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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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리뷰 17] 다시 만나는 카를 융, 기억 꿈 사상
1. 저자에 대하여
[북리뷰 4 참고]
2. 가슴을 무찔러 드는 글
* 검은색 1차 리뷰, 검붉은색 2차 리뷰, 파란색은 소감과 의견
[옮긴이 서문]
그러다 보니 10개월 동안 거의 매일 밤을 꼬박 새며 번역작업을 해야 했다. 이제는 밤을 새고 새벽 6시쯤 잠을 자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다. p8
내가 근무하는 대학에서 안식년을 보내도록 허락해주었기에 이 어려운 일이 가능했다. p8
융의 나이 82세가 된 1957년부터 5년 가까이 그와 줄기차게 대담한 결과 엮어진 자서전이다. ... 인생경험의 정신적인 정수만이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었으며, 그것만이 애써서 말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p8
융은 처음에는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자서전 출간을 거부했으나 자신이 죽은 후에 출간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걸고 동의했다. 과연 그 조건대로 융이 86세의 나이로 죽은 다음해인 1962년에 자서전이 출간되기에 이르렀다. p9
‘자기’가 ‘자아’에게 보내주는 신호들을 포착해나가는 과정이 융 자서전의 중심 내용을 이루는 셈이다. p9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실현의 역사다. (p11)
자기실현(Selfstverwirklichung)은 ‘자아’가 무의식 밑바닥 중심 부분에 있는 ‘자기’를 진지하게 가리킨다. 그러나 그림자, 아니마, 아니무스, 원형 등 무수한 무의식 층이 겹겹이 가로막고 있어 ‘자기’의 소리가 ‘자아’에게 잘 전달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자기’는 ‘자아’에게 꿈의 상징과 종교들의 상징들을 통하여 그 소리를 전하려고 한다. p9
그리고 무엇보다 신(神)의 존재를 심리학적으로 증명하려고 노력한 저서라고 할 만하다. p9
그는 신을 가리켜 ‘위대한 위험’이라고 규정했다. p10
융이 천천히 대답했다. “나는 신을 압니다.”
[프롤로그] 신화는 과학보다 정확하다
나는 이와 같은 형성과정을 표현하기 위해 과학적인 용어를 사용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나 자신을 과학적인 문제로서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p11
내적 견지에서 우리는 어떤 존재이며, 영원의 관점에서는 인간이 어떤 존재로 보이는가는 오직 신화를 통해서만 표현할 수 있다. 신화는 훨씬 개인적이며, 과학보다 더욱 정확하게 삶은 말해준다. 과학은 평균 개념들을 가지고 연구하는 것으로, 그 개념들은 각 개인의 생애가 지니고 있는 주관적인 다양성을 다루기에는 너무나 일반적이다. p11
그 이야기들이 사실 그대로인가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문제는 그것이 ‘나의 옛이야기’, ‘나의’ 진실인가 하는 것이다. p12
인간은 자신을 무엇과도 비교해 볼 수 없다. 인간은 원숭이도, 암소도, 나무도 아니다. 나는 하나의 인간이다. 그런데 인간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 오직 신화적인 존재만이 인간을 넘어선다. 그렇다면 인간이 어떻게 자기 자신에 대해 어떤 결정적인 견해를 가질 수 있겠는가? p12
한 생애의 이야기는 어던 지점, 즉 그 사람이 기억해내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하는데, 이미 너무나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인간은 일생이 어떻게 되어나갈지 모른다. 그러므로 생애의 이야기는 시작이 없으며, 그 목표지점도 단지 막연하게만 제시될 뿐이다. ... 인생은 허무하기 짝이 없고 너무나 불충분하여, 어떤 것이 존재할 수 있고 발전할 수 있다는 사실이 기적 그 자체라 할 만하다. ... 내가 그 시기 이전에 파멸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기적처럼 여겨졌다. p13
언제나 나에게 인생은 뿌리를 통하여 살아가는 식물처럼 생각되었다. 식물의 고유한 삶은 뿌리 속에 감추어져 보이지 않는다. 지상에 드러나 보이는 부분은 단지 여름동안만 버틴다. 그러다가 시들고 마는데 하루살이같이 덧없는 현상이다. p13
엄밀히 말해 나의 생애에서 이야기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은 영원한 불멸의 세계가 무상한 세계로 침투했던 사건들뿐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적 체험들을 주로 이야기하게 되는데, 여기에는 나의 꿈과 환상들이 포함된다. p14
나는 나 자신을 내적 사건들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 그것들이 내 생애의 특이성을 이루며, 나의 ‘자서전’은 그러한 내적 사건들을 다루고 있는 것이다. p15
일생을 사로잡은 꿈(유년시절)
검은 옷을 입은 남자
또 다른 기억이 하나 있다. ... 그것은 내가 처음으로 우유냄새를 의식하는 순간이었다. p24
그리고 또 하나의 기억이 있다. ... 또 다른 기억이 떠오른다. ... “어부들이 시체 한 구를 라인폭포에서 건져냈어요...” 덮개 없는 배수구가 있었는데, 거기서 피와 물이 졸졸 흐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거기에 온통 관심이 쏠리고 말았다. 그 무렵 나는 아직 네 살도 되지 않은 나이였다. 그리고 또 다른 영상이 떠오른다. p25
그후로 ‘사랑’이라는 말을 들을 적마다 나는 항상 미심쩍은 느낌을 갖게 되었다. ‘여성’이라는 말도 오랫동안 생래적인 불신감으로 다가왔다. ‘아버지’라는 말은 신뢰감을 주면서도 무력함을 뜻하기도 했다. ... 나중에는 인생 초기의 이러한 인상들이 수정되었다. 나는 친구를 믿었다가 그들로 인해 실망하기도 했지만, 여성들은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들에게 실망하지도 않았다. p26
또한 그녀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다른 신비한 것들과 내게는 알려지지 낳은 방법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런 소녀의 유형이 나중에 내 아니마(Anima)의 한 측면이 되었다. 그녀에게서 받은 생소한 느낌과 그런데도 그녀를 처음부터 알아온 것 같은 감정은 나에게 훗날 여성적인 것의 본질을 나타내는 여성상의 특징이 되었다. p27
밤중이 되면 막연히 불안한 마음이... 무언가가 집 주변을 돌아다녔다... 거칠고 세찬소리... 주변은 온통 위험지대... 물에 빠져 익사하고 시체들이 바위에 걸렸다. 근처 묘지... 구덩이를 팠고 갈색 흙더미.. 검은 프록코트에 유난히 높은 모자... 광택나는 검정 구두를 신은 사람들.. 엄숙한 표정... 검은 상자. p28
내가 기억할 수 있는 한에서는 최초의 꿈을 꾸었다. p31
다만 정수리에 눈이 하나 있었는데, 그 눈은 미동도 하지 않고 위쪽만 응시하고 있었다. .. 형상이 움직이지 않고 있는데도 어느 순간 벌레처럼 꿈틀거리며 보자에서 내려와 나에게 기어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가 외쳤다. “자, 그를 좀 보라구. 저것이 사람을 잡아먹는 것이야!” p33
오랜 후에야 비로소 그 기이한 형상이 일종의 남근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p33
그 지하의 신이 자꾸만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내가 구하지도 않았는데 나에게 주어진 무시무시한 계시였다. p35
나에게 ‘주 예수’는 어쩐지 일종의 죽음의 신처럼 여겨졌는데, ... 늘 찬양을 받는 그의 사랑과 자비에 대해 나는 남몰래 의심하게 되었다. p35
사람들이 요구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긍정적인 관계를 억지로 유지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하지만 나의 은밀한 불신을 좀체 극복할 수 없을 듯싶었다. p35
그 구절은 성만찬 상징 속에 있는 식인의 기본 동기에 관해 언급하고 있었다. p36
‘검은 남자’ ‘사람을 잡아먹는 것’ ‘우연’ ‘회고적인 해석’
유년시절의 꿈을 통해 나는 세상의 비밀들에 관해 눈을 뜨게 되었다. p37
불화와 불확실성 속에서
어머니가 나의 ‘계시’를 듣는다면 깜짝 놀라며 거부하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그러한 상처를 자초하고 싶지는 않았다. p42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혼자서 놀았다. p42
30년이 지난 후에 나는 다시 그 비탈에 올라서보았다. 이미 결혼을 했으며..아이들과 집도 있고 사회적인 지위도 있었다. ... 그것은 마치 다른 세계와 다른 시간으로부터 온 기별처럼 낯설게 여겨졌다. 그것은 유혹적이면서 동시에 충격적이었다. 내가 심취했던 유년시절의 세계는 영원한 것이었으며, 나는 그것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계속 굴러가며 점점 더 멀어져가는 시간 속으로 빠져들어 가고 만 것이었다. p47
이러한 행위의 의미 또는 그와 같은 것에 대해 내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은 그 당시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아무도 모르고 누구의 손도 미칠 수 없는 무언가를 소유했다는 데서 오는 새로운 자신감과 만족감으로 충분했다. ... 왜냐하면 나의 자신감이 그 비밀에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p49
이러한 회상을 함으로써, 전통을 거치지 않고도 개인의 마음속으로 침투해 들어올 수 있는 영혼의 고태적 구성요소가 있다는 확신이 처음으로 나에게 생겼다. p51
키스타에는 생명력을 저장해두는 물품, 즉 길쭉하고 검은 돌이 갖추어져 있다. 하지만 이런 연관성은 훨씬 후에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내가 어린아이였을 때 그 일이 나중에 아프리카 원주민에게서 발견한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행해진 것이었다. 사람들은 우선 행동을 하지만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는 전혀 알지 못한다.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거기에 대해 숙고해보는 것이다.
이제 반항아가 가까이 오도다(학창시절)
나를 다른 길로 유혹한 것은 혼자 있고 싶은 열망, 고독이 주는 황홀감이었다. 자연은 내게 경이로 가득 찬 대상으로 보였고 나는 거기에 깊이 빠져들고 싶었다. p53
신경증 발작을 일으키다
나는 놀라움과 은밀하고 지독한 부러움을 안은 채 그들이 방학 동안에 알프스, 그러니까 취리히 근처 저 ‘불타오르는 눈 덮인 산들’에 다녀온 이야기를 들었다. 심지어 바다에 갔다 온 이야기도 들었는데, 나는 정말 견딜 수가 없었다. p55
그 기억들은 지하에서 서로 얽혀 있는 하나의 뿌리에서 각각 뻗어나간 작은 가지들과 같으며, 무의식의 발달과정에 있는 정류장들과 같다.
‘주 예수’에 대해서 긍정적인 태도를 갖는 것이 차츰 불가능해지기는 했지만, 열한 살 때부터 신의 관념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다는 것은 기억하고 있다. p59
그 수치스러운 사건 전체를 조정해온 것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러했기 때문에 나를 밀쳐 넘어뜨린 친구에게 나는 한 번도 심하게 화를 내지 않은 것이었다. ... 나는 나 자신에게 분노했고 동시에 자신을 부끄럽게 여겼다. 왜냐하면 내가 나 자신에게 옳지 않은 일을 했으며 나 자신에게 웃음거리가 되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p66-67
나를 다른 길로 유혹한 것은 혼자 있고 싶은 열망, 고독이 주는 황홀감이었다. 자연은 내게 경이로 가득 찬 대상으로 보였고, 나는 거기에 깊이 빠져들고 싶었다. p67
한순간 갑자기, 지금 여기에 ‘내’가 있다는 의식과 함께, 내가 짙은 구름 속에서 막 빠져 나온 듯한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마치 안개의 벽 같은 것이 나의 등 뒤에 있었고, 그 벽 너머에는 아직 ‘나’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p68
‘그래, 그러면 너는 누구냐? 너는 마치 자기가 대단하다고 내세우는 악동처럼 반응하고 있구나! 게다가 너는 그 사람이 전적으로 옳다는 것을 알고 있다! 너는 열두 살에 불과한 학생이지만, 그는 한 집안의 가장인 데다 집 두 채와 멋진 말도 가지고 있는 세력가요 부자이지 않은가.’
그때 몹시 난처하게도 나 자신이 실제로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는 수학도 잘 모르고 자신감이 없는 학생이었으나, 다른 하나는 위대한 권위를 지닌 중요한 인물로 경시해서는 안 될 사람이며 그 공장주보다 더 막강하고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인물이었다. p70
그것을 보는 순간, 나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꼈다. “저것이다! 저 마차는 분명히 ‘나의’시대에서 온 것이다. 그 마차는 마치 내가 직접 타고 다녔던 것과 똑같은 종류이기 때문에 내가 그것을 다시 알아보는 것 같았다! ... ” “그래 저거였어! 그래, 저거였어!” p71
마침내 나는 실망스러운 마음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어떻든 지금은 작은 학생에 불과하다는 사실, 그의 처벌을 받아 마땅하고 그의 나이에 맞게 예절을 지켜주어야 한다는 사실들이었다. p72
생각에 구멍이 뚫리고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더 이상 생각을 하지 말자. 무언가 무서운 일,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 결코 가까이 다가가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나려 하고 있다. 왜 안 되는가? 왜냐하면 너는 가장 무서운 죄를 범하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 가장 무서운 지는 성령을 거스르는 죄이며 그것은 용서를 받을 수 없다. p74
그런데도 그들은 하느님이 원치 않는 일을 행함으로써 최초의 죄를 범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하느님이 그들 안에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심어놓았기 때문에 그들이 죄를 지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 사실은 뱀이라는 존재로 인해 분명해졌다. 아담과 이브를 말로 꾀도록 하기 위해 하느님이 그들보다 먼저 뱀을 창조했다. p77
그러므로 그들이 죄를 지어야만 하는 것이 하느님의 의도였다.
이와 같은 생각이 나를 지독한 괴로움으로부터 해방시켜주었다. 하느님 자신이 나를 이런 상황에 처하게 했다는 것을 이제는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p78
하느님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하라는 것인가, 아니면 하지 말라는 것인가? 나는 하느님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것도 지금 당장 나와 함께 무엇을 하기를 원하는지 알아내야만 한다. p78
하느님의 의지가 무엇이며 하느님이 무엇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지 이해하기 전에는 복종할 수 없었다. 나는 이제 하느님이야말로 이런 절망적인 문제를 일으킨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p79
나는 결국 굴복을 강요당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내가 이해하지 못한 채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문제는 내 영혼의 영원한 구원이기 때문이었다. p79
하느님은 종교적 전통으로는 내가 거부하고 싶은 것도 나에게 요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게 은총을 가져다준 것은 복종이었다. 그 체험 이후 나는 하느님의 은총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p81
오늘날에도 나는 외롭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들, 대부분 도통 알려고도 하지 않는 것들을 내가 알고 있고 그것을 암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p84
자연과 사원
나는 모든 경쟁을 싫어했다. 누가 놀이까지도 경쟁적으로 하게 되면 나는 그 놀이를 그만두었다. 그 후 나는 학습에서 2등에 머물렀는데 그것이 훨씬 마음을 편하게 했다. p87
속으로는 언제나 나 자신이 둘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하나는 부모의 아들로서 학교를 다니고 다른 많은 아이보다 그렇게 썩 영리하거나 주의 깊지도 않으며 근면하거나 단정하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못한 아이였다. 또 다른 하나는 다 자란 어른으로 정말 늙고 의심이 많아 사람을 믿지 않고 인간세상으로부터 동떨어져 있는 인물 p89
그러한 세계 옆에는 또 다른 영역이 있었다. 그 영역은 사원과 같아서 그 속에 들어가는 자는 누구나 변화되었다. p90
그 무렵에는 물론 뚜렷하게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압도적인 예감과 강렬한 느낌은 받았다. 내가 혼자 있는 순간이면 곧바로 이러한 상태로 들어갈 수 있었다. 여기서 나는 나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이며 참다운 인간이라는 것을 인식했다. p90
게다가 나는 그런 식으로 하느님에게 다가가서는 안된다는 것을 확신했다. 왜냐하면 나는 체험을 통해, 은총은 오직 하느님의 의지를 철저히 실현하는 자에게만 주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 그 반대로 하느님의 의지는 그 어떤 것보다 헤아릴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하느님의 의지는 매일매일 탐색해야 되지 않을까 싶었다. p92
종교적인 계율들이 심지어 하느님의 의지를 대신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 그 계율들은 하느님의 의지를 이해할 필요가 없도록 하는 목적을 위해 있는 듯 했다. p92
그들은 별 생각없이 온갖 모순, 예를 들면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여 당연히 인간의 역사를 미리 내다본다는 식의 모순들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였다. 하느님은 인간들을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그렇게 창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죄를 짓지 말도록 금하고, 심지어 지옥불길의 영원한 저주로 벌을 주기까지 한다. p92
그러므로 아버지는 성서에 나타난 바에 의하면 정말 무시무시할 수도 있는 하느님의 의지를 경우에 따라서는 실행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인간보다는 하느님에게 더 순종하라고 재촉하는 말을 들을 때, 그런 말은 그저 강단 위에서 생각없이 내뱉은 말이라는 것이 나에게 분명해졌다. p93
사람들은 하느님의 의지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만일 사람들이 하느님의 의지를 안다면, 이 중심과제를 정말 하느님을 몹시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거룩한 경외심을 가지고 다루었을 것이다. p93
아무튼 <신약성서>에는 그와 같은 것이 없었다. <구약성서> 특히 <욥기>가 이런 점에서 깨우침을 줄 수도 있었으나, ... 하느님에 대하 두려움은 물론 언급되었지만, 그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유대적’이라 여겨졌고, 오래전에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 관한 기독교 복음에 자리를 내주었다. p94
두 인격의 어머니
나는 자문해보았다. “도대체 누가 그와 같이 말하는 것인가? ...”
그 무렵 나는 내가 책임을 져야 하며 내 운명을 어떻게 만들어 가느냐 하는 것은 나에게 달렸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다. 해답을 찾아야만 하는 문제가 나에게 제기되었다. p95
처음부터 나는 운명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 내 생애에서 그것을 실현해야만 될 것처럼 여겨졌다. 나로서는 결코 증명할 수 없었던 어떤 내적 확신이 있었다. ... 나는 확신을 붙든 적이 없었으나 확신이 나를 붙들어주어 그와 반대되는 모든 신념에 종종 대항하게 했다. 내가 바라는 것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바라는 것을 내가 행하도록 정해져 있다는 확신을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었다. p96
그리하여 나는 모든 결정적인 일에서 인간들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홀로 하느님과 함께 있다는 느낌을 자주 갖게 되었다. 내가 더 이상 혼자가 아닌 ‘그곳’에 있을 때면 언제나 나는 시간을 초월해 있었다. 나는 수백 년의 세월 속에 있었으며, 그때 답을 준 자는 이미 항상 있었고 지금도 항상 있는 존재였다. 그 ‘다른 인물’과의 대화는 나의 가장 심오한 체험이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피흘리는 전투면서 또 한편으로는 극도의 황홀경이었다. p96
물론 나는 이러한 사실들에 대해 누구와도 말할 수 없었다. 나는 그것들에 관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p96
나는 혼자서 놀았고 혼자 돌아다니며 공상하면서 나 자신만의 비밀스러운 세계를 품고 있었다. p97
그녀는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온갖 인습적이고 전통적인 견해를 가졌으나, 그녀의 무의식적인 인격이 갑자기 돌출하곤 했다. 그 인격은 예상 외로 강력했으며 범접할 수 없는 권위를 지닌 어둡고 거대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p97
"물론이지, 새끼들을 그 따위로 키워서는 정말 안되지!" 그 순간 나는 어머니가 그 정장한 원숭이새끼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p99
그때 삼위일체에 관한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나의 관심을 끄는 뭔가가 있었다. 셋이면서 동시에 하나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내적 모순을 지니고 있는 문제였는데, 그 모순이 내 마음을 끌었다. p104
성찬식은 단지 하나의 추모식사에 불과했다. ... 즉 1860년 전에 죽은 ‘주 예수’를 추도하는 축제였다. 하지만 거기에는 “받아 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와 같은 다소 시사적인 말들이 있었다. ... 나는 이런 방식으로 예수와 한 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로서는 너무나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겨졌기 때문에, 분명히 그 배후에 뭔가 커다란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p105
사람들은 그런 것을 가리켜 ‘기독교’라고 불렀으나, 내가 하느님을 경험한 바에 의하면 그 모든 것은 하느님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 그것은 종교가 아니었고 거기에는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았다. 교회는 내가 더 이상 가서는 안되는 곳이었다. 나에게는 그곳이 생명이 아니라 죽음이 있는 곳이었다. p108
내가 생각하기에 하느님은 인간적이 아니다. 그는 인간적인 것이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위대한 존재다. 하느님은 자비로우면서도 동시에 두려운 존재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위대한 위험이다. ... 예수도 이러한 사실을 인지하고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라고 가르쳤던 것이다. p109
종교를 전체와의 유일하고 의미있는 관계로 여겼던 나의 종교관은 붕괴되고 말았다. .. 나는 더 이상 일반적인 신앙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 즉 누구하고도 나누어가질 수 없는 ‘나의 비밀’과 관련을 맺을 뿐이었다. 그것은 역겹기도 하고, 아주 나쁘게 말하면 천박하기도 하고 우스꽝스럽기도 했다. 그것은 일종의 악마적인 웃음거리였다. p109
이것과 관련하여 악마를 고소해봤자 역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악마 역시 하느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이다. 하느님만이 실재였으며 파괴하는 불이요 형언할 수 없는 은총이었다. ... 나는 매우 진지하게 성찬식을 준비하고 은총과 계시를 체험하기를 기대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느님은 그 자리에 없었다. 원, 세상에! p110
나는 교회로부터 굴러 떨어졌다. 그것이 나를 슬픔으로 가득 차게 했고,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줄곧 마음을 어둡게 했다. p110
악의 기원
1869년에 간행된 비더만(Biedermann)의 <기독교 교리>
나는 그로부터 종교란 ‘인간이 하느님과 자립적인 관계를 맺는 영적인 행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견해가 나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왜냐하면 종교란 하느님이 나와 함께 이루는 그 무엇이라고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즉, 그것은 하느님 편에서의 행위로 나는 다만 거기에 맡겨져 있을 뿐이었다. 하느님은 나보다 강하기 때문이었다. ...
나는 비더만의 <하느님의 본질>이라는 장에서, 하느님은 ‘인간 자아와 유사하게 상상될 수 있는 인격’으로서, 그리고 또한 ‘세계를 포괄하면서 세계를 전적으로 초월하는 고유의 자아’로서 스스로를 나타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p112
나는 나 자신의 자아와 유사하게 하느님을 상상하는 것에 대해 자못 심하게 반대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직접적인 신성모독은 아닐지라도 지나친 오만이라고 여겨졌다. p112
나는 이 구절이 내가 몰두하고 있던 하느님의 어두운 측면, 즉 하느님의 복수심과 위험한 격노, 하느님의 전능함으로 창조된 피조물에 대한 이해할 수 없는 행위 등에 관해 뭔가 말해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데도 피조물을 시험대 위에 세웠다. 자, 그럼 이런 하느님의 성격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와 같이 행동하는 인간적인 인격은 무엇이란 말인가?
악마 역시 하느님의 피조물이었다. 나는 악마에 관해 읽어보아야만 했다. 악마는 아주 중요한 존재로 여겨졌다. 나는 다시 교리책을 열어 고통과 불완전함과 악의 근거에 대한 화급한 물음의 답을 찾았으나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p116
그러나 어딘가에서, 어떤 시간에, 나처럼 진리를 탐구하는 자들이 있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들은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자신과 남들을 속이려 하지 않으며, 고통으로 가득한 이 세상의 현실을 부정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일 것이었다. p116
나는 생각했다. ‘드디어 여기에 악마를 진지하게 다루고, 완전한 세계를 창조하려는 하느님의 의도를 방해하는 힘을 가진 적대자와 피로 계약을 맺기까지 한 자가 있구나.’ p117
아버지의 서재에는 철학자의 책이 없었다. 그들은 따지며 생각한다는 이유로 아버지로부터 의심을 받고 있었다. p118
신의 존재는 증명될 수 없으며 신이라는 관념의 선재성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 그렇지 않을지라도 잠재적으로는 인간 안에 본래부터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무튼 우리의 “정신적 능력은 그토록 숭고한 관념을 만들어낼 수 있도록 어느 일정한 수준까지는 이미 발달되어 있음이 틀림없다.”는 것이었다. p119
그가 신의 존재에 대해 충분히 확신하고 있다는 점을 내세우고 싶어 한다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왜 그는 그 사실을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은 것인가? 왜 그는 사람이 하느님이라는 관념을 ‘만들어내며’ 그럴 수 있기 위해서는 우선 일정한 수준으로 발달해 있지 않으면 안 된다고 정말로 생각하는 것처럼 행하는 것인가? p119
하느님의 존재는 우리의 증명 여하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하느님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는가? ... 그것은 사람들이 무언가를 상상하고 생각해서 고안해내고, 그러고 나서 믿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 어떻게 하느님이 나에게는 자명한 것이 되었을까? ... 이 철학자들은 어찌하여 하느님은 일종이 관념이며 자기들이 만들어낼 수도 있고 그러지 않을 수도 있는 임의적인 가설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 나는 철학자들에게 틀림없이 뭔가 잘못된 것이 있을 거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p121
악마가 본래부터 악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명백한 모순, 즉 이원론에 빠져버리고 말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악마도 원래는 선한 것으로 창조되었으나 그의 오만 때문에 타락하게 되었다고 가정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주장은 그것이 설명하려고 하는 악이 이미 자만심이라는 악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나는 그 지적을 읽고 대단히 흡족했다. 그밖에 악의 기원은 ‘설명되지도 않고 설명할 수도 없는’것이라고 했다. 내가 보기에 그 말은 그도 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악의 기원에 대해서는 숙고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p122
칸트와 쇼펜하우어를 읽다
“유감스럽게도 이 작문은 거짓이다. 너는 이것을 어디서 베꼈느냐? 진실을 자백하라!”
“나는 그것을 베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좋은 작문을 쓰려고 특별히 노력을 기울였단 말입니다.”
“너는 거짓말을 하고 있어! 너는 이런 작문을 지금까지 한 번도 쓴 적이 없어. 아무도 네 말을 믿지 않을 거야. 그래, 어디서 베꼈지?” p126
도대체 어떻게 하면 내가 자문을 베끼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단 말인가? ...
내가 무력하여 맹목적이고 어리석은 운명에 던져졌다는 결론으로 언제나 다시 돌아올 뿐이었다. 그 운명은 나에게 거짓말쟁이요 사기꾼이라는 낙인을 찍어주었다. p127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이 질서있는 우주 속에, 신의 세계 안에, 온갖 것이 태어나고 온갖 것이 이미 죽어 있는 영원 속에 살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p130
식물들은 무엇을 의도하는 일도 없고 이탈하지도 않으면서 신의 세계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생각까지 표현했다. 나무들은 특히 신비로웠으며 나에게는 생명의 불가해한 의미를 직접적으로 구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므로 숲은 사람들이 생명의 심오한 의미와 경이로운 작용을 가장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는 장소였다. p130
만족스럽게도 나는 나의 많은 영감이 그 사상들과 역사적인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p132
쇼펜하우어, 그는 눈에 보이도록 여실히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의 고통, 그리고 혼란과 고난과 악에 대해 처음으로 이야기한 사람이었다. ... 비로소 세계가 어쩐지 가장 좋은 것만을 기초로 세워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직시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철학자가 나왔다. p133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신은 어떤 신성모독에 의해서도 기분이 상하지 않고, 오히려 반대로 인간이 밝고 긍정적인 면뿐만 아니라 어둠과 불경스러움도 갖도록 신성모독을 요구하기까지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p134
<순수이성 비판>은 몹시 골머리를 앓으며 읽었다. ... 보람이 있었다. 쇼펜하우어의 사상체계에서 근본적인 결함을 발견했다고 믿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는 순수한 본체, 즉 ‘사물 그 자체’를 인격화하고 그 성질을 규정하여 형이상학적인 진술을 하는 심각한 과오를 범했던 것이다. p135
<시학>에 따르면, 가장 좋은 시는 그 창조의 노력을 사람들이 알아차리지 못하는 시 p137
조심스럽게 물어서 조사해본 결과, 내가 사람들이 알 리가 없는 것들에 관해 자주 발언하거나 넌지시 의견을 말하기 때문에 그들이 나를 꺼려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p137
‘신의 세계’라는 표현이 어떤 사람에게는 감상적으로 들리겠지만 나에게는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모든 ‘초인간적’인 것들, 눈부신 빛, 심연의 어두움, 시공의 무한성이 지닌 차가운 무감정, 비합리적인 우연세계의 으스스한 괴기성 등이 ‘신의 세계’에 속했다. ‘신’은 나의 모든 것이었지, 단지 ‘교화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p138
자연과학 vs 신의 세계
나는 불쌍한 아버지가 내적인 의혹으로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피하여 맹목적인 믿음만을 주장했다. 그는 그 믿음을 쟁취해야만 했고 필사적인 노력으로 강요하려고 했다. p141
하느님 자신이 어떻게 한 인간을 영적인 세계질서로부터 떼어내 신성모독을 하도록 저주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을 하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해서 그들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p142
나 자신이 성실치 못해 버림을 받은 듯이 여겨졌다. 나는 스스로 이렇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너는 속이는 자다. 너는 거짓말을 함으로써 너에게 잘 대해주는 사람들을 속이고 있어. ... 또한 하느님 자신이 어떻게 한 인간을 영적인 세계질서로부터 떼어내 신성모독을 하도록 저주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을 하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다고 해서 그들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 나는 나 자신에 대한 혐오를 받아들이고 그 것을 참아내는 법을 배워야만 해.” p142
교회공동체라는 말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p144
여행과 환상, 매력적인 모험의 세계로!
그러나 이제 반항아가 가까이 오도다.
그 음료는 술이므로......
그 곳에는 더 이상 안과 밖이 따로 없고 나와 타인, 제1의 인격과 제2의 인격, 조심스러움과 소심함도 없었다. 땅과 하늘, 세계와 그 안에서 ‘기고 날고’, 돌고, 올라가고, 떨어지는 모든 것이 하나가 되었다. 나는 부끄러워하면서도 기분 좋게 의기양양하게 술에 취했다. ... 그것은 아름다움과 감각에 대한 하나의 발견과 예감으로 남았다. 나는 그것들을 단지 나 자신의 어리석음 때문에 못 쓰게 만들어왔던 것이다. p148
그의 아내와 자식들은 성자인 남편과 아버지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었을까. 아버지가 나에게 특히 사랑스럽게 여겨진 것은 바로 그의 결점과 부족함 때문이었는데 말이다. 나는 생각했다. 그렇다. 어떻게 사람이 성자와 함께 살 수 있단 말인가? ... 성자는 은둔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지만 그의 은둔처는 집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p151
아름다운 시간들(대학시절)
파우스트와 요한복음
그런데 제2의 인격은 파우스트 속에 인격화된 바와 같이 중세의 은밀한 일체감을 느꼈고, 아마도 괴테의 심금을 깊이 울렸을 흘러간 시대의 유산과도 그러한 일체감을 느겼다. 그러므로 괴테에게도 제2의 인격은 하나의 실재였다. 이 사실은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p168
나는 괴테가 그 시대에 제공한 해답이 바로 파우스트라는 사실을 확신했다. 이러한 통찰은 나에게 위안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내적 안정감과 인류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확신을 더욱 강하게 해주었다. 나는 더 이상 고립된 존재가 아니며 단순한 호기심의 대상이나 이를테면 잔인한 자연의 희롱물도 아니었다. 나의 대부요 보증인은 위대한 괴테 바로 그 자신이었다.
p169
그 당시 나의 세계관은 완전히 바뀌고 말았다. 나는 나의 길이 이제는 돌이킬 수 없게 외부로, 제한된 세계 속으로, 삼차원의 어둠속으로 이끌려가고 있음을 인식했다. p171
어디서 이런 꿈이 오는 것인가? 그때까지만 해도 이런 꿈들은 당연히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보내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수많은 인식비판을 익혔기 때문에 의혹이 거세게 일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나의 통찰이 오랫동안 발전하다가 그때 갑자기 꿈속에 나타나게 된 것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p171
나와 제2의 인격 사이에는 분열이 생겼으며, 그 결과 나는 제1의 인격 쪽으로 기울었고, 그만큼 제2의 인격으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되었다. 제2의 인격은 적어도 어느 정도 자율적인 인격임을 암시하게 되었다. p173
무엇보다 먼저 부모의 환경과 그들의 정신세계를 알게 된다. 그는 자신의 개성 때문에 부모의 정신세계와는 제약된 범위 안에서만 일치할 뿐이다. 그런데 가족정신은 다른 한편으로는 그 나름대로 시대정신에 의해 깊이 영향을 받는다. 시대정신 그 자체는 대개 무의식적이다. p173
돌이켜보면 내 어린 시절의 발달이 미래의 사건들을 얼마나 미리 잘 말해주고 있으며, ... 그러한 계시는 어제 오늘에 생긴 것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이미 그 그림자를 던져온 것이었다. p175
우리 인간은 자기 자신만의 개인적인 삶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수세기에 걸친 집단정신의 고도로 수준 높은 대변자요 희생물이요 후원자인 셈이다. p175
서양 종교는 분명히 말해 이러한 내적 인간에 초점을 맞추어, 2천 년 전부터 내적 인간을 의식의 표층으로 끌어올려 그 인격의 특성을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진지하게 노력해왔다. “밖으로 나가지 말라. 진리는 내적 인간에 깃들어 있다!” p176
아버지의 죽음과 궁핍한 시절
내가 보기에 어떤 특별한 것이 아버지를 괴롭히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했으며, 짐작컨대 그것은 아버지의 종교적 세계관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었다. 나는 일련의 암시들을 통해 그것이 종교적인 회의라는 것을 확신했다. ... 모든 경험 중에서 가장 명백한 하느님에 대한 체험을 아버지가 갖지 않았다는 것은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 왜 그는 그런 싸움을 모든 피조물의 비밀스러운 창조자이며 세계의 고통에 대해 실제로 책임이 있는 단 한 분인 하느님과 하지 않았을까? ... 하느님은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나에게조차 그런 꿈을 보여주었으며 나의 운명을 결정지었다. 그 이유는 모르지만 그 일은 그렇게 일어났다. ... 아마도 아버지가 하느님을 직접 체험하는 일을 이해할 수 있었다면 나는 그것을 밝혔을지도 모른다. p179
한번은 아버지가 기도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아버지는 신앙을 지키려고 필사적으로 몸부림치고 있었다. 나는 충격을 받고 화까지 치밀었다. 아버지가 얼마나 절망적으로 교회와 그 신학적 사고방식에 붙들려 있는가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것들은 아버지가 하느님에게 직접 도달할 수 있는 모든 길을 막아버리고는 의리없이 아버지를 버리고 말았다. p180
유물론 역시 신학과 마찬가지로 믿어야만 하는 것 이었다! 나는 이 두 가지 다 인식론적 비판이나 경험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p181
그들은 눈을 내리깔고 / 대학을 떠나 속물의 땅으로 돌아갔도다. p183
한번은 어머니가 나를 향해서인지 주변 공기를 향해서인지 ‘제2의’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는 너를 위해서 돌아가셨구나.” p185
"아버지가 꿈속에서 돌아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리고 아버지가 그토록 ‘실재’처럼 보였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리고 아버지가 그토록 ‘실재’처럼 보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 처음으로 사후의 삶에 대해 생각하도록 했다. p186
그의 생애의 마지막 10년 동안, 우리 두 사람은 어두운 그림자가 더욱 길어지고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시 자주 만났다. p190
차라투스트라는 니체의 파우스트
나는 그리스도를 전면에 내세워 그를 하느님과 인간의 드라마에서 결정적인 유일한 인물로 만드는 견해에 대해 동조할 수 없었다. 내가 보기에 이런 견해는 그리스도가 죽은 후에는 그를 낳았던 성령이 사람들 가운데서 그를 대신할 것이라는 그리스도 자신의 견해와도 전적으로 모순되었다. p192
아무튼 어느 시대나 세계 어느 곳이나 이와 같은 이야기들이 반복해서 보고되고 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로 확인할 수 있었다. 여기에는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어디서나 똑같은 종교적인 전제들이 있었다는 데서 이유를 찾을 수도 없을 것이었다. p193
니체는 이미 얼마 동안 독서계획에 들어 있었으나, 마음준비가 덜 되었다고 느껴져 읽기를 망설였다. ... 이와 같은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나는 호기심에 끌려 마침내 니체의 책을 읽기로 결심했다. ... 차라투스트라는 니체의 파우스트였다. 이제ㅔ 나의 제2의 인격은 차라투스타라였다. ... 그렇다면 나의 제2의 인격도 병적이란 말인가?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은 나를 공포감에 젖게 했다. 나는 오랫동안 그러한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도 나를 가만두지 않고 좋지 않은 때에 반복해서 나타나 나 자신을 돌이켜보도록 밀어붙였다. 니체는 인생 후반, 그러니까 중반을 넘기고서야 제2의 인격을 비로소 발견했으나, 거기에 비해 나는 제2의 인격을 이미 소년시절부터 알고 있었다. p199
그런 이유로 니체는 과장된 문체, 도가 지나친 은유, 환희의 송가를 떠벌리게 된 것이었다. 이런 것들은 연관성 없는 배울 만한 지식들에 온통 정신이 팔려 있는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알아듣게 하려는 시도이긴 했지만 허사였다. 그리고 그는 줄 타는 광대로서 자기 자신의 한도를 넘어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p200
나는 언제 어디선가 다이아몬드 계곡을 지나온 것도 같은데, 내가 가지고 온 광석표본이 자갈돌이 아니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확신시킬 수가 없었다. 그것을 더 가까이 들여다보면 나 자신까지도 확신할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p202
상처 입은 자만이 다른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다!
우리는 개선이나 치료가 어느 정도 오래 지속되는지 전혀 알지 못했으며, 나는 그와 같이 불확실한 가운데 일하는 것에 대해 늘 저항을 느꼈다. 마찬가지로 환자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내가 결정하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환자 스스로 어떤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발전해가는지 환자 자신으로부터 들어서 아는 것이 더욱 중요했다. p230
누가 도덕적 지각없이 몰래 죄를 짓고 발각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의 사례가 보여주듯이 벌을 받는 일이 있을 수 있다. 결국 모든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때로는 동물이나 식물까지도 그 죄를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p235
나는 소크라테스의 대리인이다. 라는 식으로 한탄한다면, 그것은 ‘나는 소크라테스처럼 부당하게 고발당하고 있다’는 뜻을 담고 있음을 나는 발견했다. .. 열등의식에 대한 보상을 의미하고 있다. p239
나는 정신병에 보편적인 인격심리학이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과 여기서도 오랜 인류의 갈등이 재발견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다. ... 사실 우리는 정신병에서... 오히려 우리 자신의 존재의 바탕과 마주치게 된다. p241
당신이 치료에 실패했다면 내가 이 권총으로 당신을 쏘아 죽였을 거예요! p246
나는 정신병 환자의 고통을 다른 관점에서 보게 되었다. 왜냐하면 나는 이제 그들의 내적 체험의 의미있는 현상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p247
환자들
꿈의 분석
나의 분석에서는 이론적 전제들은 아무런 구실도 하지 못한다. 나는 의도적으로 체계적인 것을 멀리하고 있다. 나에게는 각 개인에 대한 개별적인 이해만이 있을 뿐이다. 모든 환자에게 각각 다른 언어가 필요한 법이다. p249
1909년에 나는 이미 잠재적 정신병의 상징적 표현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 병을 치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무렵 나는 신화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p249
마음은 정말 신체보다도 더욱 복잡하고 접근하기 어렵다. 마음은 이를테면 세계의 절반으로, 우리가 그것을 의식할 때에만 존재하게 된다. 그러므로 마음은 단순히 개인적일 뿐만 아니라 세계의 문제이며, 정신과 의사는 전체 세계에 관여해야 한다. p250
정신치료자는 단지 환자만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의사 자신이 자기를 이해하는 것이다. p250
꿈은 의식적인 태도에 대한 보상 바로 그것이다. p253
상처 입은 자만이 치유할 수 있다. 그러나 의사가 체면(Persona)을 갑옷처럼 두르고 있으면 그는 아무런 효과도 얻지 못하게 된다. p253
고해신부 역할을 해줄 아버지 같은 사람이나 어머니 같은 사람을 가지도록 하시오! 여성들은 그런 일에 대단한 재능이 있다. 여성들은 대개 뛰어난 직관과 정확한 비판력을 지니고 있으며, 남자의 비밀스러운 의향을 간파할 줄 알고, 경우에 따라서는 남자의 아니마(Anima)가 꾸미는 음모까지 꿰뚫어볼 줄도 안다. 여자들은 남자가 보지 못하는 측면을 본다. p254
그것은 당신이 우선 당신 자신을 알아가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당신 자신이 치료의 도구입니다. 당신이 올바르지 않다면, 어떻게 환자가 올바르게 되겠습니까? 당신이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환자를 확신시킬 수 있겠습니까? 당신 자신이 진정한 재료가 되어야만 합니다. p254
집단무의식의 원형에 대하여
환자 편에서 전이가 일어난다든지 의사와 환자 간에 다소 무의식적인 동일시가 일어날 때에는 때때로 심령심리학적 성질을 지닌 현상이 야기될 수도 있다. p259
남편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 부인들이 질투심이 많아 남편의 교우관계를 깨뜨리는 일이 흔히 일어나는 법이다. p259
이러한 경험에서 중요한 점은 원형적인 상황(이 사례에서는 죽음이라는 상황이지만)과 관련하여 종종 관찰되는 전형적인 동시성 현상이다. 무의식에서 시간과 공간을 상대화함으로써 나는 전혀 다른 곳에서 실제로 일어난 어떤 일을 지각할 수 있었다. 집단무의식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것으로, 고대에서 ‘만물의 공감’이라고 불렀던 것의 기초다. 이 사례에서는 나의 무의식이 내 환자의 상태를 알고 있었던 셈이다. 나는 이미 그날 저녁 내내 보통 때의 기분하고는 유난히 달리, 이상하게도 마음이 어수선하고 신경이 예민했던 것이다. p261
나는 사람들이 인생문제들에 대해 불충분하거나 잘못된 해답으로 얼버무릴 때 신경증이 되는 경우를 자주 보아왔다. 사람들은 지위, 결혼, 명성, 외적인 성공, 재물을 추구한다. 하지만 그들이 추구하는 것들을 소유하게 되었을 때조차 사람들은 여전히 불행하고 신경증을 앓는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너무나 좁은 정신적인 한계에 갇혀 지낸다. 그들의 삶에는 흡족한 내용과 의미가 없다. 그들이 좀 더 폭넓은 인격으로 발달할 수 있다면 신경증은 보통 사라진다. 그런 이유로 인격발달이라는 관념이 나에게는 처음부터 가장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p264
오늘날에도 신자는 교회에서 상징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 p264
문제가 내적인 체험, 즉 지극히 개인적일 때는 대부분의 사람이 섬뜩한 기분이 들어 도망하기 일쑤다. ... 물론 신학자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어려운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한편으로 종교적인 것에 가깝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나 교리에 속박되어 있다. 내적 체험의 모험, 즉 영적인 모험은 많은 사람에게는 친숙하지 않다. 정신적인 실재가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파문에 해당한다. ... 이러한 문제에 직면하게 되면 흔히 사람들은 갑자기 정신에 대해 예기치 않은 깊은 경멸을 나타낸다. p267
오늘날 소위 신경증 환자들 가운데는 이전 시대라면 신경증, 즉 자기 자신과의 분열을 겪지 않았을 사람이 적지 않다. 그들이 신화에 의해 조상들의 세계와 여전히 관련을 맺고 있고, 그리하여 단지 바깥에서 보는 자연이 아닌 실제로 체험하는 자연과 연결되어 있는 그러한 시대와 환경에서 살았다면, 그들은 자기 자신과의 불일치를 면했을 것이다. 문제는, 신화의 상실을 견디지 못하고, 외적인 것에 불과한 세계, 즉 자연과학의 세계상으로 향한 길을 찾을 수도 있고, 지혜와는 조금도 상관없는 언어의 지적인 즉흥연주로 만족할 수도 없는 사람들이다. p270
그들의 표면적인 증상은 자아와 무의식 사이에 벌어져 있는 틈이 메워지는 순간 사라진다. 이러한 분열을 자신에게서 깊이 느끼고 있는 의사는 무의식의 심정 과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심리학자가 빠지기 쉬운 자아팽창의 전형적인 위급상황을 피할 수도 있을 것이다. p270
그러므로 내가 경험한 바로는, 습관적인 거짓말쟁이들 외에 가장 어렵고 배은망덕한 환자는 소위 지식인들이다. 그들이야말로 한쪽 손이 하는 일을 다른 손이 전혀 모른다. 그들은 일종의 구획심리학을 계발한다. 감정에 의해 조절되지 않는 지성으로 모든 일을 처리하려고 한다. 그런데도 그들은 신경증을 앓고 있다. p271
나는 엄청나게 많은 것을 배웠다. ... 무엇보다 나 자신의 본성에 대한 통찰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나의 오류와 실패로부터 배운 경우도 적지 않았다. p272
프로이트와의 만남
이론적인 불화
나의 정신적 발달을 향한 모험은 정신과 의사가 됨으로써 시작되었다. p275
환자는 어떤 자극어에 대해서는 연상어를 전혀 떠올리지 못하거나 반응시간이 무척 길어지곤 했다. ... 그러한 연상장애는 자극어가 정신적 상처나 갈등을 건드릴 적마다 일어났다. 하지만 환자들은 대부분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었고, 장애의 원인에 대해 물으면 환자는 흔히 기묘하게 꾸며낸 답변을 하곤 했다. p276
억압의 내용과 관련해서는 상황이 달라졌다. 이 점에서는 프로이트가 옳다고 인정할 수 없었다. 그는 억압의 원인을 성적 외상(Trauma)이라고 여기고 있었는데 나로서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p276
나로서는 그러한 성에 대한 단호한 평가가 그의 주관적 전제와 어느 정도로 연관되어 있는지, 그이 성이론이 입증 가능한 경험과 어느 정도까지 연관되어 있는지 분명치 않았다. 무엇보다 영혼에 관한 프로이트의 태도는 나에게 몹시 수상쩍게 여겨졌다. p279
그의 얼굴에 이상하게 동요하는 기색이 비쳤는데, 나로서는 그 원인을 잘 알 수 없었다. 성욕이 그에게는 일종의 누미노숨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나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p280
왜냐하면 교리, 즉 논의할 필요도 없는 신앙고백은 오직 의심을 단번에 눌러버리려고 할 때 사람들이 내세우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과학적 판단과는 더 이상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개인적인 권력충동과 관계가 있을 뿐이다. p281
그 말투는 아버지가 “사랑하는 아들아, 일요일마다 교회에 가겠다고 아버지에게 약속해다오!”라고 하는 것과 같았다. p281
왜냐하면 교리, 즉 논의할 필요도 없는 신앙고백은 오직 의심을 단번에 눌러버리려고 할 때 사람들이 내세우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과학적 판단과는 더 이상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개인적인 권력충동과 관계가 있을 뿐이다. p281
한 가지 사실은 분명했다. 항상 비종교성을 강조해온 프로이트가 일종의 교리를 준비했다는 것이었다. 또는 그가 잃어버린 질투하는 신 대신에 성욕이라고 하는 또 다른 강압적인 형상을 슬쩍 바꿔 넣었다고 하는 편이 나을 것이었다. p282
성욕은 역시 프로이트에게 신성한 힘이었으나 그의 용어와 이론에서는 성욕을 예외없이 생물학적 기능으로 표현해놓았다. 그가 성욕에 관하여 말할 때의 떨리는 어조만이 그의 내부에서 깊은 울림이 있다는 추론을 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결국 그는 성욕 역시 내면에서 보면 영성을 포함하고 있으며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고자 했다. p284
자기가 자신의 가장 나쁜 적이 되어 있는 경우, 그 사람의 신랄함보다 더 지독한 신랄함은 없을 것이다. 프로이트 자신의 말에 의하면, 그는 ‘검은 진흙탕 홍수’로 위협을 받고 있는 느낌이라고 했다. 하지만 누구보다도 프로이트 자신이 검은 심연을 퍼내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 왜 그러한 생각이 자신을 그토록 사로잡고 있는지 한 번도 자문해보지 않았다. p284
운명의 손에 넘겨져 꼼짝할 수 없게 된 니체는 스스로 ‘초인’을 창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p286
신성한 힘이란 어떤 면에서는 진실이지만 다른 면에서는 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성한 힘의 체험은 사람을 고양시키기도 하고 동시에 추락시키기도 한다. 프로이트가 성욕이 신성한 힘이며 그것은 일종의 신이면서 악마라는 심리학적인 진리를 좀 더 고려했다면, 생물학 개념의 한계에 갇히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니체도 인간존재의 바탕을 좀 더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면, 아마도 감정의 과잉으로 세계의 가장자리 밖으로 나가 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p287
동양에서는 ‘니르드반드바(Nirdvandva 양쪽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한다. 나는 이것을 명심하고 있다. 마음의 진동추는 바른 것과 그른 것 사이가 아니라 의미와 무의미 사이를 왔다갔다 한다. 신성한 힘은 사람을 극단으로 잘못 인도하는 데 그 위험성이 있다. 그것은 작은 진리를 진리의 전부인 양 여기도록 하고 작은 잘못을 치명적인 잘못으로 여기도록 한다. p287
리비도의 변환과 상징
공통점은 부친살해에 대한 환상이었다. p295
나의 말에 프로이트는 기묘한 시선, 의심이 가득 담긴 그런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그가 이렇게 말했다. “하지만 나의 권위를 위태롭게 할 수는 없어!” 그 순간 그는 권위를 상실하고 말았다. p295
그 말 속에 이미 우리 관계의 종말이 예시된 셈이었다. 프로이트는 개인적 권위를 진리보다 더 내세웠다. p295
내가 나 자신의 견해를 고집한다면 그와의 우정을 잃어버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 그래서 나는 그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p298
나에게 꿈이란 자연의 일부로서 속이려는 의도를 품고 있지 않았다. ... 꿈도 가능한 한 자연스럽게 어떤 것을 표현하려고 한다. 이러한 생명의 형태들은 우리의 눈을 속이려고 하지 않으나, 우리 자신이 근시안이어서 스스로를 속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귀가 먹었기 때문에 듣지 못하는 것이지 귀가 우리를 속이는 것은 아니다. p300
나는 의식의 잔꾀가 무의식의 자연과정에도 확대된다는 가정을 믿을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 오히려 무의식이 의식의 경향에 대해 얼마나 강하게 저항하는가를 알게 되었다. p301
나는 프리드리히 크로이처의 <고대민족의 상징과 신화>를 보게 되었는데, 그 글이 나에게 불을 댕겼다. 나는 미친 듯이 읽었고, 뜨거운 흥미를 가지고 산더미 같은 신화적인 소재와 그노시스트 저작들을 두루 섭렵했다. p301
나는 스스로 타이르곤 했다. “프로이트는 너보다 훨씬 현명하고 체험도 많은 분이다. 현재로서는 다만 그분의 말을 듣고 배우기만 해야 한다.” p304
대개 근친상간은 고도의 종교적인 내용을 나타낸다. 따라서 그것은 거의 모든 창조신화와 그 외 수많은 신화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문자주의 해석에 집착하여 상징으로서의 근친상간의 영적인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다. p309
프로이트와 결별하게 된 후 나의 모든 친구나 친지들은 나를 떠나갔다. 사람들은 나의 책을 쓰레기라고 내놓고 말했다. 나는 신비주의자로 간주되었고, 이것으로 사태는 끝장을 보게 되었다. 오직 리클린과 메더 둘만이 내 곁에 머물렀다. p310
성은 지하세계의 영의 표현으로서 아주 중요하다. 그 영은 ‘신의 또 다른 얼굴’, 즉 신의 이미지의 어두운 면이다. 지하세계의 영의 문제는 연금술의 사고세계를 탐구한 이후로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p311
그가 우리 문화에 준 충격은 무의식으로 통하는 길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는 꿈을 무의식과정에 대한 가장 중요한 정보원으로 인정함으로써, 잃어버려 이제는 어쩔 수 없다고 여겨진 가치를 과거와 망각으로부터 되찾아왔다. 그는 자신의 경험으로 무의식 정신의 존재를 증명했다. p311
우리 정신의 존재가 두 개의 극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보편적이고 기본적인 통찰은 여전히 장래의 과제로 남아 있다. p311
내 안의 여인 아니마
신화와 환상
그 무렵 나는 이상하게도 명료한 정신상태 속에서 내가 걸어온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보았다. 나는 생각했다. ‘너는 이제 신화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를 가졌다. 그리고 무의식으로 들어갈 수 있는 모든 문을 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때 내 안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있었다. “무엇 때문에 모든 문을 열려고 하는가?” 그러자 갑자기 내가 무엇을 이뤄왔는지 의문이 생겼다. ... “너 자신은 그 신화 속에서 살고 있는가?” ... “그러면 무엇이 너의 신화인가?” p316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나 자신의 환상에 주의를 기울이며 기다리는 것 밖에 없었다. p318
내 감정을 요가로 제어해야만 했다. 그러나 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경험하는 것이 나의 목표였기 때문에, 요가는 내가 안정되어 무의식과 더불어 다시 작업을 시도할 숭 있을 때까지만 했다. 나 자신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느낌을 갖자마자 나는 감정제어를 풀고 환상의 이미지와 내부의 소리가 새롭게 말하도록 했다. 인도 사람들은 이와 반대로 다양한 정신 내용과 이미지를 완전히 없애기 위한 목적으로 요가를 사용하고 있다. p325
감정을 이미지로 바꾸는 그만큼, 다시 말해 감정 속에 숨어 있는 이미지들을 발견하는 그만큼 내적인 안정이 생겼다. 만일 내가 감정에 나 자신을 내맡겼더라면 무의식의 내용에 의해 산산이 부서졌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그 무의식의 내용을 막아버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면 어쩔 수 없이 신경증에 걸렸을 것이고, 결국 무의식의 내용이 나를 파괴했을 것이다. 나의 실험을 통해 나는 점정 배후에 숨은 이미지를 의식화시키는 것이 치료의 관점에서 얼마나 크게 도움이 되는지 알았다. p326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움직이는 환상을 붙잡기 위해서는, 이를테면 나 자신을 그 속으로 빠져 들어가게 해야만 했다. 거기에 대해 나는 저항감을 느꼈을 뿐 아니라 무척 불안하기도 했다. 자기 제어력을 잃어버리고 무의식의 제물이 되지 않을까 두려웠다. 나는 그런 상태가 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신과 의사로서 너무나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이미지들을 내 것으로 삼으려는 시도를 감행해야만 했다. 만약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그 이미지들이 나를 자기들 것으로 삼았을 위험성이 있었다. p327
내가 나 개인뿐 아니라 나의 환자를 위해서 이러한 모험을 자청해서 한다는 생각은 나로 하여금 위험한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기게 했다. p328
필레몬과의 대화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아 있는 사람을 구루로 삼지만, 늘 영혼을 구루로 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p338
그녀는 재능있는 정신병 환자로 나에 대해 심한 전이현상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녀는 나의 내부에서 하나의 살아 있는 형상이 되었다. p339
나중에 나는 내 안에 있는 여성상이 남성 무의식 속에 있는 전형적인 또는 원형적인 형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를 ‘아니마’라고 불렀다. p340
매일 저녁 나는 글쓰는 일에 매달렸다. 내가 아니마에게 편지를 쓰지 않으면 그녀는 나의 환상을 파악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의 성실한 글쓰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미 적어 놓은 것은 아니마가 왜곡할 수 없을 것이고, 그걸 가지고 책략을 쓰지도 못할 것이었다. 이와 관련해서 보면, 우리가 어떤 것을 이야기하려고 마음만 먹는 것과 그것을 실제로 적어놓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나는 편지를 쓰면서 될 수 있는 한 정직하려고 노력했다.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을 버려라. 그러면 받으리라.” p341
무의식 내용은 이를테면 격리시켜야 한다. 그것을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우리가 그 내용을 인격화하여 의식으로 하여금 그 인격들과 관계를 맺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는 무의식 내용에서 힘을 제거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무의식이 그 힘을 의식에 행사하게 된다. p341
무의식의 대변자인 아니마는 그 변덕스러운 이중성으로 한 남자를 형편없이 파멸시킬 수도 있다. 결정적인 것은 결국 언제나 의식이다. 의식이 무의식의 표현을 이해하고 거기에 대해 자기의 태도를 취하게 된다. p342
무의식의 이미지를 의식에 전달해주는 것이 바로 아니마다. p343
오늘날 나는 아니마와 더 이상 대화할 필요가 없다. 나는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나 내가 그런 감정을 갖게 되었다면 똑같은 방식으로 대처했을 것이다. 오늘날 내게는 그 관념들이 직접 의식되고 있다. 왜냐하면 나는 무의식 내용을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이다. 나는 내면의 이미지들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나는 그 이미지들의 의미를 나의 꿈을 통해 직접 추론할 수 있기 때문에 이제는 중개자가 필요하지 않다. p343
죽은 자를 향한 일곱 가지 설법
무의식의 전제의 횡포에서 자유를 얻으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지적인 작업을 완수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윤리적 의무를 갖는 일이다. p345
그것은 정신병 환자를 치명적인 혼란에 빠뜨리는 무의식 이미지의 세계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합리적인 우리시대에 사라져버린 신화를 형성하는 환상의 모태이기도 하다. 신화적 환상은 도처에 존재하지만 그것은 금지되거나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있다. 무의식의 깊은 곳으로 가는 불확실한 길에 자신을 맡기는 일은 위험한 실험이나 수상한 모험으로까지 여겨진다. p345
니체는 내면의 사상세계 외에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실의 발판을 잃어버렸다. 사실 그가 자신이 내면세계를 소유했다기보다 오히려 내면세계가 그를 소유한 셈이었다. 그는 뿌리가 뽑혀 땅 위를 떠돌아다녔다. 그리하여 그는 과장하는 습성이 생기고 비현실성에 빠졌다. p346
나는 저 세상이 아닌 이 세계의 삶을 살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p347
영혼, 즉 아니마는 무의식과의 관계를 설정한다. 어떤 의미로는 그것은 사자(死者)집단과의 관계라고도 할 수 있다. 무의식은 신화적인 ‘죽음의 나라’, 즉 조상의 나라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환상 속에서 영혼이 사라졌다면 그것은 영혼이 무의식 또는 죽음의 나라로 되돌아간 셈이 된다. ... 소위 ‘영혼의 분실’ 현상과 일치한다. p349
그 무렵, 그리고 그 후로 내게는 죽은 자가, 응답이 없고 해결책이 없으며 구원되지 못한 자의 목소리로 더욱 뚜렷이 다가왔다. 그것은 나에게 숙명처럼 대답을 요구하던 의문이었다. 그 요구는 외부에서 내게로 온 것이 아니라 내면세계로부터 왔다. 그리하여 죽은 자와의 대화, 즉 ‘일곱 가지 설법’은 내가 세계를 향해서 무의식에 대해 전해줄 이야기에서 일종의ㅡ 서곡을 이루었다. p350
내가 그 영혼의 말을 받아쓴 것은 내 존재가 비교적 전체성을 지니고 살아가면서 견뎌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었다. p351
나는 될 수 있는 한 이미지와 그 내용을 일일이 이해하고, 합리적으로 정리하고, 무엇보다 삶 속에서 그것을 인식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이것은 사람들이 대개 소홀히 하는 일이다. 사람들은 이미지들이 그대로 떠오르도록 하면서 거기에 대해 무척 놀라기도 하지만 그것으로 그치고 만다.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려고 고심하지 않는다. 거기서 윤리적 결론을 이끌어내는 일은 더구나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결국 무의식의 부정적 작용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 그것에 대한 몰이해와 윤리적 의무의 결핍으로 많은 개인이 전체성을 상실하고 분열적 성질로 변해 고통을 당하게 된다. p351-352
나는 내가 더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믿기로 했다. 그것이 내 인생을 충만히 채울 것을 알고 있었고, 그 목표를 위해 나는 어떤 위험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p353
연금술을 발견하다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
나의 가설이 역사 속에서 어디에 나타나는가? 하는 질문에 답해야 했다. ... 그런데 연금술과의 만남은 나에게 결정적인 경험이 되었다. p365
그노시스파의 전통은 현재와 단절된 것 같았고, 나는 오랫동안 그노시스주의, 혹은 신플라톤주의와 현재를 잇는 다리를 발견하기가 힘들었다. .. 연금술을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그것을 통해 비로소 그노시스주의와 역사적인 연결이 이루어짐을 알게 되었다. 연금술로써 과거와 현재 사이에 연속성이 생기게 된 셈이었다. 연금술은 하나의 중세 자연철학으로서 한편으로는 과거 즉 그노시스주의에, 다른 한편으로는 미래 즉 현대 무의식의 심리학에 다리를 걸치고 있었다. p366
그노시스의 전통에 의하면 인류에게 크라터, 즉 정신적 변환의 용기를 부여한 것은 바로 그 보다 높은 신이었다. ... 가톨릭 사상의 영역에서 신의 어머니와 그리스도의 신부가 성스러운 신방으로 받아들여져 적어도 그 일부가 수용된 것은 수세기의 주저함 끝에 최근에야 비로소 이루어진 일이다. 개신교나 유대교의 영역에서는 아버지가 이전과 마찬가지로 지배적이다. ... 연금술철학에서는 여성원리가 두드러져 남성의 그것과 동등한 역할을 했다. 연금술에서 가장 중요한 여성상징의 하나는 물질의 변환이 완성되는 그릇이었다. 나의 심리학적 발견의 핵심도 이와 같은 내면의 변환과정 즉 개성화였다.
이제 나의 심리학은 역사적 토대를 얻게 되었다. 연금술과의 비교는 그노시스주의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정신적 연속성과 함께 나의 심리학에 실체성을 부여해주었다. p372
연금술에 대한 나의 작업에서 나는 괴테와의 내적인 관계를 보게 된다. 괴테의 비밀은 그가 수세기 동안 지속된 원형적 변환과정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사실이다. p373
그때 나 자신에게 던진 첫 질문은 “무의식과 더불어 무엇을 하는가?”였다. 거기에 대한 회답으로 저술된 것이 <자아와 무의식의 관계>였다. p374
그는 무의식적이긴 하지만 보편적인 그 시대의 기대를 그토록 완벽하게 표현하고 기술할 수 있을 만큼 비범한 재능을 지닌 인격의 소유자였음에 틀림없다. 인간 예수 이외의 그 누구도 같은 메시지의 소유자가 될 수 없었다. p382
성배전설과 동물 상징
나는 철학적 연금술의 주요관심사인 융합의 문제를 아직 치열하게 다루지 못했고, 기독교인들의 중심인물이 내게 던진 물음에도 답하지 못했다. ... 이것은 연금술사들이 그 치료약을 찾아 헤맨 기독교적인 고통이다. p387
상처 입은 자가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듯이 치료자는 자신을 치유한다. 특기할 일은 꿈에서 결정적인 활동이 죽은 자에 의해 행해진다는 사실이다. p388
나의 모든 저술은 말하자면 내부로부터 부과된 과제인 셈이다. 그것은 숙명적인 강요로 이루어졌다. 내가 쓴 것은 내부로부터 나에게 엄습해온 것들이다. 나는 나를 충동질하는 영혼으로 하여금 말을 하도록 허용했다. 나는 나의 저술에 대해서 어떤 뜨거운 공감을 기대한 적이 없다. 그 글들은 내가 살아온 동시대 세계에 대한 보상을 나타내고 있다. 나는 누구도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것을 말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특히 연구 초기에는 완전히 외톨이가 된 느낌을 자주 받았다. 나는 사람들이 싫어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의식세계에 대한 보상을 받아들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p397
아, 내 가슴에 두 영혼이 살고 있다
죽은 자들과 소통하는 곳
그 탑에서 내가 누린 휴식과 재생의 느낌은 처음부터 매우 강력했다. 그곳은 나에게 모성적인 장소 같은 의미가 있었다. p402
그리하여 시간으로부터 격리된 세계로, 현재에서 영원으로 나를 이끌고 간 모든 것을 묘사했다. 그곳은 사색하고 환상에 몰두하는 은신처였는데, 대개 환상은 매우 불쾌한 것들이었고 사색은 고통스러웠다. 그곳은 영적 집중의 장소였다. p403
나는 전기를 쓰지 않고 벽난로와 화덕에 손수 불을 지핀다. 저녁에는 옛날 등잔에 불을 붙인다. 수도도 없어 나는 펌프로 직접 물을 긷는다. 장작을 패고 음식을 요리한다. 이런 단순한 일은 사람을 단순하게 만든다. 그런데 단순해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볼링겐에서는 고요함이 나를 에워싸고 사람은 ‘겸허하기 그지없는 자연과의 조화 속에서’산다. 수세기를 거슬러 올라가는 생각들, 그에 따라 먼 미래를 내다보는 생각들이 머리에 떠오른다. 여기서는 창조의 고통이 완화되며 창조성과 유희성이 거의 하나로 어울린다. p405
여기 돌이 있네. 보잘것없는 것.
값도 아주 싸고......
바보들로부터 무시당할수록
현자들로부터는 더욱 사랑을 받는다네. p406
시간은 어린이다. 어린이처럼 놀며 장기를 둔다. 어린이의 왕국. 이것은 우주의 캄캄한 곳을 두루 다니며 별처럼 깊은 곳에서 빛나는 텔레스포로스다. 그는 태양의 문에 이르는 길, 꿈의 나라에 이르는 길을 인도한다. p407
파르치발은 기독교의 영웅이고 메를린은 마귀와 순결한 처녀의 아들로서 파르치발의 어두운 형제다. 이 전설이 생긴 12세기에는 메를린이 표현하고 있는 것을 이해할 만한 전제가 아직 없었다. p409
이런 종류의 꿈은 일반적인 꿈에 반해서 반복에 의해 강조된 뚜렷한 현실감각을 꿈꾸는 자에게 전하려는 무의식의 경향을 드러낸다. 그런 현실성의 원인은 한편으로는 신체감각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원형적 이미지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p412
그것은 고독현상으로, 외적인 공허와 정적을 사람들 무리의 이미지로 보상하려는 것. p413
카르마
프리메이슨식이거나 장미십자회식이다. 십자와 장미가 장미십자회의 대극의 문제, 즉 기독교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대극문제를 표시하는 것처럼, 십자와 포도 역시 천상과 지하 영혼의 상징이다. 대극합일의 상징은 황금별로 묘사되었는데 그것은 현자의 황금이다. p416
부모로부터 아이들에게 넘겨진 비개인적인 카르마가 가족에게 존재한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나는 조상들에게 숙명적으로 던져졌으나 아직 해답을 얻지 못한 물음에 내가 대답해야 하며, 지나 간 세대가 완성하지 못한 채 남긴 것을 내가 완성하거나 계승해야만 할 것같이 늘 여겨진다. p417
나는 미래가 장기적인 전망으로 미리 무의식적으로 준비되며, 그리하여 투시력을 가진 사람은 훨씬 이전부터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아맞힌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지금도 일반인들은 그 사실을 잘 모르고 있지만 말이다. p419
옛것이 한번 파괴되면 그것은 대부분 아예 없어지고 만다. 그리고 파괴적인 전진은 결코 그칠 줄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바로 이러한 관계성의 상실이며 근원과의 단절로서 ‘문화 속이 짜증’과 성급함을 야기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발전의 역사가 아직 전체적으로 완성되지 않은 현재에 사는 대신 미래에 살며, 황금시대가 오리라는 터무니없는 약속에 의지한다. 사람들은 점점 깊어지는 결핍감과 불만, 초조감에 사로잡힌 채, 새로운 것을 향해 아무 제지도 받지 않고 돌진하고 있다.
사람들은 현재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살지 않고 미래의 약속에 의지하고 살고 있으며, 현재의 빛 속에서 살지 않고 미래의 어둠 속에서 살고 있다. 사람들은 그 어둠속에서 적절한 때에 해가 솟아오르기를 기대하고 있다. p421
예를 들면 시간을 단축하는 조치들은 아주 불쾌한 방식으로 속도만 빠르게 하여 이전보다 더 시간이 부족하도록 만들고 있다. 그래서 옛 스승들은 항상 이렇게 말하곤 했다. “모든 성급함은 마귀에서 나온다.”
그에 반해 역행을 통한 개혁은 일반적으로 비용이 덜 들고 더 오래가는 법이다. 왜냐하면 그 개혁은 보다 단순하고 확실한 과거의 길로 돌아가며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 그 외 겉으로 보기에 시간을 아낄 만한 온갖 신기술을 최대한 적게 이용하기 때문이다. p422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이 너무 뚜렷하면 우리는 오늘의 시간에 제약을 받아 우리 조상들의 혼이 오늘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하는지, 다시 말해 무의식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감지할 수가 없다. p423
여행
북아프리카, 순진한 인류의 청소년기로!
이상하게도 내가 무어인의 땅으로 들어갔을 때 나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 땅에서는 특이한 냄새가 나는 듯했다. 그것은 땅이 피를 빨아들였을 때와 같은 피비린내였다. p428
이 사람들은 자신들의 격정으로 살고 있다. 다시 말해 그 격정에 의해 그들의 생이 영위되고 있다. 그들의 의식은 한편으로는 공간에서의 방향설정과 외부에서 받은 인상을 전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공간에서의 방향설정과 외부에서 받은 인상을 전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내적인 충동과 격정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그 의식은 성찰을 하지 않고 자아는 독립성이 결여되어 있다. p433
나는 늘 동시에 두 개의 영역에서 사는데 익숙해져 있었다. 하나는 의식적인 면에서 그것을 이해하고 싶으나 할 수 없었고, 또 하나는 무의식적인 면에서 그것을 표현하고 싶었는데 꿈의 형태 이외로는 더 잘 표현할 길이 없었다. p434
유럽인은 합리적인 특성을 꽤 자랑하고 있지만, 그것이 생의 열정을 희생하고 얻은 것이며, 그로 말미암아 원시적 인격 부분이 국부적인 지하존재로 떨어지는 운명을 맞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p438
아직도 현존하는 생의 가능성에 대한 추억이다. 우리가 그것을 순진하게 다시 체험해보려고 한다면 야만으로 전락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것을 잊는 방향으로 나가려 한다. 그러나 그것이 갈등의 형태로 다시금 우리와 마주치게 되면, 우리는 그것을 의식 속에 붙잡고,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살 것인가, 잊혀진 것을 회복할 것인가, 두 가지 가능성을 두고 따져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잊어버린 것처럼 보이는 그것이 충분한 이유 없이 다시 그러한 발언을 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p439
의식은 전체에 대한 조망이 없으므로 대개 이러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 사실 확인으로 그쳐야 하며, ‘자기의 그림자’와의 충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한 회답은 앞으로 진전되는 미래의 연구에 맡겨두어야 할 것이다. p440
푸에블로 인디언, 자기 자리에 있는 사람들
그가 대답했다. “그들은 머리로 생각한 것을 말하오.”
나는 놀라서 물었다. “그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당신은 어디서 생각하오?”
“우리는 여기서 생각하오.” 그는 자신의 심장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p443
그 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나는 허락받지 못했다. p446
그가 비밀의식에 관한 것들을 말할 때는 숨길 수 없는 놀라운 감동이 그를 사로잡았다. p447
그 순간 나는 인디언 남자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의젓한 자기 확신감과 ‘위엄’이 어디서 나오는지 뚜렷이 알게 되었다. 그는 태양의 아들로 그의 생명은 우주론적으로 깊은 의미가 있다. p450
지식은 우리를 성숙하게 해주지 않고 오히려 우리가 이전에 살던 신화적인 세계에서 더욱 멀리 떨어지게 한다. 우리가 온갖 유럽의 합리주의에서 잠시 시선을 돌려 우리 자신을, 한쪽은 넓은 대륙의 초원으로 다른 한쪽은 잔잔한 바다로 기울어지는 저 고적한 고원의 맑은 공기 속으로 옮겨놓을 때, 그리고 동시에 우리가 세계의식성을 버리고 그 대신 그 너머에 놓여 있는 세계 무의식성과 더불어 끝이 없는 듯이 보이는 지평을 확보할 때, 그때 비로소 우리는 푸에블로 인디언의 견해를 이해하기 시작할 것이다. p451
비록 무의식적인 암시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신과 우리’라는 이러한 동등한 관계가 인디언들의 저 부러워할 만한 의젓함의 근거가 되고 있음이 확실하다. 그러한 인간은 문자 그대로, 참으로 자기 자리에 있는 사람인 것이다. p452
케냐와 우간다, 아프리카의 고독을 겪다
내가 마치 이런 순간을 이미 한번 경험했고, 시간적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으나 그 세계를 언제나 알고 있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 오천 년 전부터 나를 기다리고 있는 저 검은 남자를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p455
그러나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나자 나는 전혀 놀라지 않았으며, 그 현상이 마치 당연한 것이고 오래전부터 내가 알고 있었던 것처럼 모두 정상적으로 여겨졌다. p455
나는 단지 그의 세계가 까마득한 수천 년 전부터 나의 세계였다는 사실만을 알고 있을 뿐이었다. p456
자연이 불완전하게 둔 것을 예술이 완전하게 만든다. p457
문제는 그가 여기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오히려 그녀가 자신의 전체성 속에 존재하면서 짐승 떼와 함께 돌아다니는 남편의 ‘자기장’의 중심이 되고 있느냐 하는데 있는 것 같았다. 이 ‘소박한’ 여인의 정신 내부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은 무의식적이므로 우리가 다 알 수는 없다. p469
현대사회에서 동성애가 맡은 역할은 대단하다.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모성콤플렉스의 결과이며 일부는 자연의 합목적적 현상이다. p470
그러나 백인들이 아프리카로 온 후로는 아무도 꿈을 감득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더 이상 꿈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제는 영국인들이 그것들을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 사람들은 부족에게 충고하는 신의 목소리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았다. p472
호루스 신화는 새롭게 부활하는 신성한 빛에 관한 이야기다. 선사시대의 원초적 어둠에서 처음으로 문화, 즉 의식을 통한 구원이 계시되었다고 말해진다. p486
인도, 이방의 문화에서 유럽의 뿌리로!
내가 인도에서 주로 몰두한 것은 악의 심리학적 성질에 관한 물음이었다. 이 문제가 어떻게 인도의 정신생활에 의해 통합되는가 하는 것은 내게 무척 인상적이었다. p489
기독교인은 선을 추구하면서도 악에 빠진다. 이에 반하여 인도인은 선과 악의 바깥에서 자신을 느끼거나, 명상이나 요가로써 이러한 상태에 이르려고 한다. p490
나에게 존재의 최고의미는 오직 그것이 존재한다는 데 있지, 그것이 원래 아무것도 아니라거나 이제는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라거나 하는 데 있지 않다. p491
내가 소유하지 않고 내가 행하거나 체험하지 않은 그 어떤 것들로부터도 나를 해방시킬 수 없다. 진정한 해방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행했을 때, 내가 온전히 나 자신을 헌신하여 철저히 참여했을 때 비로소 가능한 법이다. p491
자신의 열정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그것을 극복하지 못한다. 그러면 열정은 집 가까이 있게 되고 그가 미처 대비하기도 전에 불길을 일으켜 바로 그의 집을 덮칠 것이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포기하고 내버려두고 겉으로 잊어버린 체하고 있을 경우, 그 포기한 것과 내버려둔 것이 두 배의 힘으로 되돌아올 가능성과 위험이 상존한다. p491
나는 부처의 삶을 개인의 인생 전체를 통해 스스로를 주장한 ‘자기’의 실현으로 이해했다. 부처에게 ‘자기’는 모든 신을 넘어서, 특히 인간실존과 세계의 정수를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세계로서 존재 자체의 측면뿐 아니라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그의 인식도 함께 포괄하고 있다. p495
그리스도 역시 부처와 마찬가지로 ‘자기’의 구현자다. ... 둘 다 세상을 극복한 자들이다. 부처는 이를테면 이성적 통찰로서, 그리스도는 숙명적인 희생으로써 그 일을 이루었다. 기독교에서는 더 많이 고통을 겪는 데 주안점을 두고, 불교에서는 더 많이 깨닫고 행하는 방향으로 나간다. p496
후기불교에서도 기독교와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즉, 부처도 이를테면 모방의 대상인 ‘자기’와 같은 형상이 된 것이다. 원래는 각 사람이 니다나의 사슬에서 벗어나면 각자, 즉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부처 자신도 밝혔는데 말이다. p496
그러나, 역사적 발전은 ‘그리스도 모방’으로 이어져, 개인이 전체성에 이르기 위해 자기 고유의 숙명적인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간 길을 본받아 따라가려고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동양에서도 부처를 신앙적으로 모방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부처는 모방의 대상인 모범상이 되었고, 그럼으로써 부처 자신의 이념은 약화되었다. ‘그리스도 모방’이 기독교 이념의 발전을 치명적으로 가로막은 것처럼 말이다. 부처가 바로 그 통찰로 인해 브라마의 신들을 능가하듯이, 그리스도도 유대인들에게 “당신들은 신들이다”라고 외쳤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소위 ‘기독교적’ 서구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대신 세계파괴의 가능성으로 내닫고 있다. p497
라벤나와 로마, 보이는 환상과 보이지 않는 실재
그 그림은 익사하려는 베드로를 향해 그리스도가 손을 내미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었다. ... 특히 세례가 실제적인 죽음의 위험과 결부되어 있는 통과의례라는 주목할 만한 견해에 대해 토론했다. 그런 종류의 통과의례는 죽음과 부활이라는 원형적 사고를 통해 표현되는 생명의 위험과 결부되어 있었다. ... 익사의 위험을 암시하는 실제적인 ‘잠김’이었다. p505
그 그림의 묘사에 대한 기억은 요즘도 생생하다. 나와 동행했던 그 여인도 ‘자기 눈으로 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오랫동안 믿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이 동시에 똑같은 것을 볼 수 있는지, 그렇다면 그 정도가 어떠한지 입증하는 것은 알다시피 매우 어려운 일이다. p506
남자의 아니마는 역사적인 성격을 띤다. 아니마는 무의식의 인격화로 역사와 선사에 깊이 물들어 있다. 아니마는 과거의 것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남성이 그의 선사에 관해 알아야 할 것들을 남성 속에서 대신 보충해주고 있다. 남성 속에 아직도 살아 있는, 이미 있었던 모든 삶이 아니마다. p507
하지만 사람들이 가는 데마다 그 곳을 지배했던 정신에 의해 마음 깊은 곳에서 충격을 받을 때, 그리고 거기 있는 성벽 잔해와 둥근 기둥 하나가 내 눈에 이제 막 새롭게 인식될 때 문제는 달라지는 법이다. p510
환상들
생의 한계점에 이르러
"당신은 밝은 빛에 감싸여 있는 듯 했어요“라고 말했다. 그것은 그녀가 죽어가는 사람에게서 자주 보게 되는 현상인 셈이었다. p513
내가 살아온 인생은 자꾸만 시작도 끝도 없는 역사처럼 여겨졌다. 나는 나 자신이 하나의 역사적 단편, 앞서거나 뒤따른 본문도 없이 책에서 잘려진 장 같은 느낌을 받았다. 나의 인생은 긴 사슬에서 가위로 잘려진 것처럼 보였고, 많은 물음은 해답이 없는 채로 남았다. 무슨 이유로 그와 같이 진행되었을까? 왜 나는 그런 가설들을 가지고 왔는가? 나는 그것으로 무엇을 이루었는가? 그 결과가 무엇인가?
나는 그곳에서 나의 이전과 이후에 관한 물음에 답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었다. p517
융합의 신비
감정적인 관계는 강요와 예속으로 부담을 주는 열망의 관계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그로 말미암아 상대방과 우리 자신이 부자유하게 된다. 객관적인 인식은 감정적인 연관성 너머에 있다. 이 사실이 중요한 비밀로 여겨진다. 객관적 인식을 통해서만 진정한 융합이 가능하다. p526
만물의 종말에 관한 인식 내지는 직관으로, 나는 새로운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되었다. p526
나는 병을 통하여 또 다른 것을 얻었다. 그것은 존재에 대한 긍정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존재하는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이었다. 주관적인 반론 없이 말이다. 현존재의 조건을 내가 보는 그대로, 내가 이해하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p527
나는 또한 사람이 자기 자신 속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을 온갖 평가를 뛰어넘어 실제로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p528
사후의 삶에 관하여
나는 깊은 충격을 받고 잠에서 깨어나 생각했다. ‘아, 그렇구나. 그 사람이 나를 명상하고 있었구나.’ 그가 하나의 꿈을 꾸었는데 그것이 나다. 그가 깨어난다면 내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 p529
꿈과 예감
심리학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그러한 지식이 얼마나 한정되어 있는가를 밝히는 데 어려움이 별로 없을 것이다. 합리주의와 교조주의는 우리가 앓고 있는 시대병이다. 그것들은 모든 것을 아는 체한다. p532
유감스럽게도 인간의 신화적 측면은 오늘날 심히 무시되고 있다. 인간은 이제 더 이상 이야기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가치가 있고 치유를 가져오는 법이다. p533
신화적인 인간은 ‘그 너머로 나가기’를 갈망하지만 학문적인 책임을 고려하는 인간은 그것을 허락할 수 없다. 이성의 차원에서는 ‘신화화’야말로 쓸모없는 사변일 뿐이다. 하지만 감정의 차원에서는 치유를 가져오는 활동이며 인간존재에 광채를 부여한다. 그 광채를 사람들은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다. p533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인생이 현존을 넘어서 무한정한 연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다. ... 사람은 수백 년을, 상상할 수 없는 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그런데 왜 이와 같이 헛되이 분주하기만 한가? p534
나의 가설은 무의식이 이를테면 꿈을 통해 우리에게 보내는 암시의 도움으로 그 일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 무의식의 조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문제에 관한 해답은 없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p535
하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매일매일 우리 의식의 한계를 훌쩍 넘어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무의식이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비판적 이성이 우세할수록 인생은 그만큼 빈약해진다. 그러나 무의식과 신화를 의식화할수록 우리의 인생은 그만큼 통합을 이루게 된다. 과대평가된 이성은, 그것이 지배하면 개인이 궁핍해진다는 면에서 독재국가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p536
그리하여 시간과 공간에 관한 우리의 관념과 인과론이 다 함께 불완전하다는 점이 판명된다. 완전한 세계상은 이를테면 다른 차원으로 확대되어야 할지 모른다. 그래야 비로소 현상의 전체성이 일관성 있게 설명될 수 있을테니까 말이다. 그런 이유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합리주의자들은 심령심리학적인 경험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p540
‘여기와 저기’라든지 ‘이전과 이후’라든지 하는 구별이 필요없다. 나는 적어도 우리 정신적 실존의 일부가 시간과 공간의 상대성에 의해 특징지어진다는 사실에 대해 도저히 논박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의식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공간도 시간도 없는 절대적인 상태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 같다. p540
어쨌든 부인하는 자는 ‘무’를 향해 가는 반면에, 원형의 도움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생명의 발자국을 따라간다. p542
신화, 의식과 무의식의 사이
무의식의 형상들도 ‘정보를 잘 받지 못한다’ 그래서 ‘앎’에 이르기 위해서는 의식과의 접촉이나 인간을 필요로 한다. p543
그것들은 자아나 자아의 변화하는 상황과 아무런 접촉 없이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의식세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한 채’ 있었던 것이다. p544
그 질문은 말하자면 나의정시적인 선조로부터 나에게 제시된 셈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시대에 경험할 수 없었던 것을 들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p545
그러나 죽은 자의 혼령들도 그들이 죽는 순간에 이르기까지 알고 있던 것만 ‘알고’ 그 외에는 모르는 것 같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람들의 앎에 참여하기 위해 인생 속으로 밀고 들어오려고 애쓴다. p546
내가 보기에는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살아 있는 자들, 다시 말해 그들 뒤에 살아남아서 계속 변화하는 세계 속에 존재하는 사람들로부터 자신들의 물음에 대한 회답을 얻는 것이 아닌가 싶다. 죽은 자들은 전지(全知)하나 모든 지식을 임의로 활용할 수 없고 단지 육체에 갇힌 살아 있는 사람들의 혼으로 흘러들어가는 일만 가능하다는 듯이 우리에게 묻고 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사람의 혼은 적어도 한 가지 면에서는 죽은 자에 비해 유리하다. 즉, 명쾌하고 결정적인 인식에 이를 수 있는 능력이 바로 그것이다.
신화적 상상에서 중간세계가 없다면 정신은 교조주의에 갇혀 경직될 위험성이 있다. 또한 반대로 신화적인 내용을 고려하는 것이 피암시적인 약한 마음의 소유자들에게는 예감을 인식으로 여기고 환상을 실체화할 위험이 있다. p558
단일성과 무한성
동양적 존재의 정신적 특성에 어울리게 출생과 죽음의 연속은 끝없는 현상이요, 목표도 없이 계속 굴러가는 영원한 운명이 수레바퀴로 여겨진다. 사람은 살고 인식하고 죽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한다. 오직 부처에 이르러 목표에 관한 관념이 드러나는데, 그것은 이를테면 지상적 존재의 극복인 셈이다.
서양인의 신화에 대한 갈구는 ‘시작’과 ‘목표’를 지난 진화론적 세계상을 요청하게 된다. 이러한 세계상은 시초와 단순한 ‘끝’을 가진 세계라든가 그 자체 안에 폐쇄된, 정적이고 영원한 순환과정의 세계관을 배척한다. p560
재생의 관념에서 떼어낼 수 없는 것이 카르마의 관념이다. 결정적인 문제는 한 인간의 카르마가 개인적인 것이냐 아니냐 하는 점이다. 한 인간의 인생이 시작되도록 한 운명의 결정이 전생의 행위와 업적의 결과라면, 여기에는 개인적인 연속성이 있게 된다. 그런데 다른 경우 카르마가 이를테면 출생에 의해 묶인다면, 개인적인 연속성 없이 다시 구체적으로 생성될 것이다. p560
부처는 이 물음에 답을 하지 않은 채 남겨놓았다. 그런데 그도 그 물음에 대한 확신한 답을 몰랐다고 짐작된다. p561
나의 존재의미는 인생이 나에게 물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나 자신이 세계를 향해 던지는 하나의 물음이며, 나는 거기에 대한 나의 대답을 제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단지 세계가 주는 대답에 의지할 뿐이다. 그것이 내가 오로지 고심 끝에 인식하게 된 초개인적인 인생과제다. p562
기독교적 인간에서 사라지고 만 디오니소스적 체험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일까? p562
내가 조상 인생의 결과로서 또는 개인적인 전생에서 얻은 카르마로서 느끼고 있는 것은, 아마도 오늘날 전 세계를 잠시도 쉬지 않게 하고 특히 나를 사로잡고 있는 비개인적 원형일지도 모른다. p562
예를 들면 내가 제기하는 물음과 대답이 불만족스러울 수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내 카르마를 가진 누군가가(아마도 나 자신이겠지만) 보다 와전한 해답을 주기 위해 다시 태어나게 될 것이다. p563
만약 혼령이 어떤 통찰의 단계에 이르렀다면 삼차원의 인생을 연장한다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할 것이다. 그때 그 혼령은 이승으로 다시 돌아올 필요가 없을 것이며, 고양된 통찰은 다시 몸을 입고 싶은 욕구를 잠재울 것이다. 그러면 삼차원세계의 혼은 소멸되고 불교도들이 ‘니르바나’라고 일컫는 상태에 도달할 것이다. p567
그런데 사랑이 없으면
나도 욥처럼 “손으로 입을 가릴 뿐입니다. 내가 한 번 말하였으니 다시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게 된다. p619
사람이 무슨 말을 하든지 그 전체를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없다. 부분적인 측면에서 말하는 것은 항상 너무 과하거나 너무 부족하다. 왜냐하면 오직 전체만이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그리고 “모든 것을 견딘다”. 이 구절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 아무것도 덧붙일 것이 없다. 우리는 소위 가장 깊은 뜻에서 우주창조의 근원인 ‘사랑’의 희생제물이거나 수단과 도구다. p619
회고
비밀로 가득 찬 세계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벚나무 줄기가 자라도록 돌봐야 할 사람이 나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나는 거기 서서 자연이 해낼 수 있는 것을 보고 경탄할 뿐이다. p623
고독이란 주변에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전할 수 없거나 자기는 가치 있다고 여기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황당무계한 것으로 간주될 때 생기는 법이다. p624
창피스럽게도 어떤 힘이 우리 심장을 앗아 간다. 천상에 있는 모든 것은 제물을 요구하므로 하지만 이를 소홀히 하면 좋은 일이 결코 생기지 않는다. (횔덜린) p626
정말이지 나는 머물러 있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창피스럽게도 어떤 힘이 우리 심장을 앗아가기” 때문이다. 나는 너를 좋아하고 너를 정말 사랑한다. 그것은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아픈 순간이다. 나 자신이 희생 제물이므로 머물러 있을 수 없다. 그런데 데몬이 사람이 빠져나가도록 해주면서 그와 함께 복된 모순을 가져다준다. p627
모든 사람이 명석한데 나만이 흐리멍덩하구나
노자가 “모든 사람이 명석한데 나만이 흐리멍덩하구나”라고 했는데, 그것이 바로 내가 이 늙은 나이에 느끼는 바다. p630
3. Best 50 & 감상과 의견
1.
언제나 나에게 인생은 뿌리를 통하여 살아가는 식물처럼 생각되었다. 식물의 고유한 삶은 뿌리 속에 감추어져 보이지 않는다. 지상에 드러나 보이는 부분은 단지 여름동안만 버틴다. 그러다가 시들고 마는데 하루살이같이 덧없는 현상이다. p13
한 고개 넘고 나면, 더 큰 고개를 만난다. 이제 지치고, 나누는 것도 기쁘지 않다. 지친 것일까? 아니면,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길을 선택해 온 것일까. 주변에서 그리 살아야 한다고 정해준 길을 선택해 온 것은 아닐까. 써보면 알겠지. 뱉어내고 토해내면, 깊숙이 박혀있는 뭔가를 뽑아내면 나오겠지. 보이겠지. 그러면 알게 되겠지.
2.
또한 그녀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다른 신비한 것들과 내게는 알려지지 않은 방법으로 관계를 맺고 있는 것 같았다. 이런 소녀의 유형이 나중에 내 아니마(Anima)의 한 측면이 되었다. 그녀에게서 받은 생소한 느낌과 그런데도 그녀를 처음부터 알아온 것 같은 감정은 나에게 훗날 여성적인 것의 본질을 나타내는 여성상의 특징이 되었다. p27
그런 그녀가 내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나는 남자다. 거울을 봐도, 목욕탕에 가도, 화장실을 갈 때도 둘로 나누어진 출입구에서 주저할 것 없이 나의 선택은 남자다. 고민할 필요도 없다. 선택은 늘 둘 중에 하나니까. 망설이면 의심받는다. 이상한 놈이거나, 변태성욕자로 몰릴 수도 있다.
체육시간이면 다른 남자아이들처럼 축구에 열광하지 못하고, 나무 그늘을 찾는 나는 나약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나는 그게 좋은 걸 어떡하냐고 달래도 봤지만, 그 열등의식은 뿌리가 깊어 뽑아내기 쉽지 않았다. 국어시간, 미술시간, 간간이 음악시간이면 짧은 쾌감들이 일었다. 시에 울렁거리고, 그림 속에 몰입하고, 음악을 들으면 눈이 감겨지는 그 시간들. 그렇지만 나는 수업이 끝나는 종소리와 함께 눈을 떠야 했고, 다음 시간 과목을 준비해야 했으며, 화장실에도 다녀와야 했다. 재미없고 관심도 없는 이야기지만, 그런 이야기들을 하지 않으면 친구들이 붙여주지 않으니 들어야 했다. 그래야 놀아 줄 사람이 있을테니까. 그렇다고, 시간이 나면 그들을 찾거나 어울리려고 적극적으로 나서지도 않았다. 그냥 혼자 있는 것이 편했다. 책도 보고, 멍하니 하늘도 쳐다보고, 가끔씩 그림도 그리면서 주말을 보냈다. 그런 시간들이 좋았으니까. 그렇지만 너무 지루한 고독은 싫었다. 세상으로부터 고립된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었다.
군대에서는 더 심했다. 용감해야 하고, 싸워야 하고, 눈을 크게 뜨고 소리도 크게 질러야 했다. 총을 들고, 각진 걸음을 걷고, 가슴을 내밀고, 당당한 하루 일을 시작하고, 하루 일을 마무리 한다. 현역을 다녀오는 것이 자랑이고, 방위를 받은 것은 내세울 일이 못되었다. 남자는 무거운 것을 들수록 자랑거리였고, 상 받고 칭찬들을 일이었다.
‘쎄야 하고’, ‘강해야 하고’, ‘과묵할 줄 알고’, ‘울면 안 되고’, ‘약점 보이면, 잡아 먹힌다’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그것이 세상이다.
3.
그 기억들은 지하에서 서로 얽혀 있는 하나의 뿌리에서 각각 뻗어나간 작은 가지들과 같으며, 무의식의 발달과정에 있는 정류장들과 같다. p59
그것을 보는 순간, 나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꼈다. “저것이다! 저 마차는 분명히 ‘나의’시대에서 온 것이다. 그 마차는 마치 내가 직접 타고 다녔던 것과 똑같은 종류이기 때문에 내가 그것을 다시 알아보는 것 같았다! ... ” “그래 저거였어! 그래, 저거였어!” p71
한 번씩 이런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다. 나의 어린 시절, 분명히 처음 가보는 길, 처음 가보는 집이었지만, 언젠가 와 봤다는 느낌. 내가 여기 어디쯤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무디어지고, 별로 근거없는 이야기라고 묻어 버린 기억들. 새삼 융에게서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정말 그럴까. 나만 그런 것이 아니구나. 나같은 걸 누군가도 느끼는구나. 그렇지만, 실로 남들에게 무어라 말할 수 없었다. 미친 놈이 될테니까. 그렇게 고립되는 건 무서운 일이었기에.
4.
그런데도 그들은 하느님이 원치 않는 일을 행함으로써 최초의 죄를 범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하느님이 그들 안에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심어놓았기 때문에 그들이 죄를 지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그 사실은 뱀이라는 존재로 인해 분명해졌다. 아담과 이브를 말로 꾀도록 하기 위해 하느님이 그들보다 먼저 뱀을 창조했다. p77
그러므로 그들이 죄를 지어야만 하는 것이 하느님의 의도였다.
이와 같은 생각이 나를 지독한 괴로움으로부터 해방시켜주었다. 하느님 자신이 나를 이런 상황에 처하게 했다는 것을 이제는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p78
느님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하라는 것인가, 아니면 하지 말라는 것인가? 나는 하느님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것도 지금 당장 나와 함께 무엇을 하기를 원하는지 알아내야만 한다. p78
하느님의 의지가 무엇이며 하느님이 무엇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지 이해하기 전에는 복종할 수 없었다. 나는 이제 하느님이야말로 이런 절망적인 문제를 일으킨 장본인이라는 사실을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p79
나는 결국 굴복을 강요당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내가 이해하지 못한 채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문제는 내 영혼의 영원한 구원이기 때문이었다. p79
내게 금기시 되는 불손한 생각들, 죄악이라고 믿어왔던 것들. 그래서 양지에서 꺼내놓지 못하고, 어두운 술집 모퉁이에서나 털어 놓을 이야기들. 불경스러웠다. 그렇지만, 통렬한 기쁨을 감추지도 못했다. ‘하느님’이 울면, ‘악마’가 웃었다. 이 엇갈리는 갈등이 나를 성당에서 점점 멀어지게 했다. 갈 수 없었다. 가는 일이 도리어 죄스러웠다. 차라리 멀리 떨어진 곳에서 불손한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불손한 ‘악마의 소리’에 점점 더 솔깃해지는 나를 어쩌지 못했다. 나는 여전히 불손한 ‘냉담자’다. 그렇지만 때가 되면, 나의 신과도 화해하고 싶다. 같이 어울려서 춤을 추고 싶다.
5.
하느님은 종교적 전통으로는 내가 거부하고 싶은 것도 나에게 요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내게 은총을 가져다준 것은 복종이었다. 그 체험 이후 나는 하느님의 은총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p81
오늘날에도 나는 외롭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들, 대부분 도통 알려고도 하지 않는 것들을 내가 알고 있고 그것을 암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p84
사랑하는 사람이 ‘하느님’ 뒤로 숨었다. 그녀의 ‘신’이 어떤 지 다 알지 못한다. 그녀의 고집인지. 다만, 이렇게 불경스러운 나 때문에 여전히 힘들어 하는 사람. 비단 그 사람만이 아니다. 사람들은 나를 알지 못한다. 나는 사람들에게 나를 이해시키지 못한다. 그래서 혼자 있는 것이 편하다.
6.
그들은 별 생각없이 온갖 모순, 예를 들면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여 당연히 인간의 역사를 미리 내다본다는 식의 모순들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였다. 하느님은 인간들을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그렇게 창조했음에도 불구하고 죄를 짓지 말도록 금하고, 심지어 지옥불길의 영원한 저주로 벌을 주기까지 한다. p92
사람들은 하느님의 의지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만일 사람들이 하느님의 의지를 안다면, 이 중심과제를 정말 하느님을 몹시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거룩한 경외심을 가지고 다루었을 것이다. p93
아무튼 <신약성서>에는 그와 같은 것이 없었다. <구약성서> 특히 <욥기>가 이런 점에서 깨우침을 줄 수도 있었으나, ...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은 물론 언급되었지만, 그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유대적’이라 여겨졌고, 오래전에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 관한 기독교 복음에 자리를 내주었다. p94
억울했다. 내가 그렇게 철석같이 믿었던 신앙과 신념으로부터 배신감을 느껴야 할 때. 처음에는 세상에 분노가 생겼다. 그리고 다음에는 그렇게 믿어버린 나한테 분노가 일었다. 바보... 여전히 나는 바보다. 누구는 인생이 그런 거라고 말하지만, 남들은 참 쉽게도 말하지만, 나는 왜 이렇게 버겁고 힘이 드는지 모르겠다. 떠나고 싶다. 좀 멀리 떨어져 있고 싶다. 세상에 그런 곳이 있다면...
7.
처음부터 나는 운명적으로 결정되어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어, 내 생애에서 그것을 실현해야만 될 것처럼 여겨졌다. 나로서는 결코 증명할 수 없었던 어떤 내적 확신이 있었다. ... 나는 확신을 붙든 적이 없었으나 확신이 나를 붙들어주어 그와 반대되는 모든 신념에 종종 대항하게 했다. 내가 바라는 것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바라는 것을 내가 행하도록 정해져 있다는 확신을 그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었다. p96
17살 때였다. 신방을 나온 젊은 신부에게 ‘신’이 정해준 운명대로 산다면, 운명이 그렇게 정해진 것이라면, ‘나’는 뭐냐고를 따져 물었었다. 그는 말없이 웃기만 했고, 나는 기분이 몹시 상했다.
8.
그리하여 나는 모든 결정적인 일에서 인간들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 홀로 하느님과 함께 있다는 느낌을 자주 갖게 되었다. 내가 더 이상 혼자가 아닌 ‘그곳’에 있을 때면 언제나 나는 시간을 초월해 있었다. 나는 수백 년의 세월 속에 있었으며, 그때 답을 준 자는 이미 항상 있었고 지금도 항상 있는 존재였다. 그 ‘다른 인물’과의 대화는 나의 가장 심오한 체험이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피흘리는 전투면서 또 한편으로는 극도의 황홀경이었다. p96
지금도 왔다 갔다 한다. 예수의 성찬식, 내 안에 신이 있다. 그 신의 목소리를 따르자니, 눈 뜨고 봐야 할 현실은 온통 감옥이고, 사슬이고, 족쇄였다. 심지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돌아갈 고통을 생각해보면서, 과연 내가 ‘내 안의 신 찾기’를 계속해야 하나를 되묻기도 했다. 하지만 죽으면서 후회하고 싶지 않다.
9.
물론 나는 이러한 사실들에 대해 누구와도 말할 수 없었다. 나는 그것들에 관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주변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p96
나는 혼자서 놀았고 혼자 돌아다니며 공상하면서 나 자신만의 비밀스러운 세계를 품고 있었다. p97
내가 외계인이라고 말한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사람들은 ‘걱정스러운 눈빛’과 함께 ‘대낮부터 취한 놈’으로 본다. 그러니까 그런 말 할 때는 ‘농’을 섞어 말한다. 진지하면, 진짜로 미친놈이 되니까.
10.
성찬식은 단지 하나의 추모식사에 불과했다. ... 즉 1860년 전에 죽은 ‘주 예수’를 추도하는 축제였다. 하지만 거기에는 “받아 먹어라. 이것은 내 몸이다.”와 같은 다소 시사적인 말들이 있었다. ... 나는 이런 방식으로 예수와 한 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했다. 하지만 그것은 나로서는 너무나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겨졌기 때문에, 분명히 그 배후에 뭔가 커다란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p105
성찬식에 담겨진 ‘상징’의 의미를 해석하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사실 집중적으로 고민한 것이 아니어서, 그렇지만 그 ‘식인풍습’을 흉내 내는 매우 단순한 의식에 그렇게 많은 비밀이 담긴 것까지는 몰랐다. 신과의 거래, 계약, 모세, 예수, 새로운 약속, 그노시즘.. 등등
11.
사람들은 그런 것을 가리켜 ‘기독교’라고 불렀으나, 내가 하느님을 경험한 바에 의하면 그 모든 것은 하느님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 그것은 종교가 아니었고 거기에는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았다. 교회는 내가 더 이상 가서는 안되는 곳이었다. 나에게는 그곳이 생명이 아니라 죽음이 있는 곳이었다. p108
맞다. 내가 그랬다. 나도 그랬다. 무덤에서 불러낸 융한테 내가 흠뻑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12.
종교를 전체와의 유일하고 의미있는 관계로 여겼던 나의 종교관은 붕괴되고 말았다. .. 나는 더 이상 일반적인 신앙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 즉 누구하고도 나누어가질 수 없는 ‘나의 비밀’과 관련을 맺을 뿐이었다. 그것은 역겹기도 하고, 아주 나쁘게 말하면 천박하기도 하고 우스꽝스럽기도 했다. 그것은 일종의 악마적인 웃음거리였다. p109
이것과 관련하여 악마를 고소해봤자 역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악마 역시 하느님의 창조물이기 때문이다. 하느님만이 실재였으며 파괴하는 불이요 형언할 수 없는 은총이었다. ... 나는 매우 진지하게 성찬식을 준비하고 은총과 계시를 체험하기를 기대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하느님은 그 자리에 없었다. 원, 세상에! p110
바로 어제 새벽에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기대했고, 그렇게 실망했다. 그리고 오늘 융으로부터 고백을 듣고 있는 것이다. 어찌해야 하는가. 누구,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 나도 그랬다고 손을 들고 말해줄 사람 없나? 이 믿기지 않는 사실 앞에서 나는 주체할 수 없다. 어찌해야 하나.
13.
나는 교회로부터 굴러 떨어졌다. 그것이 나를 슬픔으로 가득 차게 했고,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줄곧 마음을 어둡게 했다. p110
악마 역시 하느님의 피조물이었다. 나는 악마에 관해 읽어보아야만 했다. 악마는 아주 중요한 존재로 여겨졌다. 나는 다시 교리책을 열어 고통과 불완전함과 악의 근거에 대한 화급한 물음의 답을 찾았으나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p116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남들이 이해할 수 있을까. 그냥 경험해 본 사람은 안다. 그 말이 무엇을 설명하고 있는지. 모르는 사람은 모르더라. 끝까지.
14.
그러나 어딘가에서, 어떤 시간에, 나처럼 진리를 탐구하는 자들이 있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들은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자신과 남들을 속이려 하지 않으며, 고통으로 가득한 이 세상의 현실을 부정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일 것이었다. p116
나는 생각했다. ‘드디어 여기에 악마를 진지하게 다루고, 완전한 세계를 창조하려는 하느님의 의도를 방해하는 힘을 가진 적대자와 피로 계약을 맺기까지 한 자가 있구나.’ p117
꼭 그런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언제까지나 나를 홀로 내팽겨쳐두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변경연을 만났다. 그런 냄새가 났다. 그래서 두드렸다.
15.
악마가 본래부터 악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명백한 모순, 즉 이원론에 빠져버리고 말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악마도 원래는 선한 것으로 창조되었으나 그의 오만 때문에 타락하게 되었다고 가정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이러한 주장은 그것이 설명하려고 하는 악이 이미 자만심이라는 악을 전제로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나는 그 지적을 읽고 대단히 흡족했다. 그밖에 악의 기원은 ‘설명되지도 않고 설명할 수도 없는’것이라고 했다. 내가 보기에 그 말은 그도 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악의 기원에 대해서는 숙고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p122
<악의 기원>, 선악의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 선악의 기준은 시대를 초월하여 변함이 없는가. 그렇지 않다. 악마 역시도 하느님의 창조물이고, 선악의 기준은 계약을 맺는 시기와 주체, 시대적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다시 이루어질 수 있어야 하고,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해방시켰다. 큰 숨통을 틔여주었다. 내 안에서 꿈틀거리는 욕망이 결코 악마가 아니라는 사실은 얼마나 큰 기쁨이 되어 주었는지.
16.
“유감스럽게도 이 작문은 거짓이다. 너는 이것을 어디서 베꼈느냐? 진실을 자백하라!”
“나는 그것을 베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좋은 작문을 쓰려고 특별히 노력을 기울였단 말입니다.”
“너는 거짓말을 하고 있어! 너는 이런 작문을 지금까지 한 번도 쓴 적이 없어. 아무도 네 말을 믿지 않을 거야. 그래, 어디서 베꼈지?” p126
도대체 어떻게 하면 내가 자문을 베끼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단 말인가? ...
내가 무력하여 맹목적이고 어리석은 운명에 던져졌다는 결론으로 언제나 다시 돌아올 뿐이었다. 그 운명은 나에게 거짓말쟁이요 사기꾼이라는 낙인을 찍어주었다. p127
도대체 말을 해도 믿어주질 않고, 7살 무렵 거짓말쟁이 엿장수에게 속아, 어머니에게 죽도록 맞은 기억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억울할 뿐이다. 어머니는 기억도 못하신다.
17.
식물들은 무엇을 의도하는 일도 없고 이탈하지도 않으면서 신의 세계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생각까지 표현했다. 나무들은 특히 신비로웠으며 나에게는 생명의 불가해한 의미를 직접적으로 구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므로 숲은 사람들이 생명의 심오한 의미와 경이로운 작용을 가장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는 장소였다. p130
내소사에 가면 천년이 된 느티나무가 있다. 은행로에 가면 6백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있다. 경기전 북쪽 담을 지나면 3백년을 넘긴 참죽나무가 있고, ‘봄’에 가면 수 십 년도 넘은 단풍나무가 있다. 오래된 나무들을 보면, 나는 그들이 나를 꿰뚫어 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든 오래된 나무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들이 무엇을 보았는지까지는 아니지만, 무언가를 말하려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따금씩 손을 대고, 그들이 말하는 소리를 듣곤 한다. 특히, ‘봄’에 있는 할머니 단풍나무와의 짙은 교감의 경험은 아직까지는 그녀와 나만의 비밀이다. 내가 그녀를 위해 한 일이 있고, 그녀가 나에게 줄 것이 있다. 우리는 그렇게 통했었다. 때가 되면, <나무 이야기>를 써보려고 한다. 내가 만난 나무들.. 틈나는 대로 그들의 사진을 찍어가고 있다.
18.
조심스럽게 물어서 조사해본 결과, 내가 사람들이 알 리가 없는 것들에 관해 자주 발언하거나 넌지시 의견을 말하기 때문에 그들이 나를 꺼려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p137
대략 17살 무렵이었다. 머리가 굵어지기 시작하면서, 나는 성경에 나오는 몇몇 구절들에 의문이 들기 시작했고, 이 궁리, 저 궁리를 해가며 ‘나의 식’으로 성경을 해석하였다. 가나안을 해맨 모세와 이스라엘 민족의 이야기, 왜 40년이었을까. 오병이어의 기적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하느님이 모든 걸 정하셨다면, 아담과 이브를 꼬신 ‘사탄’은 누가 보냈을까. 등등 혼자서 떠오르는 주제들을 화두삼아 제멋대로 해석하길 좋아했고, 아주 가끔씩 동조자를 만나게 되면, 정신없이 이 이야기들을 쏟아내곤 했다.
19.
‘신의 세계’라는 표현이 어떤 사람에게는 감상적으로 들리겠지만 나에게는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모든 ‘초인간적’인 것들, 눈부신 빛, 심연의 어두움, 시공의 무한성이 지닌 차가운 무감정, 비합리적인 우연세계의 으스스한 괴기성 등이 ‘신의 세계’에 속했다. ‘신’은 나의 모든 것이었지, 단지 ‘교화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p138
최인호는 마흔 두 살에 하늘과 땅이 날카로운 키스를 하는듯한 느낌을 받고서, 천주교에 귀의했다고 한다. 그 느낌이 무엇인지 혹시 지금 나의 느낌들과 비슷한 것이었는지. 나는 또 다시 우리별에서 온 외계인들을 아니 동족들을 찾아 나서고 있다.
20.
교회공동체라는 말은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p144
하지만 교회는 필요하다. 교회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 다만, 나는 아니다. 더 이상은 아니다. 그 정도 했으면 됐지. 내가 얼마를 더 속아야 되는지. 어차피 내가 찾는 신은 교회에 있지 않은데.
21.
그것은 아름다움과 감각에 대한 하나의 발견과 예감으로 남았다. 나는 그것들을 단지 나 자신의 어리석음 때문에 못 쓰게 만들어왔던 것이다. p148
'INTJ'라고 믿었다. 그런데 자꾸만 아닌 것 같다. ‘INFP' 인가? 아니면 새로운 17번째 신종?
22.
나는 괴테가 그 시대에 제공한 해답이 바로 파우스트라는 사실을 확신했다. 이러한 통찰은 나에게 위안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내적 안정감과 인류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확신을 더욱 강하게 해주었다. 나는 더 이상 고립된 존재가 아니며 단순한 호기심의 대상이나 이를테면 잔인한 자연의 희롱물도 아니었다. 나의 대부요 보증인은 위대한 괴테 바로 그 자신이었다.
p169
그런 의미에서 괴테도 연구대상이다. 파우스트를 꼭 찾아가 봐야할 사람이다. 내가 찾는 열쇠를 쥐고 있을지 모른다.
23.
서양 종교는 분명히 말해 이러한 내적 인간에 초점을 맞추어, 2천 년 전부터 내적 인간을 의식의 표층으로 끌어올려 그 인격의 특성을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진지하게 노력해왔다. “밖으로 나가지 말라. 진리는 내적 인간에 깃들어 있다!” p176
지금도 노력하고 있다. 참 더디다. 세상은. 무려 2천년동안이나. 대를 이어가면서 이어지고 있는 이 숭고한 노력의 흐름. 나는 지금 어디쯤에 머물고 있을까. 또 어떤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일까.
24.
니체는 이미 얼마 동안 독서계획에 들어 있었으나, 마음준비가 덜 되었다고 느껴져 읽기를 망설였다. ... 이와 같은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나는 호기심에 끌려 마침내 니체의 책을 읽기로 결심했다. ... 차라투스트라는 니체의 파우스트였다. 이제ㅔ 나의 제2의 인격은 차라투스타라였다. ... 그렇다면 나의 제2의 인격도 병적이란 말인가?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은 나를 공포감에 젖게 했다. 나는 오랫동안 그러한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도 나를 가만두지 않고 좋지 않은 때에 반복해서 나타나 나 자신을 돌이켜보도록 밀어붙였다. 니체는 인생 후반, 그러니까 중반을 넘기고서야 제2의 인격을 비로소 발견했으나, 거기에 비해 나는 제2의 인격을 이미 소년시절부터 알고 있었다. p199
그런 이유로 니체는 과장된 문체, 도가 지나친 은유, 환희의 송가를 떠벌리게 된 것이었다. 이런 것들은 연관성 없는 배울 만한 지식들에 온통 정신이 팔려 있는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알아듣게 하려는 시도이긴 했지만 허사였다. 그리고 그는 줄 타는 광대로서 자기 자신의 한도를 넘어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p200
니체는 내면의 사상세계 외에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실의 발판을 잃어버렸다. 사실 그가 자신이 내면세계를 소유했다기보다 오히려 내면세계가 그를 소유한 셈이었다. 그는 뿌리가 뽑혀 땅 위를 떠돌아다녔다. 그리하여 그는 과장하는 습성이 생기고 비현실성에 빠졌다. p346
니체처럼 살고 싶지만, 니체처럼 죽고 싶지는 않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니체에 열광하고, 니체 때문에 밥 먹고 살고, 니체를 말하면서 행복해하지만, 니체가 내 삶은 아니다.
25.
상처 입은 자만이 치유할 수 있다. 그러나 의사가 체면(Persona)을 갑옷처럼 두르고 있으면 그는 아무런 효과도 얻지 못하게 된다. p253
사랑하려면 아예 몸을 던져야 한다. 어설프게 하면, 이것도 저것도 아니다. 치료하려는 자는 아파보지 않고서는 모른다. 그 고통을. 의사도 수술대 위에 누워봐야 하고, 감옥같은 병실에서 환자복을 입어봐야 한다.
26.
고해신부 역할을 해줄 아버지 같은 사람이나 어머니 같은 사람을 가지도록 하시오! 여성들은 그런 일에 대단한 재능이 있다. 여성들은 대개 뛰어난 직관과 정확한 비판력을 지니고 있으며, 남자의 비밀스러운 의향을 간파할 줄 알고, 경우에 따라서는 남자의 아니마(Anima)가 꾸미는 음모까지 꿰뚫어볼 줄도 안다. 여자들은 남자가 보지 못하는 측면을 본다. p254
대단한 선물이다. 그녀들은 축복받았지만, 의무도 부여 받았다. 남자는 여자들이 그렇다는 것조차도 모른다. 그것이 그녀들이 힘들어 하는 이유다.
27.
그것은 당신이 우선 당신 자신을 알아가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당신 자신이 치료의 도구입니다. 당신이 올바르지 않다면, 어떻게 환자가 올바르게 되겠습니까? 당신이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어떻게 환자를 확신시킬 수 있겠습니까? 당신 자신이 진정한 재료가 되어야만 합니다. p254
내가 글을 쓰는 이유, 매일 쓰는 이유. 묵은 상처들을 낱낱이 헤집어대고, 다 꺼내 놓는 이유. 아직은 모르겠지만, 쓰다 보면 알게 되겠지.
28.
내 감정을 요가로 제어해야만 했다. 그러나 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경험하는 것이 나의 목표였기 때문에, 요가는 내가 안정되어 무의식과 더불어 다시 작업을 시도할 숭 있을 때까지만 했다. 나 자신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느낌을 갖자마자 나는 감정제어를 풀고 환상의 이미지와 내부의 소리가 새롭게 말하도록 했다. 인도 사람들은 이와 반대로 다양한 정신 내용과 이미지를 완전히 없애기 위한 목적으로 요가를 사용하고 있다. p325
나중에 나는 내 안에 있는 여성상이 남성 무의식 속에 있는 전형적인 또는 원형적인 형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를 ‘아니마’라고 불렀다. p340
글을 쓰는 사람에게, 특히나 그 글쓰기의 목적이 ‘나를 찾기 위한 여행’일 때 명상과 기도, 요가 등은 아주 좋은 수단이다. 자신의 깊은 내면에 다다르게 하고, 깊숙이 감추어져 있는 트라우마를 꺼내 치료하게 할 수도 있다. 점점 더 숨결이 가뿐해진다.
29.
매일 저녁 나는 글쓰는 일에 매달렸다. 내가 아니마에게 편지를 쓰지 않으면 그녀는 나의 환상을 파악할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의 성실한 글쓰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이미 적어 놓은 것은 아니마가 왜곡할 수 없을 것이고, 그걸 가지고 책략을 쓰지도 못할 것이었다. 이와 관련해서 보면, 우리가 어떤 것을 이야기하려고 마음만 먹는 것과 그것을 실제로 적어놓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나는 편지를 쓰면서 될 수 있는 한 정직하려고 노력했다.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을 버려라. 그러면 받으리라.” p341
나의 글쓰기, 우리의 글쓰기.. 책을 통해 만나는 저자들의 글쓰기 습관들을 하나씩 눈여겨 보게 된다. 매일 쓴다. 솔직하게 쓴다. 비우기 위해 다 토해내되, 무조건 뱉어내는 것이 아니라 연구하면서 쓴다. 이렇게도 써보고, 저렇게도 그려보고, 이런저런 형식으로 표현해보면서는 한 발짝 물러서서 곰곰이 따져본다.
30.
나는 저 세상이 아닌 이 세계의 삶을 살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p347
돌아와야 한다고 말한다. 조셉도 그렇고, 리차드 바크도 그렇고. 영웅은 다시 돌아와야 한다고 했고, 갈매기 조나단도 그 길을 선택했다. 십자가에 걸릴 자신의 운명을 알면서도 선택한 자에게... 죽음은 이미 어떤 위협도 되지 못한다. 그에게는 이미 세상의 차원을 뛰어 넘은 삶이 있다. 비록 그의 몸이 땅을 딛고 있어도, 그는 다른 세계의 삷을 살아가고 있다. 바람조차 그를 느끼지 못하고, 햇빛도 그림자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31.
그노시스파의 전통은 현재와 단절된 것 같았고, 나는 오랫동안 그노시스주의, 혹은 신플라톤주의와 현재를 잇는 다리를 발견하기가 힘들었다. .. 연금술을 이해하기 시작하면서, 그것을 통해 비로소 그노시스주의와 역사적인 연결이 이루어짐을 알게 되었다. 연금술로써 과거와 현재 사이에 연속성이 생기게 된 셈이었다. 연금술은 하나의 중세 자연철학으로서 한편으로는 과거 즉 그노시스주의에, 다른 한편으로는 미래 즉 현대 무의식의 심리학에 다리를 걸치고 있었다. p366
연금술철학에서는 여성원리가 두드러져 남성의 그것과 동등한 역할을 했다. 연금술에서 가장 중요한 여성상징의 하나는 물질의 변환이 완성되는 그릇이었다. 나의 심리학적 발견의 핵심도 이와 같은 내면의 변환과정 즉 개성화였다.
이제 나의 심리학은 역사적 토대를 얻게 되었다. 연금술과의 비교는 그노시스주의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정신적 연속성과 함께 나의 심리학에 실체성을 부여해주었다. p372
이제 나는 안다. 연금술과 더불어 ‘영지주의’ 또는 ‘신지학’에 대한 관심이 어디서 출발하고 있는지를. 이미 나를 강하게 부르고 있고, 올 1년 과정을 마무리하고, 신화에 대한 보다 깊이 있는 공부를 위해서나 내가 현재 부딪치고 있는 신학에 대한 강한 저항감으로부터 참 신앙의 의미를 가지게 할 수 있는 힘이 거기에 있을 거라는 강한 끌림이 느껴진다. 다만, 마음이 더 바쁠 뿐이다.
32.
상처 입은 자가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듯이 치료자는 자신을 치유한다. 특기할 일은 꿈에서 결정적인 활동이 죽은 자에 의해 행해진다는 사실이다. p388
나의 모든 저술은 말하자면 내부로부터 부과된 과제인 셈이다. 그것은 숙명적인 강요로 이루어졌다. 내가 쓴 것은 내부로부터 나에게 엄습해온 것들이다. 나는 나를 충동질하는 영혼으로 하여금 말을 하도록 허용했다. 나는 나의 저술에 대해서 어떤 뜨거운 공감을 기대한 적이 없다. 그 글들은 내가 살아온 동시대 세계에 대한 보상을 나타내고 있다. 나는 누구도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것을 말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특히 연구 초기에는 완전히 외톨이가 된 느낌을 자주 받았다. 나는 사람들이 싫어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의식세계에 대한 보상을 받아들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p397
나의 글쓰기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이 나는 매우 궁금하다. 변경연 홈페이지에 자주 들락거리며, 댓글과 클릭 수의 변화를 주의 깊게 보는 이유도 그렇다. 물론 ‘클릭 수’에 연연하거나, 사람들이 좋아하는 글을 쫓겠다는 말이 아니다. 일반인들의 시각에서 볼 때, 좀 색다른 공감하기 힘든 나의 세계와 시각에 대한 그들의 반응이 궁금할 따름이며, 내가 그들과 어떤 방식으로 소통해야 할 것인지를 깊게 고민하는 과정이라고 믿고 있다. 지금껏 내가 살아 온 주변세계의 반응으로부터 나는 ‘내가 외로운 이유’가 항상 궁금해왔고, 내가 이상한 사람이라는 결론에 부딪힐 때마다 성실히 노력하며, 나를 맞추기 위한 노력들을 해왔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외롭고, 갈수록 소진되는 이 근원적인 목마름의 본질이 궁금할 따름이다.
33.
나는 미래가 장기적인 전망으로 미리 무의식적으로 준비되며, 그리하여 투시력을 가진 사람은 훨씬 이전부터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아맞힌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지금도 일반인들은 그 사실을 잘 모르고 있지만 말이다. p419
유럽인은 합리적인 특성을 꽤 자랑하고 있지만, 그것이 생의 열정을 희생하고 얻은 것이며, 그로 말미암아 원시적 인격 부분이 국부적인 지하존재로 떨어지는 운명을 맞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 p438
그가 대답했다. “그들은 머리로 생각한 것을 말하오.”
나는 놀라서 물었다. “그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당신은 어디서 생각하오?”
“우리는 여기서 생각하오.” 그는 자신의 심장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p443
근대를 거치면서 우리는 얻은 것도 있지만, 잃은 것도 있다. 인간의 지적 영역과 과학분야의 영역이 확장되었지만, 정작 인간은 신화를 잃어버리고 있다. 신과 자연
이런 말을 해대는 ‘융’은 운이 좋다. 정신과 의사였으니, 정신병원에 입원하지 않아도 되는 방법을 알 수 있었을테니 말이다. 두 가지다. 첫째는 정신과 의사가 되는 과정을 포함하여 융은 스스로의 이러한 경험들의 원인을 찾기 위해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였다는 것과 그 과정에서 하나의 고통을 이겨낸 후의 결과를 얻게 되었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그가 일반인이 아닌 정신과 의사라는 사실 때문에 그는 정신병원에 입원하지 않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도 존재하는 이러한 무의식의 ‘예지력’은 그러나 그 잠재력을 믿고, 귀 기울이지 않음으로서 대부분 사장되고 만다. 인류는 신화를 잃게 되었고, 꿈의 세계로부터 추방되었다.
34.
기독교인은 선을 추구하면서도 악에 빠진다. 이에 반하여 인도인은 선과 악의 바깥에서 자신을 느끼거나, 명상이나 요가로써 이러한 상태에 이르려고 한다. p490
내가 소유하지 않고 내가 행하거나 체험하지 않은 그 어떤 것들로부터도 나를 해방시킬 수 없다. 진정한 해방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행했을 때, 내가 온전히 나 자신을 헌신하여 철저히 참여했을 때 비로소 가능한 법이다. p491
성경과 관련된 이책 저책을 뒤지다가 ‘원죄’에 대한 해석에 눈길이 꽂혔다. ‘타락’과 ‘원죄’라는 개념은 기독교의 개념이다. 둘 다 히브리 성경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창세기> 3장에는 하느님의 법에 대한 아담과 이브의 거역과 에덴 동산에서의 추방이 나온다. 하지만 이런 반항이 출산이라는 행위를 통해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원죄가 되었다는 것은 기독교에만 있는 개념이다. 타락 이전에 사람들은 그것이 죄든 아니든 원하는 대로 할 자유가 있었다. 이런 자유는 타락으로 인해 사라졌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기독교에서는 세례를 통해 얻게 되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죄를 짓거나 짓지 않을 자유를 되찾게 된다.
35.
자신의 열정을 통과하지 않은 사람은 결코 그것을 극복하지 못한다. 그러면 열정은 집 가까이 있게 되고 그가 미처 대비하기도 전에 불길을 일으켜 바로 그의 집을 덮칠 것이다. 사람들이 너무 많이 포기하고 내버려두고 겉으로 잊어버린 체하고 있을 경우, 그 포기한 것과 내버려둔 것이 두 배의 힘으로 되돌아올 가능성과 위험이 상존한다. p491
사람에 따라 다소의 차이가 있겠지만, 나의 경험에 비추어보자면, 나의 열정은 -나는 ‘짐승’의 개념으로 흔히 표현한다- 짓눌리고, 왜곡되고, 굴절되고, 편협하게 자라고 있었다. 진정 하고 싶은 것이 아닌, 해야 할 일들 속에서 제대로 성장하지 못한 나의 열정은 드디어 심술을 부렸다. ‘더 이상은 못살겠다’는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평소에 훈련이 되지 못한 그 짐승의 몸부림을 달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
36.
나는 부처의 삶을 개인의 인생 전체를 통해 스스로를 주장한 ‘자기’의 실현으로 이해했다. 부처에게 ‘자기’는 모든 신을 넘어서, 특히 인간실존과 세계의 정수를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하나의 세계로서 존재 자체의 측면뿐 아니라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그의 인식도 함께 포괄하고 있다. p495
그리스도 역시 부처와 마찬가지로 ‘자기’의 구현자다. ... 둘 다 세상을 극복한 자들이다. 부처는 이를테면 이성적 통찰로서, 그리스도는 숙명적인 희생으로써 그 일을 이루었다. 기독교에서는 더 많이 고통을 겪는 데 주안점을 두고, 불교에서는 더 많이 깨닫고 행하는 방향으로 나간다. p496
그러나, 역사적 발전은 ‘그리스도 모방’으로 이어져, 개인이 전체성에 이르기 위해 자기 고유의 숙명적인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간 길을 본받아 따라가려고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동양에서도 부처를 신앙적으로 모방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부처는 모방의 대상인 모범상이 되었고, 그럼으로써 부처 자신의 이념은 약화되었다. ‘그리스도 모방’이 기독교 이념의 발전을 치명적으로 가로막은 것처럼 말이다. 부처가 바로 그 통찰로 인해 브라마의 신들을 능가하듯이, 그리스도도 유대인들에게 “당신들은 신들이다”라고 외쳤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소위 ‘기독교적’ 서구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대신 세계파괴의 가능성으로 내닫고 있다. p497
레닌의 말 중 지금도 가슴에 꽂혀 있는 말, <모든 이론은 회색이며, 오직 영원한 것은 저 들판의 푸른나무 뿐이다> 끊임없이 변화하고 진보하는 현실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잣대로서 이론은 이미 얼마쯤은 과거의 것이다. 따라서 창의적이고 진보적인 사람들에게 새로운 이론은 답답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을 것이며, 끊임없는 개혁의 대상으로 된다. 그렇지만 과거의 권위를 좋아하거나, 이미 변화를 거부하는 보수적인 사람들은 언제나 있게 마련이다. 이들은 기득권이다. 쥔 것을 놓치 않으려고 한다. 그들에겐 그럴싸한 명분이 쥐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예수는 부처든 과거 영웅들의 권위까지도 등에 업고 살아가려 한다. ‘예수’나 ‘부처’가 무덤에서 부활한다면 놀라 자빠질 일이다.
37.
나는 그곳에서 나의 이전과 이후에 관한 물음에 답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었다. p517
내게 변경연은 그런 곳이다. 그런 곳이어야 한다. 난 나와 같이 느끼고, 나와 같이 생각하고, 나와 같이 쓰고, 나와 같이 놀아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게 변경연이라고 믿었다. 거기에 가면 그런 사람들이 한 둘쯤, 반드시 만나게 될 거라 믿었다. 세상에 서러움 받고, 장롱구석 한쪽에 쳐 박혀 찔찔 짜던 미운 오리새끼들, 대나무 숲 찾아 고함지르고 싶은 대장장이 한 둘쯤은 반드시 있을 거라고 믿고 있다.
38.
감정적인 관계는 강요와 예속으로 부담을 주는 열망의 관계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그로 말미암아 상대방과 우리 자신이 부자유하게 된다. 객관적인 인식은 감정적인 연관성 너머에 있다. 이 사실이 중요한 비밀로 여겨진다. 객관적 인식을 통해서만 진정한 융합이 가능하다. p526
만물의 종말에 관한 인식 내지는 직관으로, 나는 새로운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되었다. p526
나는 병을 통하여 또 다른 것을 얻었다. 그것은 존재에 대한 긍정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존재하는 것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이었다. 주관적인 반론 없이 말이다. 현존재의 조건을 내가 보는 그대로, 내가 이해하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p527
나는 또한 사람이 자기 자신 속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을 온갖 평가를 뛰어넘어 실제로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p528
사랑, 사랑의 비밀이 여기에 있다. 지금 나를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것들, 신에 대한 강요된 사랑, 법과 제도와 사람들의 굴레 속에서 묶인 나의 사랑, 깨달은 자에게는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비밀을 담아두어서도 안 된다. 당장에라도 저잣거리에 나가 외쳐대고 싶지만, 그랬다가는 목에 칼이 들어온다. 수갑이 채워지고, 앰블런스에 연행되어 감옥 같은 병동에 갇히게 된다. 실패한다. 구속된다. 입에 재갈이 물리어진다. 개죽음을 당하게 된다.
우선, 납작 엎드려야 한다. 숨을 죽여야 한다. 내 안의 짐승부터... 길들여야 한다. 아무 때나 소리를 질렀다가는 저 파수꾼 같은 경비병에게 들키거나, 잘 훈련된 경비견들의 이빨을 피하지 못한다. 마지막 순간까지. 숨통을 단 번에 끊어야 한다. 내겐 딱 한 방의 총알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내 안의 신을 믿고, 목숨을 걸고, 둥그런 원형 속의 십자가로 심장을 조준해야 한다. 단, 한 방에 끝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내가 죽는다.
39.
나는 깊은 충격을 받고 잠에서 깨어나 생각했다. ‘아, 그렇구나. 그 사람이 나를 명상하고 있었구나.’ 그가 하나의 꿈을 꾸었는데 그것이 나다. 그가 깨어난다면 내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 p529
그래서 나는 같은 꿈을 꾸고, 같은 시간대에 살고, 같은 공간에 머물기를 바랐다.
40.
심리학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그러한 지식이 얼마나 한정되어 있는가를 밝히는 데 어려움이 별로 없을 것이다. 합리주의와 교조주의는 우리가 앓고 있는 시대병이다. 그것들은 모든 것을 아는 체한다. p532
유감스럽게도 인간의 신화적 측면은 오늘날 심히 무시되고 있다. 인간은 이제 더 이상 이야기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 ...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가치가 있고 치유를 가져오는 법이다. p533
신화적인 인간은 ‘그 너머로 나가기’를 갈망하지만 학문적인 책임을 고려하는 인간은 그것을 허락할 수 없다. 이성의 차원에서는 ‘신화화’야말로 쓸모없는 사변일 뿐이다. 하지만 감정의 차원에서는 치유를 가져오는 활동이며 인간존재에 광채를 부여한다. 그 광채를 사람들은 놓치고 싶어 하지 않는다. p533
나는 이 말을 안다. 이 말에 공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 고마울 따름이다. 노아의 방주를 탄 것 같다. 아... 저 산 아래 내일을 모르고 여전히 오늘에 분주한 이들이 안타까울 뿐이다.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누군가 떠들며 지나간다. “예수 믿으세요...”
41.
나의 가설은 무의식이 이를테면 꿈을 통해 우리에게 보내는 암시의 도움으로 그 일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 무의식의 조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 문제에 관한 해답은 없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p535
하지만 실제로는 우리가 매일매일 우리 의식의 한계를 훌쩍 넘어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무의식이 함께 살고 있는 것이다. 비판적 이성이 우세할수록 인생은 그만큼 빈약해진다. 그러나 무의식과 신화를 의식화할수록 우리의 인생은 그만큼 통합을 이루게 된다. 과대평가된 이성은, 그것이 지배하면 개인이 궁핍해진다는 면에서 독재국가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p536
Book of Days... Enya의 노래를 듣는다. 몸이 따라 움직인다. 가만있질 못한다. 노래 소리에 몸을 맡기면.. 몸이 춤을 춘다. 꿈꾸듯이... 나는 시간의 경계를 넘어.. 하늘로 날아 오른다. 멀리서 종소리가 들리고, 천상에서 들리는 소리를 듣는다. 심장의 박동수는 이미 내 것이 아니다. 그 목소리를 따라 빠르게도 뛰고, 느리게도 뛰었다가... 숨소리도 마찬가지다. 울렁거리듯이.. 천천히..그러나 솟구쳐 오를 땐 가볍게, 가볍게 날개를 펼친다. 환하다. 빛이 난다. 눈이 부시다. (108배 후에 음악 명상을 하면서...)
42.
‘여기와 저기’라든지 ‘이전과 이후’라든지 하는 구별이 필요 없다. 나는 적어도 우리 정신적 실존의 일부가 시간과 공간의 상대성에 의해 특징지어진다는 사실에 대해 도저히 논박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의식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공간도 시간도 없는 절대적인 상태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 같다. p540
‘천리안’을 가지고, ‘축지법’을 쓰고. 한 자리에서 4~5백년의 시간을 거슬러 가기도 하고, 실시간으로 지구 반대편을 엿보기도 한다. 이미 우리는 ‘신’의 경지에 오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미 우리는 ‘타임머신’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43.
무의식의 형상들도 ‘정보를 잘 받지 못한다’ 그래서 ‘앎’에 이르기 위해서는 의식과의 접촉이나 인간을 필요로 한다. p543
꿈은 현실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꽃으로 피지만, 그 근원은 저 땅 속 밑에서 시작되고 있다. 꽃 지고, 열매가 다시 떨어져 시작하는 자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그 곳, 세상이다. 저잣거리다. 그래서 영웅들은 힘든 시간을 견디어 내고서도, 자신을 힘들게 했던 그 잔인한 곳으로 되돌아 오기를 선택하나 보다. 그들의 운명이다.
44.
그러나 죽은 자의 혼령들도 그들이 죽는 순간에 이르기까지 알고 있던 것만 ‘알고’ 그 외에는 모르는 것 같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람들의 앎에 참여하기 위해 인생 속으로 밀고 들어오려고 애쓴다. p546
그들은 약해지면 밀고 들어온다. 도무지 예의라고는 없고, 함부로 말하고, 떠들고, 말을 듣지 않는다. 마치 다 아는 것처럼 지껄여댄다. 담배연기 뿌연 선술집 술주정뱅이들처럼, 질투로 가득 찬 암코양이처럼, 웃기지도 않는다. 그들을 빌어먹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잡스러운 점장이들이다. 싸구려 목사들이다. 그들은 어지럽히기만 한다. 얄팍한 느낌만으로 말한다. 도무지 위대함을 보지 못한 천박함과 오만이 그들의 눈빛에서 그들의 추한 영혼들이 비친다.
45.
내가 보기에는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살아 있는 자들, 다시 말해 그들 뒤에 살아남아서 계속 변화하는 세계 속에 존재하는 사람들로부터 자신들의 물음에 대한 회답을 얻는 것이 아닌가 싶다. 죽은 자들은 전지(全知)하나 모든 지식을 임의로 활용할 수 없고 단지 육체에 갇힌 살아 있는 사람들의 혼으로 흘러들어가는 일만 가능하다는 듯이 우리에게 묻고 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사람의 혼은 적어도 한 가지 면에서는 죽은 자에 비해 유리하다. 즉, 명쾌하고 결정적인 인식에 이를 수 있는 능력이 바로 그것이다
니체처럼 살고 싶지 않다. 니체는 내 삶이 될 수 없다. 내게 권총만 한 자루 쥐어진다면, 나는 쏘고 싶다. 신이 죽었다고 말하기보다는 신을 쏘고 싶다. 내가 죽였다고 외치고 싶다. 그리고 폭우가 쏟아지는 하늘을 향해 나머지 총알들을 연발하고 싶다. 그렇게 쇼생크를 탈출하고 싶다.
46.
부처는 이 물음에 답을 하지 않은 채 남겨놓았다. 그런데 그도 그 물음에 대한 확신한 답을 몰랐다고 짐작된다. p561
그래서 부처가 예수보다 조금 나은지도 모른다. 남은 사람들이 해야 할 몫, 그리고 그들도 하면 된다는 것까지를 남겨놓을 줄 알았기에. 누구처럼 그 모든 것을 대신해서 짊어지고 가면 안 된다. 남겨두어야 한다. 각 자의 몫이 있다. 그래야 공평하다.
47.
나의 존재의미는 인생이 나에게 물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나 자신이 세계를 향해 던지는 하나의 물음이며, 나는 거기에 대한 나의 대답을 제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단지 세계가 주는 대답에 의지할 뿐이다. 그것이 내가 오로지 고심 끝에 인식하게 된 초개인적인 인생과제다. p562
군대를 제대하고, 다시 동료들을 찾았다.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그들도 되려 물었다. 나를 필요로 하는 일이면 어디든 가겠다고 했다. 스스로 훌륭한 태도라고 생각했다. 얼마나 겸손하고, 헌신적인 발언이란 말인가. 새로 만들 ‘노동자회’ 일을 같이 하게 되었다. 만나는 사람들이 거칠었다. 온통 세상을 향한 불만투성이었고, 그들의 가슴 속에는 분노들이 가득했다. 만날 때마다 ‘욕’이었고, 술 마시면 ‘투쟁’이었고, 나를 늘 ‘동지’라고 불렀다.
십 수 년이 지났다. 개뿔이나... 그들은 요즘도 욕을 하고 살고, 요즘도 남들 의식하지 않고 메가폰 볼륨을 높인다. 너무 쉽게 길을 막아서고, 그러면서도 당당하다. 그렇지만, 내겐 이제 안쓰러워 보인다. 그들 눈빛 너머로 빈약하게 말라 비틀어져 죽어가는 또 다른 그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건 내가 지나 온 과거이기도 하다. 업보다. 내가 지어온 일이기도 하다.
이제 나에게 물어야 할 시간들이다. 마흔을 즈음해서 꺾여진 나이, 더는 미루어서는 안 될 일임을 안다. 후회없이 살고 싶다. 또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저 어두운 터널, 저 지겨운 시간들 속으로, 저 시끌벅적한 아수라장으로 가고 싶지 않다. 나를 피말리게 하는 지옥이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외로움을 감수해야 한다. 돌팔매질이 시작될 지도 모른다. 그래도 떠날란다. 난 이미 충분히 했다. 더 이상은 그들의 몫이다. 그것까지 다 내가 짊어져야 할 이유를 나는 알지 못한다. 이제 충분한 시간이 되었다.
48.
나도 욥처럼 “손으로 입을 가릴 뿐입니다. 내가 한 번 말하였으니 다시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게 된다. p619
세상을 향해 한 번은 말해야 한다. 그것이 최소한의 의무라고 믿으니까. 그렇지만, 두 번, 세 번을 하다보면, 나도 지치고 세상도 싫어한다. 자꾸 불편해지만 하지, 들으려 하지 않는다. 쫓아가려 하면, 도망친다. 그냥 놔둬라. 알 사람은 때가 되면 알게 되고, 궁한 자는 찾게 되어 있다. 나는 다만 기다릴 뿐이다. 대신, 나를 찾는 이가 있다면, 그들에게는 성심을 다해야 한다. 그들은 멀리서 왔으며, 고생을 했다. 이미 그만한 보상을 받을 준비가 된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는 그만한 보상이 주어져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다면, 할 수 있는 만큼 그들에게 나누어야 한다.
49.
사람이 무슨 말을 하든지 그 전체를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없다. 부분적인 측면에서 말하는 것은 항상 너무 과하거나 너무 부족하다. 왜냐하면 오직 전체만이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그리고 “모든 것을 견딘다”. 이 구절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 아무것도 덧붙일 것이 없다. 우리는 소위 가장 깊은 뜻에서 우주창조의 근원인 ‘사랑’의 희생제물이거나 수단과 도구다. p619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그리고 “모든 것을 견딘다. 맞지만, 거짓말이다. 애매모호한 말이다. 사랑이 무엇인지를 먼저 깨닫게 해주어야 한다. 내가 먼저 깨달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 말은 약도 되고, 독도 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저 말에 현혹되어, 고통을 참으며, 스스로를 괴롭히면서 살아가는 지 똑똑히 보고 나서 해야 할 말이다. 그 전에는 저 말을 할 수 없다. 해서는 안 되는 말이다.
50.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벚나무 줄기가 자라도록 돌봐야 할 사람이 나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나는 거기 서서 자연이 해낼 수 있는 것을 보고 경탄할 뿐이다. p623
고독이란 주변에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전할 수 없거나 자기는 가치 있다고 여기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황당무계한 것으로 간주될 때 생기는 법이다. p624
나를 사람들은 생각이 너무 많다고들 한다. 어떤 친구는 생각하지 말라고, 개나 돼지처럼 살라고 두 번이나 충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살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안다. 그들은 여전히 나를 모른다. 아직 나도 나를 잘 모르는데.
4. 카를 융을 다시 읽으면서
카를 융의 자서전을 처음 읽으면서, 매우 인상 깊었던 것은 그의 체험들이었다. 세상 밖으로 쉽게 내어 놓을 수 없었던 그의 경험들과 그가 겪었을 마음의 고통 등에 많은 공감이 되었었다. 발췌한 내용들을 보면서, 내가 그런 필터를 가지고 책을 보고 있었구나 싶었다.
다시 읽으면서는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책장을 폈지만, 곧 당황하게 되었다. 한 번 읽었던 내용이니, 술술 넘어가게 될 것이라는 나의 기대는 금방 허물어지고 말았다. 몇 가지, 우선 이런 구절이 있었는데 왜 못보고 지나쳤을까 싶은 구절들이 새롭게 눈에 띄는 것이 신기했다. 그리고 그 구절들이 이제야 눈에 들어오는 이유를 나에게 물었다. 불과 몇 달 전인데, 나는 달라져 있었다.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처음에는 밑줄 친 그것들이 신기하고, 궁금했지만 지금은 그것들을 신기해하고, 궁금해 하는 내가 궁금해진다.
- 자서전을 쓰는 과정에서 실제로 겪게 되는 고충에 대한 글귀들이 새로 눈에 들어왔다.
- 칼럼을 쓰는 과정에서 쏟아내었던 나의 이야기들과 관련된 소재, 인물들에 관련된 내용들이 눈길을 새로 잡았다 (예, 괴테 파우스트 이야기)
- 제1인격과 제2인격과 관련된 이야기는 새삼스러울 정도로 처음 읽을 때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았던 내용이었는데, 지금은 그 때 왜 이해를 못했는지가 이해되지 않는다.
- 얼마 전 토론모임에서 다루었던 '니체'의 이야기는 새롭게 더 관심이 갔다.
- 프로이트와의 관계나 해석에서도 좀 더 세부적인 융의 입장을 읽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