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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3일 13시 46분 등록
부모로서 둘이 화합하여 잘 살아갈 수 없어 험한 꼴을 보이기보다 차라리 아이들을 위해 이혼하는 거라고 당당하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애시에 어른들로 인해 죄 없는 아이들은 세상으로 내던져졌다. 천륜이 아름다운 이유는 바로 보배로운 인륜의 가치에 의해 잉태되고 태어나서 그 고유한 종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 숭고하고 기름진 양육에 의해 더 한층 아름답게 성장해 나갈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인 것은 아니었던가.

아이들은 배고파 우는 거지가 아니다. 학용품 값을 지불할 수 있기 때문에 학교에 가서 가르침을 받는 것이 아니고 엄마가 도시락을 싸주었기 때문에만 성장하는 것이 아니다. 언제나 부당하게 앞질러 착각하며 스스로를 만족하는 것은 어른들이고 그래도 꿋꿋하게 쉼 없이 무럭무럭 자라며 신의 가호아래 제 인생을 펼쳐가는 것은 아이들이다. 아이들에게는 어른보다 맑은 절대적 신의 권능이 있고 더 짙고 푸른 꿈이 있으며 어른들이 감히 속단하여 근접하지 못할 아름다운 육체와 영혼의 웅장함이 영롱하게 깃들어있다. 즉 대부분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우리는 아이들이 태어나는 것에 기여를 했는가? 불임이어서 병원을 쫓아 다녔다고 해도 그것이 태어날 아이 자체를 위한 선택은 결코 아니었다. 어른들의 자기 최면과 만족 그리고 선택이 아니던가. 그러므로 천륜은 인륜의 자녀이다. 우리는 저마다 독립된 개체이고 진화해 나가는 고유하고 위대한 생명 그 자체일 뿐이다.

까마귀 집이든 야생화의 군집이든 한 가문의 전통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은 오래된 그들의 노력의 산물일 것이다. 그냥 키워지는 것만이 다가 아니고, 남들처럼 키웠다고 생각하는 것은 언제나 어른들의 지독한 자만심의 발로일 런지 모른다. 아이 때문에 들러붙어 산다고 하는 세상의 모든 성인남녀들아, 당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네 활개를 펴듯 활개를 치며 실컷 살아보든지 떠나라. 그래도 세상은 너를 욕하지 못한다. 그래도 세상은 너를 참견하여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감히 섣불리 이르지 못한다. 너를 대신하여 책임질 위대한 것은 어쩌면 아무것도 없는 것인지 모른다. 무엇이 두려운 것인가? 사랑? 알량꼴량한 서푼짜리도 안 되는 자존심? 아니면 네 스스로 왜소하다고 느끼는 하릴없는 자신의 존재?

기르지 못하고 내팽겨 쳐버린 어미가 제 몸매와 젖가슴과 안위를 위해 싹둑 탯줄을 끊어버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버젓이 살아가는 여자보다 훨씬 위대하다. 아예 잉태조차 두려워 파란 알약을 삼키는 일보다 골백번 더 위대하다. 너희들 때문에 사는 거라고 한숨짓는 아비보다 천만 번 위대하다. 모든 만물은 저마다 고유한 자유로움으로 태어나고 살다가 죽을 권리로 이 세상에 나왔다. 나는 그때 거기에 있었고 너 역시 그 별로 떨어진 것을 한탄해 무엇 하리. 그것은 살아있음에 대한 즐거운 비명과도 같은 업業 단지 그것에 지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세상의 모든 성인이시여, 거룩하고 위대한 신비의 세상의 어미와 아버지여! 아이 때문에 발목 잡혀 살지 말라. 너 때문에 위로 줄줄이 딸을 낳았더라고 뒤집어씌우지 말고 너 때문에 못 입고 못 먹었노라고 굴레를 씌우지 말라. 그대 인생의 요행을 버리지 못한 채 엎어버리지 않은 것에 대해 무책임하지 마라. 한순간의 쾌락은 너무 짧고 성년이 될 때까지의 부양은 너무 길다고 좀스럽게 굴지 말라. 너희 때문에 즐겁고 너희 때문에 살 의욕이 있었다고 말하지 못할망정 가르치고 먹이고 입혔노라 이자 붙여 셈하여 절대의 지존인양 자식을 족치지 말라. 그 형제 되었음이 마치 나머지 심장의 하나인양 죽을 때까지 눌어붙어 올가미를 씌워가며 칭칭 감기지 말라. 혼자 다 처먹으려는 사악한 인간들도 문제지만 혼자 다 처먹겠다고 설쳐대는 꼴불견도 내내 한통석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오십 보나 백 보는 그 물의 그 밥처럼 모두 한 가지로 사는 유유상종의 이무기들의 아귀다툼의 짓거리는 아니었던가.

사랑이 없다고 한탄하지 말며, 시가 때문이라고 원망하지 말며, 다른 여자가 생겼더라고 떠들어 봐야 별수 없다. 살아갈 돈이 없다고 지껄이지 말며, 차마 아이들 때문이라고는 더더욱 허튼소리로 딴청을 부리지 말자. 사랑하지 못함과 서로 돕지 않음을 뉘우치지 못함과 사사로이 딴 곳에 정신 팔려있음에 대해 사과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들여다보고 부끄러워해야 하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 사랑하지 못함을 한탄해야 하는 것이다.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변하고 마는 혼탁함에 대해 반성하지 못하고 아이들 때문에 산다고 머물지 말아야 한다. 차라리 갈 곳이 없어 너희들 곁에 남았다고 말하라. 그것이 한때 으르렁거림과 반목과 질시 속에 화사하게 피어나는 빛줄기처럼 솔직하고 담백하며 더욱 아름다울 우리들의 실상은 아니던가? 사람아, 사랑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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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죽을 글쓰기를 해볼까? 직사하게 욕먹을 글을 한번 써볼까? 손가락질보다 삿대질로 쳐들어 올 글을 쓴다면 어떻게 될까? 내가 이런 사람이란 걸 알면 비웃을까? 멀리 도망갈까?
그러면 외로울까? 크하하. 웃기다.
IP *.36.21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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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철민
2008.04.04 13:51:26 *.114.22.72
그저, 글이 끝내 부드럽기만 한다면,

저는 그저 러브스토리류나 읽으며 아이스크림이나 실컷 먹겠습니다.

문제를 던져 주어야 생각도 하고, 으르렁거리기도 하지 않을까요.

평지풍파 무서워 가슴에 묻고만 산다면 진정한 아티스트라 할 수 있을까요.

고의적이진 않더라도 가슴이 열리는 곳으로, 물이 흐르듯 족적을 남길 수 있다면 ...(이곳에 나그네가 글을 남겨도 되나요? 아니라면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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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살이
2008.04.04 17:27:19 *.123.215.74
저는 "아이들 때문에 살지말자"는 제목 자체가 이미 무언가 던져주고 있는 느낌을 받습니다.

써니님 느낌처럼 저도 아이들이 스스로 자라나는 힘이 있음을 느끼곤 합니다. 몇 일만 못보면 아이들의 얼굴은 자라있습니다.

심리학에서 로져스나 매슬로우 같은 인본주의 학자들은
인간에게는 자아(자기)실현과 같은 긍정적인 욕구가 있다고 했습니다.

저 또한 인간의 그들의견에 동의합니다.
'변경연' 이곳에 모이는 사람들... 그들의 등을 누가 떠밀었을까요?

요즘 써니님은 그야말로 '성실'을 초월하여 마음껏 발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말 부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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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4.04 18:42:56 *.36.210.80
맞아 죽을 줄 알았는데...

밖이 안 보다 후하군요. 몰라서 그럴까요? 내가 역시 오프라인보다는 온라인에 강한가보군요.^^

그게 무슨 선동의 글이냐는 항의 빗발 어제 오늘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써야 한다고 생각하죠.

왜냐구요? 성질이 더러워서 그렇겠죠.


나그네 철민님, 동정표 하나

더하기

오랜 만에 하루살이님과의 덧글 재회

기분 나쁘지 않군요.

찍~ 싸는 얼굴을 하고 마음 달래고 있었는데 말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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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
2008.04.08 14:05:02 *.75.127.219
어쩌면 제속이 이렇게 후련할 수 있을가요.
써니씨가 이런 글을 써내고 이런 생각이나 삶을 어떻게 감당할 수 있었을가.좀(?) 모질게 살아오신 흔적이 여기 저기 묻어나는 것입니다.
상투적인 생각이나 삶을 거부하고 자기 혼이 부르짖는 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의 절규, 절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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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4.09 11:26:46 *.36.210.80
모질게, 강하게 살아보려고 노력했답니다. 참지 못해서 고집을 부린 것은 아닌가 모르겠다고 후회를 이기려는 태도도 여러 번 가져 보았답니다. 모성이 모자란 것은 아닌가 의심도 하면서요.

하지만 저는 아직도 깨달음이 적은 것인지 내 일상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펼쳐지기만 하는 것인지 현재까지는 이러합니다.

키우지도 못하면서 모성이 강하다고 하면 우습겠지요? 하지만 모자라다는 생각을 가져보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리고 갈라져야만 하는 상황이라면 남성들이 주장하는 그리고 해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양육에 대해 당연하게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쪽이든 유책 배우자가 있다면 그쪽에서 부양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봅니다. 즉 여자건 남자건 이혼을 주장하는 쪽에서 아이의 양육에 대한 비용을 지불해 주는 것이 마땅하지요. 혼인의 지속성을 파기하는 쪽에서 당연히 물어야 하는 보상이고 치루어야하는 대가 이지요.

하지만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는 그러하지 못합니다. 법이 피해자를 그토록 보살피지 못합니다. 아직은 관습에 따라 여자가 좀 참지 하는 쪽으로 기우는 경우가 많고 제 경우도 그러한 오랜 학습과 관념 때문에 가슴앓이를 많이하고 살아가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딸을 가진 경우이거나 여하튼 피해의 입장이라면 분명히 이 점은 잘 살펴서 공정하게 판단되어야만 하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예를 들어 들은 이야기로는 미국의 경우 잘못 이혼하면 부양에 대한 책임 때문에 신세가 쫄딱 망하게 되어 이혼이 쉽지 않다고 할 정도로 양육에 대한 보장이 잘 되어있지만 우리는 흉내만 내고 있는 것이 사실이고 또한 지키지 않으면 일일히 쫓아다니며 시간과 일 등의 세월을 허비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따라서 바람을 피우거나 어떤 이유로든 이혼을 주장하는 쪽은 그에 마땅한 책임의식과 능력까지도 갖추고 난 후 일을 저질러도 저지르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 해결을 하기 실은 막무가내의 사람들은 제 멋대로 쾌락의 짓거리에 빠져들거나 무책임하게 가정의 룰을 파기하고 마는 것입니다. 재미는 엉뚱한 년놈들이 보고 피해는 당하는 사람과 아이들이 고스란히 입게 되는 것이지요. 피해 당사자도 제 갈 길로 갈 수 있다고 할 때 시시비비를 가리자면 문제를 일으킨 쪽에서 책임을 지어야 하는 것이 틀림없이 마땅하고 옳은 일이지요.

그러나 우리의 법률은 아직도 미약하기 그지 없습니다. 불과 10여 년 전 그때는 정말 예전과 별로 다를 것이 없었지요. 요즘에 와서야 조금 인식이 바뀌고 개선도 되고 있으나 사람들의 인식이라는 것이 전통과 관습을 하루 아침에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요. 저의 아이가 셋이면 만약 재판이란 것을 통해 친권과 양육권을 찾아와도 비용을 받으면 아닌 말로 당시 상대의 월급일체를 몽땅 몰수해서 가져온다고 해도 턱없이 모자랄 지경이니까요.

그러니 주기 싫으니까 야반도주하듯 줄행랑을 치기도 하는 것이지요. 더 싸우지 않고 갈라서는 것이 백 번 현명했다고 봅니다. 다 잊고 혼자서 일어나려고 노력한 것이 오히려 몇 푼 받는 것보다 훨씬 지름길이었다고 생각도 가져보지만 그래도 억울함은 남습니다. 여자의 입장, 딸의 입장이라고 하면 그집 좋은 일만 시킨 것이되니까요. 누구 말마따나 실속 없는 짓거리나 하는 사람이지요. 저라는 사람은. 그러나 실속을 찾으려고 하면 바로 그것에서 이해상관이 나타나기 마련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외양만 버젓한 부부생활은 부럽지 않아요. 그것이 얼마간의 위안을 줄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살고 싶은 인생은 아니랍니다.

그러면, 잘 살아야 하지 않겠나 하시겠지요? 그러게요. 그래서 발버둥이겠지요.

저는 제 딸이 물어온다면 아이 때문에 산다고 하는 것에 대해 이러한 생각과 말을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 글이 의식으로는 맞지 않으셨을줄 압니다. 하지만 한번쯤 이해해 주시려고 읽어주시고 덧글 주신 고마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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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
2008.04.10 11:51:22 *.75.127.219
제가 카나다에 살아본 경험으로는 써니씨의 얘기가 외양적으로는 맞습니다.그러나 그것을 활용하는 사람이나 그 배경은 다르다는 생각이 듭니다.무슨 법이든지 처음 시작했을 때는 그 취지야 아주 좋게 말을 하지만 운용과정에서 변질이 되고 악용되는 것을 조정해주어야 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많지요.

부부가 헤어질때 그 부작용을 없애기 위해서 그 자식에 대한 것을 조정해주기 위해서 철저하게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끝까지 책임을 지웁니다.그리고 많은 경우에 여자에게는 양육을 하게 합니다.그래서 이것이 겁이나서 이혼을 엄두도 못내거나 성질에 못이겨 해놓고는 평생을 고생하는 사람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많은 여자들이 이것을 악용해서 편하게 사는 사람을 보고는 이것도 꼭 좋은 제도는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아무렴 부부가 힘들게 같이 사는 것보다 다른 측면세서 어려운 부분도 있기야 하겠지만 혼자 애들을 데리고 사는 것이 훨씬 맘이 편한 것입니다.그래서 써니씨 같은 분같이 심지가 똑바르고 중심이 분명한 사람만 세상에 있는 것은 아니더라구요.

마광수 교수가 이어령씨 평을 한것이 신문에 나서 눈길을 끕니다.여기서 이어령교수의 글이나 말에는 알맹이가 없다고 합디다만 원래 교수나 작가는 말로 먹고 사는 사람인데 실물을 다루는 사람한테는 그동네 사는 사람들 모두 말장난이나 하는 사람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래도 나름대로 헛소리를 한것은 아닐테고 많은 사람들의 공감대를 이끌어 내었다는 것은 무엇이 되었든 뭣이 있었을 턴데 그것을 일언지하에 알맹이가 없다고 하니 당하는 사람한테는 황당했을 겁니다.자기가 알맹이를 못보고 해대는 소리가 아니냐하고 대들기도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그래서 글쓰기가 참 겁이나네요. 이런 댓글 달기두요.그래도 하긴 해야겠지요.더욱더 생각을 깊이 갖고 노력을 해야 될 것이라고 다짐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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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2008.04.10 15:31:43 *.36.210.80
그런 경우도 있겠군요. 말로는 들어보았습니다만 세상이 참 요지경 속입니다. 장사치들처럼요. 하지만 유책배우자가 있다면 그 부분에 대해서는 당연히 보상을 받는 것이 현명하다고 봅니다. 죄까지 뒤집어 쓸 경우가 있다면 얼마나 억울한 일이겠습니까.

한 10여 년 쳐박혀서 살다보니 해결나는 것은 없고 지치기도 하고 어느덧 인생의 고운 날들은 다 사라져가는 것에 대해 불안감과 함께 저의 중심도 혼돈스럽게 흔들리려 해서 서성이고 있는데 우연히 이곳을 알게되어 이곳에 와서 읽고 쓰기를 시작했습니다.

누군가 저에게 그때 그 시간을 그렇게 보내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하고 저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겠지. 글을 쓰지 않았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더 못 살았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아. 찾고 있었으니까 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왔다고 다 해결 될 것도 아닐 것입니다. 여기라고 완전할리 없으니까요. 저가 절을 하고 마음을 다잡는 것도 일종의 저의 중심을 흐트리지 않기 위한 선언이요 초심을 잃지 않고자 하는 맹세 같은 것 일지도 모릅니다.

특히나 손아래 사람들에게 더러는 웃기지도 않게 조언이 아닌 비난과 힐란조의 비웃음 같은 억지 격려늘 받을 때도 더러 있습니다. 아직은 그들 앞에 내놓을 밑천이 없어 우습게만 보이는 것이지요. 너 반성해. 너 틀렸어 하는. 그럴 때마다 다시 호흡을 합니다. 그리고 제 길을 갈 뿐입니다. 울분도 터뜨리고 기막혀도 하고 맞받아서 욕설도 퍼붓기도 하고 허허 웃기도 하면서 말이지요. 보살피는 마음으로 경험들을 나누어주시는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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