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香仁 이은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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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조직 속에서 살아온 이가 이제 비로소 그 사슬에서 풀리게 되었다. 좋건 싫건 떠나야 하는 시간이 도래했으니 기꺼이 그것을 영접하기로 하였다. 20대 초반부터 시작해 중간에 잠깐 학업을 한답시고 빼 먹은 4년을 제하면 약 20년 이상을 조직에서 보냈다.
첫 번째 회사는 멋도 모르고 들어가 해외를 다니면서 노는 재미에 빠졌고 두 번째 회사에서는 내가 이걸 못하겠냐 하는 승부 근성이 오늘 날까지 이곳에 머물게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무엇보다도 그 놈의 월급 받는 재미에 지금까지 버텨왔다는 게 맞는 말일 것이다.
직장인으로 살면서 월급의 매력은 무시할 수가 없다. 그것은 어쩌면 매력이라기 보다는 마약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어디 직장인 뿐인가? 돈이라는 것은 가끔은 혐오하고 무시하지만 그러나 동경하게 되고 그러다 때때로 슬그머니 로또도 사설랑은 침대 속에서 원 없이 꿈도 꾸어보는 것이 그렇지 않은가?
오늘 날 인간들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머니의 약발은 떨어질 기세를 멈추지 않고 있다. 요즘 자주 등장하는 물가 인상이니 휘발유 값 인하라는 (쥐꼬리만큼이지만 서두) 보도가 더더욱 민감하게 다가온다면, 인정하긴 싫어도 그것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 역설적인 긍정인지도 모른다.
현대 사회 이전부터 인간들이 모여 사는 곳에는 그들이 가진 역량에 따라 그것의 교환이 이루어지면서 자연스럽게 화폐경제로 발전해왔다. 지금까지 굳건히 유지되어 왔음을 인지한다면 그것의 역기능과 순기능을 따지기보다는 필요불가결로 이해함이 옳을 것이다. 때때로 나 역시 자급자족의 전원생활을 꿈꾸곤 하지만 이 시대엔 너무나 매력적인 쇼핑품목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그것을 돈을 지불해야 갖게 되는 시대에 살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외치는 이가 있다면 속물이라 죄송하다고 그에게 아량을 구한다.
일본에 있다가 한국 근무가 시작되고 10년이다. 강산도 변한다는 바로 그 10년이다. 물러나는 자리지만 그래도 이곳에서 일구어 놓은 일들이 있고 또 내 대신 자리를 지켜주는 이들이 생겨났으니 그것 하나만큼은 그래도 뿌듯하다.
대기업이라는 곳은 조직 개편과 함께 자연스럽게 고물들은 물러나는 상황으로 나 역시 여지없이 사의를 표해야 하는 시점이 되었다. 자의 반 타의 반이지만 사직을 제출하면서 그래도 몸 담았던 곳과의 이별의 세레모니는 아무도 모르게 남모르게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출퇴근 시간의 낭비를 싫어한답시고 사무실과 방을 같은 건물에 두었다. 그러니 아침에 눈곱도 안 떼고 회사출근까지 3분도 안 걸리는 상황으로 아주 시간을 합리적으로 사용한다고 믿었던 사람이다. 이 부분에서 변명하자면 실은 나는 귀차니스트의 전형임을 밝힌다. 오늘 여기서 이렇게 고해성사를 하지만 실은 나를 아는 웬만한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사무실은 폐쇄하고 살던 집은 그대로 유지하기로 결정이 났다. 그러니 한 곳의 짐은 깨끗이 정리를 해야 한다. 그 이사라는 것이 살던 집보다 큰 집으로 이사하던가 아니면 아예 통째로 이사한다면 그리 힘들지가 않다. 그러나 반대로 작은 집으로 옮겨야 한다던가 또는 지금처럼 한 곳을 폐쇄하고 짐을 분류해서 보내는 작업은 간단치가 않다.
덕택에 나는 근 이 주일은 정말로 몸의 진을 쏙 뺐다. 일단 버리는 것, 그리고 선별해서 갑에게로 보낼 것, 을에게로 보낼 것, 회사 폐업에 따르는 절차. 등등……
짐 정리를 하면 척척 그냥 하면 될 터인데 중간 중간에 지나간 추억이 발목을 잡는다. 사진 하나, 편지 하나에 잠깐씩 향수에 젖다 보니 일이 더딜뿐더러 묘한 기분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감상에 젖다가 일하다가 또 이런 게 있었네 하며 시간을 끄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 전부 따로 분류해 놓는다.
그러는 통에 가끔 오시는 집중신께서 이 정신 없는 아수라장으로 한꺼번에 몰려오는 바람에 다른 일은 아무것도 못하고 꼬박 이 일에 올인하는 상황에 처해버리고 말았다.
쿨한 동생이 한 마디 한다.
“뭐 못 버리고 쌓아두는 타입인가 봐, 그렇게 안 봤는데……”..
씩씩한 성격의 딸만 있는 우리 집에선 이런 건 흉이다. 잽싸게 아닌 척하곤
“그게 아니라.” 다 쓸 데가 있다고 있는 폼을 잡는다.
늘 쿨한 척 하는 언니였으니 꼼꼼한 구석이 의외라는 표정이다.
그런데 웬만한 건 다 버리겠는데 편지만은 버릴 수가 없었다. 꼭꼭 눌러 쓴 편지, 카드, 알았던 사람들의 필체……나는 그것을 함부로 휴지통에 넣을 수가 없다. 그러고 보니 아주 어릴 적부터의 편지도 방 한 구석에 고이 모셔두고 있다. 나 이렇게 정이 많은 사람인가 스스로도 놀라 자빠질 지경이다.
언제부터인가 사진도 씨디에 담겨 있고 안부도 이메일이 당연한 세상이 되었지만 아날로그 시대의 유물이 되어버린 편지들은 이제 그래서 더욱 보물처럼 소중한 느낌이다. 사람의 숨결이 담겨있는 그 종이들을 한 곳에 꼭꼭 담아 또 방으로 모셔 두었다. 언젠가 나는 그 주소에 편지를 보내고 그들 중 누군가와 해후하는 감동을 가지리라.
겨우 짐 정리를 하고 인수 인계를 끝냈다. 텅 빈 사무실을 보니 참으로 “시원 섭섭” 이란 말이 어쩜 이리 딱 들어맞는가 슬그머니 혼자 웃는다. 이제 집에서만큼은 좀 치우면서 살자고 다짐을 한다. 몇 가지를 좁은 집에 들여놓다 보니 정말 오랜만에 나의 서식지도 가까스로 먼지를 털을 수 있었다.
사월부터는 보통인간으로 돌아간다. 첫 직장이 좀 특이했던 만큼 그 때의 은어로 쓰자면 ‘민간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구본형 선생님은 “건달” 이라는 표현을 쓰셨는데 아주 마음에 쏙 드는 표현이다. 앞으로 열심히 도용해서 써 볼까 한다.
이제 내게는 마약 같은 월급도 없고, 출퇴근도 없고, 나를 긴장하게 하는 헤프닝도 없으리. 조직 생활의 마지막 끝 자락에 서 보니 만감이 교차하지만 이런 시간도 다른 것들이 그랬던 것처럼 금방 기억 속으로 사라져 갈 것이다.
봄 소식과 더불어 다가올 낮술과 건달의 세계를 기대하면서 그간의 월급쟁이 세월들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고 있다. 삼월 한 달까지는 밤술이 강세이다. 위를 살살 달래가며 이 시간들에게 이별을 고할 생각이다.
IP *.48.38.103
첫 번째 회사는 멋도 모르고 들어가 해외를 다니면서 노는 재미에 빠졌고 두 번째 회사에서는 내가 이걸 못하겠냐 하는 승부 근성이 오늘 날까지 이곳에 머물게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무엇보다도 그 놈의 월급 받는 재미에 지금까지 버텨왔다는 게 맞는 말일 것이다.
직장인으로 살면서 월급의 매력은 무시할 수가 없다. 그것은 어쩌면 매력이라기 보다는 마약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어디 직장인 뿐인가? 돈이라는 것은 가끔은 혐오하고 무시하지만 그러나 동경하게 되고 그러다 때때로 슬그머니 로또도 사설랑은 침대 속에서 원 없이 꿈도 꾸어보는 것이 그렇지 않은가?
오늘 날 인간들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머니의 약발은 떨어질 기세를 멈추지 않고 있다. 요즘 자주 등장하는 물가 인상이니 휘발유 값 인하라는 (쥐꼬리만큼이지만 서두) 보도가 더더욱 민감하게 다가온다면, 인정하긴 싫어도 그것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 역설적인 긍정인지도 모른다.
현대 사회 이전부터 인간들이 모여 사는 곳에는 그들이 가진 역량에 따라 그것의 교환이 이루어지면서 자연스럽게 화폐경제로 발전해왔다. 지금까지 굳건히 유지되어 왔음을 인지한다면 그것의 역기능과 순기능을 따지기보다는 필요불가결로 이해함이 옳을 것이다. 때때로 나 역시 자급자족의 전원생활을 꿈꾸곤 하지만 이 시대엔 너무나 매력적인 쇼핑품목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우리는 그것을 돈을 지불해야 갖게 되는 시대에 살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외치는 이가 있다면 속물이라 죄송하다고 그에게 아량을 구한다.
일본에 있다가 한국 근무가 시작되고 10년이다. 강산도 변한다는 바로 그 10년이다. 물러나는 자리지만 그래도 이곳에서 일구어 놓은 일들이 있고 또 내 대신 자리를 지켜주는 이들이 생겨났으니 그것 하나만큼은 그래도 뿌듯하다.
대기업이라는 곳은 조직 개편과 함께 자연스럽게 고물들은 물러나는 상황으로 나 역시 여지없이 사의를 표해야 하는 시점이 되었다. 자의 반 타의 반이지만 사직을 제출하면서 그래도 몸 담았던 곳과의 이별의 세레모니는 아무도 모르게 남모르게 시작되고 있었다.
나는 출퇴근 시간의 낭비를 싫어한답시고 사무실과 방을 같은 건물에 두었다. 그러니 아침에 눈곱도 안 떼고 회사출근까지 3분도 안 걸리는 상황으로 아주 시간을 합리적으로 사용한다고 믿었던 사람이다. 이 부분에서 변명하자면 실은 나는 귀차니스트의 전형임을 밝힌다. 오늘 여기서 이렇게 고해성사를 하지만 실은 나를 아는 웬만한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사무실은 폐쇄하고 살던 집은 그대로 유지하기로 결정이 났다. 그러니 한 곳의 짐은 깨끗이 정리를 해야 한다. 그 이사라는 것이 살던 집보다 큰 집으로 이사하던가 아니면 아예 통째로 이사한다면 그리 힘들지가 않다. 그러나 반대로 작은 집으로 옮겨야 한다던가 또는 지금처럼 한 곳을 폐쇄하고 짐을 분류해서 보내는 작업은 간단치가 않다.
덕택에 나는 근 이 주일은 정말로 몸의 진을 쏙 뺐다. 일단 버리는 것, 그리고 선별해서 갑에게로 보낼 것, 을에게로 보낼 것, 회사 폐업에 따르는 절차. 등등……
짐 정리를 하면 척척 그냥 하면 될 터인데 중간 중간에 지나간 추억이 발목을 잡는다. 사진 하나, 편지 하나에 잠깐씩 향수에 젖다 보니 일이 더딜뿐더러 묘한 기분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감상에 젖다가 일하다가 또 이런 게 있었네 하며 시간을 끄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 전부 따로 분류해 놓는다.
그러는 통에 가끔 오시는 집중신께서 이 정신 없는 아수라장으로 한꺼번에 몰려오는 바람에 다른 일은 아무것도 못하고 꼬박 이 일에 올인하는 상황에 처해버리고 말았다.
쿨한 동생이 한 마디 한다.
“뭐 못 버리고 쌓아두는 타입인가 봐, 그렇게 안 봤는데……”..
씩씩한 성격의 딸만 있는 우리 집에선 이런 건 흉이다. 잽싸게 아닌 척하곤
“그게 아니라.” 다 쓸 데가 있다고 있는 폼을 잡는다.
늘 쿨한 척 하는 언니였으니 꼼꼼한 구석이 의외라는 표정이다.
그런데 웬만한 건 다 버리겠는데 편지만은 버릴 수가 없었다. 꼭꼭 눌러 쓴 편지, 카드, 알았던 사람들의 필체……나는 그것을 함부로 휴지통에 넣을 수가 없다. 그러고 보니 아주 어릴 적부터의 편지도 방 한 구석에 고이 모셔두고 있다. 나 이렇게 정이 많은 사람인가 스스로도 놀라 자빠질 지경이다.
언제부터인가 사진도 씨디에 담겨 있고 안부도 이메일이 당연한 세상이 되었지만 아날로그 시대의 유물이 되어버린 편지들은 이제 그래서 더욱 보물처럼 소중한 느낌이다. 사람의 숨결이 담겨있는 그 종이들을 한 곳에 꼭꼭 담아 또 방으로 모셔 두었다. 언젠가 나는 그 주소에 편지를 보내고 그들 중 누군가와 해후하는 감동을 가지리라.
겨우 짐 정리를 하고 인수 인계를 끝냈다. 텅 빈 사무실을 보니 참으로 “시원 섭섭” 이란 말이 어쩜 이리 딱 들어맞는가 슬그머니 혼자 웃는다. 이제 집에서만큼은 좀 치우면서 살자고 다짐을 한다. 몇 가지를 좁은 집에 들여놓다 보니 정말 오랜만에 나의 서식지도 가까스로 먼지를 털을 수 있었다.
사월부터는 보통인간으로 돌아간다. 첫 직장이 좀 특이했던 만큼 그 때의 은어로 쓰자면 ‘민간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구본형 선생님은 “건달” 이라는 표현을 쓰셨는데 아주 마음에 쏙 드는 표현이다. 앞으로 열심히 도용해서 써 볼까 한다.
이제 내게는 마약 같은 월급도 없고, 출퇴근도 없고, 나를 긴장하게 하는 헤프닝도 없으리. 조직 생활의 마지막 끝 자락에 서 보니 만감이 교차하지만 이런 시간도 다른 것들이 그랬던 것처럼 금방 기억 속으로 사라져 갈 것이다.
봄 소식과 더불어 다가올 낮술과 건달의 세계를 기대하면서 그간의 월급쟁이 세월들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고 있다. 삼월 한 달까지는 밤술이 강세이다. 위를 살살 달래가며 이 시간들에게 이별을 고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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