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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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목 : 행복한 100일의 새벽 데이트
2. 새벽기상 시간 및 새벽활동 시간 : 5시 ~ 7시
새벽활동 : 새벽 공기를 들이 마신 후 하루 한권의 시집을 읽고 느낀 점을 적는다
3.나의 전체적인 목표 : 100권의 시집을 읽고 내가 쓰고 싶은 글의 주제를 잡는다
4. 중간목표
- 매주 읽을 7권의 시집을 도서관대여와 구입을 통해 선정해서 일주일 단위로 목록을 만들어 둔다
- 단군 일지와 블로그를 통해 느낀 점을 기록한다
- 읽지 못한 시집은 휴일을 통해 그 주 안으로 읽는다
5. 목표달성을 위해 직면할 난관과 극복방법
- 남편의 취침시간이 새벽 1, 2시라 같이 깨어있게 되는 경우가 많다. 중간에 깰 것을 대비하고 가능하면 10시경 취침해서 자는 시간을 최대한으로 확보한다.
- 낮시간에 업무에 대한 집중도가 떨어질 것을 대비 점심시간에 30분 정도 잠을 잔다.
- 재미없는 시집도 일단 정한 것은 읽고 본다. 그리고 지루했다고 적는다. 왜 지루했는지 생각해본다
- 읽고 싶은 다른 책이 있으면 우선 시집을 읽고 나서 읽는다
6. 목표를 달성했을 때 나에게 일어날 긍정적 변화
- 새벽 시 읽기를 통해 많은 시인들의 시세계를 이해한다
- 순수한 새벽 시간, 시를 통한 만남을 통해 매일 스스로 선택하는 삶을 열어 나간다
- 좋아하는 시인의 시세계를 파고 든다
- 쓰고 싶은 글의 주제가 확실해진다
7.목표를 달성했을 때 나에게 주는 보상
- 가족들과 제주도 2박 3일 여행을 간다


황동규 시인은 1938년생이다. 이 시집이 발간된 때가 2006년이었으니 얼추 69세 무렵이다.
서울대 영문학과와 동대학원, 영국 에딘버러 대학 유학 까지 마치고 25년간 몸담은 대학에서 은퇴한 무렵 전후로 쓴 시들이 여기에 담겨 있다.
친구의 빈소에 가서 본 것이 참을 수 없을 만큼 하얀 밥풀을 가득 단 이팝나무, 감각들이 온몸에서 썰물처럼 빠질 때 마지막으로 느끼고 본 치미는 욕정 같은 것이다. 노년을 맞는 '참을 수 없는' 쓸쓸함, 외로움, 허무함 같은 것들이 시집의 전편에 나와 있었다.
그러다 시인은 불연듯 붓다와 예수 사이에 대화를 만들어 낸다. 그 대화를 통해 시인 자신이 많은 것을 새로 배웠다고 고백한다. 나는 아래 시를 읽고 문득 황동규 시인이 좋아졌다.
미운 오리 새끼
'우리는 깨침에 대해
너무 많은 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지 않는가,
봄이 오면 풀과 나무는 절로 꽃 피우는데?'
불타의 말에 예수는 못 들은 척
산사에 오르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산이 꿈틀대더니
꽃의 파도가 되었다.
다시 보니 산이었다.
눈을 거두며 예수가 말했다.
'사람의 속모습은 거의 비슷하지.
겉으론 봄꽃 진 다음 여름꽃 피고
꽃인지 낟알인지 모를 걸 머리에 달고 가을 억새는
좋아서 물결치지만.'
'아예 하찮은 풀로 치부하고 살다가
어느 일순 환히 꽃 피우는 자는?'
불타의 말을 받아 예수가 속삭였다.
'겁나겠지!'
이 시 읽고 열린 마음이 아래의 '허물' 읽고 털썩 엎어져 버렸다.
허물
매미 허물 하나
터진 껍질처럼 나무에 붙어 있다.
여름 신록 싱그런 혀들 사방에서 날아와
몸 못 견디게 간질일 때
누군들 터지고 싶지 않았을까?
허물 벗는 꿈 꾸지 않았을까?
허물 벗기 직전 매미의 몸
어떤 혀, 어떤 살아 있다는 간절한 느낌이
못 견디게 간질였을까?
이윽고 몸 안과 밖 가르던 막 찢어지고
드디어 허공 속으로 탈각!
간지럼 제대로 탔는가는
집이나 직장 혹은 주점 옷걸이 어디엔가
걸려 있는 제 허물 있는가 살펴보면 알 수 있으리.
한 차례 온몸으로
대허하고 소통했다는 감각이.
온몸이 간질거리는 감각으로 허물을 벗어던지고 싶은 많은 미운 오리새끼들에게!

대학 다닐 때 선배 한분이 김승희를 무척 좋아했다. 참신한 상상력, 주술적 언어들... 뭐 이런 것들이 있다고 했다.
시집의 첫 시인 '별' - 별에서 ㄹ이 떨어져서 벼가 되고, 농부의 꺽인 무릎 ㄹ이 되어 벼를 모신다, 그럴 때 벼가 별이 된다는- 을 읽고 언어와 의미로는 아름다웠지만 버뜩 드는 생각이 이분이 언어유희를 즐기고 있구나 하는 것이었다. 많은 김승희의 시들이 이렇게 말의 유희를 한다.
시 속에는 9/11테러 등의 국제 정세가 나오고, 화가들이 나오고, 치열하게 살다간 많은 예술가들이 나오고, 이국적인 많은 지명들이 거론되어 시의 소재, 시가 그려내고 있는 세상은 그 누구보다 넓고 다양하다. 그런데, 그 안에 시인 개인의 삶은 얼마 보이지 않는다. 다만, 푸른 색 연작시 안에 줄기차게 거론되는 자살과 우울의 이야기들이 시인의 심리를 짐작케 한다.
'Flow, 몰입, 미치도록 행복한 나를 만나다'를 어젯밤 읽다 잠들었었다. 어제 읽은 대목이 '말의 유희'에 관한 것이다. Flow, 몰입의 행복감을 느끼는 다양한 방법 중에 말의 유희가 있다. 상징 체계의 숙달, 지적 탐험으로서 미묘한 대화, 수수께끼 풀이, 언어의 가장 창의적 사용이라고 하는 '시' 읽기와 쓰기, 이런 것들이 말의 유희에 들어간다고 한다. 칙센트미하이에 따르면 심각한 우울증 및 다른 정서 장애 증세를 느끼는 시인과 극작가들이 글을 쓰는 이유는:
'그들의 의식이 엔트로피에 의해 과도하게 둘러싸여서, 글을 쓴다는 것이 감정의 혼란 속에서 어느 정도 질서를 잡아주는 치료 역할을 해주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자신들이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는 언어의 세계를 창조해 내어 골치 아픈 현실의 존재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는 것만이 작가들이 플로우를 경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플로우 활동과 마찬가지로 글쓰기도 중독이 되면 위험하다. 작가가 제한된 범위의 경험만을 하게 되고, 다른 경험들을 접할 가능성을 차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경험을 통제하기 위해 글을 쓰되 글쓰기 자체가 내 의식을 통제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한, 글쓰기는 무한한 오묘함을 느끼게 해주고 풍부한 보상을 받게 해주는 도구가 된다' 라고 했다.
내가 경험을 통제하기 위해 글을 쓰되 글쓰기 자체가 내 의식을 통제하도록 내버려두지 말라는 말. 글보다 삶이 우선이라는 말이겠다.
사람마다 편차가 크니 김승희의 시를 읽고 전율과 해방을 느꼈던 우리 선배같은 분도 많을 것이다.
사랑은 ㅇ을 타고
사랑은 움직인다
사랑이 동그란 바퀴를 타고 있기 때문에,
당신밖에 할 수 없는 일,
사람에서 ㅁ을 깍아 ㅇ을 만들어서
....ㅇ....ㅇ.....ㅇ.....ㅇ.....ㅇ.....
동그란 바퀴는 구르고 움직이며 때로 미끄러지기도 한다,
ㅇ.....굴렁쇠.....사랑은 누군가의 목을 조이기도 하고
들판 밖으로 나가 굴러 널브러지기도 하고
정착을 모르고 여기저기 쓰러지기도 하지만
깊고 찬 우물, 광야에서 발견한 우물의 ㅇ
아리랑.........쓰리랑........이란 말도 그렇다.
그런 말이다,
마음에 바퀴를 달고 있다는 것이다,
시베리아 남부지역, 바이칼 호숫가에 살고 있는 에벤키족의 언어에서
아리랑(alirang)은 '맞이하다'는 뜻을,
쓰리랑(serereng)은 '느껴서 알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영혼을 맞이해봐라
이별의 슬픔을 참아봐라,
아리랑 쓰리랑 두 개의 바퀴를 타고 가서, 나아가서,
찬 새벽 사막에서 우물 ㅇ을 만나봐라
마음을
.....ㅇ......ㅇ.....ㅇ.....ㅇ....ㅇ.....에 올려두고
일평생 미끄러져봐라
앉아 있는 사람에서 ㅁ이 ㅇ이 될 때까지
둥글게 둥글게 모서리 뼈를 깍아봐라,
ㅁ이 ㅇ이 될 때까지 아리 아리게 쓰리 쓰리게
뼈를 깍는 그 고통이 지나야만
웃는 웃음 ㅇ이 바퀴를 굴려 나가리니
깊고 찬 우물, 광야에서 발견한 우물의 ㅇ
'사랑을 비를 타고' 흥겨운 노래와 춤이 들리는 듯하다.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그리운) 것은 다 님이다. 중생이 석가의 님이라면 철학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화의 님이 봄비라면 마치니의 님은 이태리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니라 나를 사랑하느니라. - 군말
고은 시인은 '만해의 시는 젊은이에게는 사랑의 노래로서, 종교인에게는 구원의 언어로서, 민족주의자에게는 민족 해방의 염원을 주고받는 암호로서 읽혀질 수 있다'고 하는데 그럼 내게는?
'고도의 시적 상징, 한없이 부드러운 애무의 대상, 가열한 투쟁의 근거, 우리 생활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경험되는 모든 것들, 동시에 그 모든 사물들의 존재를 원천적으로 규정하는 진정한 실재' - '님'에 대한 고은 시인의 설명이다.
그럼 내 님은? 내가 그리워하는 것, 나를 그리워 하는 것, 내가 하나가 되려 하는 것, 그로 인한 주시는 고통도 이별도 사랑스럽고 날마다 날마다 기다리면서 나룻배처럼 낡아갈 수 있는 무엇.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그런 님이 계신가?
그 님이 있든 없든 그 존재를 그리워하고 있다. 그리워하고 있는지 몰라도 그리워하고 있는 존재. 내가 사랑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사랑하고 사랑받는 존재.
연애가 자유라면 님도 자유일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이름 좋은 자유의 알뜰한 구속을 받지 않느냐? 너에게도 님이 있느냐, 있다면 님이 아니라 너의 그림자이니라.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 기루어서 이 시를 쓴다 - 군말-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양이라면 님을 모르는 나를 뜻하는 말일게다. 이름좋은 자유의 알뜰한 구속이란 도대체 무슨 말? 나의 그림자인 님? '님의 침묵'은 수수께끼구나. 알 수 없어요. 누구의 발자취, 누구의 얼굴, 누구의 입김, 누구의 노래, 누구의 시,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인지.
모르면 아는 만큼 읽으면 그만이지. 알듯 말듯, 보여줄 듯 말듯, 가릴 듯 말듯 쓰신 그 분의 의도대로.
84년이 흘러 님의 침묵을 읽은 나도 한 용운의 '기룬 님'이다, 뭐!
내 님은 어디 있나요? 저기 잠들어 있나요?
나의 꿈
당신이 맑은 새벽에 나무 그늘 사이에서 산보할 때에,
나의 꿈은 작은 별이 되어서 당신의 머리 위에 지키고 있겠습니다.
당신이 여름날에 더위를 못 이기어 낮잠을 자거든,
나의 꿈은 맑은 바람이 되어서 당신의 주위에 떠돌겠습니다
당신이 고요한 가을밤에 그윽히 앉아서 글을 볼 때에
나의 꿈은 귀뚜라미가 되어서 책상 밑에서 <귀뚤귀뚤> 울겠습니다.
우리가 새벽에 깨어 산보하고, 달리기하고, 글을 읽고, 명상할 때 님이 다녀 가셨습니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건 팔 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드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천치(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으련다
- 자화상에서-
언어는 자신을 규정하고 미래를 형상화시키는 힘이 있다. 스물세살 때 쓴 미당의 자화상에 그의 인생이 들어있다는 것이 참으로 놀랍다. 이 자화상에 그려진 시적 자아가 미당의 삶 그대로가 맞다면 그는 종의 아들로 여전히 사회에 만연했을 신분적 비천함을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며 시를 썼을 것이다. 실제 미당의 아버지는 신교육을 받고 당시 민족주의 대자본가이던 인촌 김성수의 농토와 소작인을 관리하던 분이었고 미당의 어린 시절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신분적으로 종의 아들이라는 자괴감이 있었을 것 같다. 후에 힘과 권력 있는 곳에서 결코 떠나려 하지 않고 힘과 영광의 빛 안에서 살려고 한 그의 삶이 이러한 미당의 원형적 갈구 때문이었을까?
2000년 미당의 사후, 그의 해바라기 친일, 친권력 성향에 대해 얼마나 많은 비판이 있었던가.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눈과 입에서 죄인과 천치를 읽었고, 실제 그의 생전, 그는 자신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솔직하고도 당당했다.
첫시집 '화사집'이 나온 것이 그가 27세이던 1941년이다. 그 이후 가미가제를 칭송하고 학도군 징병을 칭송하는 시들을 1942년부터 썼다고 한다. 그는 '일본이 그렇게 쉽게 항복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못가도 몇 백년은 갈 줄 알았다'고 자신의 친일 행적에 대해 하늘의 뜻을 좇은 친일이라는 종천친일파라는 이름을 붙이며 그 당시 여느 사람들 모두 그러했다고 말했다.
68세가 되던 1983년 '안잊히는 일들'이라는 시집에서 '울산바위 이야기'를 했다. 모든 기암괴석들이 하느님의 명으로 금강산으로 날아갈제 제일 큰 울산바위도 날아가다 '세상에 제 잘난 체만 하는 온갖 기암괴석들이 하늘이 새카맣게 앞을 다투어 모두 날고 있는지라, '내 체모로서 어찌 저 잡것들 속에 한 몫 낀단 말인가?'만 싶어, 도중에 설악산 한 귀퉁이에 펑퍼짐히 주저앉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신의 막내아들과 함께 울산바위에 놀러갔던 그는 시 안에서 밝힌다. '그애한테 '이렇게 하라'고 말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그 바위의 전설을 그대로 알려준 까닭은 물론 '너도 경우에 따라서는 이렇게라도 해서 살아야 한다'는 내 오랜 경험 끝의 교훈을 암시해 두자는 것이었습니다.'
오랜 경험끝의 교훈이라는 '경우에 따라서는 이렇게라도 해서 살아야 한다' 라는 말은 무엇을 뜻할까? 서정주 시인이 권력이 있는 곳들을 향해 적극적으로 해바라기하고 산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후학들에게 이런 비판을 받는 눈먼 아름다움으로 매도되고 있는 것이다. 역사 안에서의 관계성이라는 인식이 부족할 때 미당처럼 너무도 아름다운 언어를 구사한 시인도 이렇게 비판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
내 마음에 들어온 시들은 '자화상', '학', '국화 옆에서', '내리는 눈밭속에서는', '동천',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침향', '서리오는 달밤 길' 등이었다. 미당의 아름다운 시들은 계속 사랑받을 것이다. 그의 삶에 대한 비판과 함께.
'병든 수캐', '아름다운 배암' , 주저 앉은 울산 바위', 자신을 향한 언어들이 어떻게 자신을 만들어갈 수 있는지 미당의 시에서 봤다고 하면 너무 큰 비약일까?
'국화 옆에서'와 '목화'에 나온 누님의 원형이 되었을 듯한 '만십세' 시에 나오는 세상에서 젤 좋은 17살 뒷집 곽 참봉 따님 남숙에 대한 기억, 사는데 한 중요한 표준이 되었다는 '서리 오는 달밤 길'에서 본 아주 좋다는 느낌을 주는 '구성'에 대한 기억 등 1983년 나온 '안잊히는 일들'이라는 시집을 보면 미당 시의 원류를 추적할 수 있을 것 같다.
내리는 눈발 속에서는
괜, 찬, 타, .....
괜, 찬, 타, .....
괜, 찬, 타, .....
괜, 찬, 타, .....
수북이 내려오는 눈발 속에서는
까투리 메추라기 새끼들도 깃들이어 오는 소리, .....
괜찬타, ....괜찬다,.....괜찬다, .......괜찬다,.......
포그은히 내려오는 눈발 속에서는
낯이 붉은 처녀 아이들도 깃들이어 오는 소리, .......
울고
웃고
수그리고
새파라니 얼어서
운명들이 모두 다 안 끼어 드는 소리, .......
큰놈에겐 큰 눈물 자국, 작은 놈에겐 작은 웃음 흔적,
큰 이야기 작은 이야기들이 오보록이 도란거리며 안 끼어 오는
소리, .....
괜찬타, ....
괜찬타, ....
괜찬타, .....
괜찬타, .....
끊임없이 내리는 눈발 속에서는
산도 산도 청산도 안 끼어 드는 소리. ..........
시인이 남기는 수백편의 시중에 한, 두편이 기억된다. 삶이 아니라 시로 말하는 시인. 날리는 눈발에서 네 번의 괜찬타, ....를 읽고 우리에게 전달해주는 시인.... 괜찬타,.......
과연 괜찮은가?

青天有月來幾時 하늘에 저달 언제부터 있었던가
我今停杯一問之 잠시 잔 멈추고 묻노라
人攀明月不可得 뉘라서 저달을 따올수 있으랴만
月行卻與人相隨 달은 사람을 언제나 따라온다네
皎如飛鏡臨丹闕 날던 거울이 하늘대궐에 걸렸는가
綠煙滅盡清輝發 프르스름 안개 걷히니 더욱 밝구나
但見宵從海上來 동해에서 떠오를때 바라보던 달
寧知曉向雲間沒 새벽녁 구름속에 잠기는걸 아는가
白兔擣藥秋復春 옥토끼 봄 가을 없이 약방아 찧고
嫦娥孤棲與誰鄰 이웃없는 항아선녀 외로워 어쩌나
今人不見古時月 우리는 지금 옛달을 볼수없으나
今月曾經照古人 저달은 일찍이 옛사람을 비췄으리
古人今人若流水 옛날이나 지금이나 유수같은 세월
共看明月皆如此 저달 바라보며 같은 생각 했으리라
唯願當歌對酒時 바라노니 잔들고 노래 부를때마다
月光常照金樽裡 교교한 달빛 잔 가득 비춰주시라.
- 번역은 孤芳, 李勝九의 블로그에서 따옴
예전 스쳐 지나가듯 읽은 이 백의 시구에서 마음에 남은 것이 '우리는 지금 옛달을 볼 수 없으나 저달은 일찍이 옛사람을 비췄으리'하는 구절이다.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라는 노래와 물에 빠진 달을 건지려 하다 이태백이 물에 빠져 죽었다는 이야기가 나오게된 것이 바로 위에 소개된 시 때문이 아닐지..
한시의 번역은 손대는 사람마다 틀리게 나온다. 아마 모든 시의 번역이 그럴 것이다. 고은 시인이 올해도 노벨상 수상을 못한 것에 대해 번역의 한계, 시 자체의 보편성의 부족 등 이래 저래 짚는 얘기들이 많다. 한 언어와 역사를 공유하는 사람들간의 정서를 온전히 옮기지 못하는 번역의 한계도 맞는 말이겠고 세계를 아우르는 보편성의 부족도 맞는 말일게다.
인터넷에서 찾아낸 위의 번역과 달리 허세욱 교수는 이 시를 이렇게 해석하여 번역한다.
술잔 들고 달에게
저 하늘에 저 달의
내력을 말해 주오.
내 잔 멈추고
묻노니,
사람은 저 달에
오를 수 없지만
저 달은 떠돌며
사람 따라 다니거늘.
하늘을 나는 거울이
단청 대궐에 걸린 듯
푸른 연기 사라지면
다시 휘영청 밝네.
누구나 밤이
바다로 뜨는 걸 알지만
누가 새벽녘 구름 사이로
사라지는 걸 아는가?
흰 토끼 불로약을 찧어
가을, 그리고 봄
항아는 혼자 살며
뉘라 이웃하는가?
지금 사람은
옛 달을 보지 못하지만
지금 달은
옛 사람을 비추었기로.
옛 사람, 지금 사람
모두가 흐르는 물
저 밝은 달
바라보기는 마찬가지어거늘.
지금 내 노래와
내 술잔을 보곤
달님이여! 길이
이 금빛 술통을 비춰 주소서.
해석의 차이가 천지 차이다. 한 분은 따온다고 하고 한 분은 오른다고 했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한시의 특성 때문일까? 다른 언어권의 번역시들을 읽을 때 감흥이 덜오는건 이런 번역상의 문제 때문일 것이다.
이백이 혼혈일 수도 있다는 것, 평생을 방랑했고 네번 결혼 했으며 2년간의 짧은 관직생활을 했고 안록사의 난에 연루되어 귀양가기도 했었다는 것, 두보보다 12살 위라는 것을 책에서 일러 주었다. 그리고 아마도 이백은 만성늑막염에 해당되는 부액증으로 죽었을 것이라고.

1941년 강원도 고성 생. 2001년 5월 작고. 이 시가 나온지 7개월만에 60세로 작고하셨다.
참여자가 아닌 달관자, 고뇌 없이 달관한 사물, 길찾기의 도정이 아닌 이미 찾은 자가 쓴 듯한 시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길을 찾는 도정에서 갈등하고 있기에 이미 벗어버린 듯한 달관의 시들은 하늘에 걸린 달 만큼이나 멀고 아득해 보인다.
시가 달관과 구도의 색채를 띄고 있을 때 지나친 탈속은 시로서의 매력을 떨어지게 할 수도 있다고 느꼈다. 물론 자기 수준만큼 밖에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나 시 속에 갈등이 있다가 그 갈등이 극적으로 승화되는 무언가가 느껴질 때 시가 가슴을 탁 치고 올라온다. 시 속에 달관만 그려져 있으면 이렇게 탁 치고 올라오는 무엇인가가 부족하다. 그러면, 달관과 깨달음의 시는 쓰지 말란 말인가?
이런 고요함, 나뭇잎 한 장이 어깨에 앉아서 '내 몸에 우주가 손을 얹었다'라고 느낄 수 있는 고요함이 내 가슴에 깃들면 이 시들을 다시 읽어봐야 할 것이다. 지금 이 성선의 시들은 '새는 세상을 날며 그 날개가 세상에 닿지 않는다. ', '나의 시는 지금 너무 비현실적이어서/너에게 닿을 수 없다/내 가슴은 이미 불꽃이 식어버려/너의 몸을 덥힐 수 없다'라고 읊었듯 새와 달과 나비처럼 내게는 너무 높고 신성하고 외롭기만 하다.
해설을 쓴 정효구 문학평론가는 그를 일러 '세속의 집을 버리고 우주 속으로 떠난 출가한 시인', '세속사의 문법과 거리를 두고 자연과 우주의 문법'을 배운 시인이라 칭한다. 시로써 도를 꿈꾸는 시인들이 이 성선 시인 홀로만은 아니다. 다만 시 속에 갈등을 느끼는 세속의 사람이 없었기에 시로서는 좀 아쉬운 그런 느낌이 있었다.
도 반
벽에 걸어놓은 배낭을 보면
소나무 위에 걸린 구름을 보는 것 같다
배낭을 곁에 두고 살면
삶의 길이 새의 길처럼 가벼워진다
지게 지고 가는 이의 모습이 멀리
노을 진 석양 하늘 속에 무거워도
구름을 배경으로 서 있는 혹은 걸어가는
저 삶이 진짜 아름다움인 줄
왜 이렇게 늦게 알게 되었을까
알고도 애써 모른 척 밀어냈을까
중심 저쪽 멀리 걷는 누구도
큰 구도 안에서 모두 나의 동행자라는 것
그가 또다른 나의 도반이라는 것을
이렇게 늦게 알다니
배낭 질 시간이 많이 남지 않은 지금
조도
작은 날개로
길을 다 지우고 가 버려서
그가 떠난 뒤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가지 위에 떨림 하나
그것도 잠깐만에 사라졌다
그의 삶
不立文字
황홀한 鳥道
시인은 흔적 없는 조도를 꿈꾸는데 시는 흔적의 길이라는 것이 모순이다.









영웅
이 원
오늘도 나는 낡은 오토바이에 철가방을 싣고
무서운 속도로 짜장면을 배달하지
왼쪽으로 기운 것은 오토바이가 아니라 나의 생이야
기운 것이 아니라 내 생이 왼쪽을 딛고 가는 거야
몸이 기운 쪽이 내 중심이야
기울지 않으면 중심도 없어
나는 오토바이를 허공 속으로 몰고 들어가기도 해
길을 구부렸다 폈다
길을 풀어줬다 끌어당겼다 하기도 해
오토바이는 내 길의 자궁이야
길은 자궁에 연결되어 있는 탯줄이야
그러니 탯줄을 놓치는 순간은 절대 없어
내 배후인 철가방은 안팎이 똑같은 은색이야
나는 삼류도 못 되는 정치판 같은 트릭은 쓰지 않아
겉과 속이 같은 단무지와 양파와 춘장을
철가방에 넣고 나는 달려
불에 오그라든 자국이 그대로 보이는
플라스틱 그릇에 담은 짜장면을
랩으로 밀봉하고 달려
검은 짜장이 덮고 있는 흰 면발이
불어터지지 않을 시간 안에 달려
오토바이가 기울어도 짜장면이 한쪽으로
쏠리지 않는 것
그것이 내 생의 중력이야
아니 중력을 이탈한 내 생이야
표지판이 가리키는 곳은 모두 이곳이 아니야
이곳 너머야 이 시간 이후야
나는 표지판은 믿지 않아
달리는 속도의 시간은 지금 여기가 전부야
기우는 오토바이를 따라
길도 기울고 시간도 기울고 세상도 기울고
내 몸도 기울어
기울어진 내 몸만 믿는 나는
그래 절름발이야
삐딱한 내게 생이란 말은 너무 진지하지
내 한쪽 다리는 너무 길거나 너무 짧지
그래서 재미있지
삐딱해서 생이지 절름발이여서 간절하지
길이 없어 질주하지
달리는 오토바이에서 나는 가끔은 뒤를 돌아봐
착각은 하지마 지나온 길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야
나도 이유 없이 비장해지고 싶을 때가 있어
생이 비장해 보이지 않는다면
대단해 보이지 않는다면
어느 누가 온몸이 데는 생의 열망으로 타오르겠어
그러나 내가 비장해지는 그 순간
두 개의 닳고 닳은 오토바이 바퀴는 길에게
파도를 만들어주지
길의 뼈들은 일제히 솟구쳐오르지
길이 사라진 곳에서 나는
파도를 타고 삐딱한 내 생을 관통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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랩같다. 가락을 타고 노래처럼 흘러간다.
제목이 왜 '영웅'일까?
'오토바이는 내 길의 자궁이야
길은 자궁에 연결되어 있는 탯줄이야
그러니 탯줄을 놓치는 순간은 절대 없어'
캠벨의 '신화의 힘'에서 이 시와 맞닿는 이미지 몇개를 읽는다.
'우리는 성당으로 들어감으로써 사실은 영적인 이미지로 가득 찬 세계로 들어갑니다. 성당은 우리 영적인 삶의 어머니의 자궁입니다. 그러니까 어머니 교회인 것이지요. 주위의 모든 형상은 모두 영적인 삶의 의미를 지닙니다.' - 신화의 힘 p159
'우리에게는 여백, 혹은 여백 같은 시간, 여백 같은 날이 있어야 합니다.. 바로 이 여백이야말로 우리가 무엇인지, 장차 무엇일 수 있는지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이 여백이야말로 창조의 포란실(抱卵室)입니다. .... 초원의 사냥꾼에게는 세계 전체가 성소였어요. 그러나 우리 삶의 겨냥은 지나치게 경제화, 실용화에 맞춰져 있습니다. 그래서 나이를 먹어갈수록 순간 순간의 요구가 어찌나 집요한지, 우리는 우리 자신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우리가 참으로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이런 세태를 살다보면 우리는 늘 우리에게 요구된 일만 합니다. 우리 천복(天福)의 정거장은 어디에 있느냐.... 우리는 이것을 찾아야 합니다. 오디오를 틀어놓고 좋아하는 음악을 올려 놓아도 좋습니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시시한 음악을 올려놓아도 좋습니다. 좋아하는 책을 읽어도 좋겠지요. 바로 이 성소에서 다른 삶을 '그대'라고 부르는 것을 체험하는 겁니다. 초원에 살던 사람들이 이 세상의 만물에 대해 그렇게 했듯이 말이지요.' - 신화의 힘 p179~180
오늘 만난 친구는 지난 10년간 끊임없이 자신이 아닌 모습으로 살다보니 이제 몸이 한계에 이른 듯하다고 했다. 심장이 통제할 수 없이 두근거려 거리에서 쓰러질 것 같아 119 앰블런스를 타고 병원에 실려 가기도 했고 지나친 정신적 부담감으로 인해 안정제를 매일 먹을 것을 처방받았다고 한다.
늘 요구된 일만 하다가 진정한 자신을 낳을 수 있는 '여백의 성소'를 잃어버린 우리에게는 진짜 나를 창조해갈 '자궁'이 필요하고 자궁에 연결되어 있는 '탯줄'이 필요하다.
'길도 기울고 시간도 기울고 세상도 기울고
내 몸도 기울어
기울어진 내 몸만 믿는 나는
그래 절름발이야
삐딱한 내게 생이란 말은 너무 진지하지'
캠벨은 얘기한다.
'우리는 '삶의 한 중간에 이르렀을' 때 문득 위기를 만나게 됩니다. 몸은 시들어가는데, 별같이 무수한 우리 삶의 주제가 매일밤 꿈자리를 차고 들어옵니다. 단테는 이것을, "중년에 아주 무서운 숲에서 길을 잃었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단테는 이 숲에서, 각각 자만, 욕망, 공포를 상징하는 괴물 세 마리를 만납니다. 그런데, 시적 통찰력의 화신(化身)인 베르길리우스가 나타나 지옥의 미궁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게 해줍니다. 이 지옥의 미궁은 자만과 욕망과 공포에 사로잡혀 영원으로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이 있는 곳입니다. ' 신화의 힘 p217
심리적 위기에 이른 우리의 길도 기울고 시간도 기울고 세상도 기울고 내 몸도 기울고 삐딱한 내게 생이란 말은 너무 진지하다. 중년에 아주 무서운 숲에서 길을 잃은 우리는 제각기 '자만, 욕망, 공포'를 상징하는 괴물 세마리와 싸운다. 그런데, 이 지옥의 미궁에서 나를 빠져나가게 해줄 영웅은 어디 있지?
나도 이유 없이 비장해지고 싶을 때가 있어
생이 비장해 보이지 않는다면
대단해 보이지 않는다면
어느 누가 온몸이 데는 생의 열망으로 타오르겠어
그러나 내가 비장해지는 그 순간
두 개의 닳고 닳은 오토바이 바퀴는 길에게
파도를 만들어주지
길의 뼈들은 일제히 솟구쳐오르지
길이 사라진 곳에서 나는
파도를 타고 삐딱한 내 생을 관통하지
온 몸이 데는 생의 열망으로 타올라 비장해진 내게 길의 뼈들이 솟구쳐 오른다. 길이 사라진 곳에서 삐딱한 내 생이 관통당한다.
아니, 무슨 영웅이 이래? 영웅이면 날 구원해줘야할 거 아냐? 왜 혼자 고꾸라져?
그러나, 캠벨은 말한다. 영웅은 원래 자신의 몸을 던져 희생하는 자라고.
'수많은 문화권에는, 동정녀가 영웅을 낳고, 영웅은 죽음을 당했다가 부활하는 전설이 있는데, 이것은 도대체 뭘 말하고 있는 겁니까?
구세주 성격을 지닌 주인공의 죽음과 부활은 이런 전설의 공통적인 모티프로 등장하지요. 가령 옥수수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만 해도 그래요. 소년의 꿈속에 나타나는 잘생긴 젊은이는, 죽어서 소년이 속한 민족에게 옥수수를 주지요? 옥수수는 그의 주검에서 자라나니까요. 생명으로 솟아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죽어야 했던 거죠. 태어나게 하기 위한 죽음, 죽기 위한 태어남, 이 두 패턴이 요즘 내 관심을 끄는 군요. 현존하는 모든 세대는 다음 세대가 오게 하기 위해서는 죽어야 한답니다.' 신화의 힘 p201
캠벨에 따르면 영웅은 또한 자신의 희생으로 '진리를 인식하게 하는 자'이다.
'쇼펜하우어의 말은 그런 심리적 위기가 형이상학적 깨달음의 돌파구임을 보여 줍니다. 이 형이상학적 깨달음이란 '우리'라고 하는 존재가 사실은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깨달음, '우리'라는 것은 한 생명의 두 측면이라는 깨달음입니다. 우리가 '우리'라는 것을 서로 별개인 둘로 인식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조건 아래서 형상을 경험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 영웅이란 자신의 물리적인 삶을 이러한 진리 인식의 질서에다 바친 사람을 말합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은, 우리를 바로 이러한 진실에 던져넣으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웃을 사랑하건 사랑하지 않건, 일단 진실에 대한 깨달음에만 이르면 목숨을 거는 일도 곧잘 하게 됩니다.' 신화의 힘 p211
불어터지지 않은 흰 면발을 안팎이 똑같은 은색 철가방에 넣고 중력을 이탈해 배달하는 나는 '먹고 먹히는 것이 삶의 본질'라고 캠벨아저씨가 말하는 이 세상에서 '겉과 속이 다른' 우리의 자만과 욕망과 공포와 싸워나가는 우리의 영웅이다. 어쨌든 시인은 그렇게 봤다. 철가방 오토바이맨이 왼쪽으로 기울어진 세상을 질주하는 모습이 아슬아슬, 위태 위태해 보인다. 때로 이들 오토바이맨들은 솟구치는 길과 부딛혀 자신의 삶을 내던지기도 한다.
자신으로 살지 않는 기울어진 내 세상을 인식하게 하는 자, 겉과 속이 다른 그 세상을 파도쳐 전복하게 하는 자, 그는 영웅임에 틀림이 없다.


에게해의 수평선을 금실로 꼰 금줄이다.
그 금줄 위에서 하루를 태우다
지친 해가
바다에 누워 쉬면
하늘은 금방 까만 바다가 된다
이제, 로도스섬도 지워지고
포세이돈도 지워지고
나도 지워져 가고 있다
오종일 바다는 거품 한 점 없이
갓 난 비너스는 보이질 않았다
시뇨레 시뇨레
새벽 일어나 댓글로 달아주신 따뜻한 글을 보았습니다.
누군가에게 관심을 기울인다는것,
누군가에게 작은 배려를 해준다는것
사람에게 세상에게 작은 나눔의 불씨를 폴폴 날리는 조영미님의 모습이 연상되네요.
고맙습니다.
올해 8월 그리스에서 에게해를 보았습니다.
그 에개해의 느낌을 여운을 저도 전해 드립니다.

도서관에서 빌린 이 시집을 보더니 중학교 1학년인 딸이 말한다.
'엄마, 이거 나 보라고 빌렸어? 나는 중학생이 보는, 고등학생이 읽어야할... 뭐 이런 책들은 읽기 싫어. 교과서랑 참고서 같잖아.'
'중학생 독후감 필독선'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긴 하지만 그 안에 실린 정지용의 시가 중학생용으로 각색된 건 아닐테기에 그냥 웃었다.
어젯밤 잠도 푹 잤건만 오늘은 시들이 왜 이리 자장가처럼 보이는지..
왜 일까 생각해보니 감정이 절제된 회화풍의 시들이 시와의 공감대를 형성하기 어렵게 만들기 때문인 듯 했다.
초기시들도 그러했지만 후기로 갈 수록 더욱 절제되고 이에 따라 시어들도 극도로 상징적이고 축약적이 되어갔다. 이미 지용이 시를 쓴지 60~70년이 흐른 지금, 일부 단어들이 낯설기에 시적 공감과 이해의 정도는 더욱 낮아진지도 모른다.
애창되는 향수 ' 넓은 벌 동쪽 끝으로/옛 이야기 지줄되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얼룩백이 황소가/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 를 읽을 때엔 노래가 절로 나왔다.
지용 시의 시적 화자들이 시인 본인이 아닌 경우가 많았다. 오빠를 떠나 보낸 어린 소녀, 내 맘에 맞는 이를 그리는 어여쁜 새악시, 산 너머 저쪽에는 누가 사나? 를 되뇌이는 소녀의 마음,
시를 읽을 때는 졸면서 읽었는데 이렇게 다시 뒤적 뒤적 시집을 보니 말이 참 아름답고 시 한편이 하나의 소품 정물화처럼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한번 읽을 때 틀리고, 두번, 세번 읽을 때 틀려지는 느낌이다.
발열
처마끝에 서린 연기 따라
포도순이 기어 나가는 밤, 소리없이,
가물음 땅에 스며든 더운 김이
등에 서리나니, 훈훈히,
아아, 이 애 몸이 또 달어오르노나.
가쁜 숨결을 드내시노니, 박나비처럼,
가녀린 머리, 주사 찍은 자리에, 입술을 붙이고
나는 중얼거리다, 나는 중얼거리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다신교도와도 같이.
아아, 이 애가 애자지게 보채노나!
불도 약도 달도 없는 밤,
아득 하늘에는
별들이 참벌 날으 듯하여라.
유리창 1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 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득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치고,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거니,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
중학생을 위한 독서 해설에서 일러준 바에 의하면 지용이 아들을 잃고 쓴 시라고 한다.
다시 읽어보자. 이 절제에 가슴을 찢는 무엇인가가 있다.









사평역 시인 곽재구 '받들어꽃' 1991년 발간 미래사 한국대표시인100선집.
사평역 시인 곽재구는 내 스무살 무렵 '시는 이렇게 쓰는거야'를 보여준 시인이었다. 가슴 울리는 서정이 있었고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민족과 역사에 대한 자각이 있었다. 내 마음속 풍경과 주변 일상에만 맴도는 습작의 한계를 느끼며 시의 폭을 깊고 넓게 하고 싶었지만 쉽지 않았다.
민족과 역사와 민중의 삶을 애정어린 눈으로 그리는 시인의 관심과 사랑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54년 전남 광주 출신에 전남대 국문과를 나왔다. 80년대 광주가 시인에게 그런 각성을 주었을 것이다. 내 마음을 울린 시는 시인의 뛰어난 서정시들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시를 읽는 요즘, 내 가슴을 특별히 뜨겁게 만드는 시이다.
새벽 편지
새벽에 깨어나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있으면
이 세상 깊은 어디에 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 하나 출렁이고 있을 것만 같다
고통과 쓰라림과 목마름의 정령들은 잠들고
눈시울이 붉어진 인간의 혼들만 깜박이는
아무도 모르는 고요한 그 시각에
아름다움은 새벽의 창을 열고
우리들 가슴의 깊숙한 뜨거움과 만난다
다시 고통하는 법을 익히기 시작해야겠다
이제 밝아올 아침의 자유로운 새소리를 듣기 위하여
따스한 햇살과 바람과 라일락 꽃향기를 맡기 위하여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를 사랑한다는 한마디
새벽 편지를 쓰기 위하여
새벽에 깨어나
반짝이는 별을 보고 있으면
이 세상 깊은 어디에 마르지 않는
희망의 샘 하나 출렁이고 있을 것만 같다.





6시가 한참 넘었는데 아직도 하늘은 어둡다. 잠은 쏟아지고 오늘은 정말 집중이 되지 않았다.
쥐, 호랑이, 개, 도축장, 닭, 소, 모기 등 동물들을 모티브로 시를 쓴 것이 특이했다.
지하철을 타고 출근할 때 사람들의 머리가 빼곡한 계단을 보며 떠올리곤 하던 느낌을 일으키는 시 한편 소개한다.
8시
7시는 8시를 위하여 언제나 불안하다. 7시가 되기 전까지 6시는 수백 번이나 아직은 7시가 아니라고 외친다. 7시는 6시 59분 59초까지 이불 속에 누워 편안한 척하는 나의 잠을 당당하게 짓밟으며 나타난다.
7시는 나를 거칠게 일으켜세워 예리한 분침과 초침으로 내 몸을 알맞게 등분한다. 먼저 익숙하게 엉덩이를 베어내어 변소에 던져버린다. 다음은 얼굴을 잘라 거울과 면도기와 함께 세숫대야에 처박아놓는다. 여기저기 널브러진 팔다리들은 허겁지겁 이불을 개고 옷을 입고 넥타이를 매고 구두를 신는다.
8시가 오는 것이 두려우면서도 나는 8시를 향해 달려간다. 어제 지나갔던 발자국을 정확하게 밟으면서, 표정 없는 사람들이 초침처럼 조급하게 지나가는 7시와 8시 사이를 지나.
아무런 생각도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7시의 거리에 쏟아져나온다. 그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기에는 8시의 입구가 너무도 좁다. 7시의 곳곳에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일시에 8시의 좁은 입구로 몰려든다. 나도 그들과 함께 초침이 가리키는 눈금과 눈금 사이 좁은 틈을 비집고 들어간다.
너무도 좁고 답답한 눈금에 가려서, 그 눈금 사이에 낀 사람들의 욕설과 아우성에 가려서 8시의 시계에는 언제나 9시가 보이지 않는다.

19년만에 나온 두번째 시집이라고 한다. 동덕여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하고 계시다.
시집을 읽으니 그만큼 아끼고 다듬어 시를 쓴 것이라 생각된다.
시인의 이름과 시집 이름 어감이 좋다. 시집을 펼치기전 설레는 기대가 좋은 시로 보상받은 듯해 기쁘다.
따라 쓰고 싶은 좋은 시들이 많았다.
이성선 시인의 시라고 하는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의 구절.. 그 시를 천천히 음미하게 하고 싶은 시인의 바램.
'다리를 빨리 지나가는 사람은 다리를 외롭게 하는 사람이네'
'우리들 희망의 절망적인 상징' - 새끼 발가락과 마주치다 중에서
'나는 먼 곳에 마음을 벗어두고 온 사내' - 예래 바다에 묻다 중에서
'남겨진 글씨들이 고아처럼 쓸쓸하다/못 박힌 중지 마디로 또박또박 이름을 적어놓고/어느 우주로 스스로를 흩었단 말인가/겨울밤/우물 깊이 떨어지는 두레박 소리' - 유필
'묻건대/이러고도 생은 과연 싸가지가 있는 것이냐!' - 치욕의 기억 중에서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철이른 낙엽하나/슬며시 곁에 내린다/그냥 있어볼 길 밖에 없는 내 곁에/저도 말없이 그냥 있는다/고맙다/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조용한 일
'먹어 치우기 위해 밥은 있고 쉬어 치우기 위해 숨은 있을 뿐' - 부시, 바쁜 중에서
'뒤축 무너진 헌 구두나 끌고/나는 또 쓸데없이/이집 저집 기웃거리며 늙어가겠지' - 때늦은 사랑 중에서
'그 앞에 고요히/무릎 꿇고 싶은 날들 있었다' - 나비 중에서
'비장의 이 허장성세' - 소리장도 중에서
'나는 눕네 아슬한 가지 끝에/늙은 까마귀 같이/무서운 날들이 오고 있네'- 빈 방 중에서
'이미 저질러진 일들이여/완성된 실수여' - 길이 아니다 중에서
'사람들 가슴에/막다른 골목 날선 조선낫 하나씩 숨어있다/파란 불꽃 하나씩 있다' - 깊이 묻다 중에서
'애가 타 기다리던 그대 오빠는 눈 부라렸지만/우리는 숫기없이 꿈 덜깬 두 산짐승/손도 한번 못잡아 본 걸요' - 옛일 중에서
'살 닳는 안타까움' - 네거리 중 에서
'쫓겨온 저 사내와/아니라고 외치며 떠밀려온 내가/세상 끝 벼랑에서 마주보네' - 거울 중에서
'누구에게 말하나 비통에 대해/별은 빛나 적적한데 그대에게?'- 서귀 중에서
'닿을 듯 닿을 듯 닿지 못하고/저물녘 봄날 골목을 빈손만 부비벼 돌아옵니다' - 춘곤 중에서
시 전체가 아닌 이렇게 한 귀퉁이 만을 적고 보니 몸의 어느 한 귀퉁이만 부각시킨 것처럼 느낌이 살아나지 않는구나. 시인이 50대 초반에 이를 때까지 적은 싯귀들을 보니 이런 정서의 시를 좋아할 정도로 내가 나이 든 것이 실감났다.
시인이 경쾌하게 읊은 경쾌하고 즐거운 정서의 시 두편도 마음에 쏙 들었다. '자전거를 끌고 여름 저녁 천변 길을 슬슬 걷는 것은 다소 상쾌한 일'로 시작되는 전주와, 우리 아버지와 친구분들이 어울려 떠들썩하게 놀며 화투를 치는 광경을 떠오르게 만드는 시 '친구들'
친구들
마굿간 시절
신용카드 한 장 변변찮은 헌털뱅이들이다
헌털뱅이 파카나 걸치고
이번엔 누구를 약올려줄까
눈에 개구가 반짝반짝 올라서들 온다
개구진 헌털뱅이들은 화투도 반은 입으로 친다
판에 오천원 내기 바둑이 하도나 꼬수워
낄낄낄 어쩔 줄을 모른다
구경하는 치들도 낄낄낄낄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른다
쇠죽 쑤는 아랫목인 듯
그 낄낄낄 위로 뒹굴며 모두 같이 등을 지진다
푹 삶은 누룽지처럼 서로를 한 대접씩 마시고
속을 데우는 것이다
오늘도 수세미수염에 부스스한 머리들을 해가지고 나타날 것이다
담배냄새를 구수하게 풍기며 이 어둑한 구석으로
옛날 아버지들처럼 모여들 것이다

낯선 경험,새로운 충격 제 3의 시라는 표제를 단 문학세계사 시집.
고려대 국문과 대학원을 나온 시인은 '시적 언어의 기하학'이라는 논문을 썼다. 과연 '시적 언어의 기하학' 스럽게 시는 암호로 가득차 있었다.
글에서 누설하는 것은 결국 글쓴이 자신이다. 문장과 단어는 이해하기 쉽고 간결해야 한다. 글쓴이의 생각이 명료해야 읽는 사람도 명료하다. - 어제 저녁 읽은 글쓰기 생각쓰기의 요지이다.
시에도 적용 가능한 것일까? 시에서 전달하려고 하는 시상과 정서의 통일은 있어야 하고 시인 자신에게 명료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시쓰기는 길을 잃고 만다.
2001년 무렵 34세의 젊은 독신 작가. 그와 나와의 거리가 지구와 안드로메다만큼 멀다.... ㅠㅠ

정신을 제대로 깨워주고 시구절들을 따라쓰게 만드는 시집이었다.
도종환 시인이 '이재무 시는 실팍하다. 속이 꽉 찬 뿌리식물처럼 단단하다..이재무 시에 내재된 야생의 정신이 나는 부럽다. 그는 고통없는 가축의 삶을 향해 길들여져가기를 거부한다'라고 시집 뒷편에 적어두었다. 도종환 시인이 이렇게 자기 이름을 걸고 추천해준 시인이니만큼 책임을 지시겠지 싶은 마음으로 읽었다.
이재무 시인은 마음 속에 청동 몸피를 가진 야생의 푸른 늑대를 버리지 못하는 개다.^^ 본인이 시를 통해 그렇게 밝혔다. 자본과, 생활과, 생존에 매여있는 그 누군들 개 아니랴. 개가 아니라 늑대로 살고 싶은 시인이 묶인 몸으로 삶에 대해 치열한 복수를 하는 것이 이재무 시인의 시이다.
비루한 생활에서 시를 발견하고 있다는 시인의 시쓰기가 안쓰럽고도 대단하다. 가시관을 쓰고 언덕을 올라가는 분처럼 비루한 우리 삶을 대변하고 있다. 모든 시에서 따라쓰고 싶은 구절을 발견했다. 내가 앞으로 우리 시를 번역한다면 이 분의 시집 또한 번역해보고 싶다.
감자알
바구니 속 미끈하게 잘 생긴 감자알보다
작고 못생긴 감자알에 먼저 눈 가고 손 간다
자주 목 막혀 냉수사발 벌컥벌컥 들이켜며
한입 크게 베어물면
까닭도 없이 삶이 문득 서럽고 경건해진다
경사 심한 비탈밭 속 지하의 시간 캄캄, 더듬거리며
스스로 길 내 가까스로 완성한 동글납작한 몸
섭섭, 서운하게 생긴 감자알들은
울퉁불퉁 요철의 시간 더 가혹하게 견뎌온 것들이리라

1974년 작고하신 신석정시인이 1971년부터 3년간 발표한 시들을 모은 유고시집이다. 모든 시들이 청탁 혹은 기고에 의해 각종 기관지, 문예지, 일간지, 월간지 등에 실렸음을 알 수 있었다.
그 매체의 특성에 따라 언어를 조정한 듯한 시들을 읽으며 노시인의 육성이 간간히 드러나긴 했지만 상당히 아쉬웠다. 신적정 시인은 전원 목가적 시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현실 참여적 시도 많이 썼다고 한다.
아래 시를 읽고 그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종 (弔鍾)
少年은 풀밭에 누웠다.
하늘은 한 알의 보리알,
지금 내 앞엔 아무것도 보이는 것이 없다.
- 黃錫璘
설령
어둡고 흐린 마음이사
한 쪼각 하늘로
덮을 수도 있고
한 자락 산으로
가릴 수도 있고
한 줄기 강물에
띄울 수도 있지만,
목이 타도록 가난한
겨레를 외면하고
갈라진 조국의
하늘을 외면하고
한 송이 꽃 같은 헛된 꿈으로 달래려는
너희 그 썩어 문드러진
순수한 노래의 탈의 임종을 위하여
나는 弔鍾을 울려주리라.
차라리
열매 없는 꽃을 찾아
꿀을 빨아먹는
벌레라면 몰라도
하늘이 한 알의 보리알로 보이는
저 가엾은 우리들의 소년을 위하여
너희 순수한 노래의 탈의 마지막을
弔鍾을 울려 장송하리라.
창조 1972.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