데 아침에 깨 보면 창호문 아래서 새우잠을 자고 있곤 했죠. 그래도 개운하게 일어났어요. 뱀파이어가 된 후에는 한 평이 안 되는 관에서조차 안식을 찾기가 어려워요.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스물 둘이에요. 이름은 그때그때 바뀌었지만. 사람들은 늙어가는데 난 여전히 풋풋했어요. 사랑하고 아파하고 위로하고 위로 받았지만, 생체시계가 다름을 그들이 알아채기 전에 떠나야 했죠. 그래서 관계를 포기하는 대신 젊음을 얻었어요. ‘나이를 거꾸로 먹는 비결’에 대해 주변에서 얘기를 속닥거리기 시작하면 미련 없이 가방을 쌌어요. 프랑스에서 영국, 영국에서 미국으로. 태국에서 중국을 거쳐 고국 땅을 밟은 게 이십 년 전이죠, 아마. 미련때문에 잠시 주저했는데 떠남이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돼 버렸네요. 딸꾹.
힘듭니다. 당신을 범하고 싶어요. 흡혈의 본능을 잠시라도 잊기 위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가장 슬픈 장면을 떠올려야겠어요. 친구 따라 간 집회가 문제가 돼 하루 아침에 조선땅을 떠나 상해로 탈출하는 신세가 됐어요. 거기서도 오래 머물지 못하고 아편전쟁 중에 중국을 떠났죠. 조선땅에서 나를 이끈 피에르 신부랑요. 프랑스는 아주 멀리 있는 나라였습니다. 3개월이 넘는 항해에 배 안에 전염병이 돌았죠. 나도 예외는 아니었구요. 피똥을 싸며 생사의 기로에 섰을 때 피에르에게(편하게 그렇게 부르라더군요) 죽어가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살고 싶어요. 엄니가 보고 싶어요.” 안수 기도를 하던 그의 손이 떨리는가 싶더니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이더군요. 복화술을 하는지 입술은 그대로인데 그는 묻고 있었어요. “불멸의 삶을 살고 싶니? 허나 고통이 따를 것이다.” 그때는 이것저것 따질 계제가 아니었어요. 무조건 살려 달라고 했죠. 그의 송곳니가 거죽만 남은 목을 파고 들어오는데 생각보다 아프지 않았어요. 그냥 따끔한 느낌. 처음에는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나중엔 게걸스럽게 빨아댔어요. 하늘빛이 노래지는데 이상하게 윗니가 간질간질하더라구요. 그가 목을 내밀길래 냅다 물었죠. 그렇게 새로운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가 나의 아버지가 된 거죠. 아버지는 사형집전신부였어요. 뱀파이어에게 연민이 어울린다고 생각하세요? 사형집전신부는 그가 찾아낸 최고의 직업이었어요. 일용할 양식과 삶을 지탱하는 연민을 모두 제공해 주었죠. 그는 본능을 이기려 신부가 되었고, 가여운 영혼에게 축복을 빌어주고 사형수의 피를 얻었어요. 모순 아니냐고요. 죽고 사는 문제인데 그게 그렇게 모순인가요. 하지만 그는 제법 양심적인 뱀파이어였나 봐요. 그가 조선땅을 밟은 건 순교하기 위해서였대요. 끝이 보이지 않는 저주받은 운명을 신에게 바치기 위해. 그는 결국 성공하지 못했어요. 소멸의 두려움에 무릎을 꿇은 거죠. 그가 나에게 말한 고통은 그거였어요. 살아 있음의 경험을 유지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대가. 깨어있어야 한다는 게 뭔지 아세요? 피복이 벗겨진 전선이 물에 닿는 거에요. 힘겨운 스파크가 일어나죠. 굳은살이 돋아나 전선을 싸매면 또다시 피복을 벗겨내는 끔찍한 작업이에요. 맨 얼굴로 마음 속의 토네이도를 들여다보는 것. 선택의 여지는 없어요. 부활한 육체가 권태에 찌들어 말라버린 정신을 주워 담지 않으려면. 파리 사교계에서 난 *‘마드모아젤 오’로 통했어요. 아버지의 비겁함을 조롱하며 방종을 즐겼죠. 오랜 시간을 그렇게 허비하다가 그를 떠나 몸이 이끄는 대로 떠돌았어요. 배반과 고통의 나날이었어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살다가 뒤통수를 맞는 일이 많았죠. 믿음이라는 게 실은 스물 둘 분례가 본 작은 세상에 불과하다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어요. 고통이 쌓여가면서 ‘몸이 이끄는 대로’ 가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바뀌었어요. 뱀파이어가 할 수 있는 건 인간보다 많지 않아요. 일용할 양식에 저렴한 소의 피를 섞은 뱀파이어를 보면 인간과 별반 다를 것도 없고. 딸꾹.
…그래서 당신이 좋아요. 당신에게서 그 옛날 피에르의 따뜻함이 느껴져요. 사는 게 버거웠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리에 손을 얹고 기도하던 그를 기억하며 버텼어요.”
“사랑했네요. 피에르도 당신도.” 말하려던 톤보다 나지막하게 말문이 열렸다.
“정신이 들어요? 언제 깬 거에요?” 화들짝 놀란 그녀가 물었다.
“어머니 무릎을 베고 옛날이야기를 듣고 있었어요. 한참을 듣다가 고개를 돌리니 당신이더라구요. 헤헤.” 두 뺨을 흘러내린 눈물이 목소리의 발원지를 찾아 고개를 드는 순간 인중에서 합쳐졌다. 어둠이 깔려 있기를 다행이었다.
* la Mademoiselle orientale(동양여인)의 준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