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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3월 23일 05시 55분 등록
나는 성격이 밝고 낙천적 천진성이 남아있어 그런지 아직도 밝은 색깔을 좋아한다. 청년시절 주위에서 패션 모델감이라고 지칭할 만큼 제법 큰 키에 몸은 깡 말라있었다. 나 스스로는 내 몸매가 재미없는 여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몸매에 대해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나 작은 가슴 때문에. 중년에도 연예인 하리수씨 이후 트랜스젠더 라는 말이 공공연해지면서부터 모임에서 후배들은 나더러 트랜스젠더인줄 알았다고 하며 놀려대기도 했다. 청년 시절 굵은 넓적다리와 외무가 아닌 조선무형 다리 그리고 넓은 골반은 나를 한숨짓게 만들었다. 엄마는 내가 골반이 크기 때문에 아이를 잘 낳을 거라고 어려서부터 말씀해 주시곤 하였다. 그리고 다리가 굵어야 건강하고 힘이 세다고 늘 위로해 주셨다. 나이가 먹으면 저절로 젖가슴도 더 부풀어 진다고 하시며 너무 크지 않은 것이 나중에 보기 흉하게 늘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하셨다. 어려서부터 엄마 몸매를 빼닮았던가 보다.

하여간 나는 우아한 의상보다 심플하고 강렬한 옷을 좋아했다. 때에 따라 바뀌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단순한 라인에 포인트가 될 만한 색깔이나 선이 들어간 모던한 분위기의 풍을 선호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뽀얗고 배시시 쪼개면서 우아한 듯 차분한 분위기의 크림색이나 베이지색 톤으로 굵고 긴 머리가 웨이브로 출렁거리는 모습을 좋아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나는 아무 도움 없이 졸지에 연년생 세 아이를 낳아 기르는 통에 그런 우아함을 연출해 보일 수가 도저히 없었다. 색깔도 그런 색은 내 낯빛에 맞지 않아 좋아하지 않았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 그런지 경우에 따라 어울리는 듯도 하지만 이건 세월이 받쳐주는 색깔이고 나와 베이지색의 톤은 그리 잘 맞지 않는다. 베이지색은 뽀얗고 차분한 유형에게 잘 어울린다. 나는 상황에 맞는 차림을 우선시 하는 편이다. 일을 할 때에는 그와 관계하여 어울리는 복장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살림을 하는 동안 나는 늘 간단하고 경쾌한 옷을 선호했다. 왜냐하면 종일 아이들과 씨름하다보면 땀을 뻘뻘 흘려야 해서 화장도 잘 안하고 있을 때라 피부색의 누런 나를 생기 있게 받쳐주려면 약간 밝은 느낌이 좋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런 내가 무게 없어 보여 그랬는지 경박한 느낌을 갖기도 했던 것 같다. 하기야 어떤 잘난 위인이라도 나처럼 열심히 살면 다 그럴 수밖에 없지만, 밖에서 활동하는 여자들의 외양만을 보고서 제 마누라의 일상에는 안중에도 없고 겉멋을 비교한다는 정신태도 자체가 한심한 작태가 아닐 수 없다. 내 자존심을 걸고 시시때때로 나는 최선을 다해 그를 멋지게 연출해 주었지만 그 자신은 나에게 아무 것도 해주지 않으면서도 타박을 하기 시작하고 고작 제가 놀아나는 주위의 여자들과 비교하며 취향이 안 맞는다고 생각하고는 하였던 것이었나 보다. 처음에는 그냥 그것이 나이 차이에서 오는 이유인 줄 알고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솔직히 말이 그렇지 결혼 생활 5년간 아이를 연년생으로 셋 낳았으면 내내 배가 불러있었고 그 와중에 아이들과 함께 집안 살림을 하자면 누구라도 다 진짜 아줌마가 되지 않고는 정상적인 살림꾼이 될 수 없다. 성실하게 살림에만 몰두하는 것도 쉬운 선택이 아니니 대견해 하며 칭찬해 주지는 못할망정 어째서 그리도 제 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인지 도통 알 수 없겠는 것이다. 누구 못지않게 결혼 전에 입었던 잠자리 날개와 같은 옷들은 다 그림의 떡이 되고 빠듯한 살림살이에 긴축제정 설계까지 하며 살림을 제대로 하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아줌마답지 않고는 가사가 원활히 운영이 되지도 않는다. 집에서 살림하는 여자가 제 옷이나 사 입고 돌아다닐 한가한 시간과 돈이 어디에 있는가 말이다. 없다. 정말 없다. 아무 생각 없이 제 모양이나 내는데 신경 쓰면서 사는 여자가 아닌 바에야.

나는 게으르게 많이 자지 않았고 언제나 깔끔했으며 아무렇게나 매식 따위로 한기 식사를 때우기를 남발하며 쉽고 편하게 사는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끼니마다 찌개를 끓이고 나물을 묻혀대는 살림살이를 하며 정말 내 또래 가운데에 누구에게도 뒤지는 살림 솜씨는 결코 아니었다. 나는 나보다 음식을 잘하는 사람은 내 친구 선화 정도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영숙이가 손맛이 칼칼하다. 이들은 일단은 쫀쫀하지 않고 먹음직스럽게 장만해 낼 줄 안다. 그 외의 주변을 살펴봐도 정말 가관인 경우도 많다. 살림을 사는 건지 소꿉놀이를 하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지들은 잘한 다고 뽐내며 떠드는데 가보면 언제나 별로였다. 그런데 음식이라는 것이 제대로 하려면 얼마나 정성이 들어가고 시간을 많이 요하는 것이던가. 제대로 사는 여자들은 다 안다. 하지만 날림으로 살림을 해대는 여자들은 20년, 30년을 해도 모른다. 그 어머니에게서 그렇게 배우게 되어있고 가장 정직하게 저절로 훌륭하게 늘어가지 않는 것이 어쩌면 살림 사는 솜씨이다. 기껏 인공 감미료를 써서 다시다나 풀어 그럴 듯하게 멋진 쟁반에 내어놓는 것으로는 좋은 맛을 낼 수가 없다. 나도 요즘 하지 않으니 솜씨가 다 달아나버리고 말았다. 이혼 후 나의 가장 큰 병폐가 무엇을 만들어 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의욕상실일 것이다. 이렇듯 살림이라는 것이 그리 만만하고 쉬운 일이 절대 아니다. 하다못해 라면 하나도 제대로 끓이지 못하고 손 하나 까딱 하지 않는 위인들이 살림이 저절로 되는 만만한 것인 줄 착각하고 가정 돌보기를 우습게 여기는 것이다.

막내 돌날 그녀가 입고 나타난 옷 색깔에서 그가 평소에 나를 못마땅한 듯 말하던 베이지색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게다가 제법 고급 의상이었다. 천도 디자인도 그리고 그날의 컨셉에서 부자연스러움이라고는 없었다. 피부 역시도 잘 가꾸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제대로 조화를 이루었다. 은은함이 도도함과 함께 우아하게 번지도록. 하지만 당시의 나와는 비교할 수 없는 상황이 더 먼저라고 나는 생각되었다. 그녀에게는 그것이 어울리고 나는 나다운 것이 어울릴 것이었다. 나도 똑같은 돈 들여 꾸며주면 그만 못할 것도 없었다. 돈으로 처발라 좋은 옷 입고 머리 만지고 마사지 받아가며 화장해 내 놓으면 세상 어느 여편네가 이쁘지 않을까. 문제가 서방의 능력이지 아내의 못난 얼굴만은 아니다. 좋은 옷을 안 입어도 사랑을 받으면 이뻐진다. 나가서 해대는 짓거리의 합리화를 위해 타박하고 맆서비스에 지나지 않는 사탕발림을 위해 대충 외식이나 가끔씩 시켜가며 그것으로서 훌륭하고 모범된 가장인 양 우쭐대는 위인들의 꼬락서니라니.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아니라 그날 이상하게 묘한 기분이 딱 느껴지더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색깔을 보는 순간 그가 내게 수준이 낮음을 비꼬듯이 해대던 말이 언뜻 떠오르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는 제 입으로 한 말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었지만 사람이란 결국 제 주변의 이야기를 하게 되어있고 주어들은 말을 써먹는 것이 아니던가. 제 계집 제쳐두고 다른 계집을 좋아하여 정신이 팔리면 사내들이 곧잘 써먹는 이유가 상대의 여자가 불쌍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미치고 자빠진 것들. 저 없이 못살까봐? 그동안은 어떻게 살았는데? 뭐? 가슴이 아파? 염병할 꼴값을 떨고 있네.

돌날아침 그를 꾸며주고 아이들 챙겨 나가느라 정신없이 바쁘게 서둘러 나갔었다. 양말 짝 하나도 제 손으로는 못 챙겨 신는 어른아이 때문에 항상 더 일거리가 많았다. 그래서 늘 내 치장은 뒷전이 되고야 만다. 다를 꾸며주고 나서 나를 꾸미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고 그동안을 못 참아주니 나는 맨 날 뒷전이 되고야 마는 것이다. 그래도 못나게 빠질 만큼의 추레한 상태는 아니지만 서방이라고 있어도 생전에 도움을 주지 않으니 이런 날에는 배로 고달플 수밖에. 그는 애써 딴청을 부리고 있었지만 그가 어떤 이유로든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는 것을 감지 할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위기라는 것을 순간적으로 느껴보기는 그때가 난생처음이었다.

잔치가 진행 중이라 나도 태연하려고 노력을 하고 있었다. 큰 아이는 원하지도 않는데 자주 데려가서 나와 곧잘 떨어져 할머니와 고모와 지내며 거의 방안에서만 생활했지만 많은 사람들 앞에서도 서먹해 하지 않고 누이다운 행동을 하며 제법 잘 적응했다. 큰 아들 녀석은 실내 공기가 더운데다가 입고 있던 한복이 불편하였는지 약간 우울한 듯 보채기도 하고 그랬다. 그래도 이날 가장 멋지게 내 마음 가득 든든함이었다. 그날 돌의 주인공인 막내아이는 내 품에 안겨 별 문제 없이 잘 견뎠다. 그런데 그날 장면 중에 오래도록 애잔하게 기억에 남는 것이 하나 있다. 잔치가 어느 정도 끝나고 마무리를 하고 오려는데 둘째인 맏아들애가 창밖을 내다보는 장면이 순간 아주 굉장히 쓸쓸하고 고독하게 느껴졌었다. 어린 아이가 창 너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우수가 깃들어 있어서 퍼뜩 내 뇌리에 이상한 느낌이 들었었다. 나중에 이혼을 하고나니 예시라도 받은 듯한 큰아들아이의 그 장면이 늘 오래 기억에 남아있고는 한다.

잔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내내 그는 백미러로 내 눈치를 계속 살피고 있었다. 나도 무심히 말했고 그도 아무 대수로운 일이 아닌 양 시침을 뚝 떼고 말하고 있었지만 그날이후 우리의 사이는 극도로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는 여전히 바빴고 여전히 여자들과 함께 어울려 돌아다녔다. 심지어는 중국에서 있던 여자까지 찾아와서 새벽부터 일한다고 나가더니만 관광을 시켜준답시고 나돌아 다니다가 내가 다 알게 되지 않았나. 요상하게도 어찌어찌하여 내가 다 알게 되는 것도 기이한 일이 아닐 수 없던 것이다. 때마침 본사에서 연락이 와서 수소문해 찾다보니 그 짓거리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온갖 쓰잘머리 없는 의리 찾고 뭐 찾으며 늘 나를 속여먹는 것이 가만히 앉아있는 내게 다 전달되는 것도 참으로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아예 몰랐으면 모르지만 일단 알고 나면이야 어떻게 그냥 넘길 수가 있나. 그때만 해도 조선족이 국내에 들어오려면 누군가의 빽이 있거나 브로커들에게 돈을 많이 주고 올 수 있던 시절이었다. 오만 인간들을 다 챙기느라 허구한 날 술에 절어 집구석에 들어와서는 늘 피곤하다고 하고 널브러져 잠자기가 무섭게 뛰쳐나가고 그 모습이 애달프고 안쓰러워 말을 참고 지내다보니 아주 살판났다하고 질펀하게 나돌아 다니면서 허튼 수작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저런 온갖 잡다한 상황 속에서도 좋은 아내로 귀염 받으며 잘살고 싶은 욕망이 샘솟아 있었는지 이상하게 전혀 생각지도 않았는데 그녀를 보는 순간 전에 없이 마음이 황량해지고 한량없이 스산했다. 세상에 태어나 그런 절망을 처음 느껴보았다. 내가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초라함이 내 온 몸과 마음을 사막의 흙바람처럼 마구 몰아붙이며 내 눈으로 입으로 가슴과 허파로 콧구멍과 귓구멍으로, 구멍이라는 구멍을 다 차고 드는 것 같았다. 그랬다. 흙먼지와 왕모래가 내 온 생활을 속속들이 덮치기 시작했다. 밥에도 씹혔고 국에도 들어가 있었다. 하루 웬 종일 나는 점점 더 슬퍼졌고 내 눈물과 모래가 뒤엉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나도 알 수 없는 위기의식이 느껴졌기 때문에 간곡히 나를 이야기 했고 그 역시도 자기가 그 여자에 대해 그런 느낌이 있었음을 수궁하고 근신하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하루를 참은 것을 일 년쯤 근신한 것처럼 갑갑해 했고 그런 그를 지켜보며 나는 내내 마음이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집에 들어오면 짜증내기 일쑤였고 세상일을 혼자 다 하는 사람처럼 힘들어 하고 귀찮아했다. 결국에 몇 달이 안 가서 일파만파로 사단이 나기 시작했다. 허구한 날 싸우고 지지고 볶으면서 돈, 여자, 일, 집안 일, 주변 등등 안거치는 문제가 없었다. 승진을 꼭 해야 할 시기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승진이 안 됐다고 기분이 나빠서 술 먹느라고 안 들어오고, 출장 간다고 아무 소식 없고 등등 어느 것이 공식 행사이고, 어느 것이 진짜인지 분간도 할 수 없이 뒤죽박죽 엉켜드는 것이었다. 그러면 그런가 하고 지내다보면 그게 아니면서 그리도 제 멋대로 제 편한 대로만 골리듯 생활을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계속해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누구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익명의 전화가 걸려와 목소리만 확인하고 끊기기 시작했다. 그 무렵부터 이혼 후 전화국에서 발신전화 표시서비스를 하기 전까지. 그러니까 이혼 후 2년이 지나도록 심지어 내가 살고 있는 우리 집에까지 걸려왔다. 물론 나는 그에게 여러 번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가 내게 해주는 말은 신경 쓰지 말고 살라는 속편한 말 이었지만 그것은 다분히 그의 입장일 뿐이었다. 나는 달랐다. 거의 대부분은 마치 누군가 나를 빤히 들여다보는 듯이 그가 출근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만 받으면 끊는 것이었다. 무작위로 기분 내키는 대로 행해지는 일들이었다. 어떤 때에는 하루에도 몇 번 어느 때는 한 번 어느 때는 건너뛰기도 하는 등 하며 그러나 거의 일정하게 대부분은 출근을 하고 나면 한 10분가량 후에 전화가 오고는 하는 것이었다. 마치 누군가 어느 길목에서 지키고 있다가 그의 차가 지나가면 전화를 거는 것처럼 말이다. 출근 시간을 일정하게 하지 않고 약간의 격차를 두어도 그러는 것이었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아무리 사태에 대한 말을 해도 어쩌면 그렇게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전혀 해결해 주려고 하지 않는 지 그것이 더욱 야속해서 병이 날 지경이었다. 하는 수 없이 아이를 들쳐 업고 안고 걸리면서 내가 직접 전화국을 찾아가 의뢰했지만 적어도 대화할 정도의 시간이 되어야 번호가 잡힌다는 것이었다. 그 전에는 잡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상대는 그 모든 것을 다 알고 행하는 짓이었다. 나는 혼돈스러웠다.

너무나도 무심한 남편이 야속했고 어떤 사람들은 남편일 수도 있다고까지 했다. 그가 있을 때도 여러 번 그런 전화가 왔다. 심지어 밤에도 왔다. 밤에 오는 전화의 의미는 무엇인가? 아무리 무신경 했지만 저도 편할 수는 없었는지 하루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너 자꾸 알려고 하면 나하고 못살아.” 그 말은 그는 알고 있다는 뜻이 아닌가. 가족? 여자? 그가 여자를 그렇게 다룰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물론 여자가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내가 그 정도로 펄펄 뛰는데 인간이라면 그 정도의 앞가림은 하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 나는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친정에 머물게 되었을 때 똑같은 방법으로 그리 자주오던 전화는 무슨 의미인가? 괴전화에 부모님께서 신경이 쓰인다며 전화번호를 바꾸자고 하셨다. 나는 놔두라고 했다. 이혼했으니 더는 신경 쓰지 말자며 설득했다. 이혼 전도 이혼 후도 전화번호를 바꿔서 될 일이 전혀 아닌 것을 알고 있었기에 스스로 그치도록 하고 싶었다. 마침내 발신전화표시가 되기에 이르자 심심하면 오던 전화가 오지 않아 심심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런 식으로 마구 내 주변을 조여 오는 사건들로 가득했다. 나는 정신이 돌 것만 같았다. 그가 곁에 없으면 더욱 불안해 졌고 그조차도 믿을 수 없기도 했다. 우리는 서로 극도로 날카로워져갔다.

내가 아무리 못살겠다고 해도 그는 아무런 해결도 도와주려고도 하지 않았다. 하도 부모님이 다투고 집을 뛰쳐나가고 하는 것을 예사로 보고 자라 그런지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날 잡아 잡수하고 고래심줄로 손 하나 까딱 하지 않고 제가 먼저 더 으르렁거렸다. 나는 삶의 의욕을 잃어갔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아이들과 하루 종일 집안에 갇혀서 살면서 죽어가고 있었다. 시체와 같이 움직이는 송장에 불과한 나날들이었다. 남편이 전혀 도움을 주려하지 않기 때문에 나는 아무 것도 해결되는 것이 없었다. 하다못해 이사라도 가고 싶었다. 분위기를 전환해 보고 싶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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