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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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땡땡이 - 둘만의 소중한 일상만들기 (1)
나는 땡땡이 선수다. 고등학교 때 그 지겹던 야자와 보충수업도 꼬박꼬박 참여했던 내가 땡땡이 선수가 된 것은 오로지 그의 꼬임 탓이다. 덧붙여 말하면 우리 이쁜이들 덕택이다. 사전에서는 ‘땡땡이’를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눈을 피하여 게으름을 피우는 짓’이라고 나와 있다. 나의 정의는 ‘있어야 할 곳이라고 마땅히 기대되는 곳에서 살짝 일탈하여 재충전을 하는 것, 그리고 얼른 제자리로 복귀하는 것’이다.
토요일도 4시까지 근무했던 첫 회사에서는 보건휴가조차 사용하는 것이 죄악시되었고 비교적 휴가사용이 자유로웠던 신랑이 한 달에 한번 엄마의 계모임 날에 휴가를 내곤했다. 그러다보니 나 자신을 위해 하루는커녕, 반나절을 쉰다는 것도 참 힘들었다. 가끔은 집, 회사, 집, 회사로 뺑뺑 도는 일상의 탈출이 정말 절실할 때가 있었다. 아기도 좋고, 일도 좋지만 다 놓고 도망가고 싶은 순간 말이다.
며칠째 그런 느낌에 시달리던 날이었다. 퇴근시간이 가까워진 오후, 갑자기 문자 한 통이 날아왔다. 급한 일이 생겼으니 무조건 덮고 나오라는 것이었다. 심각한 일이 생긴 것 같았다. 말없는 그의 손길에 끌려 따라 들어간 곳은 곱창구이집이었다. 그날 난 쉼표가 간절히 필요했다는 것을 알았다. 지글지글 곱을 내뿜으며 익어가는 곱창을 잘근잘근 씹으며 내 마음은 확 풀렸다. 그 후 난 조용히 땡땡이 예찬론자가 되었다. 가끔은 회사에, 가끔은 집에 땡땡이를 쳤다. 처음에는 종일 아이를 봐주시는 친정엄마에게 미안해서, 또 회사에 눈치가 보여서 망설였지만 차츰 완전히 방전되기 전 스스로 알아서 충전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점점 간도 커졌다. 뭐든지 한 번 하기가 어렵지 점차 이력이 붙는 법이다. 내 마음과 몸의 에너지가 점점 소진되어가는 것을 느끼면 적당한 시점을 포착하여 과감하게 저질렀다. 종종 그와 함께, 가끔은 혼자였다. 시장조사를 그의 회사 근처로 일정을 짜서 얻어먹는 맛있는 점심 한 끼, 커피 한 잔, 6시에 시작하는 영화 한 편, 야근을 핑계 삼은 저녁 데이트, 집 근처에서 마시는 시원한 생맥주 한 잔, 따끈한 사케 한 잔, 그의 회사로 돌아서 함께 퇴근하기 등등. 가벼운 쉼표는 지친 일상의 비타민이요, 목마른 여름의 생수 한 모금이었다. 비타민으로 낫지 않을 지경이 되면 아예 그와 함께 장거리 시장조사 겸 데이트를 나가기도 했다. 그도 싫을 때는 나 혼자 탈출을 했다. 혼자 하는 땡땡이일 때 우리는 서로 철저한 지원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퇴근하며 보내는 문자 한 통 - ‘나 오늘 저녁 땡땡이야’ -으로 우리는 서로의 빡빡한 생활에 일탈을 허가했다. 말도 안 되는 회의를 하루 종일 하느라 입에서 단내가 나고 머리가 터질듯 한 저녁 집 근처 만화카페로 퇴근한 적이 있었다. 만화가게에서 끓여주는 계란라면을 먹으며 한참을 낄낄대다 깜깜한 밤에 집으로 오는 발걸음은 날아갈 듯 가벼웠다. 그 후 농구장에 가서 마음껏 소리 지르고 돌아오는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었고, 바쁘면 바쁠수록 운동을 꼭 해야 하는 신랑이 하나도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연애시절의 가슴 뛰는 경험만이 아니라, 일상의 고단함도 함께 헤쳐 나갈 우리의 방식을 발견한 것이다.
처녀총각시절 서로가 없으면 죽고 못 살 뜨거운 연애를 한 부부일수록 이혼율이 더 높다는 이야기가 있다. 사랑을 시작하면서 경험한 설레임과 미묘한 감정의 교류들, 상대의 마음을 확신하지 못해 밤을 지새우던 안타까움과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던 순간의 하늘을 날 것 같던 환희, 함께 하던 각종 데이트의 즐거움, 온갖 유치한 짓을 다 하며 연애하던 감정의 공유들... 아름다웠던 이 모든 것들이 결혼 후에 오히려 장애물이 되기도 한다. 너무 오래된 연인들처럼 신선함이 사그러들고, ‘일상’이라는 막강한 괴물이 그 자리를 슬금슬금 차지하는 것이다. 후다닥 아침밥을 해 먹고, 정신없이 출근하고, 지루하고 때로는 미래가 암담해 보이는 일에 시달리고, 피곤에 지친 몸으로 퇴근하고, 또다시 후다닥 저녁밥을 먹고, 대충 치우고 잠이 드는 일상에 매몰된다. 설상가상 ‘아이’라는 폭탄이 떨어지면 찬란했던 그 시절은 완전히 끝나버린다. 연애의 기억은 사랑과 열정에 대한 기대치만 높여놓은 채 화로의 불씨처럼 안으로 숨어든다. 찬란했던 잠깐의 공유의 기억은 사라지고 근 삼십여 년 동안 각자를 지배했던 서로 다른 일상의 패턴들이 생활을 지배한다. 일상의 늪에서 부대끼고 서로 부딪치며 뜨거웠던 두 사람은 서로에게 ‘소’와 ‘닭’이 되어가는 것이다. 오히려 소개로 만나 몇 번의 데이트 후 결혼한 커플들이 더 신선할 수 있다. 뜨거운 애정에 대한 기대는 상대적으로 낮고 함께 누린 정서공유의 경험이 적으니 결혼 후에 알게 되고 함께 겪는 모든 것이 새롭고 조심스러운 것이다.
화로 안에 숨어있는 불씨를 찾아내는 길, 그리고 계속해서 따끈한 온기를 유지하는 길은 하나밖에 없다. 완전히 불씨가 죽어버리기 전에 끊임없이 화로를 뒤적이는 것, 수시로 재를 토닥이고 공기를 공급해주는 것이다. 우리를 둘러싼 일상이 변했기에, 우리의 사랑도 변한다. 상대적으로 밋밋해진 일상에 새로운 기름을 덧칠하며 ‘사랑’과 ‘행복’도 더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표현하고 공유해야 한다.
행복은 크기가 아니라 횟수라고 한다. 사랑도 그렇다. 일 년에 한 번 결혼기념일에 멋진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꽃을 선물 받는 것보다 저녁식사 후 잠깐의 산책 같은 일상이 쌓일 때 더 큰 만족을 느낄 수 있다. 벼르고 벼른 일요일 밀리는 차들에 시달리며 먼 곳에 다녀오는 것보다 함께 재활용품을 버리러 나갔다가 빈손을 마주잡고 어슬렁어슬렁 돌아오는 길에 나누는 소소한 대화가 더 달콤하고 정겨운 법이다. 억지로 시간과 돈을 내어 대단한 무엇을 하지 않아도 좋다. 그저 단둘이 ‘데이트’를 하는 것이다. 함께 있고 싶다는 생각만으로 우리가 처음 손을 잡고 걸었던 한참 전 그 봄날처럼. 그리고 그 때처럼 수시로 그의 눈을 바라보고 그의 맘을 만지고 서로에게 다가가는 것이다. 가볍게 스치는 봄바람처럼.

아마 오빠도 그럴걸요. 오빠의 예민한 감수성은 울 신랑에게선 절대 찾을 수 없는 부분ㅎㅎ
예전엔 저도 이해를 못했는데 요즘은 레이더가 맞춰진 부분이 다르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요.
나랑 레이더가 맞춰진 부분은 완전 센스쟁이,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는 부분은 완전 절벽~~
그의 절벽만 바라보면 절대 나올 수 없는 책이죠
결국 이 책은 내가 그의 절벽과, 또 절벽와 어울어진 절경을 바라볼 수 있는, 그래서 그 자체를 멋지다 감상할 수 있는 시야를 갖게 되었다는 자화자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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