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승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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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속고 있다. (열한 번째)
11기 정승훈
지난 토요일 친한 언니와 함께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DDP)에서 하는 루이 비통 전시회를 다녀왔다. 사실 난 명품백을 가지고 있지도 않고, 갖고 싶어 하지도 않아서 큰 기대를 하진 않았다. 오랜만에 만나는 언니를 보는 기쁨과 말로만 듣던 DDP를 보게 된다는 기대가 더 컸다. LV마크와 많은 짝퉁가방만 알고 있던 나에게 루이 비통 전시는 별천지였다.
루이 비통은 1835년 14살의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 파리로 갔다. 스위스 국경에 위치한 마을에서 걸어서 파리에 도착하기까지 2년이 걸렸단다. 뭔가 후대에 길이 남는 사람들은 십대에 벌써 큰 뜻을 품고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 물론 루이 비통은 아버지의 재혼이 이유였기 하지만. 파리에서 유명한 로맹 마레샬의 도제교육을 통해 맞춤 제작 상자와 트렁크를 만들고 포장하는 법을 배웠다. 이후 유제니 황후(나폴레옹 3세 부인)와 같은 주요 인사들의 신뢰를 얻기 시작한다. 루이 비통은 목공집안에서 배운 기술을 접목하여 오늘날 현대적 여행가방의 시초인 트렁크를 새로운 소재와 차별성으로 브랜드를 만들었다. 루이 비통 사후 아들과 손자에게 가업은 이어져 현대에까지 유지되고 있다.
전시를 둘러보며 처음 보는 트렁크 모습에 감탄했다. 신발 30켤레를 넣는 신발만을 위한 가방, 피크닉을 위한 소꿉장난 같은 가방, 작가를 위한 타자기와 책을 넣을 수 있는 가방까지 그저 여행을 위한 옷가지를 넣는 가방이 아니었다. 너무도 다양한 용도에 놀랐다. 가죽은 기본이고 알루미늄에서 구리까지 다양한 소재에 또 한 번 놀랐다. 전시회장 중 시대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전시공간이 있었다. 1920~1930년대 기차의 모습을 재현하고 옷과 가방, 그 가방과 기차를 배경으로 한 사진들, 광고들이었다. 앞 전시장에서 본 소가죽이 아닌 동물 털로 만든 외투에서 조금씩 불편해졌던 마음 한 구석이 이 전시장에 와서는 ‘싫음’으로 다가왔다. 가죽 가방을 들지 않으려 직접 천가방을 만들어 드는 나에게 소가죽은 기본이고 악어가죽, 뱀가죽으로 만든 가방은 가방으로 보이지 않았다. 또한 대공항 시절이 분명함에도 몇 개씩이나 되는 가방을 옆에 쌓아놓고 찍은 사진들, 물건의 주인이름과 함께 FIXED라고 써진 상품설명까지. 루이 비통은 처음부터 고객층이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다양성을 권하는 낭만주의는 소비지상주의와 꼭 들어맞는다. 양자의 결합은 현대 여행산업이 기반으로 하고 있는 무한한 ‘경험의 시장’을 탄생시켰다. 여행산업은 비행기표나 호텔 객실을 판매하는 게 아니라 경험을 판다.”(사피엔스 174페이지)
루이 비통은 여행과 재화(차별화된 맞춤형 가방)를 잘 연결해서 그걸 소비할 수 있는 소비층에게 전달했다. 대공항시절 서민은 당장에 먹고 살 수 없어 힘든 생활을 했지만, 한 쪽에선 주문제작한 가방에 옷, 신발, 모자까지 챙겨 여행을 다녔다. 그걸 기회로 삼아 사업을 확장했다. 기업가의 입장에서 본다면 사업수완이 뛰어난 것이라 여길 수도 있다. 재화에 옳고 그름은 없다. 재화는 재화일 뿐이다.
소비지상주의는 우리에게 행복해지려면 가능한 한 많은 재화와 용역을 소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루이 비통은 거기서 더 나아가 남들과 차별성을 강조하며 유명 연예인, 유명 인사들이 지녔던 가치까지 더한다. 전시회장 마지막 부분에 이르면 유명 연예인이 들었던 가방과 옷을 전시된 공간이 있었다. 루이 비통의 가방을 가지는 것은 단순히 비싼 가방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그 가방을 가짐으로 나는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루이 비통이라는 상상의 질서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신화에 속고 있다. 물론 그런 줄 모르고 말이다. 과연 나는 명품가방이 아닌 어떤 신화에 속고 있을까? 명품백을 밝히는 된장녀와는 다르다는 지적 허영심? 보이지 않는 것이라 더욱 모르고 그래서 나 스스로 더 가치 있다고 여기는 건 아닐까 자문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