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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13일 02시 18분 등록
어려서 나는 붓꽃을 무지하게 좋아했다. 우리 집 담장 밑 꽃밭에는 보라색과 노란색의 붓꽃이 피곤하였다. 여러 꽃 가운데 단연 빼어난 자태로 초록의 줄기들 사이에서 쏙 하니 올라오는 붓꽃의 아름다움이란 주위의 웬만한 꽃들의 아성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너무 어릴 적이라 나는 잘 몰랐었는데 두 평가량 되는 꽃밭을 만든 것은 우리 큰오빠였다고 한다. 오빠가 서울로 이사를 오기 전 농고에 잠깐 다닌 적이 있고 그래서 그런지 오빠는 늘 화단 가꾸기를 무지 잘하고 좋아했다. 아니 우리 큰오빠는 손으로 하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다 잘했다. 부모님께서는 평생을 단독주택에서만 사시는데 젊어 항시 일이 바쁘셨던 아버지는 집에 못하나 박으실 틈도 없고 또 일도 잘 못하셨지만, 큰오빠는 씩씩하게 힘센 장군처럼 일을 무척이나 잘해서 온갖 집안일을 도맡아 처리하곤 하였다.

학창시절엔 TV에 나오는 레슬링선수 김일이나 역도산처럼 특기로 레슬링을 해서 몸집도 건장하고 늠름한 청년이었으며 일상의 자질구레하고 힘이 들며 기술이 필요한 집안일을 아버지 대신 척척 해냈다. 오빠는 웬만한 인부 몇 몫을 하며 우리 집 관리를 도맡아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도꼭지건 전기배선이건 안 만지고 못하는 것이 없을 만큼 그의 손만 닿았다하면 척척 박사였다. 게다가 어려서부터 고생을 많이 하고 어렵게 자라서 그런지 어찌나 알뜰하고 살뜰하든지 좀처럼 돈을 들여서 무엇을 반반하게 멋을 부리기보다 오만 폐품을 가지고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번듯하게 쓱쓱 싹싹 잘도 고치고 멀쩡히 되돌려 놓는 것이어서 나는 이런 큰오빠 손이 정말이지 마이다스(Midas)의 손처럼 높은 경지의 신의 손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오빠는 화단에 여러 가지 꽃들을 심어 놓았었다. 맨드라미, 칸나, 과꽃, 튜울립, 히아신스, 백합, 다알리아, 펜지, 채송화, 해바라기, 나팔꽃, 색색의 빨강, 분홍, 희고 노란 장미 등 없는 것이 별로 없이 철철이 꽃밭가득 예쁘게 화단의 꽃들이 온통 축제를 벌이고는 하였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에는 자연책에 나오는 식물들이 우리 집 화단에서 사시사철 피고 지는 꽃들이어서 나는 그 꽃들을 잘 맞추고는 하였고, 곁에서 꽃들의 입사귀와 뿌리 등을 지켜보며 관찰할 수 있어 배울 점도 많았다. 가을이면 귀퉁이의 감나무도 늠름히 버티어 있어서 진홍의 감이 익어갈 때의 모습이 그렇게 이쁘고 풍요로움을 더해 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먹는 것보다 보는 즐거움을 그때부터 알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오빠가 심어놓은 그 여러 가지 꽃 중에서 특히나 내가 붓꽃을 좋아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먼저 붓꽃의 쭉 뻗은 줄기가 마치 굵은 난초 잎을 연상하게 하면서 초록의 줄기가 기품이 있고 청초하게 느껴졌다. 다른 줄기들과는 달리 이색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했거니와 그 키도 너무 크거나 작지 않으면서 꽃이 피기 전에도 단연 돋보이는 줄기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이것이 꽃이 피었다하면 그 꽃잎파리 색깔이 대단히 오묘하고 신비한 빛깔을 자아낸다는 사실이었다. 청보라 빛 꽃잎의 빛깔이란 어찌나 도도하고 우아하게 느껴지던지 나는 우리 집 여러 꽃 가운데서 가장 좋아했다. 노오란 꽃잎을 가진 것도 있었는데 보랏빛의 초록이 우아함과 신비감을 느끼게 했다면 노랑과 초록의 조화는 밝고 경쾌함 그 자체의 빛깔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꽃들이 화단에 필 때면 경이로운 신비감에 빠지곤 했던 것 같다. 그 꽃잎파리 주변을 노랑나비 흰나비들이 날고 벌이 윙윙거리며 잠자리가 이리저리 낮은 비행을 하는 것을 구경하고 있노라면 절로 풍요로운 기분이 드는 것이다.

화단의 가장자리는 대리석 같은 돌로 쌓아서 만든 것이었는데 오빠는 그 앞에 서서 운동을 하고는 했다. 또한 화단의 붓꽃 앞에는 기다란 나무 의자가 하나 놓여 있었는데 한쪽에는 둥그런 역기가 매달려 있었다. 그것은 큰오빠가 매일 런닝셔츠만 입고 누워서 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운동을 하는 기구였는데, 아마도 그 무렵 그 동네에서 우리 큰오빠같이 운동을 잘하는 사람은 보기 드물었던 것 같다. 오빠는 공부보다 그런 것들을 더 좋아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화단의 앞쪽에는 양 귀퉁이에 빨랫줄이 하나 길게 매어져 있었는데 아마도 그곳이 볕이 잘 들고 한갓진 곳이어서 때로는 이불 껍데기 등을 빨아서 죽 펼쳐 말리곤 하느라고 매어둔 것이었다. 나도 초등학교에 입학해서는 잔망스럽게도 학교에 다녀오면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엄마를 돕겠다고 하이타이 가루를 풀어서 지지미원피스를 빨아가지고 그 꽃밭 앞 가장자리에 매어져 있는 빨랫줄로 가져가서 먼저 옷걸이에 걸어 가지고 짜지 않고 물이 빠지도록 하고 형체가 반듯하게 유지된 채 마를 수 있도록 널어놓고는 하였던 것이다. 그러면 큰오빠랑 옆집언니가 착하다고 역성을 들어주고는 하여서 더욱 신나는 놀이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니까 아마 나를 초등학교에 입학시킨 그 해 여름날이었던가 보다. 한 날은 우리 큰오빠에게 입영 영장이 날아와서 군에 입대할 날이 다가오자 옆집 언니와 오빠는 그 화단의 붓꽃 앞에서 서로가 작별인사를 나누며 악수를 하는 것이었다. 무심히 목격한 것이었지만 두 연인과도 같은 이별 장면이 마치 영화에서처럼 알싸한 기분이 들기도 하였다. 오빠는 담담한 표정을 짓는 것 같았고 옆집 언니는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날 저녁 엄마는 큰오빠를 군대에 입영시켜 보낼 준비를 하시며 그리 애틋하고 안쓰럽게 훌쩍이는 것이었다. 밤새 바지춤에 돈을 넣어가지고 감침질을 하시며 이런 저런 말씀으로 신신당부를 하는 것이었는데, 어찌나 슬프고 안타까워하는지 지금도 그때 어머니의 서글픈 바느질과 젖은 눈시울이 눈에 선하다. 얼마 후 첫 편지와 함께 논산 훈련소에서 전방인 철원지역으로 자대배치를 하러 떠나면서 집에 부쳐온 옷가지에는 엉덩이부근에 벌건 핏자국이 물감을 한바가지 엎지른 것처럼 번져있었고, 그것을 보신 엄마는 저린 가슴을 움켜쥐며 밤새도록 애를 태워가며 흐느끼시곤 하였었다.

그런데 그 이후 작은 오빠는 처음으로 전투경찰에 뽑히면서 좀 수월하게 군 생활을 하기도 하였지만 큰오빠 때와는 비교도 안 되리만치 담담히 보내시어 솔직히 깜작 놀랐다. 나중에 막내오빠가 군에 갈 때에는 당연한 듯 오히려 눈도 까딱 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첫정이라는 것이 언제나 이토록 감흥이 큰 것이었던가 보다. 내 경우에도 첫아이를 출산하여 낳고 기를 때에는 하루하루가 신비한 경이로움으로 탄성을 자아냈던 기억이 역력하니까 말이다.

제대를 마치고 결혼해서 13년 동안 함께 산 큰오빠 내외는 지금은 머나먼 타국 땅에 가서 이민자 생활을 하고 있다. 언제나 든든한 살림 밑천이요 우리 집의 의젓한 기둥인 큰오빠가 오래 같이한 우리 곁을 떠나고 없을 때야 우리는 그를 더 많이 기억하고 찾았다. 무엇보다 약방의 감초 같았던 큰오빠였던 지라 그가 남겨놓은 빈자리가 그렇게 크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 없으면 잇몸으로 산다고 다들 살아가게 마련이어서 모두들 잘 정착해 나갔다.
무엇보다 한때 죽음을 넘나드는 질환으로 오래 장기 치료를 받아왔던 터라 어디에서든지 그 한 몫을 다하고 살아가 주길 진심으로 바라고 염원하는 것이었기에 그의 부재가 한없이 크고 너름에도 불구하고 특히나 어머니는 항시 기도하는 마음으로 잘 견뎌내셨다. 나야 답답할 때나 겨우 큰오빠의 그 큰 빈자리를 느끼곤 하였지만 말이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은 붓꽃이 심어져 있지 않다. 이사 올 때부터 꾸며진 화단이지만 오빠가 만든 것만 못하고 그 만한 공간도 되지 않으며 사시사철 그렇게 화사하고 아름답지도 않다. 그저 조촐히 한 귀퉁이 모과나무와 장미넝쿨 그리고 사루비아와 봉숭아, 라일락, 금잔화 등이 피는 정도다. 오빠처럼 애써 화단을 가꾸지 않음이 가장 결정적 이유일 것이고, 유년의 그 집처럼 화사하게 화단에 볕이 들지도 않는 까닭이다. 그래도 조카아이들과 함께 이곳에서도 잠시 살면서 손톱에 봉숭아 꽃물도 들이곤 했었다. 새집으로 부모님을 모셔놓고 오래 함께 같이 살게 될 줄 알았지만 또 다른 인생의 남겨진 시간과 경험들을 위해 아쉬움을 뒤로 하고 이국땅으로 훌쩍 떠나간 것이다.

엄마는 아직도 큰오빠 내외가 이집으로 이사하면서 새로 장만하여 들여놓은 농을 그대로 놓아두고 생활하시면서 언제나 아들 내외와 손자들과 함께 생활하시는 듯 그리움과 바람을 같이 하신다. 20여년이나 지났지만 그때에 나와 큰오빠가 같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장만한 이제는 다 낡고 달아빠진 소파도 정겨워 못 버리시고, 아직도 새것과 같은 오래된 커튼을 바꿔달면서는 옛 추억의 사진첩을 꺼내보듯 언제나처럼 반가이 대화로 맞이하여 걸고는 한다.

지금의 집에는 화단에 붓꽃이 심어져 있지 않지만 오빠가 나의 유년에 심어놓은 꽃밭에는 항상 온갖 꽃들이 만발하여 포근하고 다정한 기억의 장면들을 많이 수놓아 둔 채 그대로 간직되어져 있다. 어느덧 큰오빠 나이가 환갑에 이르렀다. 이제와 생각하니 그리도 우리를 놀래키던 생명의 끈을 단단히 움켜쥐고 당시의 사활을 건 거의 두 배에 가까운 인생을 살아준 것만으로도 참으로 고맙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큰오빠의 건강과 그 가족의 다복한 삶을 언제라도 기원하며 그까짓 ‘이별’ 쯤이야 하고 잘 견디고 살아간다. 비행기로 10시간 남짓하면 오가는 거리이기도 하거니와 서로의 마음을 알기에 육신의 애틋함도 이겨낼 줄 앎이라. 다만 노부모의 다릿심이 간혹 문제이겠지만 그러면 어떠랴, 자연의 순리인 것을.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서로가 격려하며 각자의 등뼈로 오롯이 당당하게 살아가는 기쁨에 있지 않겠는가. 그리움 때문에 더 오래 건강을 버텨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으로 잘 쓰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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