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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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시간과 새벽활동
◆ 새벽시간 : 05:00~07:00
◆ 새벽활동 : 독서, 쓰기
목표 : 내 생각을 정리하고 말하자.
046일차
2013.10.24/목
활동시간: 2시간
활동내역 : 신화 읽는 시간
나의 신화를 만들어간다는 것은 나의 세계가 없는 평범한 삶에서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나의 세계 하나를 창조해내는 것이다. 자주적 삶의 방식도 없고 정신적 독립성도 없는 대중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신의 삶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마침내 세상에 자신의 작은 왕국 하나를 건설해가는 이야기다. 성공과 실패가 하나의 물결처럼 서로를 교환하는 것, 승리의 환희와 패배의 모멸이 온몸을 휩싸는 일에 뛰어드는 것, 모든 신화는 바로 이 무수한 모험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이 책은 단순한 신화 읽기를 위해 쓰인 것이 아니다. 그런 류의 책들은 너무도 많다. 이 책은 모험의 선동을 위해 쓰였다. 모험에의 초대, 이것이 내가 이 책을 쓴 이유다.
047일차
2013.10.25/금
활동시간: 2시간
활동내역 : 떠남과 만남
하루하루를 낭비하지 마라. 충무공은 싸움터에서도 하루가 지나는 것을 무심코 넘기지 않았다. 그 하루를 기록하여 그날이 그날로서 존재함을 잊지 않았다. 일이 닥쳐서야 어쩔 줄 몰라 하다 모욕을 당하는 일만큼은 피해라. 충무공은 이미 수년 전부터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준비하였다. 거북선을 만들고 선박을 축조한 것은 그가 전장에서 용감히 싸우다 죽는 것만을 최선으로 아는 일개 무장이 아니라 미래를 스스로에게 유리하도록 만드는 개척자라는 것을 의미한다. 스스로 미래를 만들어내는 것만큼 확실한 승리는 없다. 그는 왜적과의 싸움에서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다. 어느 나라의 전사에도 이런 기록은 찾기 어렵다. 아마 없을 것이다.
048일차
2013.10.26/토
활동시간: 2시간
활동내역 : 그리스인 이야기
시인뿐이 아니다. 작곡가든 미술가든 조각가든 가수든 무용수든 칭하여 예술가라 불리는 모든 사람들 중에서 무사이 여신들이 문득 천둥처럼 찾아와 가슴을 뒤흔들고 내 속의 내가 아닌 또 다른 내가 되어 단 한 번의 손짓으로 심혼을 흔드는 불멸의 대작을 만들어내기를 염원하지 않는 사람은 없으리라. 그렇기에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도 어느 한 부분은 여전히 한 인류로서 중세인이며, 고대인이며, 그리스인이다. 우리의 무의식 속에 인류의 모든 과거가 살아 숨 쉬고 있다가 어떤 야생의 순간에 원시의 순수한 힘으로 우주적 교감을 이루게 될 때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정신적 시선은 의식의 혁명을 겪게 된다.
그 어떤 야생의 순간, 깨달음의 순간도 그냥은 오지 않는다. 모기가 무쇠로 된 소의 가죽을 뚫기 위해 원시의 순수한 힘을 쏟을 때 의식의 혁명이 일어난다.
059일차
2013.11.6/수
활동시간: 2
활동내역 : 녹색평론
생각해보면, 주의집중을 끊임없이 흐트러지게 하는 물건과 오락과 잡담이 갈수록 넘쳐나는 세상에서 상상력이 고갈되어가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그러나, 현대적 상황에서 홀로코스트 혹은 파국에 대한 둔감성을 조장하는 핵심적 요인은 아마 두 가지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엄중한 사태를 끊임없이 왜곡하고, 비소한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기술용어의 남용(혹은 의도적 사용) 경향이다. 예를 들어, 나치스는 유태인 학살을 '최종적 해결'이라고 불렀고, 오늘날 미국정부는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침략전쟁, 그리고 세계 전역에서 벌이는 테러와의 전쟁, 또 마약과의 전쟁에서 무고한 민간인을 살상하면서 그것을 '부수적 손상'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러한 '기술적' 용어들로 인해 지금 세계는 결코 받아들여서는 안될 끔찍한 악행들을 쉽게 용납해버리는 극단적으로 불의한 상황에 도달한 것이다.
그러나, 또 하나 파국에의 감수성을 약화시키는 것으로 빠트릴 수 없는 그리고 용서하기 어려운 중요한 행위가 있다. 그것은 시와 예술의 이름으로 홀로코스트의 경험을 극적으로 승화시키거나 혹은 '아름답게' 작품화하려는 행위이다. 이것은 특히 예술이 상품이라는 형태 이외의 통로로 전달되는 것이 갈수록 지난한 자본주의 소비사회에 오래 길들여진 감수성으로는 저항하기 어려운 문학적-예술적 관행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시도, 예술도 아니고 묵시록적 사태를 왜곡이나 환상 없이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는 용기 혹은 정신적 성숙함이다. 묵시록적 사태를 시와 예술이라는 이름 밑에서 인간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 친숙한 것으로 만드는 행위는 예술행위가 아니라 외설적 행위라고 부르는 것이 옳다.
아도르노는 아우슈비츠 이후 시를 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나치스에 의한 유태인 대학살은 실제로 인간성을 파괴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 속의 '시적 가능성'까지도 제거해버렸다고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아도르노의 비통한 선언은 물론 그 자신의 비범한 통찰력과 민감한 감수성의 소산이다. 그러나 그 통찰과 감수성에는 개인과 시대와 사회를 넘어서는 보편성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실제로 홀로코스트적 상황에서 시를 쓰려고 한다는 것은 부도덕하다기 보다 우둔한 짓일 수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택할 수 있는 아마도 가장 위엄 있는 그리고 가장 진지한 행동은 근원적 의미에서의 '침묵'인지도 모른다.
060일차
2013.11.7/목
활동시간: 2
활동내역 :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
불온성이란 어떤 뜻밖의 만남에서 느끼는 ‘저들’의 기분이다. 위대함과 탁월함의 찬양자들, 자신의 고상함과 고매함을 자랑삼는 자들, 자신이 세상의 주인이며 세상을 지배한다고 믿는 자들, 바로 그런 자들이 어떤 당혹스런 만남 앞에서 느끼는 감정이다. 그런자랑과 믿음을 비웃는 것 같은 알 수 없는 웃음 앞에서, 그 위대함 앞에 초라하고 보잘것 없는 것을 아무 거리낌 없이 내놓는 당당함 앞에서, 그 탁월한 자들의 빛나는 시선을 "생까는" 어이없는 뻔뻔스러움 앞에서 그들이 느끼는 불쾌하고 불편한 기분이다.
이거... 첨 읽을 땐 시원하다 느꼈는데 좀 더 생각해보니 '저들'한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닌 것 같다. 불안해...
078일차 2013.11.25/월 활동시간: 2 활동내역 : 관능적인 삶 변치 않고 사랑한다는 것과 잊지 못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내가 삶에서 주목하는 것은 소소한 변화와 움직임, 그 사람 혹은 그때가 아니면 내게 줄 수 없는 특별함이다. 어릴 땐 그 모든 것이 결국엔 사라진다는 사실에 공포를 느꼈고, 이후에는 아득한 상실감을 느꼈다. 그리고 어느덧, 사라짐이 선물하는 존재와 순간의 소중함에 매료되었다. 종국에는 이 모든 감각의 절실함이 나를 세상으로부터 멀어지게 할 것이다. 반짝이는 햇살 아래 떠오르는 세상을 바라보는 창문 속 노인이 되듯. <관능적인 삶> 이서희
082일차
2013.11.29/금
활동시간: 2
활동내역 : 관능적인 삶, 다른 길이 있다.
기억의 날씨
어젯밤, 밤새 밀려오는 생생한 기억들 덕분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감각에 대한 기억이었다. 지나치게 세세하게, 혹은 과장된 선명함으로 예고 없이 나를 방문한 그날의 기억들. 내가 지나왔던 시간들이 길게 펼쳐졌다 금세 마음을 바꿔 짧게 몸을 말아버리고는 내 곁에 무수히 겹쳐지기 시작했다. 가까이 있되 닿을 수는 없는 기분. 하지만 그 존재를 확연히 느낄 수 있는 또렷한 감각으로 말이다. 그저 지나간 추억이라고 부르기에는 지나치게 생생해서 눈앞에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 존재를 또렷이 떠올릴 수는 있었다. 내 주변의 질서정연한 시공간감을 부드럽지만 강력하게 밀어비리는 총체적인 감각이었다. 대단한 것들은 아니었다. 단지, 그날의 나를 둘러싼 대기, 문득 낯설어져버린 주변의 풍경, 너무 사소해서 잊고 지나갔을 법한 세밀한 움직임들이 우연한 방문객처럼 나의 밤을 두드리고 있었다. 이 곳의 지루한 날씨 탓인지 유난히 소소한 날씨의 풍경들이 몸에 닿을 듯 다가왔다. 어느 서울 변두리 골목길을 훑던 무심한 겨울 햇살, 버스 차창으로 흘러들어 오던 찬란한 봄날의 바람, 여름밤 눅눅하게 차오른 습기에 스며든 술 냄새, 놀이터를 적시던 고즈넉한 빗줄기 같은 것들 말이다. 그 속으로 가만히 몸을 맡기자 실을 잣듯 하얗고 반짝이는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나는 고치 안에 몸을 틀듯 웅크린 채 누워버렸다. 너무나 아늑해서 한동안은 나가고 싶지 않았다.
- 관능적인 삶, 이서희 -
몇 번씩 읽어도 마음에 들어오지 않는 단어, 문장이 있다. 이렇게 써봐야 알 수 있다. 몸으로 기억하는 날씨... 너무 아늑해서 한동안 나가고 싶지 않았던 날씨... 그런 게 있었던가... 오늘, 아니 지금은 뭔가 자꾸만 읽고, 쓰고 싶게 만드는 날씨다.
083일차
2013.11.30/토
활동시간: 2
활동내역 : 다른 길이 있다.
- 김근태 의장의 정치적 유산을 이어받은 인재근이 별개의 정치적 인격체로 독립하는 게 가능할까요? 물론 민주화 운동에서 쌓아온 인재근의 자산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만 -
“저는 김근태의 아내라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김근태가 살아서 못 한 것은 제가 계승해서 계속해야죠. 김근태는 묘비에 민주주의자로 남았지만, 저는 인권운동가로 남고 싶어요. 국가보안법 때문에 인권침해를 받고 고문을 받아서 결국 남편이 요절한 거잖아요. 앞으로 더 열심히 정치해서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고 평화통일을 앞당기는 인권정치인이 될 거예요. 인권을 침해당해 찾아오는 가슴 아픈 분들의 이야기에도 계속 귀를 기울일거고요."
088일차
2013.12.5/목
활동시간: 0.5
활동내역 : 감정수업, 강신주
고양이로서 인간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지혜로운 동양인들은 지행합일을 외치고 동시에 지혜로운 서양인들은 이론과 실천의 합일, 혹은 변증법적 종합을 이야기한다. 지금 인간들 스스로 자신이 앎과 삶이 괴리된 존재라는 것을 토로하고 있는 것 아닌가. 이미 지행합일이 되어 있다면 그것을 꿈꾼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니까. 놀라운 것은 인간을 제외한 모든 동물들은 지행합일이 되어 있고, 이론과 실천이 변증법적으로 통일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인간은 고양이 선생을 포함한 모든 동물들을 존경해야만 한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지행합일도 되지 않았으면서 인간은 지행합일이 이루어진 동물들을 열등하다고 조롱하며, 심지어 자신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뻐기고 있다. 정말 웃기는 일 아닌가?
089일차
2013.12.6/금
활동시간: 1
활동내역 : 삶을 위한 철학 수업, 이진경
억압이나 구속의 부재, 이런저런 선택의 가능성. 이는 자유를 누리기 위해 필요한 조건일지는 모르지만, 그것 자체로 자유로운 삶을 뜻하지는 않는다. 나를 둘러싼 ‘자유로운’ 제도나 조건이 나를 자유롭게 만들어주진 못한다. 반대의 경우도 사실일 터이다. 나를 옥죄는 구속이나 억압이 있어도 나는 자유로울 수 있다. 가난한 자의 자유, 노동하는 자의 자유, 혹은 심지어 감옥에 갇힌 자들의 자유에 대해서도 우리는 들은 적이 있지 않은가? 자유란 이런저런 조건을 입력하면 자동으로 발행되는 자판기 티켓이 아니라 어떤 조건에서든 나 자신이 만들어가야 할 세공품이다. 어떤 조건에서도 가능한 것이니 이 얼마나 다행인가!
090일차
2013.12.7/토
활동시간: 0
활동내역 : 아내의 심부름, 삼청동산책
자유란 스스로 무언가를 만들어갈 수 있는 ‘능력’과 결부된 것이다. 삶이나 행동의 방향과 결부된 어떤 힘이나 능력이다. 그것은 여러가지 그럴듯한 선택지의 유혹 앞에서도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을 하는 능력이고, 이런저런 제약과 구속 속에서도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살 수 있는 능력이다. 억압이나 구속은 그 자체로 자유와 반대되는 상태가 아니라 자유로울 수 있는 능력이 가동되는 출발선에 불과하다. 어떤 상태에서도 우리는 그 자체로 자유롭다고 할 수 없지만, 역으로 어떤 상태에서도 자유를 향해 걷기 시작할 수 있다.
091일차
2013.12.8/일
활동시간: 2
활동내역 : 삶을 위한 철학 수업
092일차
2013.12.9/월
활동시간: 2
활동내역 : 삶을 위한 철학 수업
세상에 오직 두 가지 길만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필경 거짓일 것이다 고통 앞에서 강하기만 한 사람을 가정하는 것만큼이나, 고통 앞에서 약하기만 한 사람을 가정하는 것 또한 단순하기 그지없는 허구일 것이다. 한없이 강해 보이던 이가 느닷없이 무너지는 장면, 혹은 그 반대의 장면이야말로 현실의 삶 이상으로 영화나 소설을 ‘리얼’하게 만드는 결정적인 장면 아닌가. 우리는 두 개의 길을 항상 앞에 두고 있으며, 언제나 이 두 길 사이에서 산다. 우리가 지나온 삶은 그 두 개의 길이 섞이고 교차하는 하나의 길일 것이다. 우리가 앞으로 살아갈 길 역시 그 두 개의 길이 항상 가능한 선택지로 놓여 있는 ‘하나의 길’일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어느 길로 가고 있는지, 내가 강자인지 약자인지를 확인하는 게 아니라, 고통이나 대결을 함축한 채 지금 다가오는 삶과 이번에는 어떤 방식으로 대면할 것인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강자와 약자는 따로 존재하는 어떤 인물들의 유형이 아니라, 내 안에 존재하는 두 가지 방향, 두 가지 삶의 방식인 것이다. 자유란 그 두 선택지 앞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할 자유가 아니라, 약자의 길과 동시에 다가오는 또 하나의 길, 노예적 삶과는 다른 삶을 살 가능성을 지칭하는 이름일 것이다. 그 피할 수 없는 ‘운명적인’ 매혹의 이름일 것이다.
093일차
2013.12.10/화
활동시간: 2
활동내역 : 삶을 위한 철학 수업, 관능적인 삶
가끔, 무심한 얼굴로 세상 곳곳의 불행에 대해 읊어대는 언론과 예술, 논란의 중심이 되기 위해 가장 충격적인 이야기를 우리 눈앞에 날고기 처럼 들이대는 각종 매체에 구역질을 느낀다. 보기 좋게 포장해 달라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공감인데 많은 경우 그들이 조장하는 것은 수치심이다. 갈수록 무감해지는 우리의 감각에, 세상의 온갖 불행에 노출되어 익히 들어 본 이야기 중 하나로 묻어버릴 우리의 무심함에, 더 큰 충격을 주기 위해 더 비린 불행을 찾아 바치는 듯한 그 뻔뻔함에 화가 날 때가 있다. 이야기를 얻기 위해 소비되는 구체적인 불행들. 누군가는 현실을 직시하기 위해 그와 같은 이야기를 꺼낸다고 하지만, 글쎄, 때로 우리는 너무 무책임하게 주인공을 고문하고 죽이고 대중의 관음에 밥이 되게 만들지는 않는가.
우리의 행복은 가끔 당신의 불행에 슬며시 기대고 있는 치사함을 품고 있다. 저 사람들처럼 되지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인 내 인생이 그래도 행복한 거라고 믿는다면, 만약 그 정도가 우리가 생에서 얻을 수 있는 위로와 행복이라면, 그 얼마나 비루하고 허약한 행복인가. 우리는 끊임없이 남의 이야기를 소비하고 더불어 그 불행을 먹으면서 행복을 키워 간다. 동시에 세상에 넘치는 수많은 성공 미담을 보면서 억지 희망을 꿈꿔 보지만, 사실 세상의 성공이란 얼마나 오만하고 자기 기만적인가. 결국 그 좁고 뾰족한 칼날이 내게로 향할 때면 종국에 우리가 치러야 할 것은 우리도 저렇게 될 수 있다는 희망이 아니라 그렇게 되지 못하고 앞으로도그렇게 되지 못할 운명에 대한 수치와 절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