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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 16일 00시 53분 등록
하나, 씨가 되는 말

혹 가다가 ‘이혼’이라는 말을 아주 쉽게 심심풀이 땅콩처럼 자주 쓰면서 사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이 무에 그리 좋은 말이라고 자주 사용하는지 모르겠다. 아마 사용하는 측에서도 은연중 어딘가에서 인이 배이도록 들어서 그러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하루 이틀이라고 자주 들으면 식상하듯 별로 좋지도 않은 이혼이라는 말을 무슨 무기인양 툭하면 협박용으로 사용하며 남발하는 사람들을 보면 나는 공연히 내 귀에 들렸다는 것만으로도 무진장 성질이 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부부싸움이 오갈 때 오히려 사고를 친 당사자 쪽에서 적반하장으로 아주 의기 양양해하며 먼저 사용하면서 시침을 떼고 공격하는 경우를 흔히 목격하게 되는데 이게 말이 되는 경우인가. 그러니 당하는 사람은 이중 삼중으로 당하게 되면서 그 거짓부렁의 연극에 속아가며 게다가 자칫 이해부족의 나쁜 사람으로까지 오인이 되는 경우까지 발생하니 어찌 부당함에 억울하고 분통해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가끔 주변에서도 이런 경우를 이야기해 오는 경우가 있는데 경험을 해보거나 지혜가 있는 사람은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 대번에 알 수 있는 일이지만 알면서도 참견 할 수 없는 노릇이고, 또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나을 상담자를 위해 적당히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도록 배려하지만 한편으로 잘도 꾸며대는 상대방의 연극에 속수무책으로 짓밟히며 심하게 마음고생까지 겪는 착한 상대역들을 지켜보노라면 어찌 안쓰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무리 머리가 잘 돌아가 시침을 떼고 도리어 가관이기야 하지만 이미 하늘이 알고 땅이 알며 지들이 아는 일이니 양심이 있다면 편하기야 하겠는가. 누가 매번 속아주기만 하겠는가 말이다.

나와 살던 사람도 이런 이혼 따위의 말을 아주 쉽게 자주 사용했는데 설령 어쩌다 농담이라고 해도 이 말이 그리 야속하고 가슴에 앙금이 생길 수가 없었다. 옛말에 ‘말이 씨가 된다’ 고 하는 속담이 있듯이 처음에는 전혀 나와 무관하게 생각하였지만 하찮은 일에도 자신의 주장을 펴기 위해 억지를 써가며 자주 들먹이니 나중에는 정말이지 그 말이 너무도 듣기 싫어 되받아서 그의 면전에 똑같은 방법으로 핏대를 올리며 악을 쓰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말이 씨가 되어 정말로 이혼 서류에 서로가 쾅!쾅! 도장을 찍어버리기까지 했다. 이렇듯 아무리 지속된 문제와 시달림이 있었다고 해도 도장을 찍을 당시는 또한 예측불허의 불가피한 상황으로 치닫기 일쑤이고 즉흥적인 작용이 끼어들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의 관계가 그렇게까지 심각하지 않은 상태에서조차 평소에 그런 말을 쉽게 토할 때면 마음이 상하여 강하게 거부의 몸짓을 보내기도 했지만 그의 반응은 마치 우습다는 듯이 골려가며 처음에는 우리말의 ‘반어법’도 모르냐고 둘러대고는 하였다. TV 극중에 남편의 부당한 처사에도 불구하고 그의 곁을 떠나지 못하는 여인네들의 역할을 보면서는 너도 그럴 것이라고 간단히 점을 쳐가며 우쭐해 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나는 나도 모르게 마음에 응어리를 하나 간직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무리 좋아하는 남편이고 하늘같이 섬기고 싶은 천하의 서방이었다가도 정나미가 뚝 떨어지고 구역질과 매스꺼움이 느껴지면서 좋지 않은 기분이 되고는 말았다. 그러한 나를 보는 그는 무척이나 재미난 광경이 벌어지기라도 한 듯 더 골려먹기 일쑤이곤 하였으니 그것도 팔자였을까? 내심 설마 하면서도 나는 그 말이 몹시 듣기 싫었고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그를 이해하기 무척 거북하고 힘들었다. 그래도 그게 딴엔 농이거니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들을 때마다 서운함이 축적되고는 하였던 것이고 마침내 일을 내고야 만 것이다.

청년시절까지 그리고 지금까지도 무척이나 고지식하게 살아온 나는 그런 말이나 생각을 함부로 하는 것만으로도 불길하고 더럽고 추잡하게 느꼈었다. 마치 몹쓸 병에라도 걸린 것처럼 인생의 전적인 실패로 받아드리며 아주 못되고 흉한 짓거리라고 생각하며 자랐던 터라, 그 말이 결코 아무렇게나 쉽게 내뱉으며 우스개로 사용될 말은 아니라고 인식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듣기 싫은 말을 무슨 재미난 장난거리인양 함부로 마구 쓰니 서로 간에 감정싸움이라도 일어나는 날에는 평소에는 어쩔 수 없이 참고 넘어갔을 지라도 실제로는 서운하게 잠재되어 있던 감정들이 모조리 되살아나 더 심하게 다투게 되곤 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계속 서로가 지지 않고 싸우다 보니 정말로 이혼까지 하게 되었다. ‘그래, 해!’하고 반발심으로 맞받아치면서 그야말로 끝까지 가버린 것이다. 간혹 사람들은 이혼하는 사람들은 별세계의 사람인양 치부하려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게 과연 그럴까? 나보다 더 심한 상태에서도 들러붙어 사는 것만이 장땡일까? 지독히 경멸하며 사는 부부가운데 이혼했다고 하면 마치 다른 세상 사람을 대하듯 잘난 체를 하며 얕잡아 보는 이들이 더러 있기도 한데 도무지 그들의 속을 알 수가 없다. 진실로 나는 그렇게 살아가는 부부들에 대해 잘 납득이 가지 않을 뿐 아니라 그런 결혼 생활에 대해 전혀 부럽지가 않다. 어떠한 경우라도 이혼을 하지 않겠노라고 하는 선의의 맹세와 다짐으로나 받아들여야 할 일인가 보다. 나도 그랬으니까.

도저히 살 수 없다고 판단되고 아주 보기 싫어서 살도 맞대기 싫으며 보기만 해도 밥맛이 뚝뚝 떨어지는 경우가 아니라면, 그저 한사람이 정신만 바로 차려준다면 못살 것이 없을 때는 함부로 이혼까지 할 일은 아닐 것이다. 나는 사사건건 너무나 쉽게 내뱉는 그 말에 신물이 났고 지쳤으며 심히 마음이 상했고 게다가 나중에는 저지하거나 이기지 못하니까 나 자신에 대한 모멸감까지도 느끼게 되었다. 쉽게 사랑한다고 하거나 듣지도 않았지만 100번의 사랑과 신뢰라 할지라도 단 한마디로 인하여 일순간에 모든 것이 허사가 되는 망언이 아닐 수 없다. 망언은 망언을 부르고 계속해서 망발로 이어질 뿐이다. 누구든 한쪽이 싫어하는 말을 계속 해대고 그로인해 억울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자신의 발뺌만을 일삼으며 제대로 풀어가려고 생각지 않고 대강 얼렁뚱땅 하루 또 하루 날짜만 넘기며 눈 가리고 아옹 하는 식의 임시방편으로 넘기는 것은 필요 이상의 소모전으로 사람만 상하게 한다. 거짓은 거짓을 부르고 망령은 더 지독한 망령된 생각을 불러들일 뿐이다. 그러므로 나쁜 싹은 처음부터 잘 다스리고 잘라내어 나가려는 서로간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론으로는 너무나 빠삭히 아는 이런 일들이 막상 당사자의 몫이 되면 원만하게 잘 풀려나가지 않는다. 왜 그럴까? 특히 잘못된 시선 가운데 하나는 아마도 섣부른 주변 사람들의 미숙한 상담 혹은 부추김에도 연유할 수 있다. 양자를 돕기보다 친한 상대편 쪽에 서서 마치 우열을 판별하듯 잘잘못을 구분하려 들기 때문에 자칫 억울한 상대자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일은 참으로 주의를 하지 않으면 안 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또 하나 원인제공을 일으킨 당사자가 먼저 사과를 하고 마음의 중심을 바로 잡아주어야 하지만 이 경우 대게는 참다못해 호소를 하는 측보다 한 수 위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아닌 말로 증거를 단단히 확보해 두지 않으면 도리어 뒤집어 씌워지기 일쑤인 것이다. 피해자의 억울함만이 계속 가중 되는 딱한 경우가 발생될 수 있다. 하지만 양심보다는 술책과 전략이 우위를 점령하듯 각박한 사회생활에서 길들여진 사람들은 가정 안에서 살림만 하는 사람들을 마치 능멸이라도 하듯 과감하게 적반하장으로 밀어붙이고 봄과 동시에 우선 교묘하게 자기 발뺌부터 하고 본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치 자기 쪽에서 상대를 이해하고 용서하는 양 훌륭한 연극을 해보이려 들기도 한다.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행동이 아닐 수 없지만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음도 간과할 수 없는 노릇이다. 이 사회가 이 사람들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개인이 사회의 어느 단면에 치졸하게 물들어 버리고 만 것일까를 정확히 판별하기 난해하지만 이런 이중적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니 참 쉽지 않은 일이다. 전문가의 상담과 조언이 필요하지만 비용이 만만치 않고 심도 있는 상담이 아니고서는 대략의 개괄에 흐르는 일반적인 조언에 머무르고 마는 것 또한 흠이라면 흠이다. 이때 정신을 바싹 차리는 것이 무엇보다 가장 좋은 해결의 방안이지만 그에 더해 계속해서 감정을 오버하는 경우 사태는 심각해 질 수밖에는 없다.

여자가 한이 맺히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옛말이 있는데 누구든 스스로가 노래 부르듯 함부로 이혼을 들먹거려가며 싸워서는 안 된다. 정말 하고 싶으면 그저 조용히 행하면 되는 것이다. 아주 간단한 일이다. 법원에 가면 그냥 해결 되더라. 최근 몇 년간 급격한 이혼 사태로 말미암아 협의 이혼에 대한 조정절차가 다소 까다로워졌다고 해도 당사자들이 이혼하고야 말겠다는 데 법이 무슨 수로 어떻게 막겠는가. 기다리는 시간만 공연히 길었다가 판사가 나타나 1분도 안 걸리게 “아무개 누구누구는 서로 이혼에 합의합니까?”, “네” 서로가 그 한마디면 끝이다. 더 물어봐 주기를 바란다고 해도 더 물어보는 말도 별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상황에 부닥쳐 줄 서있는 사람들은 많았다. 그러니 이혼은 아주 쉬운 일이고 이혼하는 사람들의 수는 적지 않다. 미리부터 이혼 못해 노래 부르듯 살 지 않아도 된다. 더군다나 이혼이라는 말을 무기삼거나 협박용으로 사용할 일은 더더욱 아니지 싶다. 그리고 하려거든 작정을 하고 제대로 정정당당히 서로 할 말 다하고 요구할 것 다하고 주장할 것 다 해가면서 공평하게 처리해야 한다. 가장 문제되는 것은 양육과 재산분할 문제가 될 것이다.

나도 그랬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체질이 그런 것인지 여타의 선진 외국 사람들에 비해 남녀 관계가 소원해 질 때 좀 구질구질하다는 평을 듣고는 한다. 요즘에 젊은이들은 쿨하게 헤어진다고는 하지만 그게 정식 혼인 절차를 거친 경우의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것인지 연인으로 대강 엉겨 붙어 동거하듯 살다가 헤어지는 대상을 말하는 것인지 명확치 않으나 아무래도 후자의 경우에나 해당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대게의 경우 일반적으로 결혼 3년 쯤 지나면 정으로 사는 것이라고들 하니까 말이다. 겉으로야 정으로 사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심정까지 정말로 그렇게 살게 된다면 바람직하지는 않을 것이다. 대게는 보통으로 가정을 잘 이끌어 가는 사람들이 그렇게 표현하고는 한다. 서로 이해하며 살아야 함을 강조한 면일 게다.

처음의 서로의 애틋한 마음을 지속적으로 유지 하지 못한다거나 나름의 특유의 그 ‘끼’라는 것이 발동하여서 가정을 쉽게 져버리려드는 남녀의 사고방식에 대해 나는 납득하기 어렵다. 둘의 인격이 만나 살면서 어느 한쪽이 사건을 일으키고 이혼을 주장하며 반성의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하면 그것은 이미 온전한 가정으로 이어져 나갈 수 없다. 하여튼 남녀 관계가 깨어질 무렵은 현실을 고려하며 사랑 아니면 돈이라는 이분법으로 결론을 내리게 되고 극단으로 치닫게 되는 데 이때에는 정말이지 사람의 숨겨진 성격이 다 들어나게 마련이다. 아니 어쩌면 서로들 있는 대로 오버를 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격한 감정의 상태에서 이성적이고 민주적이며 평화롭게 결론 내려지기는 이미 글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만날 때처럼 헤어지는 일도 예절을 갖추며 그렇게 신사적으로 행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본다. 도대체 왜 그렇게 안 되는 걸까? 재미와 이익과 행복은 갖고 싶지만 손해와 질타와 타격은 받기 싫은 영악함 때문일 게다. 심지어 어떤 경우는 이혼조차 하지 않으면서 자기가 받은 상처를 고스란히 상대에게 되돌려 주고자 왜곡된 경향으로 치닫게 되거나, 교묘히 들볶아 스스로 뛰쳐나가게끔 유기나 방치를 유도하여 책임과 보상을 회피하려드는 경우까지 발생하기도 한다. 상처의 강약에 따라 십분 이해는 간다. 하지만 그러면 순간적으로는 속이 후련할지 모르겠지만 오래까지 좋을 리는 없을 것이다. 무엇으로 우리의 삶에 그런 행태가 도움을 주겠는가. 상처를 주는 쪽이나 받는 쪽이나 심지어 보는 사람조차도 아픔만이 더 가중되고 말 것이다. 물론 사람의 감성지수와 사고 수준과 윤리의식 따위에 따라 그 수습이 천차만별로 다를 테지만 좋은 만남을 시도 했던 것처럼 헤어짐도 좋게 마무리를 지으려 노력하는 것이 보다 인간적이지 않을까 한다. 더군다나 헤어지는 마당에 이르러서는 상대를 자유롭게 놓아줌과 동시에 최대한 덕담하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오쇼 라즈니쉬의 자서전에는 아주 근사한 말로써 사랑에 대한 원초적인 그의 견해가 적혀있다.
“나는 사랑을 믿는다. 만약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한다면 그들을 서로 사랑하는 한 함께 살 수 있다. 사랑이 사라지는 순간 그들은 감사하며 헤어져야 한다.” p300 <오쇼 라즈니쉬 자서전>

그런데 우리의 삶은 어떤가? 말처럼 쉽지 않고 그렇게 간단하게 해결되지 않는다. 내 삶뿐만이 아니라 여타의 다른 사람들의 경우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똑같이 사랑하고 똑같은 마음으로 헤어지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리라. 더군다나 청춘 남녀의 교제가 아닌 불륜이라고 하는 사태가 끼어드는 경우에는 더욱 복잡하게 얽히기 마련이다. 어느 쪽에서건 배우자가 있는 경우라면 사태는 심각해 질 수밖에는 없다. 요즘에는 쌍방에 말도 안 되는 경우도 매스컴을 통해 심심찮게 접하게 되곤 하지만 그것을 어찌 사랑이라고 할 수 있으랴. 사랑에는 사랑보다 성숙한 책임과 배려가 먼저 수반되어 지고 당연히 따라야 하지만, 그것이 섣불리 간과된 일시적이고 낭만적 감정만으로 사랑이 아름답게 전개될 수 없고 지속되기는 더욱 쉽지 않으리라. 애시에 사랑보다는 사랑이란 감정의 노름을 탐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시인하지 않으려 함은 더욱 가관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사랑이라고 짓거리는 당사자 들 중 아무도 당당하게 사랑하노라 말 할 수 없는 것이 무슨 사랑이라고 하는 것인지를 보면 딱하고 우스울 뿐이다. 라스니쉬의 말대로 사랑이 사라지는 순간 감사하며 헤어질 수 있을 정도의 책임과 배려도 함께 갖출 수 있다면 다소라도 얼마나 괜찮을지 생각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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