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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 16일 01시 53분 등록
네엣, 너도 그렇게 하라 혹은 맞은 만큼 때려라?

나는 그에게 죽도록 맞은 적이 있다. 그것도 결혼도 하기 전 결혼식 하루 전 함 들어오던 날에 그의 친구들을 맞이하여 손님을 다 치르고 나서. 우리 집에 많은 식구들이 있었지만 내 방에 들어가 쥐도 새도 모르게 직사하게 맞아서 결국에 결혼식을 올리지 못했다. 처음엔 응급실에 실려가 잠이 들어 몰랐고 하루 지나서 결혼식도 못하고 화장실에 가서 내 얼굴을 보는 순간 영화 속의 괴물이 거울에 비춰졌다. 대학 때부터 가까이 지낸 내 친한 친구 Y와 우연히 서로 2주 간격으로 결혼식을 올리게 되어있었는데, 내가 결혼식장에 나타나지 않자 무슨 일인가 하고 몇 몇 친구들이 우리 집까지 찾아왔다가 병원에 방문을 왔지만 나는 아무도 만나지 않고 그들을 매정하게 돌려보냈다. 어머니와의 면회도 거부했다. 내 얼굴을 본 것은 아니지만 청첩장을 다 돌리고 원근각처에서 찾아주신 하객들을 돌려보내는 부모님의 상한 심정이 절로 이해가 되었고, 무엇보다 내 몰골을 보시고 놀랄 어머니 얼굴을 도저히 눈을 뜨고 지켜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내가 눈을 뜨고 안 뜨고를 떠나 그날에 나를 보셨다면 평소의 어머니 성품으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모를 정도다. 나는 엄마가 지레 돌아가실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란 것이 막상 부닥치면 다 해결해 나가는 힘이 있다고는 하지만 아마도 두고두고 결코 잊지 못하고 그 깨어진 신뢰성에 노심초사하며 평생 마음의 상처를 받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게다가 내 몰골을 보신다면 어머니의 억장이 무너지다 못해 아마도 기절초풍하여 명을 재촉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아버지도 사태의 심각성을 보시고 어머니를 설득하여 내가 안정을 요한다는 이유로 돌려보내셨다. 아버지는 나의 거부 가운데 겨우 내 모습을 보시고 목이 메어가며 애절해 하시는 모습이 눈을 감은 상태에서도 절로 느껴졌으나, 나는 눈을 뜨지 않고 있다가 가시라고 짜증을 부리다시피 하며 억지로 병실 밖으로 밀어냈다. 오로지 그 사람만 내 곁에 붙어있었다. 그리고 겨우 한 친구의 면회만 허락했다. 벌써 몇 시간째 친구도 그리고 내 곁에 있는 그도 겁이 나고 정신이 없는지 애원하다시피 매달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 얼굴을 보지는 않았지만 나도 나의 상태를 짐작하고 느낄 수는 있었으니 아무도 만나고 싶지도 않고 무슨 말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곁에서 계속해서 나를 달래고 있었다. 나는 왜 그랬느냐고 제대로 묻지도 못했다. 하도 싹싹 빌기에 정말로 술로 인해 일생에 딱 한번! 실수를 한 것인 줄로 알았다. 나는 그가 그때의 나의 얼굴을 평생기억하며 속죄하며 살 줄 알았다. 아니 그가 무릎을 꿇는 심정으로 그렇게 하겠다고 맹세하고 또 맹세하였던 것이기에 철석같이 믿었다. 그는 변명과 우선 달래기에 급급해서 마치 죽으라고 하면 죽을 것 같이 속삭이고 있었던 것이다. 자기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으며 술이 과했나보다고 둘러대며 평생에 이런 일은 다시는 없을 것이라고 애원하듯 매달리며 안절부절 쩔쩔매고 있었다.

내 친구가 병실에서 잠시 수발을 들다가 내가 화장실에 가겠다고 하니 놀라 나자빠지면서 거울을 보지 말라고 당부를 했다. 그는 내가 친구와 화장실 용무를 보는 동안의 틈을 타서 담배를 피우고 오는 듯 밖에 나갔다가 들어왔다.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에 다니고 있던 사촌 언니 내외가 병실에 들이 닥쳐 기절초풍을 하듯 놀라며 그에게 치료에 대해 일러주고 갔다. 나는 그 언니 얼굴도 쳐다보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나를 애기 다루듯 하며 예뻐해 주었고 유년시절 우리 집에서 같이 살기도 했으며 그 언니 혼사를 엄마가 다 거들어주다시피 해서 결혼을 시켰었다. 그래서 형부도 내게는 아주 특별히 늘 친절하셨고 나는 그 사돈어른 댁에까지 함께 따라 다닐 정도로 귀여움을 받았었다. 그러니 그들이 얼마나 놀라했는지 모른다.

혼사를 한다고 알리니 언니는 신혼조회라도 할 일이 있는가 물어왔고 어머니께서는 안기부보다 우리가 더 잘 아니 그럴 필요 없다고까지 하면서 치르는 혼사였다. 그런데 이런 일의 사단이 벌어진 것이었다. 침대에 누워서 들으니 언니는 그에게 내 이름을 부르며 이 아이가 어떻게 자란 지는 그 댁에서도 잘 알지 않느냐, 이런 일은 있을 수도 없으며 두 번 다시 절대로 발생해서는 안 되는 일임을 단단히 못을 박듯이 단호히 힘주어 말을 하며 내 얼굴에 멍이 빨리 가실 수 있도록 민간요법으로 행해지는 치료방법을 그에게 일러주었다. 최고급 한우를 구해서 얇게 저며 얼굴에 부치라는 것이었다. 그는 그저 “네”소리만 연발하며 연신 고개를 숙이고 있는 듯했다. 나중에 그는 쇠고기 몇 근을 사가지고 와서는 종일 내 얼굴에 붙였다 떼어내기를 반복했다. 언니는 엄마가 어떻게 쓰러져 계실지 걱정하며 급히 우리 집으로 향했다. 그러한 지경이니 사태가 보통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내가 머리와 얼굴을 심하게 다쳤기 때문에 앞으로 어떤 후유증이 찾아올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다음날부터 나는 동네 병원에서 강남의 한 대학병원으로 옮겨져 검사와 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그래서 아무리 말려도 내 성격을 알 것이니 미리부터 놀라지 말라는 말을 몇 차례나 하면서 당부를 하는 것이었다. 내 얼굴은 짚동같이 부어 내 자신도 내 몰골의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시퍼런 멍이 온 얼굴에 새까만 강물처럼 흘러내렸다. 선풍기 아줌마의 얼굴을 기억하는가. 그 형체에 전신에 먹물이 흘러내린 다고 하면 아마도 그리 틀리지 않으리라. 눈을 맞지는 않았음에도 눈알맹이까지 벌겋게 피멍이 들어있어서 나는 전해질이 들어있는 링거를 꽂고 계속 맑은 피의 순환을 도우며 뇌에 산소를 공급받고 있었다.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읽었던 현진건의 ‘빈처’였던가 하는 글이 생각났다. 그때에 국어선생님께서 교과서의 한 페이지를 설명해 주시면서 사람들이 아무리 싸워도 직접적으로 눈을 때리지는 않는다며 그런데 왜 눈가에 시퍼렇게 멍이 드는지를 이야기 해 주셨던 기억이 거울 속의 내 얼굴을 보면서 문득 떠올랐다.

나는 눈 주위는 말할 것도 없이 눈의 알까지 피멍이 들어있었다. 그토록 매의 타격이 심했던 것이다. 그는 군대시절 수경사에 근무했었는데 주로 탈영병들을 잡아들이는 부서에서 근무 하였다. 그때에 그 때리는 방법을 배웠던지 나를 그토록 모질게 때렸던 것이다. 나는 연타 15대를 그에 의해서 왼쪽 귀 언저리와 뺨 사이를 맞았는데 따귀 한 대도 안 맞고 자란 터라 맞으면서도 어안이 벙벙하고 왜 맞는지를 몰라 기가 막혀하며 도저히 피할 수도 없고 도망갈 수도 없는 상태에서 포기하고 그 댓 수를 세며 맞고 있었다. 그러니 15대가 정확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하여간 내가 세기 시작하면서부터 15대를 맞은 것은 확실하다.

그날 마흔이 낼 모레인 그의 친한 친구들이 열 명가량 내 친구들과 함께 우리 집에 초청되어 왔었고 요리사가 요리를 준비했는데 시장기가 돌아 그랬는지 저녁 8시쯤 온 사람들은 그릇을 싹싹 비우며 음식이 동이나있었다. 방안에서 화장을 마치고 조금 있다가 나갔더니만 빈 그릇만 있었다. 낮에 우연찮게 고교 동창에게서 연락이 와서 시내에 머리를 하러 그녀와 같이 갔다 왔는데 그 아이가 이상하게도 자꾸 나의 결혼을 말리면서 제 할 일로 내 시간을 지연하는 바람에 일이 늦어져 나는 조금 못 마땅한 상태에서 집에 들어왔었다. 화장도 안 하고 머리만 먼저 하러 갔는데 그 아이가 자꾸만 훼방을 놓아서 괜히 같이 갔다고 생각을 하며 서둘러 집으로 와서 준비를 하고 있던 참이다. 미리 화장을 다 하려고 했는데 미처 그러지 못해 나도 마음으로 약간 긴장이 되고 바빴다. 그래서 준비를 하다가 보니 거의 식사를 마칠 즈음에나 거실로 나가 인사를 나눈 것이었다.

신랑감 친구들은 양주와 과일을 먹고 있었는데 나는 무언가 미흡한 감이 약간 들었다. 너무 음식을 빠듯하게 장만한 것이 아닌가 약간 편치 않은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그때 그의 친구들이 나더러 노래를 하라고 해서 나는 <부모>라는 노래를 불렀는데 그가 잠시 내 손을 잡았다. 그런데 손이 너무 싸늘해서 깜짝 놀라며 나도 그 순간부터 마음이 더욱 편치 않았다. 작은 오빠는 또래의 친구들이라 손수 술심부름을 해가며 옆에서 흥을 돋우고 있었다. 그리고 모임이 끝나고 다들 집으로 돌아갔다. 그는 친구들을 따라가는 듯 하다가 다시 들어왔고 나는 아까 음식이 너무 적었던 것 아니냐며 과일이라도 얼른 더 내놓지 그랬냐고 하며 예의 그 완벽에 가까운 성질로 인해 약간 짜증을 부렸다. 손님을 치르는 것인데 음식이 다 떨어진 것보다는 좀 남아야 마음이 푸근하고 편하지 않은가. 그런데 하기는 하도 잘들 먹어서 과일도 금방 떨어지고는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식구들에게 짜증을 잠시 부렸더니만 그가 얼른 나를 잡아끌고 내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그더니 술에 취해 더웠던 것인지 누워 자고 싶었는지 옷을 벗더니 나를 잡아 눕혔다. 나는 기분이 별로라서 나가려고 하니까 그가 나를 올라타서는 내 입을 트러 막고 내가 버둥거리니까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조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일어나 빠져나오려고 하였더니 나를 더 거세게 꽉 조여 놓고는 때리는 것이었다. 하도 기가 막혀서 어안이 벙벙하였다. 그리고 밀치고 나오려니까 더 세게 입을 틀어막고 계속해서 나를 짓누른 상태에서 나를 마구 때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덩치도 커다란 큰 손이 나를 때리는데 마치 각목으로 두들겨 맞는 듯이 묵직하고 둔탁한 것이었다. 나중에는 자포자기해서 그냥 맞았다. 바로 방문 앞 거실에서는 사람들 소리가 크게 웅성거렸다. 부모님과 형제들 그리고 다리를 놓은 아주머니와 내 친구들이 있었으니 웅성대며 한편으로는 치우기도 하면서 남은 뒤풀이 겸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거실에 있던 사람들은 방안에 깜깜하게 불을 끄고 나를 때리고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순간 매를 맞으면서도 그가 그날 신랑 친구들에게 내놓은 양주를 함께 퍼마시고는 귀신에게라도 씨이듯 햇가닥 한 것인지 아니면 아까 손을 잡았을 때 무지하게 차가웠을 때처럼 그 마음에 무언가 응어리가 있는 것인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죽은 듯이 맞고 있자 드디어 그가 손을 멈추었다. 그리고 나는 엉금엉금 기어서 그의 곁을 빠져나와 얼굴을 감싸 쥐고 무조건 밖을 향해 정신없이 뛰쳐나가버렸다. 만일에 내가 거실에서 얼굴을 보인다면 가족들이 모두 기절초풍할 거라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고 도무지 그가 나를 왜 때리는 것인지 이해 할 수 없고 기가 막혀서 어쩔 줄을 몰랐다. 어떻게 해야 할지를 정신을 차리고 싶었으나 나는 얼얼한 얼굴을 감싸고는 한길가로 우선 뛰쳐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막내오빠가 나를 따라와서는 내가 이상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놀라며 미처 부모님께 알리기도 전에 병원에 가야겠다며 차를 몰고 나왔고 나는 거리에 주저앉아 아무 말도 못하고 얼굴만 감싸 쥔 채 소리죽여 울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병원이었다. 응급실의 당직의사가 달려들어 검사를 하더니 당장에 입원조취를 취하라며 수선을 피워댔다. 온 머리통이 불어난 혹으로 쑤셔왔다. 이내 주사바늘이 내 혈관을 뚫었고 나는 내가 곧 잠에 빠져들 거라고 생각했지만 눈꺼풀만 깊게 감고 뜨고 싶지 않았을 뿐 응급실에서 떠들어 대는 소리가 다 들려왔다. 나는 이동침대에 실려 방사선 촬영 등을 마치고 밤을 세워 응급실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아무도 누구도 내 곁에서 말을 붙이는 사람이 없었고 놀랐을 테니 쉬라고 하며 안정을 위해 침묵만이 깊게 흘렀다. 이른 아침이 되자 그 대단한 바로 위 시누이가 제 친구를 데리고 보나마나 해결사를 자청하여 병원에 나타났다. 시누이자리는 그나마 그래도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데 따라온 팔푼이 같은 친구라는 위인은 바람 잡기로 약속을 했는지 아무렇게나 씨부렁거리며 육갑을 떨어댔다. 솔직히 말하면 일어나서 쌍판대기에 침이라도 확 뱉어주고 싶을 정도였다. 딴에는 제 친구인 시누이 편을 들겠다고 설레발을 치는 얄궂은 행태였는데 요즘은 화장기술이 좋으니까 머리로 가리고 결혼식을 올리자는 헛소리를 해대는 것이었다. 나는 정말이지 감고 있던 두 눈을 송장처럼 번쩍 뜨고 벌떡 일어나서 함부로 놀려대는 그 주둥이를 당장에라도 처박아 짓이겨 주든가 정신 나간 팔푼이 같은 인간에게 따귀를 후려갈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것을 억지로 참았다. 예전부터 들어 어렴풋이 알고 있는 강남에 산다는 위인인데 한때 쪽발이에게 빌붙어서 현지 첩살림을 하다가 평생 자빠져 놀고먹으며 유명 제약회사 부사장인 제 오라비에게 생활비를 뜯어내며 주둥이 하나로 썰을 까며 평생 놀고먹으면서도 큰소리로 뻥을 치고 다니며 혈육의 등을 쳐대고 사는 기생충 같은 패거리 일당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옛날 말에 이르기를 자식 있는 사람은 함부로 말을 할 수 없다고 하는 데 아무리 그렇더라도 그런 씨알머리 없는 인간 말종들은 도저히 그냥 보고 넘길 수가 없다. 제까짓 게 뭐가 잘났다고 따라와서 환자 앞에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가 말이다. 그 눈깔이란 것을 달고서도 그따위 소리가 아가리에서 나올 수 있다는 것이 기가 막히고 아무리 그지 깽깽이 같이 살아온 인간이라도 나이 값과 체면이 있지 어딜 와서 함부로 씨부리고 자빠졌는지 가관이 아닌가 말이다. 지금 같으면 꼬챙이를 휘두르며 그 따위 쓸모없는 눈알맹이를 파내어 내쫓았을 것이다.
그런데 나 역시 그 나이 먹도록 유치찬란하게 쑥맥이었고 어설펐으며 그러한 사태에 분노하기보다 내가 더 먼저 떨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부모님이 걱정이 되었고 그 중에서 엄마는 곧 쓰러져 돌아가실 것만 같았다. 아버지 역시 마음이 여리고 고진이어서 그리 오래 경찰직에 머무셨다고 해도 어떻게 그 직장을 다니기나 하셨는지 모를 만큼 사태를 어찌해야 할지 걱정하시며 의사의 처분만 기다릴 뿐 그를 향해 제대로 따끔하게 나무라지도 못하시고는 안절부절 하시는 것이었다. 솔직히 다른 집 같았으면 다리몽댕이가 부러져도 부러지고 누가 하나 죽어도 죽어 나갔을 만큼 간단한 일이 아니었지만 우리 쪽에서는 그저 너그러이 그럴 리가 없는데 운수가 사나운 것이라고 생각하며 한편으로 겁을 잔뜩 집어먹고 있는 그를 생각하여 순리대로 해결을 하려고 모색만 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성품을 잘 아는 시댁 쪽에서는 아버지에게만 매달리며 용서를 빌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감각이 뒤떨어져서 후유증 같은 것은 생각도 못하셨지만 엄마는 병치레를 많이 하며 살아오신 분이라 나의 예후를 더 먼저 걱정하셨다. 결과적으로 나중에 보니 엄마의 직감은 대단히 정확했다. 나는 그 후로 오래 두통을 알아왔고 특히나 생리전후에는 더 심했으며 상처를 입은 그 계절에 이르면 잊고 있다가도 통증으로 인해 상처를 의식하게 되고는 했다. 신경은 이렇듯 우리 몸의 상태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을 나도 의학적으로 배울 때보다 체험을 통해 더욱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평생의 실수를 이 한 번으로 모든 액운과 업장을 다 소멸하였노라 하며 나를 이해시키기에 어차피 하기로 한 결혼이고 괜히 처녀가 흠이나 있는 것처럼 다른 결혼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고, 무엇보다 장차 시어머니의 처신에 대해 강하게 믿고 있었다. 나를 탐하던 그 때의 그 시선을 그대로 간직하셨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내 어머니나 우리 집과의 오랜 관계에 대해서도 나의 결혼으로 인해 그르쳐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였다. 그와 나와의 만남의 시간은 짧았고 사랑을 확신하고 맹세할 만큼의 교제는 갖지 못한 상태의 결혼이었지만 오랜 세월 동안 신뢰가 쌓여있다고만 생각했다. 하여 일을 좋게 마무리하고 다시금 날짜를 잡아 결혼식을 올리고 살았건만 처음 1년간 조금 무탈했을 뿐 둘의 문제보다 시댁과의 갈등으로 인해 문제가 커져나가기 시작했다. 외아들인 그를 내게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시어머니와 월급봉투 때문에 충동질을 쳐대는 시누이로 인해 갈등은 점점 심화되어 나갔다. 게다가 알콜 중독 저리가라 할 정도의 음주 습관과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인해 도무지 지켜지는 약속 따위가 하나도 없을 정도였다. 그는 어머니에 대해 경기라도 일으키듯 예속되어 있었다. 딴엔 이 눈치 저 눈치 보아가며 비위를 맞추기도 쉽지 않았겠지만 무엇보다 결혼부터 하고 보자라는 심사로 자신들의 많은 부분들을 은폐하여 감춘 채로 밀어붙인 것이 가장 큰 문제 시발의 단초였다. 그는 하다못해 결혼 전 내 앞에서 일부러 일체 술을 마시지 않았으며 자신은 업무상 할 수 없이 술을 마실 뿐이라고 강조했다. 잘 보이거나 끊어보려고 노력한 것이라기보다 목적을 위해서 그렇게 임시방편으로 철두철미하게 우선 가리고 본 것이었다. 매사가 그런 식이었다. 그렇게 차츰 서로의 목적 내지는 결혼의 의미가 다르게 본성을 들어냈고 나는 그러한 점들이 심히 자존심 상했으며 더군다나 거래를 하듯 나를 상대로 자신들 멋대로 전략에 끼워 맞추려 하는 자체와 그 가족의 삶의 방식이 정말 이해와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싸움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부부싸움을 하다보면 나는 기껏 말로 경우를 따지며 빽빽대는 것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그에게서는 나를 어떤 방법으로든 무력화시키려는 듯 불미한 습관이 나타나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방식의 일처리와 행동의 그가 무척이나 싫었고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 답답하고 숨통이 조여드는 듯한 생활이며 파생되는 갖가지 문제로 그 삶의 굴레가 견딜 수 없이 피곤하고 힘들었다. 무엇보다 감히 나를 함부로 대함은 물론 손찌검을 해대는 그가 분하고 억울했다. 나의 심경을 토로하자 한번은 그렇게 억울하면 자기를 때리라며 얼굴을 내밀었다. 그런데 너무 기가 막혀서 웃을 뻔 했다. 겨우 내게 맞는 것조차 두려운 것인지 볼에 공기를 하나 가득 물고 어금니를 꽉 깨무는 것이 아닌가. 저는 그렇게 하늘하늘 한 상태의 나를 함부로 때리면서 제 얼굴은 그렇게 단단히 무장하여 내미는 것이었다. 똑같이 하라고? 너도 똑같이 때리라고? 그게 어떻게 같다는 말인가? 세상의 썩어빠진 정신상태의 나쁜 종자들아, 그게 어떻게 같으냐? 지들은 하고 싶은 대로 다하고 나중에 준비 단단히 대처하고서 알량꼴량하게 그 추잡하고 더러운 쌍판대기를 들이밀며 공정한 처사인양 똑같이 해보라고? 결백하다고? 에라이 천하에 나쁜 넘들아, 그렇게 살고 싶으냐? 그 따위 짓거리가 처신이고 인생 전략이냐? 그게 가정을 지켜가는 방식이라고 게거품을 물어가며 함부로 떠들지 마라. 너무나도 징글징글하게 치졸하고 역겹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가장으로서의 최면이 안서고 도무지 먹고살 재간이 없는 거냐? 병신머저리 똥꼬들 같으니라고. 그 따위 썩어빠진 정신머리하고는 안 산다. 죽어도 못산다. 야속함에 사무쳐 나는 어느새 그렇게 벼르며 살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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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은 영혼
2008.07.18 09:14:34 *.34.156.43
그저 눈물만 흐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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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7.19 19:31:23 *.36.210.11
어쩌나요...

눈물에게 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눈물에게 무서운 힘이 있다는 것 아시지요? 믿으세요. 님께서 소망하는 대로 될 것입니다. 좋은 마음을 많이 가질 수 있도록 애쓰시기 바랍니다. 아자,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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