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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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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8월 26일 11시 54분 등록

 

 

 

<2013. 몽골 여행기>

 

2-2. 몽골 땅에서 고려왕의 비애를 들여다보다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북서 방향으로 1시간 반 비행기를 타고 간다. '모론'이라는 작은 도시에 도착.

이곳에서 차를 타고 2~3시간 초원을 달려가면 몽골 초원 풍경과는 판이하게 다른, 산과 숲이 나온다. 역사학자 그레나르는 몽골인들이 원래 초원종족이 아니라 숲으로 덮인 산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삼림부족이었던 이들은 샤먼을 숭배하고 그의 아래에서 삶의 여정을 이어갔다.

 

 

 

몽골의 드넓은 초원. 4륜 구동 자동차는 초원을 끝없이 달린다.

몽골 북부에 위치한 흡수골 호수. 우리의 목적지다. 흡수골 호수는 이보다 더 위쪽에 위치한 바이칼 호(현재는 러시아 땅이 되어버린)와 지하로 연결되어 있는 신비로운 빛깔의 호수이다. 역사학자들은 몽골종족이 바로 이 호수들 근처에서 역사의 시작점을 찍었다고 말한다.

 

 

초원을 달릴 때도 흡수골 호숫가를 거닐 때도 평범하기 그지없는 칭기스칸의 후예들을 만난다. 그들은 소박하고 외부 세상일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저 평범하게 자신들의 지역을 오가며 살아가는 유목민 같아 보였다. 특별히 대단한 문화도 세상의 향한 성공의 승부욕도 없어(?) 보이는 그들은 자연과 더불어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평범하기 그지없는 이 땅에서, 도대체 12세기 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고려 23대 고종의 아들, 왕전(훗날, 원종)은 몽골 제국의 왕, ‘세조 쿠빌라이를 어떻게 설득(?)하여 고려의 국호를 내리지 않고 부마국의 관계를 맺었을까? 나는 몽골 여행 내내 12세기 말에 일어났던 몽골과 우리 고려 사이의 역사가 궁금했다.

 

 

특히, 일연이 쓴 역사서, ‘삼국유사에는 신라시대에 지어진 황룡사가 고려의 침공으로 불타는 장면에 대한 이야기가 가슴 아리게 전해져 내려온다. 일연과 삼국유사,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황룡사 절터가 있는 경주 땅에 대한 애착 때문일까? 나는 2013년의 몽골 땅에 서 있었지만 내 시선은 온전히 12세기 말 몽골에 대한 상념으로 가득 찼다. 고려와 몽골,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역사는 살아있는 얼굴이다.’

고뇌에 찬 왕의 얼굴에서 생존을 위해 애를 쓰는 노비의 얼굴까지, 그리고 침입당한 고려의 일그러진 얼굴에서 침략자, 몽골의 기고만장한 얼굴까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 이해관계들의 다양한 얼굴 표정들을 역사적 상상 속에 묘사하면 한 시대의 모습이 경계 없이 생생하게 살아난다. 나는 그들의 표정이 궁금했다. 그리고 그 표정들을 그려보고 싶어졌다. 

 

 

몽골과 고려의 관계일본제국과 조선식민지의 관계보다 더 지독했다. 조선식민지가 50 여 년의 세월이었다면 몽골과 부마국의 관계로 지냈던 고려의 역사는 100년의 침입을 받고 100년의 지배를 받았다. 100년의 지배기간 동안 모두 8명의 몽골여인이 낯선 고려 땅으로 시집을 와서 고려의 왕비가 되었다. 실제로 고려는 원의 지배를 받으며 정치적 독립성을 거의 상실했던 슬프고 아린 우리 역사의 멍울이다.

 

 

12세기 말, 몽골 전사들의 말발굽은 태평양부터 지중해까지 모든 강과 호수, 초원과 산맥을 밟아보았다. 지금의 아프리카 대륙만한 넓이의 땅을 차지했으며 칭기스칸이 정복한 나라 수는 현대의 지도 위에서 보면,  30개국이 이른다. 현재, 30 개국의  땅에 사는 인구는 30억이 훨씬 넘는다. 이 사실만 보아보 당시 몽골제국의 위세를 짐작하고 남는다.  세계 각국의 역사 책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몽골군사의 잔인성은 혹독했다고 전한다. 고려도 예외는 아니어서 100, 한 세대가 넘는 오랜 기간 동안 전쟁을 치루면서 한반도 산하에 있는 고을들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고 몽골군사에게 사로잡힌 남녀 만도 206,800, 살육된 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고려사는 전한다.

 

 

 나는 고려사를 동반하며 몽골 여행를 하던 도중  12세기 말 고려 원종과 그의 아들 충렬왕의 이야기에 시선이 꽂혔다.

오랜 전쟁의 고통을 겪은 고려 땅에 이제는 더 이상의 좋은 방법이 없었다. 고려국왕은 항복 이외에 다른 선택이 없었고 무신 정권하의 꼭두각시 국왕보다 몽골치하의 왕정복고가 왕실의 입장에선 더 나은 선택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100 여 년 가까이 치러진 전쟁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백성들을 구제하는 방법이었다.

 

 

백기를 손에 들고, 지금의 중국 무한(중국 발음으로는 우한’) 땅까지  목숨을 걸고 몽골의 쿠빌라이를 손수 찾아가 '밀약'을 맺고 돌아온 고려의 세자 '왕전'(훗날, 원종). 무한 땅은 중궁 상하이에서도 비행기를 타고 서쪽으로 2시간 들어가야 나오는 당시 한반도의 고려 땅에서 가기에는 머나 먼 동쪽 지역이다. 사신을 보내지 않고 그 험한 길을 왕이 될 세자가 손수 찾아갈 만큼 당시 고려의 운명은 절박했다.  나는 세자 왕전의 굴욕의 여정을 따라 가 보고 싶어졌다. 또한,  손수 몽골식 변발을 하고 고려 왕으로서는 처음으로 몽골 신부를 왕비로 맞이한 충렬왕에 얽힌 이야기. 충렬왕의  이야기는 재벌가에 데릴사위(?)로 들어가는 현대판 막장 드라마의 구성 요소를 거의 갖추고 있는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한 편의 드라마 같다.

 

 

충렬왕은 15년 함께 살았던 조강지처 정화궁주를 왕비자리에게 내려야 했다. 그리고 몽골의 세조 쿠빌라이의 딸을 왕비를 맞이한 이후, 단 한번도  다시 정화궁주를 찾지 않았다고 전한다. 또한 충렬왕은 몽골의 공주, 홀도로게리미실를 왕비로 맞지 했지만 충렬왕 자신이 거의 그녀의 볼모나 다름이 없었다. 충렬왕은 궁궐 내에서 몽골의 공주이자 왕비였던 그녀에게 자팡이로 마구 두드려 맞기도 했다고 전한다.

 

 

고려 말, 12세기의 몽골 왕비와 왕의 이야기는 아직 우리나라 역사 드라마에 시선을 받았던 적이 없었다..

그리고 고려사에는 그 내용들이 전해 내려오지만, 역사학계에서도 고려사에 대한 연구는 다른 왕조의 역사보다 연구가 그리 활발하지 않다. 내가 볼 때 고려 말 12세기의 역사 인물들의 표정은 사마천의 사기 열전이상으로 다양한 표정들이 있다. 그리고 12세기 말의 고려는  몽골이 세운 원제국과 세계를 향하여 눈을 뜨고 새로운 문물 교류가 활발히 진행되었던 시기였다.

 

 

 

역사라는 줄기는 여러 단면으로 잘라볼 수 있다. 

한 면은 스라린 아픔이고 어둠지만 또 다른 한 면은 다시 비상을 준비하는 도약의 발판이 되기도 한다.  고려 말 12세기는 몽골의 속국이었던 만큼 고도의 외교 관계의 기술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중국도 우리도 모두 몽골의 지배를 받으며 '팍스 몽골리아' 속에 하나로 묶였던 만큼  세계관의 변화가 가장 파격적으로 일어났던 시기였다.  남녀 관계의 측면에서도 많은 변화가 있지 않았을까 혼자 추측해 본다.   

 

 

 

나는 이 시대로 접근해 조금씩 그들의 표정을 들여다보고 싶다.

 이 시대는 그 어느 시대보다 뼛 속까지 비굴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재벌가에  데릴사위로 들어간 성공지향과 가난을 끊고자 나서는 현대판 드라마의 주인공 모습이 보인다.  특히  충렬왕을  나의 아이템 수첩에 관심대상 1순위로 기록하고 싶다.  언젠가 시간이 되면,  충렬왕 그를 만나 함께 술잔 기울이며 그가 미쳐버리고 싶었지만  가슴 쓸여내리며 참아내야 했던 식민지 부마로서의 비애를 들어보고 싶다.

 

 

                                                        

 

                                                                                                   2013.8.19. 서은경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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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27 16:50:02 *.43.131.14

충렬왕 식민지 부마 이야기가 멋진 드라마로 탄생할 것 같은 예감이예요.

은경님은 역사를 특히 많이 알고 또 깊이 관심을 가지시는 듯 합니다.  공들여 쓰신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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