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창
- 조회 수 2978
- 댓글 수 9
- 추천 수 0
등산복이어도 좋고 트레이닝복이어도 좋다. 등산화를 신어도 좋고 운동화를 신어도 좋다. 가볍게 오를 수 있는 산이어서 그렇다. 오른다고 하기 보다는 간다고 하는 게 더 적절해 보인다. 오른다고 하기엔 뭔가 쑥스러운 산이기 때문이다. 등산화 끈을 조여 맨 뒤 모자를 가볍게 눌러쓰고 집을 나선다. 산으로 가는 길은 항상 마음이 가볍다. 아파트 입구 모퉁이를 돌아서면 산이 보인다. 산은 손을 뻗으면 바로 잡히는 곳에 있다. 굳이 등산화를 신고 나서지 않아도 산은 집에서도 보인다. 산은 컴퓨터가 있는 뒷방의 창문에서 바로 내다보인다. 아파트와 산의 중간에 있는 도로가 원망스럽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냐는 심정으로 아쉬움을 달랜다. 도로만 아니라면 열린 창으로 산의 푸른 냄새가 쏟아져 들어올 듯 하다.
넓지 않은 도로를 건너 산의 초입에 들어선다. 사실 산이라고 부르기보다는 동산이라 부르는 게 적절하다. 등산이 아닌 산책에 적당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무는 제법 무성하다. 나무가 무성한 만큼 푸름도 웬만한 산 못지않다. 산길에 들어서자마자 푸른 신록에 기분이 좋아진다. 야트막한 높이의 산길을 올라서면 나무사이로 오솔길이 반긴다. 이제부터는 푸름을 즐기는 일만 남았다.
오솔길에 들어서면 신발을 벗는다. 조여 매었던 등산화 끈을 푼다. 양말은 벗어 신발 속에 집어넣고 맨발이 된다. 가끔씩 하는 맨발 산행을 할 생각이다. 거친 산길이 아니고 사람들이 자주 다닌 길이라 제법 매끈한 오솔길은 맨발로 걷기에 큰 부담이 없다. 신발은 한손에 한 짝씩 들고 맨발로 땅을 밟는다. 부드러움이 발바닥에 감겨온다. 이 부드러움은 아주 색다르다.
모든 사물은 자신의 질감을 가지고 있다. 떡의 질감은 쫄깃함이고 케이크의 질감은 촉촉함이다. 탁자의 질감은 깨끗함이고 침대의 질감은 편안함이다. 부드러움의 질감으로는 피부를 빼놓을 수 없다. 그중에서도 사람의 피부이고 그중에서도 여성의 피부이다. 손을 대면 흘러내리듯 미끄러지는 여성 피부의 질감은 부드러움보다 매끈함이 앞선다. 그러나 그 매끈함보다 따뜻함을 그리고 인간다운 느낌을 주는 건 부드러움이다. 매끈함은 욕망을 느끼게 하지만 부드러움은 동질감을 느끼게 한다.
맨발이 흙에 닿았을 때의 느낌은 동질감을 주는 부드러움이다. 발을 신발이라는 도구 속에 담아놓고 발이 만났던 것은 흙이 아니라 신발의 밑창이었다. 흙과 만나는 것은 신발이라는 도구였다. 신발이라는 도구를 중간에 두고서 발과 흙이 만났을 때 정작 흙을 느끼는 것은 발이 아니라 눈이었다. 발은 신발 속에 갇혀있고 망막에 흙을 담은 눈이 그 느낌을 전달해줄 뿐이었다. 신발을 벗고 맨발로 만나는 흙은 그러한 피상을 벗어나게 해준다. 발바닥에 닿는 흙의 느낌은 피부를 통해 뇌로 전달된다. 직접적이고 실제적이다. 시원한 부드러움. 몸은 이제야 흙을 만난다.
맨발로 길을 걷다가 길섶에 잠시 몸을 앉힌다. 길섶에는 풀들이 가득하다. 많이는 보았지만 이름 모르는 꽃들과 눈에 익지만 역시 이름을 모르는 풀들이다. 아무 잎이나 하나 뜯어 손으로 비벼본다. 손으로 풀잎을 비비고 있으면 손가락에 푸른 물이 번진다. 초록빛 바닷물에 두 손을 담그지 않아도 번져오는 푸른빛이 싱그럽다. 그 푸른빛에 코를 대어본다. 풀냄새가 물씬 풍겨온다. 풀잎에서 풀냄새가 나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지 신기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풀잎에서 풀냄새가 날 것이라는 머리로 알고 있는 인식에서만 그렇다. 머리가 아닌 몸으로 느끼는 냄새는 사뭇 다르다. 녹색의 냄새가 어떤 것이냐고 누가 묻는다면 그것은 바로 이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냄새다.
다른 풀의 잎을 뜯어서 비벼본다. 다르다. 느낌도 다르고 냄새도 다르다. 풀잎마다 나뭇잎마다 제각각의 느낌과 냄새를 지니고 있다. 사람과 다르지 않다. 풀과 나무들은 자신만의 자리에서, 자신만의 할 일을 하며, 자신만의 삶을 살아간다. 우리는 한 눈에 숲을 훑어보고 “나무가 아주 좋네”라고 말하거나 “야, 풀이다”라고 말하곤 한다. 그 말은 풀과 나무의 개별성을 무시한 것이다. 사람을 보고서 “야, 사람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개개인의 삶과 모습을 인정하는 것이다.
풀과 나무의 푸름은 제각각이고 자기 자신의 독특한 푸름과 냄새를 지니고 있다. 그렇기에 푸름의 색도 천차만별의 차이가 있고 산길을 걷다보면 산의 냄새도 곳곳마다 다르다. 그 이유는 그곳에 풀과 나무의 개성적인 색과 모습이 있기 때문이다. 색색으로 뿜어 내는 푸른 냄새가 상큼하다.
다시 발을 옮기노라면 시원한 바람이 몰려온다. 산바람이다. 한낮의 열을 차단하는 나뭇잎에 싸여있는 산을 훑으면서 몰려오는 산바람은 항상 시원하다. 나무로 뒤덮인 산에 있다는 기분과 어우러져 시원함은 더 큰 상승작용을 일으킨다. 시원한 산바람이 감싸오면 가만히 눈을 감아보라. 그리고 코에 신경을 집중해서 바람의 냄새를 맡아보라. 바람의 냄새가 맡아지는가? “그렇군. 바람의 냄새가 참 달아.”하고 말한다면 당신은 대단한 후각의 소유자이거나, 대단히 숲을 즐기는 사람이거나, 대단한 허풍쟁이거나 셋 중의 하나일 것이다.
산바람은 항상 시원하고 달콤하다. 시원함은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몸이 그것을 온전히 느낀다. 달콤함은 그렇지 않다. 분명 기분으로는 달콤하다는 것을 알겠는데 몸으로는 느낄 방법이 없다. 시각도 후각도 촉각도 바람의 달콤함을 느낄 수 없다. 미각이라면 쉽게 달콤함을 판별해 내겠지만 바람을 씹어 먹을 수는 없는 일이다. 분명 달콤하기는 한데 몸의 감각으로는 느낄 수 없는 달콤함. 그 달콤함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달콤함의 근원을 모르겠다면 더 고민하지는 말자. 그저 느끼면 되는 것이니까. 눈을 감고 코를 움직여 느껴본다. 느껴진다. 산바람의 시원함과 달콤함이. 코 속으로 들어온 시원함과 달콤함이 가슴 속까지 가득 채운다. 답답했던 가슴 속이 달콤해 지는가 싶더니 일순 새콤해진다. 숲이 주는 선물이다. 몸과 마음을 채워주는 충만하고 고마운 숲의 선물이다.
천천히 산을 내려온다. 숲의 푸름을 눈에 가득 채웠고, 숲의 푸른 냄새를 코로 가득 들이켰고, 숲의 달콤함을 가슴에 가득 담았다. 짧은 산길에서 참 많은 것을 얻었다. 그래서 숲은 항상 고맙다. 오솔길의 끝이 보일 즈음이면 숲을 벗어나는 것이 아쉽다. 다시 발을 숲으로 돌리고 싶어진다.
그럴 때 잠시 들르는 곳이 있다. 오솔길 옆으로 뻗은 또 다른 오솔길로 몇 발자국을 옮기면 숲 속의 작은 쉼터가 있다. 누군가 버리려던 의자를 두세 개 갖다 놓은 숲 속의 작은 공간이다. 곧 부러질 것 같은 의자를 나무에 기대어 놓고 앉는다. 가득한 푸른 신록이 마치 깊은 산속에라도 들어와 있는 듯한 기분이다. 신록을 만들어내는 나무들은 잡목이다. 쭉쭉 뻗은 보기 좋은 나무도 없다. 이리 휘어지고 저리 휘어져 서로 나뭇가지를 의지하기도 하고 아예 옆으로 비뚜름하게 자라는 나무도 있다. 그들이 만들어내는 신록은 대단할 수가 없다. 원천적인 한계 때문이다. 그래도 그것으로 충분하다. 뒷산에서 즐기는 신록으로는 충분히 고맙고 충분히 푸르다.
눈을 살며시 감으면 산길을 걸으며 느꼈던 산의 모든 것을 앉아서 즐길 수 있다. 흙의 부드러움이 발바닥을 톡톡 치며 올라오고 코끝에는 시원한 바람이 맴돈다. 숨을 한껏 들이키면 바람은 사정없이 가슴 속으로 밀려온다. 바람은 옷이 가리지 못한 피부를 찾아와 안마를 한다. 시원하게 얼굴을 다독거리던 바람은 어느 순간 발등을 간질인다. 잠시나마 머릿속을 비운다. 공(空)이다. 솟아나는 생각을 날려 보낸다. 몸이 가벼워지고 마음이 가벼워진다. 가벼워진 머릿속을 헤집는 생각 하나. 아 벌써 6월이다.
댓글
9 건
댓글 닫기
댓글 보기
VR Left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712 | [11]여행을 꿈꾸며 [9] | 손지혜 | 2008.06.23 | 3317 |
711 | [11] 기억은 정말 솔직할까? [7] | 최지환 | 2008.06.23 | 2981 |
710 | [11-1]창의력을 얻고 싶을 때 [10] | 오현정 | 2008.06.23 | 3508 |
709 | [11]방정리를 하고난 후 [5] | 오현정 | 2008.06.23 | 3483 |
708 | [11] 군대에서의 잊지 못할 인연 [8] | 현웅 | 2008.06.23 | 3771 |
707 | [11] 빗소리 들리는 작은 집 [9] | 창 | 2008.06.22 | 4190 |
706 | 글렌 굴드와 레너드 번스타인 [2] | 소은 | 2008.06.13 | 4643 |
705 | 아마도... [3] | 소은 | 2008.06.12 | 3451 |
704 | [11]론다의 할머니 [1] | 오현정 | 2008.06.11 | 3342 |
703 | [10] 우리시대의 대의명분(大義名分) [7] | 우경 | 2008.06.09 | 3182 |
702 | (10) 개별적 죽음,보편적 죽음:역사는 그저 반복되는 것인가 [11] | 이한숙 | 2008.06.09 | 3946 |
701 | [09] 욕망과 자유의 함수관계 [8] | 손지혜 | 2008.06.08 | 3591 |
» | [10] 숲에서 만난 6월 [9] | 창 | 2008.06.08 | 2978 |
699 | 오늘은 아이처럼 살 것이다. [7] | 이은미 | 2008.06.08 | 3422 |
698 | [10] 어느 사부(射夫)의 일기 [7] | 양재우 | 2008.06.08 | 3168 |
697 | [10] 지적 잡식성 [4] | 최지환 | 2008.06.08 | 3156 |
696 | [10] 강호동과 비움 [8] | 거암 | 2008.06.07 | 3936 |
695 | [10] 나의 첫 해외 출장기 [4] | 홍현웅 | 2008.06.07 | 3562 |
694 | [10] 스페인에서 프랑스로 가는 길 [5] | 오현정 | 2008.06.06 | 4504 |
693 | -->[re]돈 맥클린의 노래 [3] | 소은 | 2008.06.03 | 395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