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영미
- 조회 수 8833
- 댓글 수 146
- 추천 수 0
1. 제목 : 행복한 100일의 새벽 데이트
2. 새벽기상 시간 및 새벽활동 시간 : 5시 ~ 7시
새벽활동 : 새벽 공기를 들이 마신 후 하루 한권의 시집을 읽고 느낀 점을 적는다
3.나의 전체적인 목표 : 100권의 시집을 읽고 내가 쓰고 싶은 글의 주제를 잡는다
4. 중간목표
- 매주 읽을 7권의 시집을 도서관대여와 구입을 통해 선정해서 일주일 단위로 목록을 만들어 둔다
- 단군 일지와 블로그를 통해 느낀 점을 기록한다
- 읽지 못한 시집은 휴일을 통해 그 주 안으로 읽는다
5. 목표달성을 위해 직면할 난관과 극복방법
- 남편의 취침시간이 새벽 1, 2시라 같이 깨어있게 되는 경우가 많다. 중간에 깰 것을 대비하고 가능하면 10시경 취침해서 자는 시간을 최대한으로 확보한다.
- 낮시간에 업무에 대한 집중도가 떨어질 것을 대비 점심시간에 30분 정도 잠을 잔다.
- 재미없는 시집도 일단 정한 것은 읽고 본다. 그리고 지루했다고 적는다. 왜 지루했는지 생각해본다
- 읽고 싶은 다른 책이 있으면 우선 시집을 읽고 나서 읽는다
6. 목표를 달성했을 때 나에게 일어날 긍정적 변화
- 새벽 시 읽기를 통해 많은 시인들의 시세계를 이해한다
- 순수한 새벽 시간, 시를 통한 만남을 통해 매일 스스로 선택하는 삶을 열어 나간다
- 좋아하는 시인의 시세계를 파고 든다
- 쓰고 싶은 글의 주제가 확실해진다
7.목표를 달성했을 때 나에게 주는 보상
- 가족들과 제주도 2박 3일 여행을 간다

유홍준 시인은 산판일, 행상 등 온갖 일을 거쳐 제지공장에서 일하다 구정 조정당해 현재 정신병원에서 보호사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두번째 시집인 '나는, 웃는다'의 시들은 제지공장 시절 나온 듯한 시가 많다.
신산한 시인의 삶에 대해 들은 바가 있어서 이 시인의 시의 소재와 시가 나오는 시점이 특히 궁금했다.
시집 맨 처음에 소개된 '오월'은 '벙어리가 어린 딸에게 종달새를 먹인다'는 파격으로 시작한다. 이 후에도 나오는 시인의 현실 인식이 무척 괴롭게 다가왔다. 시의 소재가 된 일상의 사물과 사람, 일화, 그리고 추상은 '썩어들어가는 한쪽 뺨' 혹은 '쪼아먹히고 파먹힌 나', '열리지 않는 뚜껑, 자물통인 흉터'로 인식되는 괴로운 삶에 기반해 있다. '문 열어주는 사람'이라는 시에서 시인은 자동차 문이 잠겨 문 열어주는 사람을 부른 경험을 통해 '몇 편의 시로 갇힌 영혼의 문을 열어 주었나?'하고 물어본다.
尾行
인간의 길은 모두 바다로 가서 빠져 죽는다, 라고 쓴 엽서를 전해주고 우체부가 오후의 오솔길로 사라진다
오솔길이 하늘을 향해 기어오른다 아직 어린 구렁이 새끼 한 마리 제 아름다운 몸을 오솔길처럼 구부렸다 폈다 황천행,
수련 중이다
美行이다
꿈틀거리는 모든 황천행 인간의 오솔길 尾行이 하늘을 향한 수련 중, 美行이 되는 드문 아름다움이 느껴지는 시다.
마지막 시인의 말 또한 의미심장하다.
오동나무 밑을 지나가는데 아이 하나가 다가온다.
동그랗게 말아쥔 아이의 손아귀에서
매미 울음소리가 들린다.
얘야, 그 손
풀어
매미 놓아주어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 평생 우는 손으로 살아야 한단다.
자신과 독자들 모두에게 하는 말 같다.
아, 백일의 첫날. 시인 유홍준과 함께 한 첫 데이트를 마친다.

오늘 데이트 한 시인과 시집은 최영철 시인의 '찔러본다'. 최영철 시인은 1956년 경남 창녕 출신으로 이 시집은 시인의 아홉번째 시집이자 문학과 지성 시인선 380, 8월 26일 출간된 최신판이다.
시인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별로 힌트가 없다. 다만, 개고기를 먹고, 그러면서도 개를 가여이 여기며, 시장과 슈퍼와 이웃집 구멍 가게에 자주 가며, 삶을 달아나기 힘든 감옥생활이라고 생각하고, 죽음을 해방이라고 여기며, 재래시장과 공사판과 자연과 나이듬, 삶의 비루함 등 눈닿고 마음 닿는 많은 곳에서 시의 소재를 얻고 있다. 시인의 세상 인식은 어떤 삶의 소재이든지 자신만의 색깔로 물들여 버린다.
50대 중반의 가장으로 이 세상에 대한 인식이 아름다울 수 만은 없는게 당연하지. 시를 읽으면서 불편하고 괴로운 느낌이 들곤 했다. 시와 철학은 '독자의 친숙한 내면을 와해시켜 삶을 낯설게 만드는 것'이라는데 불쑥 끼어드는 낯섬이라기보다는 삶 자체에 대한 시인의 비관적인 시선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그럼에도 시의 소재가 된 일상과 자연, 사람들에 대한 따스한 시선이 강하게 살아있어 시인이 계속 시를 쓰고, 삶의 아름다움을 찾도록 하는 힘이 되고 있다. 시집의 제목으로 쓰인 '찔러본다'는 어쩌면 시인이 쓰고 싶고, 추구하고 싶은 시세계를 대표한다고 생각된다. 암울한 현실 인식을 떨치게 만드는 의미의 세계로 진입시키는 시.
찔러본다
햇살 꽂힌다
잠든 척 엎드린 강아지 머리에
퍼붓는 화살
깼나 안 깼나
쿡쿡 찔러본다
비 온다
저기 산비탈
잔돌 무성한 다랑이논
죽었나 살았나
쿡쿡 찔러본다
바람 분다
이제 다 영글었다고
앞다퉈 꼭지에 매달린 것들
익었나 안 익었나
쿡쿡 찔러본다

오늘 읽은 시집은 장석남 시인의 '뺨에 서쪽을 빛내다'. 알쏭달쏭한 제목이다. 장석남 시인은 65년 인천생으로 현재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중이라고 한다. 22살 때 등단하여 첫 시집을 냈다고 하니 20년 이상을 시인으로 사신 분이다. 성북동 집에서 정원을 가꾸고 있어서인지 정원에 들여놓은 바위, 꽃나무가 시의 소재로 자주 등장한다.
시집 제목과 마찬가지로 개별 시 제목과 시 속에 등장한 소재들, 상황들이 일관된 하나 내지 두개의 단어로 추려내기 힘든 모호함들이 있었다. 시 하나 안에 여러 시간대가 공존하는 듯 했고 축약된 상징들, 상념과 추상들, 실제 상황들이 섞여있어 시 하나를 읽고나서 선뜻 무엇을 읊은 것인지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시 읽기가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 바로 이런 경우들인가 보다. 시 하나에 여러 시간과 추상과 의미들이 중첩되어 있어 금방 파악이 되지 않는다. 이럴 때는 그냥 느낌으로 시를 읽으라고 하던데 꾸벅 꾸벅 졸면서 읽은건지 만건지.
역시 나는 선명한 이미지나 이야기가 들어있는 단순한 시를 선호한다. 그러나, 시 하나 속에 공간과 시간, 그리고 의미의 폭을 깊이있게 깔고 시 제목과 시 내용에서도 시의 전체적인 예술성을 만들어내는 예술가적인 시작법이 매력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기교와 깊이가 있어야 이런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나마 단순한 내 레이다에 걸린 시는
묵집에서
묵을 드시면서 무슨 생각들을 하시는지
묵집의 표정들은 모두 호젓하기만 하구려
나는 묵을 먹으면서 사랑을 생각한다오
서늘함에서
더없는 살의 매끄러움에서
떫고 씁쓸한 뒷맛에서
그리고
아슬아슬한 그 수저질에서
사랑은 늘 이보다 더 조심스럽지만
사랑은 늘 이보다 위태롭지만
상 위에 미끄러져 깨져버린 묵에서도 그만
지난 어느 사랑의 눈빛을 본다오
묵집의 표정은 그리하여 모두 호젓하기만 하구려
묵을 먹으면서도 이런 시를 볼 수 있는 것이 시인의 깨어있는 눈과 감각일 것이다.
시집 제목을 따온 시는
서쪽 1
가도 가도 서쪽인... 이홍섭 구(句)
쩍-- 갈라지는 부엌문 여는 소리. 개는 겨우 앞발 버티고
등을 치켜올려 기지개를 켜지만 알고 보면 그놈은 주인인지
객인지 구분도 없는 놈, 그저 찐 감자 껍질이나 얻어먹으려 오는,
제 친구 막내나 된다는 듯 다시 마룻장 밑으로 들어가고
허기진 창자를 삐뚜름히 비추는 저녁볕
노는 아지랑이
솥을 열다
서쪽을 열고
뺨에 서쪽을 빛내다
마지막 싯귀가 멋지다. 노을빛을 받아 발갛게 빛나고 있는 서쪽 뺨이 절로 그려지는 싯귀. 그래서 시인도 시 제목으로 따왔나 보다.

42년 광주에서 나시고 60년 전남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시를 쓰신지 50년.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와 같은 연배. 2005년에 간암을 선고받았다고도 하신다.
일간신문과 스포츠 신문의 기자, 홍보부장 등으로 오래 언론계에 있다가 퇴임하셨고 80년 이래
30년 넘게 전국의 산을 다니며 여러 권의 산행 시집을 내놓았다.
이 시집에서 시인은 아스팔트 도시에서 억눌려 있던 삶을 산 속에서 치유하고 정화하여 다시 세속으로 돌아올
넉넉한 품을 키우는 과정을 산행시들을 통해 반복적으로 표현한다.
산에 그런 치유의 힘이 있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다. 작년 이맘 때 한달간, 아침이면 매봉산을 올라갔다 내려오곤 했다. 마음에 시름시름 병이 있던 내가 산에 가면 힘을 받고 치유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
역시 산은 나를 포근하게 보듬어 안아 주었다.
시인은 낯선 산내음에서 항상 설레임을 느끼며 산이 주는 위안과 산이 주는 교훈을 곰씹으며 산이 씻어준 귀에 비로소 들려오는 소리들을 시로 받아 적는다. 하지만 그 깨달음들은 왠지 닫혀져 있고 낮은 목소리의 시는 결국 부질없는 부스러기라는 것을 시인은 알고 있다.
산에 다니면서부터 나는 나의 시가
낮은 목소리로 가라앉아 숨을 죽이거나
느리게 걸어가서도 결국은
쓸모없이 모두 사라지리라는 것을 알았다
키가 큰 욕망은 마침내 무너지고 널브러져서
부스러기가 된다는 것을 산이 가르쳤다
기를 쓰고 올라와서 본들
건너편 산이 항상 더 높이 보인다
이게 편안하다
(건너 산이 더 높아 보인다 中)
그래서 모든 시들은 적막하고도 쓸쓸하다.
백두대간 쉼없이 종주하는 많은 우리의 아버지들이 느끼고 있는 속내일 것이다.
'너덜겅 내려가며', 이런 시인의 마음이 솔직하게 드러나는 시이다.
너덜겅 내려가며
완강한 것들은 언젠가는 제풀에 무너지기 마련이지
무너져서 이렇게 너덜경을 만들지
푸나무 한 그루 자라지 못하는 돌무더기 길 내려가면서
쓸모없이 널브러진 욕망들의 단단한 부스러기
아가리 다물지 못하는 세상의 굳은 입들을 본다
무너져 버린 다음에도 저어 아래쪽에서
또 쌓아 솟구치려는 어둠의 덩어리들 내 어리석은 얼굴을 본다
한때는 앞서서 씩씩하게 나아가던 발걸음이
어느 사이에 맨 뒤로 처져 끌려가는 몰골이 되었다
세계는 나를 거들떠보지도 말을 걸지도 않았다
나를 위해 꽃 피우는 것은 봄에도 아무것 하나 없다
따슨 햇살도 가뭄 끝 단비도 시원한 바람도
애써 나를 비켜 가며 쏟아지거나 줄행랑을 친다
그대 그 고운 얼굴 알게 모르게 주름살이 파이더니
이리 팍팍한 세월로 사그라들어 고요하구나
돌무더기 너머 피어난 철쭉 꽃받 서럽게 아름다워
그대 힘차게 보였으나 속으로 연약했던 한 생애
살고 사라지는 일 순식간이 아니냐!
시인이 산에서 건져올린 위안과 적막의 언어에서 위안의 물 한모금 얻어 마시는 사람이 있다면 시인은 그로서 만족할 것이다.

오늘은 비몽사몽에 시 읽기에도 몰입이 되지 않았다.
어제 밤 늦도록 마신 감식초 탄 소주와 맥주와 와인 탓이다. 그리고, 일부는 시인 탓?
졸린 눈을 부비며 어질어질한 머리로 읽긴 했지만 시의 긴장도가 많이 떨어지는 걸 느낀다.
공감도 싱크로율이 낮아서 그러한가?
시집 한 권에서 유일한 공감으로 읽어낸 시.
얼룩과 무늬
욕망과 어리석음이 만드는 게
얼룩이라면
꿈과 고요는 무늬를 낳는다.
얼룩이 나를 가리켜
얼룩이라 한다.
성급함과 오류들이
내 얼룩들을 만들었을 것이다.
감히 무늬라고 우기지 못하고
크게 상심한다.
누군들 얼룩이 되고 싶었으랴.

비가 오는 날임에도 불구하고 6시 무렵 뚜렷이 구분되어 오는 여명은 오늘도 어김 없다.
떠지지 않는 눈꺼풀로 앉아 컴퓨터를 켜고 출첵을 하는 동안 잠에서 깨어 난다.
단군 프로젝트의 함께 하는 힘에 새삼 고마움을 느낀다.
66년 충남 논산 출생의 어디서 만난 듯한 반듯한 얼굴의 나희덕 시인.
아, 이분은 소리를 형상으로, 형상을 소리로 자유롭게 표현하는 열린 귀를 가진 분이구나 싶은 싯귀들이 많았다.
음계와 계단이라는 시에서 유년시절 예배당 계단을 올라가 홀로 피어 올리던 피아노의 음, 그리고 그곳에서 도취와 반복으로 은밀하게 진행되던 타인의 기도를 숨어서 봤던 기억이 그려졌다. 시인의 지켜봄, 소리와 형상의 교차 편집 등 시의 뿌리가 드러나는 듯한 시였다.
기러기떼에서 젓가락의 서글픔과 노젓는 소리를 보고, 흐르는 비에서 몰약의 자비로운 마취를 보고, 의자에서 성자를 보는 시인의 감수성은 '종소리가 들리면 조금씩 아파오는 곳이 있을 뿐'이라고 읊으며 허무와 결핍의 쓸쓸한 정서를 은연 중에 뿜어내고 있다. 일상에서 시를 건져내는 시인들의 시적 긴장감은 많은 경우 결핍과 허무에 뿌리를 두고 있다. 물론 시는 결핍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지만 기도, 지혜, 사랑, 즐거움, 위로, 격려, 북돋음, 도발, 신과의 하나됨을 추구하는 시인의 간절함이 빛나는 시들을 빚어낸다. 결핍을 결핍으로, 허무를 허무로만 드러내고 자신안에 갇혀버리는 시는 결국 독백의 넋두리로 쓸쓸함만을 전해준다.
일곱 살 때의 독서
제 빛남의 무게만으로
하늘의 구멍을 막고 있던 별들, 그날 밤
하늘의 누수는 시작되었다 하늘은 얼마나
무너지기 쉬운 것이었던가 별똥별이
떨어질 때마다 하늘은 울컥울컥 쏟아져
우리의 잠자리를 적시고 바다로 흘러들었다
그 깊은 우물 속에서 전갈의 붉은 심장이
깜박깜박 울던 초여름밤 우리는 무서운 줄도
모르고 바닷가 어느 집터에서, 지붕도 바닥도 없이
블록 몇장이 바람을 막아주던 차가운 모래
위에서 킬킬거리며, 담요를 밀고 당기다 잠이 들었다
모래와 하늘, 그토록 확실한 바닥과 천장이
우리의 잠을 에워싸다니, 나는 하늘이 달아날까봐
몇번이나 선잠이 깨어 그 거대한 책을 읽고
또 읽었다 그날 밤 파도와 함께 밤하늘을
다 읽어버렸다 그러나 아무도 모를 것이다 내가
하늘의 한 페이지를 훔쳤다는 걸,
그 한 페이지를 어느 책갈피에 끼워넣었는지를
그때 훔친 하늘의 한 페이지를 시인은 줄곧 옮겨적으려 하는 가 보다.

64년 경남 진주 출신인 시인은 경상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하고 라디오 작가로 일하다가 92년 독일로 유학, 현재 고대 중동 유적을 발굴하는 고고학박사과정을 밟고 있다고 한다. 휘둥그레지는 인생의 전환이다.
'혼자 가는 먼집'은 92년에 발간되었다. 이 시집을 내고 시인은 유학을 떠난 것이다.
이 시집에 들어있는 시인의 정서를 볼 때 이해가 된다.
모든 것을 훌훌 털고 이승을 떠나듯 새로운 세상, 새로운 나로 거듭나고 싶어했을 것이다.
먼 이국에서 가장 관심가는 것, 가장 끌리는 것을 찾아 고고학을 선택했을 것이다.
'혼자 가는 먼 집'을 읽으며 실연하여 흐느끼는 방황의 시인을 보았다. 마음과 몸의 병을 호되게 앓고 있는 듯한 시인은 잃어버린 사랑, 초라함, 불우함, 애처러움, 버려짐, 아픔, 서러움에 대해 마치 술주정처럼 주절 주절 읊고 있다. 이런 시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인의 시 속에는 감정적 타협과 자기 합리화나 자기 미화가 없었고, 바닥까지 내려간 정직함이 느껴졌다.
이 시집을 덮고 나자 허수경 시인의 현재가 궁금했다. 이런 시를 쓰고 난 다음에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하는 궁금함이 생겨난 것이다. 일상으로 돌아와 생활인의 타협을 적고 있을까? 아님, 시를 접지나 않았을까? 그정도로 시인은 위태로워 보였다.
그런데, 스물 아홉, 꽃뱀의 허물처럼 시를 남긴채 독일로 가서 고고학을 전공한 시인의 다음 행보가 눈부시다. 역시 시인이다. 살기 위해 달아난 것처럼 보인다. 이곳에서 그냥 그냥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즐거운 반전, 한 인생의 새로운 태어남을 본 듯하여 경이롭고 기쁘다. 시인은 고고학교수와 결혼하여 독일에서 정착하였다고 한다. 이후에도 꾸준히 시를 발표하고, 고고학 발굴현장에서 건져낸 새로운 세계들을 시로 남기고 있다고 한다. 허수경의 고고학 시대가 궁금하다.
먹고 싶다.....
서울 처음 와서 처음 뵙고 이태 만에 다시 뵙게 된 어른이
이런 말을 하셨다 자네 얼굴, 못 알아볼 만큼 변했어
나는 이 말을 듣고
광화문, 어느 이층 카페 구석 자리에 가서 울었다
서울 와서 내가 제일 많이 중얼거린 말
먹고 싶다...........,
살아내려는 비통과 어쨌든 잘 살아 남겠다는 욕망이
뒤엉킨 말, 먹고 싶다
한 말의 감옥이 내 얼굴을 변하게 한 공포가
삼류인 나를 마침내 울게 했다
그러나 마침내 반성하게 할까!
나는 드디어 순결한 먹고 싶음을 버렸다 서울에 와서
순결한 먹고 싶음을 버리고
조균의 어리석음, 발바닥의 들큰한 뿌리
그러나 사랑이여, 히죽거리며 내가 너의 등을
찾아 종알거릴 때 막막한 나날들을
함께 무너져주겠는가, 이것의 먹고 싶음,
그리고 나는 내 얼굴을 버리고
길을 따라 생긴 여관에 내 마음조차 버리고
안녕이라 말하지 마 나는, 먹고 싶다.........,
오오, 날 집어치우고.......
내 얼굴, 내 마음조차 버리고, 날 집어치워 버린 시인은 먹고 싶다........는 열망을 따라 먼 이국에서 새로운 인생으로 거듭났다.

미안하지만 이 원규 시인의 '옛 애인의 집'은 비몽사몽 간에 읽었다.
노고단, 섬진강, 은어떼, 잠자리, 풀잎으로 반복되는 지리산 산 속 삶의 풍경과 내 삶의 풍경이 많이 달라서일까?
쉽사리 풍덩 빠지지를 못한다.
62년 경북 문경 태생의 이 원규 시인. 고1 자퇴, 입산, 하산, 대학 입학, 휴학, 막장 광부 생활,노동해방문학과 민족문학작가회의 실무, 기자 생활. 그리고 지리산 입산. 지금은 오토바이 하나 타고 지리산 곳곳의 빈집들을 찾아 옮겨 다니며 살고 있다고 한다. 이런 삶을 살고 있으니 그가 숨쉬는 바람은 세속의 바람결과는 완연 다르다.
獨居
남들 출근할 때
섬진강 청둥오리 떼와 더불어
물수제비를 날린다
남들 머리 싸매고 일할 때
낮잠을 자다 지겨우면
선유동 계곡에 들어가 탁족을 한다
미안하지만 남들 바삐 출장 갈 때
오토바이를 타고 전국 일주를 하고
정말이지 미안하지만
남들 야근할 때
대나무 평상 모기장 속에서
촛불을 켜놓고 작설차를 마시고
남들 일중독에 빠져 있을 때
나는 일 없어 심심한 시를 쓴다
그래도 굳이 할 일이 있다면
가끔 굶거나 조금 외로워하는 것일 뿐
사실은 하나도 미안하지 않지만
내게 일이 있다면 그것은 노는 것이다
일하는 것이 곧 죄일 때
그저 노는 것은 얼마나 정당한가
스스로 위로하며 치하하며
섬진강 산 그림자 위로
다시 물수제비를 날린다
이미 젖은 돌은 더 이상 젖지 않는다
물론 시인이 오늘도 출근해야할 우리들에게 미안할 것도 미안해하지 않을 것도 없다. 시인의 선택이 시인에게 자유로움과 섬진강 산 그림자 위로 물수제비를 날릴 시간과 여유를 준 것이니까. 다만 '일하는 것이 곧 죄일 때/ 그저 노는 것은 얼마나 정당한가' 이 구절에서 생계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일이 살짝 더 무거워지는 것이다.
지리산의 자연과 함께 하는 삶이든, 도시의 번잡한 삶이든 시인의 역할은 시를 통해 자신의 삶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것이라고 본다. 진실되고 간절하기만 하다면 시의 울림은 메아리를 가질 것이다.

이 분은 시인이다. 쌀 한톨에서 산맥과 계곡과 강물과 은하수, 밤하늘 별자리를 보고, 비 내린 후 남은 송화가루 자국에서 하느님의 약숟가락 자국을 본다. 낙지 빨판에서 금강초롱 종소리를 듣고, 갈라진 콩크리트벽에서 수로가 되는 상처를 보고, 얇은 대패밥에서 나무의 기저귀를 본다. 사방이 벽으로 둘러 싸인 감옥 안에서도 시인은 어린 시절의 기억과 상상력으로 빛나는 세계 하나를 온전히 불러 낼 수 있을 것이다.
이 분은 한문 선생이다. 얼마전 문학콘서트에서 직접 뵌 이 정록 시인은 말빨이 엄청 났다. 재미있고 말에 씨앗과 각이 있어 버릴 말도 많지 않았다. 빠져들게 하는 말빨이 있어서인지 빠져들게 하는 이야기가 살아있는 시가 많다. 소설을 쓰라는 권유를 받았다는 얘기가 말이 된다. 그래도 제일 질투가 나는 것은 돌아가신 소설가 이문구 선생님이라고 했다. 최고의 동시집 두 권을 남겼기 때문이다. 이 말에서 이 분이 지향하는 세계를 알 수가 있다.
시인은 심장의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가 '나는 글을 꼭 써야 하는가?' 라고 물어 봤을 때 '나는 써야만 해'라는 강력하고도 짤막한 필연성이 있는 답이 나와서, 자신이 보고 체험하고 사랑하고 잃은 것에 대해 마치 이 세상의 처음 사람처럼 말하는 사람이라고 릴케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일러 주었다.
생선의 전부
강물로 뛰어들리라는
그 기어코를 놓치면
지느러미부터 말라간다
바다로 돌아가리라는
그 기어코를 내동댕이치면
얼음 위에 누워 있어도
이미 생선이 아니다
돌아가리라
이 펄떡거림이 생선의 전부다
우리가 아침 식탁에서 구워먹은 것은
돌아가리라 다섯 토막이다
어두육미라며 꼬리를 쳐냈다면
돌아가리 네 토막을 먹은 것이고
머리도 잘라버렸다면
입안 가득 아가리만 발라먹은 것이다
그렇다면 '아가리'가 되어 '닥치기' 싫은 우리는 어디로 돌아가야 하나?

유난히 이 시집에서는 저녁 풍경이 많이 나온다. 버무림, 감싸안음으로 표현되는 저녁 어스름이 희미하게 번져드는 무렵, 딱 그 무렵에서 많은 시들이 태어났다. 저녁, 잠, 어스름, 추억, 사라지는 것, 아스레한 것, 그리움이 때로는 수묵화처럼, 때로는 수채화처럼 정교하게 표현되었다.
시의 배경이 되는 시골 마을들은 시인이 살고 있는 곳이라기 보다는 마치 추억 속의, 회상 속의 고향 마을 같았다. 전체적인 톤이 지나간 옛날에 대한 회상, 그리움,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 속에 희미하게 번져가는 수묵화같은 느낌이었다. 시인은 섬세하게 관찰했고 무심한 눈길로 정물화 혹은 풍경화를 그려내곤 했다.
독특하게 살아나는 아름다운 언어의 싯구, 시인만의 독창적인 표현은 많았지만 이상하게 전체적으로 내 마음에 와닿는 정서의 시들이 없었다. 그리움, 쓸쓸함 이외의 정서가 별로 없고 대부분의 풍경들이 그림 그리듯 무심하게 표현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뭐랄까, 시인의 인생에서 뭔가에 부딪히고 뚫고 저항하며 살아나가며 쓴 시라기 보다는 과거와 주위의 사물과 추억과 교감하며 써내려간 시라는 생각이 든다. 동갑내기 고향 친구라고 하는 소설가 김연수와의 대담에서 읽으니 '달려가지 않고 머물어서 소멸과 변화에 대해 불교적으로 관조'하며 쓴 시들이라고 한다.
이런 무심하고도 약간 허무하며 아스라한 정서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가 보다. 2004년 발간된 '맨발' 시집은 2006년에 초판 9쇄를 찍었고 아마 지금은 더 많이 팔렸으리라 생각된다. 문태준 시인은 70년 경북 김천 출생, 고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94년 등단하여 2000년에 첫시집을 내고 '맨발'은 서른 다섯살 무렵 쓴 두번째 시집이다. 그가 그려낸 고향 김천 마을의 풍경이 어쩐지 눈에 익었었다.
두편의 시.
비가 오려 할 때
비가 오려 할 때
그녀가 손등으로 눈을 꾹 눌러 닦아 울려고 할 때
바람의 살 들이 청보리밭을 술렁이게 할 때
소심한 공증인처럼 굴던 까만 염소가 멀리서 이끌려 돌아올 때
절름발이 학수형님이 비료를 지고 열무밭으로 나갈 때
먼저 온 빗방울들이 개울물 위에 둥근 우산을 펼 때
맨발
어물전 개조개 한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 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아침 노을(?)이 참 곱다. 붉은 구름 띠 하나가 동편 하늘에 걸려 있다.
'그늘'은 죽음이다. 이 영광 시인은 아버지와 형의 죽음을 잇다라 경험한다.
시인은 집요하게 죽음의 과정과 습과 염, 입관과 장례의 과정을 묘사한다.
혈육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에도 바라보는 모든 것은 죽음의 빛깔,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해진 '이상한 밝음 더욱 이상한 방안의 어둠, 타는 경계' 안에 있다.
이 영광의 시들은 물렁하고 부드러운 살이 없고 아주 단단한 뼈와 얼음, 알몸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이런 이 영광의 시가 마음에 든다. 이육사의 '절정' 처럼 뭔가 북방에서 말타고 오는 지사의 이미지가 있다. 이 영광 시인이 안동에서 자랐기 때문일까. 그렇게 내 마음속에는 이육사와 연결이 된다.
숲
나무들은 굳세게 껴안았는데도 사이가 떴다 뿌리가 바
위를 움켜 조이듯 가지들이 허공을 잡고 불꽃을 튕기기
때문이다 허공이 가지들의 氣合보다 더 단단하기 때문이
다 껴안는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무른 것으로 강한 것을
전심전력 파고든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다면 나무들의 손
아귀가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졌을 리가 없다 껴안는다
는 것은 또 이런 것이다 가여운 것이 크고 쓸쓸한 어둠을
정신없이 어루만져 다 잊어버린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이
글거리는 포옹 사이로 한 부르튼 사나이를 有心히 지나가
게 한다는 뜻이다 필경은 나무와 허공과 한 사나이를, 딱
따구리와 저녁 바람과 솔방울들을 온통 지나가게 한다는
뜻이다 구멍 숭숭 난 숲은 숲字로 섰다 숲의 단단한 골다
공증을 보라 껴안는다는 것은 이렇게 전부를 다 통과시켜
주고도 제자리에, 고요히 나타난다는 뜻이다
시인은 하루를 살고 하루를 반추하며 제 경험을 곱씹으며 시를 쓰는 듯하다. 즉각적으로 스쳐지나가는 이미지 하나나 감각 하나로 시를 쓰지 않는다.
詩는
詩는 늦은 것이다
하객들 두루 도착한 후에
문 닫고 들어와 조용히
뒷전에 앉는 사람처럼
詩는 아주 먼 것이다
송고를 하고
기계를 끄고
술 한잔 앞에 두면
또, 빈손이다
멍한 몸에서 건져올린 젖은 주름진 손,
불의 계곡
물의 심연
기억나지 않는 어둠을 만지던
더듬이 한 쌍,
서로 더듬거린다
알아본다
그렇게 나는 멀리 나갔다 왔다
더 멀리,
들어갔다 나왔다
어디에도 닿을 수 없는데
멈추지 못하는 길이 있었던 거다
불끈거리며 몸속을 달리는 정맥 혈관처럼
어디에도 닿을 수 없는데 멈출 수 없는 것이 시의 길이라는 것은 시를 쓰는 자의 입장에서는 맞는 말 같다.
자신의 시가 어디에 가 닿을지 어떻게 알고 쓴단 말인가. 결국 읽는 자의 마음 어디 한 구석에 와 닿는 것 밖에 시의 효용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래도 그 길은 버릴 수 없는 몸 속의 정맥 혈관이다.
사라진다
지워지기 위해 잠깐 나타나는 것들
눈보라가 사람 마을과 시내와 방풍림을 쓸어안고
고요히 눈보라 속으로 사라진다
나는 꼭 한 번 눈물 없이 묻고 싶었다
너의 神은 너에게
뭐라고 속삭이니
너는 어디로 간 거니
사라지기 위해 한순간을,
그러니까 갈 봄 여름을
한마디도 못 알아들으면서
개근했던 것들아
이영광 시인이 꽃을 노래하고 사랑을 노래하고 자연과 하나됨을 노래하는 시를 쓴다면 어떻게 될까?
'숲'이나 '직선 위에서 떨다'와 같은 시를 쓴 정신으로 이런 것들도 노래했으면 좋겠다. 이영광 시인과 독자인
나를 위해 하는 말이다.

콩, 너는 죽었다
콩타작을 하였다
콩들이 마당으로 콩콩 뛰어나와
또르르또르르 굴러간다
콩 잡아라 콩 잡아라
굴러가는 저 콩 잡아라
콩 잡으러 가는데
어, 어, 저 콩 좀 봐라
쥐구멍으로 쏙 들어가네
콩, 너는 죽었다
최근 영화 '시'와 TV광고 출연으로 대중과 더욱 친숙해진 김용택 시인.
섬진강 시인으로 불리는 그분은 평생 고향을 떠나지 않고 40년 가까이 고향 전라도 임실 섬진강변 마을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시다가 2008년 퇴직하시고 최근 자연학교를 준비하고 계시다.
'내 인생의 글쓰기'라는 산문집에서 김용택시인이 어떻게 독서를 하고 어떻게 시인의 길을, 교사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 읽은 적이 있다.
'나는 상기되었다. 즐거웠으며 행복했다. 나는 사람이 무엇을 하며 사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 무렵 나는 비로소 내가 선생으로 일생을 보내기로 작심했던 것 같다. 나는 모든 희망을 버렸다. 무엇이 되는 것에 대한 것들을 모두 놓아버렸다. 이 아이들과 일생을 보내기로 한 것이다. 그 순간 나는 본 것 같았다. 세상이 환히 개이고 마침내 내가 날개를 달았던 것이다.'
이런 자각이 있었기에 김용택시인은 고향마을에서 평생을 아이들과 함께 보내며 '콩, 너는 죽었다' 같은 동시를 쓸 수 있었을 것이다. 김 훈의 산문집 '인생'에 실렸다는 '내친구 용택이'라는 글의 인용이다,
"용택이네 학교에서는 담임 선생인 용택이도 시를 쓰고 아이들도 동시를 쓰는데,
내가 보기에는 그 실력이 막상막하인 것 같다. 교실 뒷벽에 <우리들 차지>라는 칠판이
걸려 있다. 언젠가 박완서 선생님이 이 학교에 놀러 오셨다가 <우리들 차지>에 붙은 글을
죽 읽어보시고는 그 중 한 편을 골라 가리키시면서
"이건 참 잘 썼다. 이 아이는 좋은 시인이 될 것 같다. 잘 길러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랬더니 담임 선생인 용택이는 뒤통수를 긁으면서
"박선생님, 그건 제가 쓴 겁니다"라고 말했다.
용택이는 이 기막힌 이야기를 나한테 해 주면서, 그래도 자기가 아이들보다 시를 잘 써서
박완서 선생님한테 칭찬받은 일을 기뻐했다.
용택이는 이걸 자랑이라고 나한테 자랑한 것이다.
"야, 정말이라니깐. 박완서 선생님이 내 시가 좋다고 했어야!"
내게도 김용택 시인은 마음 속 선생님이다. 대학 1학년 때 읽은 '섬진강' 시들과 먼 훗날 다시 시를 읽어야지 하고 결심했을 때 집어 든 '시가 내게로 왔다' 시집들이 시의 세계로 나를 이끌어 주었다.
김용택 시인의 '섬진강 15 겨울, 사랑의 편지'를 소개하며 하루를 연다.
섬진강 15
겨울, 사랑의 편지
-김용택-
산 사이
작은 들과 작은 강과 마을이
겨울 달빛 속에 그만그만하게
가만히 있는 곳
사람들이 그렇게 거기 오래오래
논과 밭과 함께
가난하게 삽니다.
겨울 논길을 지나며
맑은 피로 가만히 숨 멈추고 얼어 있는
시린 보릿잎에 얼굴을 대보면
따뜻한 피만이 얼 수 있고
따뜻한 가슴만이 진정 녹을 수 있음을
이 겨울에 믿습니다.
달빛 산빛을 머금으며
서리 낀 풀잎들을 스치며
강물에 이르면
잔물결 그대로 반짝이며
가만가만 어는
살땅김의 잔잔한 끌림과 이 아픔
땅을 향한 겨울풀들의
몸 다 뉘인 이 그리움
당신,
아, 맑은 피로 어는
겨울 달빛 속의 물풀
그 풀빛 같은 당신
당신을 사랑합니다.

2003년 작고하신 소설가 이문구 선생님의 유고 동시집이다.
이 동시집은 이 정록 시인이 '정말 질투난다'고 해서 읽고 싶었다. 이 문구 선생님이 소설을 안쓰고 처음부터 동시를 썼더라면 좋았을 것이라고도 하셨다.
이문구 선생님은 자식들을 키우며 '개구장이 산복이'라는 동시집을 썼는데 왜 시인들이 돈 안되는 시를 쓰는지 알 수 있었다고 신경림 시인께 얘기하시며 아직 태어나지 않은 손자, 손녀들을 위해 동시들을 썼다고 하셨단다.
그래서 신경림 시인은 이 시들이 할아버지의 '애틋한 사랑의 선물' 이라고 하셨다.
소설을 잘 안 읽는지라 이문구 선생님의 소설을 읽어본적이 없다. '관촌수필', '산너머 남촌', '장한몽' 이런 소설 제목들은 익숙하지만.
동시집을 읽으며 든 생각은 '왜 동시는 일반 시와 구별되는가'하는 의문이였다. 읽는 대상이 어린이와 어른으로 갈라진다는 차이점이 있지만 시인에게 시상이 떠오를 때, 나는 꼭 동시를 써야지, 나는 시를 써야지 하고 구분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세상을 좀더 새롭게, 자유롭게, 감정이나 사고의 덧칠없이 보고자 하는 의도가 있을 때 동시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싶다.
아무래도 아이들이 읽고 재미있구나, 예쁘구나, 신기하구나, 그랬구나 하고 느끼기를 바라는 시들이다보니 삶의 무게나 고뇌, 허무나 고독은 끼어들기가 힘들다. 동시는 어린이의 맑은 눈 높이에 맞추고 쓴 시이기에 세상을 처음 보고 받아 적는 듯한 순수함과 경이로움이 있어야 한다. 이정록시인이 질투했다는 것은 이러한 순수함과 경이로움이 이 동시집 안에가득했다는 얘기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내게 재미있었던 시는
몽촌 토성의 꺼병이
몽촌 토성의
어린 꿩이
한동네
까치에게 물었어요.
아빠 이름은 장끼 씨구요
엄마 이름은 까투리 씨구요
내 이름은 꺼병이예요
장꺼병이요.
울 엄마도 까 씨인데
혹시 친척이 아니세요?
까치는 말했어요.
너희는 꺽꺽 울고
우리는 깍깍 울고
같은 까 씨지만
조상이 다르단다.
친척이 아니고
그냥 이웃이야.
어린 시절 부엌 풍경에 대한 기억을 아련하게 이끌어내 준 시는,
부지깽이
시골집 나뭇간엔
작대기감도 말뚝감도 안 되어
그냥 노는 막대기가 많은데
어느 날 부지깽이가 되면
부뚜막에 오른 개
엉덩이도 때려 주지만
불을 때며 아궁이를 들락거리며
불땀 없는 땔감을 괄게 태우고
잉걸불 끌어내어 화로에 담으면서
제 몸을 태우고 또 태우고 해
하루가 다르게 짧아지다가
드디어 아궁이에 던져져서
불덩이가 되곤 했지.
구본형 선생님이 '부지깽이'란 아이디를 쓰시는 듯 한데 선생님의 역할이 이 시랑 묘하게 겹쳐진다.
'삶을 시처럼 산다' 는 말씀. '삶은 곧 시'라고 하는 캠벨의 말과 겹쳐진다.
누구나 자기 삶을 대표하는 시 한편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2004년 5월 창비에서 발간된 정호승 시인의 '이 짧은 시간 동안'.
시집 한 권을 통해 접한 시인의 세계는 눈을 안팎으로 다 돌려 시 하나에 나와 남이 잘 어우러져 있었다.
정호승 시인은 눈 돌리는 어는 곳에서나 시를 발견하고 있다. 얼어죽은 미꾸라지가 쓴 '투명한 얼음 속의 절명시', 잃어버린 새끼를 핥는 어미개의 혀, 고속도로를 어슬렁거리는 소, 산산조각으로 부서진 부처님상, 장례식장 미화원 손씨 아주머니, 시각 장애인 식물원, 도축장으로 들어갈 물먹는 소, 가부좌한 부처님 같이 구워지는 통닭, 마음을 비우지 못하는 사람들을 구경 하는 연꽃, 노모의 텔레비젼, 맹인 수녀, 김수환추기경의 기도하는 손, 잔치국수를 먹는 중년의 여자, 국화빵을 굽는 사내, 시립 화장장 장례지도사 김씨의 저녁, 막장의 갱부 등 시집에 나오는 삶들은 다양하기도 하다.
시집 말미에 시인은 '모든 인간에게서 시를 본다'고 썼다. 한 인간의 삶에서 시 하나를 건져내 줄 수 있다면 그건 시인이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일게다. 장례식장 미화원 손씨 아주머니나 시립 화장장 장례지도사 김씨, 혹은 정호승 시인이 시 하나로 승화시킨 모든 사람들과 동물들과 사물들이 제 몫의 의미를 입고 존재를 견디고 있다. 시인은 그렇게 존재의 의미를 만들어주고 그로 인해 자신이 존재하는 의미를 얻고 있다.
내가 멍하니 TV 앞에서 스치듯이 흘려 보낸 거북의 산란 장면이 같은 장면을 본 시인에게서는 시가 되어 나온다. 시를 찾는 시인의 안테나에 걸리는 일상의 어떤 소재도 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정호승의 시는 따스하고 맑았다. 구도하는 자세가 있고, 모든 인간의 삶에서 시를 보고자 하는 의지가 있고, 윤동주 시인이 이 시대를 살아간다면 느꼈을 반성이 있고, 무엇보다 기억하고 싶은 아름다운 싯구들이 있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정호승의 시를 사랑하는 것일게다.
부도밭을 지나며
사람은 죽었거나 살아 있거나
그 이름을 불렀을 때 따뜻해야 하고
사람은 잊혀졌거나 잊혀지지 않았거나
그 이름을 불렀을 때 눈물이 글썽해야 한다
눈 내리는 월정사 전나무 숲길을 걸으며
누군가 걸어간 길은 있어도
발자국이 없는 길을 스스로 걸어가
끝내는 작은 발자국을 이룬
당신의 고귀한 이름을 불러본다
부도 위에 쌓인 함박눈을 부르듯
작은 새!하고 당신의 이름을 불러본다
사람들은 오늘도 검은 강물처럼 흘러가
돌아오지 않지만
더러는 강가의 조약돌이 되고
더러는 강물을 따라가는 나뭇잎이 되어
저녁바다에 가닿아 울다가 사라지지만
부도밭으로 난 눈길을 홀로 걸으며
당신의 이름을 부르면 들린다
누가 줄 없는 거문고를 켜는 소리가
보인다 저 작은 새들이 눈발이 되어
거문고 가락에 신나게 춤추는 게 보인다
슬며시 부도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내 손을 잡아주는
당신의 맑은 미소가 보인다
시집 안에 없는 '이 짧은 시간 동안'이 시집 제목으로 쓰였다. 시인은 5년간 시를 쓰지 못하고 살아도 산 것이 아니게 살았다고 한다. 시가 나를 버리는게 아닌가 하는 위기감과 상실감에 의해 한꺼번에 씌여진 시들이라고 한다. 그리고 시가 내 인생을 위로해줄 때가 있어서 너무나 감사하다고 썼다.

우리시는 일제시대때부터 시작된 듯한 느낌이다. 백석, 이용악, 윤동주, 정지용.. 이 분들 이전에 누가 있었나? 한문으로 쓴 한시가 있었고 지금 우리 세대와는 단절이다. 번안시, 번역시는 아무래도 몰입과 감정이입이 어렵다. 우선 정서적으로 낯설다. 그리고 어미 하나만 다르게 써도 틀린 것이 시의 느낌인데, 번역된 시는 이미 원작의 느낌과는 많이 틀리다. 며칠전 '스무편의 사랑의 시와 한편의 절망의 노래'를 읽고나서 아무런 느낌도 남지 않았던 것도 일부는 번역시의 한계 때문일 것이다. 시가 가진 운율과 모국어가 가진 울림, 아름다움이 합쳐져야 비로소 시의 가락이 읽는 사람의 마음에 울림을 준다. 허난설헌의 시가 중국에서 인정받고 중국사람들이 즐겨 읽었다는 글을 읽으며 한자 사용으로 인한 우리 시의 단절, 문화적 정서적 단절에 대해 아쉬운 마음이 든다.
허난설헌은 허균의 손위 누이로 뛰어난 시적 재능으로 인해 남편에게 버림받고, 아이 둘도 일찍 떠나 보내고, 스물 일곱의 나이에 죽음을 맞았다. '성균관 유생의 나날'에서는 총기와 재기로 무장하고 시문을 읊는 남장 처녀의 발랄한 모험을 그리며 주변 모든 사람들, 심지어 왕까지도 주인공을 보호해주는 내용이 그려진다. 배경상 허난설헌의 시대보다 200여년이 더 흐르고, 임진왜란 이후 여자들의 삶이 더욱 제약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로 볼 때 '성균관..'은 판타지가 확실하다.
연밥 따는 노래
맑고 넓은 가을 호수
푸른 옥처럼 물빛 빛나는데
연꽃 가득 핀 깊숙한 곳에
목련나무 배 한 척 매어 두었네
님을 보자 물 건너로
연밥 따서 던졌지
행여 누가 보진 않았나
한나절 내내 부끄러워라
이 시는 너무 '방탕하다'는 평가를 받아 허난설헌의 문집에 실리지 못했다고 한다. 도대체, 조선시대는 어떻게 된 시대인지. '스물일곱 송이 붉은 연꽃', 무척 아름답게 번안된 허난설헌의 시집이나 옛 여인의 삶이 쓸쓸하기만 하다.
추석연휴가 시작되는데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아침이다. 먼길 떠나시는 분들은 조심해 다녀오소서..

도발적이고 관능적인 육체의 언어, 감수성과 시적 완성도가 뛰어난 그녀의 시가 등장했을 때 나이든 문단의 아저씨들은 처녀의 분홍빛 속살을 훔쳐보는 듯한 관음증적인 흥분을 느꼈으리라.. 훗, 내 언어도 그녀 흉내를 내기 시작한다.
한 시인의 첫 시집은 그 시인의 내밀한 속살과 같다. 김선우 시인은 어머니, 몸의 욕망, 사물들의 욕망, 대담하고 도발적인 언어와 상상력, 금기의 표현이 뛰어나다. '물속의 여자들'이란 시에서 마치 무당과도 같은 눈으로 표현했듯 명성황후, 황진이, 허난설헌이 깬 금기의 세계를 이어받아 시를 쓰는 듯 시적 화자는 거침없이 몸의 욕망을 표현하고 터부시된 단어와 상상력 -이를테면 똥, 음부, 자위, 근친상간, 생리통-을 시 속에 펼쳐 놓는다. '숭고한 밥상'이라는 시에서는 생일상을 받고 어머니를 먹고, 아버지와 동침하고, 누이와 살을 섞고, '누대에 걸친 근친상간의 밥상/비켜갈수 없는/무저갱의 밥상위에/발가벗고 올라가 눕고 싶은 생각이'라는 거침없는 상상력이 펼쳐진다.
물론, 김선우의 시들이 도발적, 금기적 언어들로만 가득차 있다면 그녀가 뛰어난 시인으로 이름날 이유가 없다. 일상에서 시적인 긴장감과 깊이, 갇혀있지 않은 상상력을 보는 시적인 감수성이 뛰어나다.
근엄한 도덕률에 갇혀서 약간의 일탈된 공상만으로도 스스로 고해성사의 반성을 토해내는 많은 사람들에게 김선우의 시들은 일상을 낯설게 만드는 시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 김선우의 시를 읽고 시원한 배출의 쾌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내부의 고뇌를 파고 드는 시가 아닌, 내부의 금기를 깨고 바깥 사물들을 빌려와 내 안을 펼쳐보이는 김선우 식 시쓰기에서 자유로움을 본다. 김선우 스스로는 그런 자신의 시쓰기에서 생의 자유를 느끼고 있을까?
맑은 날
동사무소를 지나다 보았다
다리가 주저앉고 서랍이 떨어져나간 장롱
누군가 측은한 눈길 보내기도 했겠지만
적당한 균형을 지키는 것이
갑절의 굴욕이었을지 모른다
물림쇠가 녹슬고
문짝에서 먼지가 한웅큼씩 떨어질 때
흔쾌한 마음으로 장롱은 노래했으리
오대산의 나무는
오대산 햇살 속으로 돌아가네 잠시 내 살이었던
못들은 광맥의 어둠으로 돌아가네 잠시 내 뼈였던
저의 중심에 무엇이든 붙박고자 하는
중력의 욕망을 배반한 것들은 아름답다
솟구쳐 쪼개지며 다리를 꺽는 순간
비로소 사랑을 완성하는 때
돌팔매질당할 사랑을 꿈꾸어도 좋은 때
많은 사람들은 적당한 균형, 저의 중심에 무엇이든 붙박고자 하는 중력의 욕망으로 산다. 그 중력의 욕망을 배반하여, 돌팔매질당할 아름다운 사랑을 꿈꾸는 것이 김선우의 시이다. 그녀는 자유로울까, 그녀는 행복할까? 이렇게 묻게 되는 건 시쓰기를 통해 자유롭고 행복해지는 시인을 꿈꾸기 때문이다.
원재훈 시인이 2008년 인터뷰한 그녀의 말.
"우선은 시가 혼란스럽던 나를 구했다, 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시를 쓰면서 상처를 치유할 수 있었고, 때마침 적절한 시기였어요. 시를 쓰면서 내 몸과 자아가 함께 성숙했다고나 할까요. 그리고 행복했어요. 첫 시집을 내고 나서 좋은 말도 많이 들었고요. 그리고 원고료 있잖아요. 첫 원고료를 받아들고 놀랐어요. 그때부터 소비에 대한 욕망을 줄이면서 조금 적은 돈으로 살려고 해요. 남 하는 거 다 하고 싶은 마음을 버리고 사는 거지요. 그런 헛된 욕망에서만 벗어나도 사는 데 그렇게 많은 돈이 드는 건 아니잖아요.”
이제야 '도화 아래 잠들다'와 '내 몸 속에 잠든이 누구신가'의 김 선우의 시세계가 이해된다. 그리고 그녀가 좋아진다.
얼레지
옛 애인이 한밤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자위를 해본 적 있느냐
나는 가끔 한다고 그랬습니다
누구를 생각하며 하느냐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랬습니다
벌 나비를 생각해야만 꽃이 봉오리를 열겠니
되물었지만, 그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얼레지...
남해 금산 잔설이 남아 있던 둔덕에
딴딴한 흙을 뚫고 여린 꽃대 피워내던
얼레지꽃 생각이 났습니다
꽃대에 깃드는 햇살의 감촉
해토머리 습기가 잔뿌리 간질이는
오랜 그리움이 내 젖망울 돋아나게 했습니다
얼레지의 꽃말은 바람난 여인이래
바람이 꽃대를 흔드는 줄 아니?
대궁 속의 격정이 바람을 만들어
봐, 두 다리가 풀잎처럼 눕잖니
쓰러뜨려 눕힐 상대 없이도
얼레지는 얼레지
참숯처럼 뜨거워집니다
딸 여섯, 막내 아들 하나 있는 집 딸로 태어나 '바리공주' 동화를 쓴 시인. 얼레지같은 시를 써 준 것에 감사드린다.

20년 동안 시인은 쉽지 않은 길을 걸어왔다. 시인을 홀로 두고 떠난 부인이 시인으로 살아갈 접시꽃 씨앗을 뿌려 주었고, 해직교사로 투쟁에 앞장 선 몇년의 전교조 활동이 시의 길에 대한 쉼없는 반성과 갈등을 주었고, 마침내 찾아온 지병은 시인을 산방에 칩거하여 내면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였다. 그리하여,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 같은 아름다운 통찰의 싯귀로 시인 자신과 우리 모두를 위로하는 기도하는 시인으로 돌아 왔다.
'해인으로 가는 길'을 읽고 마음이 저렸다. '접시꽃 당신'으로 겉돌던 마음이 '해인으로 가는 길'을 통해 시인에게 닿는 길을 찾았다. 한번 읽고 앞으로 다시 펼칠 일 없는 시집들이 대다수인데 도종환 시인의 '해인으로 가는 길'은 앞으로 잠안오는 밤이면 펼쳐들 것 같다. 벌거벗은 성찰이 있지만 또한, 아름다운 맨살과 기도가 있어 빛나는 시의 세계. 무엇을 보고 무엇을 쓸것인가 다시 한번 생각케하는 도종환 시인의 시세계이다. 릴케의 '가을날'과 비견되는 시, '깊은 가을'
깊은 가을
가장 아름다운 빛깔로 멈추어 있는 가을을 한 잎 두 잎 뽑아내며
저도 고요히 떨고 있는 바람의 손길을 보았어요
생명이 있는 것들은 꼭 한 번 이렇게 아름답게 불타는 날이 있다는 걸
알려주며 천천히 고로쇠나무 사이를 지나가는 만추의 불꽃을 보았어요
억새의 머릿결에 볼을 비비다 강물로 내려와 몸을 담그고는
무엇이 그리 좋은지 깔깔댈 때마다 튀어오르는 햇살으리 비늘을 만져보았어요
알곡을 다 내주고 편안히 서로 몸을 베고 누운 볏짚과 그루터기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향기로운 목소리를 들었어요
가장 많은 것들과 헤어지면서 헤어질 때의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살며시 돌아눕는 산의 쿨럭이는 구릿빛 등을 보았어요
어쩌면 이런 가을날 다시 오지 않으리란 예감에 까치발을 띠며 종종대는
저녁노을의 복숭앗빛 볼을 보았어요
깊은 가을,
마애불의 흔적을 좇아 휘어져 내려가다 바위 속으로 스미는 가을 햇살을 따라가며
그대는 어는 산기슭 어느 벼랑에서 또 혼자 깊어가고 있는지요

94년 3월 발간되어 참 많은 각광을 받았다. 이 시집에서 사람들은 각기 많은 것을 읽어내었을 것이다.
우선 80년대에 대학을 다니고 운동권이었던 사람들은 '살아남은 자의 슬픔'같은 일말의 죄의식과 비애와
변해가는 세월에 대한 허무를 읽었을 것이다. 그리고, 30대를 맞거나 30대를 넘기는 많은 이들은 뜨거웠거나
허무했던 20대에 대한 아쉬움, 앞으로 다가올 30대, 그리고 그 이후의 삶에 대한 두려움, 막막함 이런 것들에 공감하지 않았을까?
시대에 각광받은 시집에는 시대가 열광해할 코드들이 묻혀 있었다. 시인이 의도적으로 그 코드들을 읽어내었다기 보다는 민감한 자의식을 깊게 파고 드니 그 코드와 닿아있었다는 것이 맞을 듯 하다. 자기 안으로 깊이 파고드니 결국 세상과 닿아 있었다고나 할까. '나는 내 시에서 돈 냄새가 나면 좋겠다'고 한 시인의 소망대로 시인은 시로 성공했고 이후에도 전업 시인,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시는 자신의 내면이 드러나기에 '광화문에서 발가벗고 있는 심정'으로 시집을 내놓는다는 최영미 시인. 안으로 깊이 파고 들어, 시대와 닿은 최영미는 좋은 시인이다.
사는 이유
투명한 것은 날 취하게 한다
시가 그렇고
술이 그렇고
아가의 뒤뚱한 걸음마가
어제 만난 그의 지친 얼굴이
안부없는 사랑이 그렇고
지하철을 접수한 여중생들의 깔깔웃음이
생각나면 구길 수 있는 흰 종이가
창 밖의 비가 그렇고
빗소리를 죽이는 강아지의 컹컹거림이
매일 되풀이되는 어머니의 넋두리가 그렇다
누군가와 싸울 때마다 난 투명해진다
치열하게
비어가며
투명해진다
아직 건재하다는 증명
아직 진통할 수 있다는 증명
아직 살아 있다는 무엇
투명한 것끼리 투명하게 싸운 날은
아무리 마셔도 술이
오르지 않는다

'잠들면서까지 살아갈 것을 걱정하는 자와
죽으면서도 어떤 것을 붙잡고 있는 자를
나는 보았네' - 길 가는 자의 노래 중
나역시 살아갈 것을 걱정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기에 뜨끔했다.
지금은 그리움의 덧문을 닫을 시간
세상을 잊기 위해 나는
산으로 가는데
물은 산 아래
세상으로 내려간다
버릴 것이 있다는 듯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다는 듯
나만 홀로 산으로 가는데
채울 것이 있다는 듯
채워야 할 빈 자리가 있다는 듯
물은 자꾸만
산 아래 세상으로 흘러간다
지금은 그리움의 덧문을 닫을 시간
눈을 감고
내 안에 앉아
빈 자리에 그 반짝이는 물 출렁이는 걸
바라봐야 할 시간
나는 이 시에 등장하는 산과 물이 벌려 놓은 공간 감각이 좋다. 시를 읽으면서 시야가 트이는 길고 커다란 공간이 생겨난다. 아름답지만 왠지 빈 공간이 느껴지는 이 시는 류시화의 시세계를 대변하는 것 같다. 그의 모든 시는 눈을 감고 자신의 안을 들여다 본다. 모든 단어들은 시인의 마음 속에서 상상력으로 빚어진 형상들 같다. 그는 투명한 유리로 언어의 집을 짓듯 시에 등장하는 다양한 단어를 가지고 시를 빚는 것을 즐기고 사랑한다. 그리고 시의 말미엔 항상 잠언이 있다.
시를 읽어갈 수록 내 마음은 말갛게 빚어진 정교한 언어의 집에 갇히는 느낌이었다. 왜일까? 문단에서 배척하는 베스트셀러 작가라는 선입관 때문일까? 지나치게 초월적인 이미지 때문일까. 아니면 과연 내가 시 속에서 진정성을 발견하지 못한 때문일까.
많이 읽히고, 많이 사랑받고, 많은 위로와 평안을 주는 잠언집과 번역서와 시집과 수필집을 오래도록 소개해온 류시화 작가. 많은 사람들에게서 사랑받는 아름다운 운율과 정신으로 시를 빚지만 시에서는 뭔가가 부족하게 느껴진다. 시에 등장하는 슬픔, 고독, 세계 이런 단어들이 지나치게 추상명사로 다가온다.
나도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자격도 안되면서 뭘 이렇게 구구절절 읊고 있는지. 그런데 도대체 좋은 시, 좋은 시인이란 어떻다고 생각하기에 내가 이런 말을 할까? 누구는 좋은 시인, 누구는 부족해 이렇게 재단해가며..
100일이 되면 내 맘속에 좋은 시에 대한 정의가 내려져 있기를 바란다.


지난번에 그 내공 깊음에 댓글조차 달리 않고 지나갔던 몇 분들 중의 한 분이 영미님이세요..^^
하루 한 편의 시를 읽고 그 안에서 스스로를 찾아간다..
참으로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이 전해져 오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단군일지를 100일 동안 작성하신다면 영미님의 세계가 너무도 깊어지고 확장될 것 같아
제 가슴이 다 설레입니다..
지금까지 100% 출석률을 기록하고 계시지만
새벽기상 습관화정도가 아니라 지금처럼 단군일지를 활용하시어
2010년 가을이 정말 의미있는 시간으로 꽉 채워지시기 마음 깊이 응원하고 박수 보냅니다.
좋은 시들 사이에서 편안한 마음으로 잠시 노니다 갑니다..^^








모임자리에서 어울리지 못하고 말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오면 어쩌나 고민했었는데..
영미님을 비롯한 모든 분들이 참 부드럽고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셨어요.
장소도 한몫 한듯 하구요. ^^
부족원님들이 말씀하시는 걸 가만 듣고 있으면 정말 한가지 이상씩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더라구요..
저도 시를 좋아했었는데..영미님처럼 깊게는 아니였지만요..
시를 쓰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어렴풋이 알겠더라구요.
사실 저도 아주 가끔은 일기장에 시를 적고는 해요...그냥 혼자 쓰고 읽는 것만 으로도 행복을 느끼면서요 ㅋㅋ.
영미님의 글 자주 볼수 있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