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병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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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칼의 노래를 먼저 읽고 나서 난중일기를 읽었다. 이 둘은 소설과 일기의 간극만큼의 차이가 난다. 재미로 치면 칼의 노래가 압도한다. 인간 이순신의 내면 묘사가 뛰어나고 사방의 적들에 둘러 쌓여 고뇌하는 실존의 모습이 허무주의를 배경으로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반면에 난중일기는 재미가 없고 무미건조하다. 간결하게 그날 한일, 일어난 일에 대해 단순하게 적혀있을 뿐이다. ‘활 10순을 쏘았다.’ ‘아침밥을 윤봉사와 같이 먹었다.’ 라는 식으로 무인다운 문체를 보여준다.
난중일기는 1592년 임진년부터 1598년 무술년까지 이순신이 진중에서 6년 9개월에 걸쳐 붓으로 쓴 초서체의 일기다. 난중일기는 임란 당시 조선 민중들의 생활상과 무능력한 조정의 모습, 조선의 군사체계 등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적 가치를 갖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난중일기의 진면목은 영웅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이순신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난중일기는 이순신이 쓴 이순신 자신에 관한 이야기다.
이순신의 삶은 고난으로 점철된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를 가장 괴롭힌 건 바로 병마다. 신경성 위염과 토사곽란에 시달렸으며 식은 땀을 흘리며 긴 밤을 뒤척인 적이 수없이 많다. ‘이날 밤에 식은 땀이 등을 적시고 옷 두 겹이 다 젖고 이부자리도 젖었다.’(1596년 3월 17일) ‘이날 밤에 속이 답답해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중까지 앉았다 누웠다 하다가 밤이 깊어서야 잠들었다.’(1596년 7월 24일) ‘어두운 무렵에 코피를 한 되 남짓 흘렸다. 밤에 앉아서 생각하고 눈물 짓고 했다’(1597년 10월 19일)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 했던가. 정유년 4월, 이순신은 선조의 국문을 견디고 백의종군한 지 얼마 안 돼 어머니의 부음을 듣는다. ‘조금 있다가 종 순화(順花)가 배에서 와서 어머님의 부고를 전한다. 뛰쳐나가 둥그러지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하다. 곧 해암으로 달려가니 배가 이미 와 있었다. 길에서 바라보는,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이야 이루 다 어찌 적으랴…’(1597년 4월 13일) 이순신은 난중일기 곳곳에서 어머니에 대한 깊은 효심을 표현하고 있다. ‘아침에 흰 머리카락 몇 개를 뽑았다. 흰 머리가 난 것이 큰일은 아니지만, 다만 위로 늙으신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송구스럽다.’(1593년 6월 12일)
그러나 어머님을 잃은 슬픔도 잠시,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끈 지 한 달 후에 막내아들 면을 고향 아산에서 왜적에게 죽임을 당하는 봉변을 당한다. 이 날 이순신의 꿈은 비통한 심정을 고스란히 전한다. ‘새벽 2시쯤 꿈에 내가 말을 타고 언덕 위를 가다가 말이 헛디디어 냇물 가운데 떨어지긴 했으나 거꾸러지지 않았는데, 끝에 아들 면이 엎드려 나를 감싸 안는 것 같은 형상을 보고 깨었다. 무슨 조짐인지 모르겠다… 저녁 때 어떤 사람이 천안으로부터 와서 편지를 전하는데, 미처 봉함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겉봉을 대강 뜯고 둘째 아들 열의 글씨를 보니 겉면에 ‘통곡’ 두자가 씌어 있어 면의 전사를 알고, 간담이 떨어져 목놓아 통곡했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인자하지 못하신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듯하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이런 어긋난 일이 어디 있을 것이냐.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도 그 빛이 변했구나. 슬프고 슬프다. 내 아들아, 너를 버리고 너는 어디로 갔느냐. 남달리 영특하기로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 두지 않는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앙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이제 세상에 목숨을 부지한들 누구에게 의지할 것이냐. 너를 따라 함께 죽어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건만 네 형, 네 누이, 네 어미가 의지할 곳이 없으니 아직은 참고 연명이야 한다마는 내 마음은 이미 죽고 형상만 남아 있어 울부짖을 뿐이다. 하룻밤을 지내기가 길고 길어 1년 같구나.’(1597년 10월 14일) 이 날 일기는 구구절절 가슴 시리도록 슬픔이 밀려온다.
이순신은 자신의 병마와 싸우고 가족을 잃은 슬픔을 딛고서 변화의 적들과 끝없는 싸움을 해야 했다. 조선을 침략한 왜군은 두말할 것도 없고 무능력한 조정과 선병질적인 선조의 의심, 가소로운 원균의 모함, 명나라 유정과 진린의 모멸과 배신에 대항해야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더 큰 싸움은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자신의 나약함과 깊은 절망을 극복하고 그는 희망을 잃지 않는 법을 배웠다. 난중일기는 이순신의 7년 간의 변화의 기록이다.
이순신이 백의종군에서 복권되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을 때 선조는 현지 상황을 판단하여 수군에 가망성이 없으면 수군을 포기하고 권율 도원수가 이끄는 육군에 합류하라는 교지를 내렸다. 이순신은 이에 대해 “아직 배 12척이 남아 있고 이순신이 죽지 않았다”는 말로 수군을 일으켜 세워 반드시 승리하겠다는 장계를 올린다. 비록 12척에 불과한 군선을 보유하고 있지만 승리에 대한 확신과 자신에 대한 믿음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전하께서는 수군이 외롭다하시오나 오히려 제게는 열 두 척의 전선이 있고, 신의 몸이 죽지 않는 한 적들이 우리를 업신여기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충무공전서 권9)
또한 이순신은 10배나 전선이 많은 적과의 명량해전을 하루 앞두고 장수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병법에 이르기를 "죽고자 하면 반드시 살고, 살려고 하면 반드시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고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모두 오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1597년 9월 15일) 이순신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부하들을 격려하고 자신감을 불어 넣는 리더십을 보여준다. 이는 본인이 스스로 두려움과 나약함을 이겨내어야 가능한 법이다. 그는 스스로의 변화를 통해 외로움과 두려움이라는 내부의 저항을 이겨내고 비극 속의 위대함을 일궈냈다. 인간의 모든 힘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극복하여 얻어진 것이다.
이순신은 옥포해전에서 최후의 노량해전까지 23전 23승, 즉 100% 승리의 전과를 올린다. 이 같은 믿기지 않은 전과를 올린 것은 단지 운이 좋아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의 승리의 비결은 전투에 대한 철저한 준비에서 비롯된 것이다.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찾아온다. 1592년 4월 임란 전에 그는 미래를 내다 보고 이미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일기에 따르면 그는 방어용 성과 못 그리고 봉수대 등을 수리하고, 전라좌도에 속한 녹도, 발포, 흥양, 여도, 방답 등 다섯 진을 일일이 순찰하면서 병선과 무기를 점검하였다.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작전 지시할 정도로 그는 병법과 전략에 몰입했다. ‘이날 밤 신인(神人)이 꿈에 나타나 가르쳐 주기를,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진다”고 했다.’(1597년 9월 15일)
이순신은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사람과의 인적 네트워크를 유지하면서 부하, 동료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중시하였다. 그의 평생지기 유성룡은 그에게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정탁은 이순신이 모함으로 하옥되었을 때 선조에게 이순신을 변호하는 글을 올려 죽음에서 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영의정 유성룡의 편지도 가져왔다. 위에서 밤낮으로 염려하고 애쓰는 일을 들으니, 그 강직한 마음과 그리움이 끝이 없었다.’(1594년 2월 12일) 난중일기에 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이순신은 밤마다 식은 땀을 흘리면서도 술은 계속해서 마셨다는 것이다. 술을 마시면서 밤새도록 이야기 한 적도 많다.
이순신은 끊임없는 학습과 실험을 통해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조선기술을 가진 나대용을 만나 거북선 제작에 착수하여 일 년여 만에 시전리 앞바다에서 시운전(진수식)을 하였다. 거북선을 만드는 과정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지는 않지만 추론해 보건대 수많은 시행착오와 실패를 경험했음은 틀림이 없을 것이다. 또한 이순신은 진법을 연구하고 또 연구하여 한산 앞바다에서는 다른 부하 장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형을 학의 날개처럼 넓게 펼쳐 그 안에 적이 들어오도록 하여 포위하는 진법(학익진)을 적용하여 큰 전공을 올렸다.
이순신이 7년간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밑바탕은 그가 하루를 충실하게 보냈다는 점에 있다. 물론 몸이 매우 안 좋아서 쉰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는 매일 화살을 쐈다. 하루 2시간을 고정적으로 활쏘기에 할애했다. 군관들에게도 특별히 날씨가 나쁠 때가 아니면 거의 매일 활쏘기를 연습시켰다. 그리고 일기를 하루 중 어느 때에 썼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그는 하루를 일기를 통해 마무리했다. 전쟁 중이지만 그는 진중에서 발생하는 일과 본인의 생각을 매일 기록해 나갔다. 기록은 기억을 지배하는 법이다. 그가 만약 난중일기를 남기지 않았으면 오늘날 이렇게 추앙 받을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난중일기에는 하옥 등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제외하고는 짧은 내용이라도 거의 매일 기록이 되어있다. 어떤 날은 날짜만 있기도 하고, 날씨만 언급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순신은 긴박한 전장 속에서 왜 일기를 썼을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하루를 진지한 성찰을 통해 반성하고 보다 나은 내일을 준비하려는 마음이 큰 까닭이다. 거꾸로 생각하면 일기를 쓰기 위해서는 하루를 소중하게 보내야 하고 잘 기억하기 위해서다.
나는 블로그를 통해 ‘일상의 황홀’을 기록한다. 물론 매일 할 수는 없지만 이제부터는 가급적 자주 기록을 하려 한다. 또렷한 기억보다 희미한 기록이 나은 법이다. 누구에게 보여준다는 것을 의식하기 보다는 하루를 되돌아보고 나 자신과의 대화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진정한 나 자신을 발견하는 고정적인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위대한 이순신 장군처럼 내면의 성숙을 통해 위대한 나의 역사를 만들어 나가기 위함이다. 소중한 하루를 헛되이 보내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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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중일기는 1592년 임진년부터 1598년 무술년까지 이순신이 진중에서 6년 9개월에 걸쳐 붓으로 쓴 초서체의 일기다. 난중일기는 임란 당시 조선 민중들의 생활상과 무능력한 조정의 모습, 조선의 군사체계 등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적 가치를 갖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난중일기의 진면목은 영웅이 아닌 인간으로서의 이순신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난중일기는 이순신이 쓴 이순신 자신에 관한 이야기다.
이순신의 삶은 고난으로 점철된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를 가장 괴롭힌 건 바로 병마다. 신경성 위염과 토사곽란에 시달렸으며 식은 땀을 흘리며 긴 밤을 뒤척인 적이 수없이 많다. ‘이날 밤에 식은 땀이 등을 적시고 옷 두 겹이 다 젖고 이부자리도 젖었다.’(1596년 3월 17일) ‘이날 밤에 속이 답답해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중까지 앉았다 누웠다 하다가 밤이 깊어서야 잠들었다.’(1596년 7월 24일) ‘어두운 무렵에 코피를 한 되 남짓 흘렸다. 밤에 앉아서 생각하고 눈물 짓고 했다’(1597년 10월 19일)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 했던가. 정유년 4월, 이순신은 선조의 국문을 견디고 백의종군한 지 얼마 안 돼 어머니의 부음을 듣는다. ‘조금 있다가 종 순화(順花)가 배에서 와서 어머님의 부고를 전한다. 뛰쳐나가 둥그러지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하다. 곧 해암으로 달려가니 배가 이미 와 있었다. 길에서 바라보는,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이야 이루 다 어찌 적으랴…’(1597년 4월 13일) 이순신은 난중일기 곳곳에서 어머니에 대한 깊은 효심을 표현하고 있다. ‘아침에 흰 머리카락 몇 개를 뽑았다. 흰 머리가 난 것이 큰일은 아니지만, 다만 위로 늙으신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송구스럽다.’(1593년 6월 12일)
그러나 어머님을 잃은 슬픔도 잠시,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끈 지 한 달 후에 막내아들 면을 고향 아산에서 왜적에게 죽임을 당하는 봉변을 당한다. 이 날 이순신의 꿈은 비통한 심정을 고스란히 전한다. ‘새벽 2시쯤 꿈에 내가 말을 타고 언덕 위를 가다가 말이 헛디디어 냇물 가운데 떨어지긴 했으나 거꾸러지지 않았는데, 끝에 아들 면이 엎드려 나를 감싸 안는 것 같은 형상을 보고 깨었다. 무슨 조짐인지 모르겠다… 저녁 때 어떤 사람이 천안으로부터 와서 편지를 전하는데, 미처 봉함을 뜯기도 전에 뼈와 살이 먼저 떨리고 정신이 혼미해졌다. 겉봉을 대강 뜯고 둘째 아들 열의 글씨를 보니 겉면에 ‘통곡’ 두자가 씌어 있어 면의 전사를 알고, 간담이 떨어져 목놓아 통곡했다. 하늘이 어찌 이다지도 인자하지 못하신고. 간담이 타고 찢어지는 듯하다. 내가 죽고 네가 사는 것이 이치에 마땅하거늘, 네가 죽고 내가 살았으니, 이런 어긋난 일이 어디 있을 것이냐. 천지가 캄캄하고 해조차도 그 빛이 변했구나. 슬프고 슬프다. 내 아들아, 너를 버리고 너는 어디로 갔느냐. 남달리 영특하기로 하늘이 이 세상에 머물러 두지 않는 것이냐. 내가 지은 죄 때문에 앙화가 네 몸에 미친 것이냐. 내 이제 세상에 목숨을 부지한들 누구에게 의지할 것이냐. 너를 따라 함께 죽어 지하에서 같이 지내고 같이 울고 싶건만 네 형, 네 누이, 네 어미가 의지할 곳이 없으니 아직은 참고 연명이야 한다마는 내 마음은 이미 죽고 형상만 남아 있어 울부짖을 뿐이다. 하룻밤을 지내기가 길고 길어 1년 같구나.’(1597년 10월 14일) 이 날 일기는 구구절절 가슴 시리도록 슬픔이 밀려온다.
이순신은 자신의 병마와 싸우고 가족을 잃은 슬픔을 딛고서 변화의 적들과 끝없는 싸움을 해야 했다. 조선을 침략한 왜군은 두말할 것도 없고 무능력한 조정과 선병질적인 선조의 의심, 가소로운 원균의 모함, 명나라 유정과 진린의 모멸과 배신에 대항해야 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더 큰 싸움은 자신과의 싸움이었다. 자신의 나약함과 깊은 절망을 극복하고 그는 희망을 잃지 않는 법을 배웠다. 난중일기는 이순신의 7년 간의 변화의 기록이다.
이순신이 백의종군에서 복권되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을 때 선조는 현지 상황을 판단하여 수군에 가망성이 없으면 수군을 포기하고 권율 도원수가 이끄는 육군에 합류하라는 교지를 내렸다. 이순신은 이에 대해 “아직 배 12척이 남아 있고 이순신이 죽지 않았다”는 말로 수군을 일으켜 세워 반드시 승리하겠다는 장계를 올린다. 비록 12척에 불과한 군선을 보유하고 있지만 승리에 대한 확신과 자신에 대한 믿음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전하께서는 수군이 외롭다하시오나 오히려 제게는 열 두 척의 전선이 있고, 신의 몸이 죽지 않는 한 적들이 우리를 업신여기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충무공전서 권9)
또한 이순신은 10배나 전선이 많은 적과의 명량해전을 하루 앞두고 장수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병법에 이르기를 "죽고자 하면 반드시 살고, 살려고 하면 반드시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고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모두 오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1597년 9월 15일) 이순신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부하들을 격려하고 자신감을 불어 넣는 리더십을 보여준다. 이는 본인이 스스로 두려움과 나약함을 이겨내어야 가능한 법이다. 그는 스스로의 변화를 통해 외로움과 두려움이라는 내부의 저항을 이겨내고 비극 속의 위대함을 일궈냈다. 인간의 모든 힘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극복하여 얻어진 것이다.
이순신은 옥포해전에서 최후의 노량해전까지 23전 23승, 즉 100% 승리의 전과를 올린다. 이 같은 믿기지 않은 전과를 올린 것은 단지 운이 좋아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의 승리의 비결은 전투에 대한 철저한 준비에서 비롯된 것이다. 기회는 준비된 자에게 찾아온다. 1592년 4월 임란 전에 그는 미래를 내다 보고 이미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일기에 따르면 그는 방어용 성과 못 그리고 봉수대 등을 수리하고, 전라좌도에 속한 녹도, 발포, 흥양, 여도, 방답 등 다섯 진을 일일이 순찰하면서 병선과 무기를 점검하였다.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작전 지시할 정도로 그는 병법과 전략에 몰입했다. ‘이날 밤 신인(神人)이 꿈에 나타나 가르쳐 주기를,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진다”고 했다.’(1597년 9월 15일)
이순신은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사람과의 인적 네트워크를 유지하면서 부하, 동료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중시하였다. 그의 평생지기 유성룡은 그에게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정탁은 이순신이 모함으로 하옥되었을 때 선조에게 이순신을 변호하는 글을 올려 죽음에서 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영의정 유성룡의 편지도 가져왔다. 위에서 밤낮으로 염려하고 애쓰는 일을 들으니, 그 강직한 마음과 그리움이 끝이 없었다.’(1594년 2월 12일) 난중일기에 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이순신은 밤마다 식은 땀을 흘리면서도 술은 계속해서 마셨다는 것이다. 술을 마시면서 밤새도록 이야기 한 적도 많다.
이순신은 끊임없는 학습과 실험을 통해 좋은 성과를 거두었다. 조선기술을 가진 나대용을 만나 거북선 제작에 착수하여 일 년여 만에 시전리 앞바다에서 시운전(진수식)을 하였다. 거북선을 만드는 과정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지는 않지만 추론해 보건대 수많은 시행착오와 실패를 경험했음은 틀림이 없을 것이다. 또한 이순신은 진법을 연구하고 또 연구하여 한산 앞바다에서는 다른 부하 장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형을 학의 날개처럼 넓게 펼쳐 그 안에 적이 들어오도록 하여 포위하는 진법(학익진)을 적용하여 큰 전공을 올렸다.
이순신이 7년간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밑바탕은 그가 하루를 충실하게 보냈다는 점에 있다. 물론 몸이 매우 안 좋아서 쉰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는 매일 화살을 쐈다. 하루 2시간을 고정적으로 활쏘기에 할애했다. 군관들에게도 특별히 날씨가 나쁠 때가 아니면 거의 매일 활쏘기를 연습시켰다. 그리고 일기를 하루 중 어느 때에 썼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그는 하루를 일기를 통해 마무리했다. 전쟁 중이지만 그는 진중에서 발생하는 일과 본인의 생각을 매일 기록해 나갔다. 기록은 기억을 지배하는 법이다. 그가 만약 난중일기를 남기지 않았으면 오늘날 이렇게 추앙 받을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난중일기에는 하옥 등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제외하고는 짧은 내용이라도 거의 매일 기록이 되어있다. 어떤 날은 날짜만 있기도 하고, 날씨만 언급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순신은 긴박한 전장 속에서 왜 일기를 썼을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하루를 진지한 성찰을 통해 반성하고 보다 나은 내일을 준비하려는 마음이 큰 까닭이다. 거꾸로 생각하면 일기를 쓰기 위해서는 하루를 소중하게 보내야 하고 잘 기억하기 위해서다.
나는 블로그를 통해 ‘일상의 황홀’을 기록한다. 물론 매일 할 수는 없지만 이제부터는 가급적 자주 기록을 하려 한다. 또렷한 기억보다 희미한 기록이 나은 법이다. 누구에게 보여준다는 것을 의식하기 보다는 하루를 되돌아보고 나 자신과의 대화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진정한 나 자신을 발견하는 고정적인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위대한 이순신 장군처럼 내면의 성숙을 통해 위대한 나의 역사를 만들어 나가기 위함이다. 소중한 하루를 헛되이 보내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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