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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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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0월 25일 07시 38분 등록

어떤 선택

 

‘파리바케트’와 ‘풍년제과’

‘교보문고’와 ‘민중서관’

‘스타벅스’와 ‘빈센트 반 고흐’

 

지난 한 해 동안 나는 아이들과 모종의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가정상의 이유로 주말마다 내가 아이들과 하루를 보내야 했다. 아이들과 나는 협상을 시작했다. 아이들이 하고 싶은 것들과 내가 하고 싶은 것들을 셋이서 머리를 맞대고 의논했다. 별로 어렵지 않게 우리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고, 서로가 만족할 만한 하루 일정들을 내올 수 있었다. 들어갈 비용도 어느 정도씩 분담키로 했다.

 

아침을 먹고 난 오전 9시 반, 자전거의 앞뒤로 하나씩 아이들을 태웠다. 더 커버리면 못 태울 것 같아 애비노릇 한답시고 시작한 추억만들기 프로그램 중 하나다. 5학년이 된 하록이 보다 뒷자리 일어서서 타기를 좋아하는 하영이가 더 즐기는 눈치다. 그렇게 먼저 시작하는 곳은 동문거리에 있는 ‘비사벌’ 서점이다. 지금은 거의 다 사라져버리고 네 군데 밖에 남지 않은 헌책방 중 하나다. 예전에 ‘책천지’를 운영하던 사장님이 가게를 옮기면서 새로 ‘비사벌’로 간판을 바꿨다. 다른 서점들보다 사회과학 서적들과 문학예술서적들이 많이 거래되는 곳이어서 헌책방 네 군데 중 대학시절부터 단골을 하던 책방이다. 청계천에도 헌책방 골목들이 있고, 그 규모나 찾는 이들에 비하면 감히 비할 바 아니지만, 그래도 남아 있어줘서 고마울 따름이다. 전북일보 김은정 국장은 이 거리에 고서점들이 들어서면 어떨까 하는 구상도 해보지만, 두 시간 남짓한 시간동안 헌책보다도 아이들 교과서와 참고서를 찾는 아주머니들뿐인 책방주인들에게 가당이나 할까 싶다.

 

두 시간 남짓한 시간을 우리는 소위 ‘보물찾기’를 한다. 주로는 ‘메이플 스토리’나 ‘그랜드 체이서’ 같은 최근에 인기 있는 만화들 속에 파묻혀 시간가는 줄을 모르지만, 아무튼 아이들에게 자기가 보고 싶은 책들을 마음껏 보고, 고르게 하는 재미를 배워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책은 마음의 양식이지 몸의 양식은 아닌 듯싶다. 실컷 보고 있을 때는 몰라도, 무심결에 시계를 보고나면 그 때부터 배가 고파지기 시작한다. 다시 협상이 시작된다. 각각 두 권씩을 고를 수 있고, 권당 2,500원하는 책값은 아빠의 후원으로 구입할 수 있다. 시도 때도 없이 다투던 남매도 이 시간이면, 머리를 써가면서 서로 줄다리기를 한다. 읽었던 다음 권 만화책을 각각 한 권씩 구입하기로 하고, 나머지 한 권씩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고른다. 내가 고른 책들과 같이 현금으로 계산을 하곤 한다.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 하는 일이지만 조금이라도 오랜 시간 아이들과 이 보물찾기 놀이를 더 하고 싶은 욕심이 더 크다.

 

예술회관에서부터 이어져서 아직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삼양다방, 홍지서림, 겐스빌치킨, 해태바베큐, 웽이집, 꼬꼬영양통닭, 창작소극장 이런 정겨운 이름들을 언제까지 볼 수 있을까. 벌써부터 텅 비어가는 건물들의 2층에 배고픈 예술가들을 위한 오픈스튜디오를 해보기도 하고, 드럼통에 광나무를 심어 가로수처럼 전시하기도 하고, 주차장이 들어서면서 헐리워진 공간의 담벼락에는 모나리자 그림도 그려져 있다. 얼기설기 조형물들도 설치하고, 건물 옥상난간에 위태롭게 걸쳐진 인형들도 있다. 몇 년 전부터 동문거리를 살려보겠다고 터를 잡고 들어온 ‘심심’에서 벌여 놓은 일들이었다. 왜 이런 일들을 하냐는 질문에 김병수 대표는 심심해서 한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지만, 이런 불편한 실험들을 예산낭비라며 주변에서는 가만 놔두질 않았다. 김병수 대표는 전주의제21이 살림 꽤나 하는 곳인줄 알았나보다. 몇 차례 도와달라는 부탁을 해왔었지만, 사실 도움 줄 수 있는 일이 많지는 않았다. 그저 10월이 되면 열리는 ‘동문거리 축제’에 나눔장터를 공동으로 개최해서 분위기를 잡아주는 정도였지만, 늘 그들의 실험적인 모습들은 왠지 같은 길을 가고 있는 동행같기도 했다. 기회가 닿을 때마다 같이 일해보고 싶었다.

 

점심은 그날 주머니 형편에 따라 정해진다. 가본집에서 짜장면을 시켜 먹기도 하고, 아웃백에서 사치를 부리는 날도 있다. 이도 저도 아니면 와플짱에서 와플 하나씩으로 때우기도 하고, 바로 옆집에서 라면이나 돈까스로 해결하기도 했다. 마음에 점하나 심는 것이 점심이라고는 했지만, 결코 만만한 비용은 아니었다.

 

다음 행선지는 ‘교보문고’였다. 새로 나온 책들이며, 기다리던 씨리즈가 나왔는지도 확인할 참이었다. 대신 조건이 있다. 약 8,500원 정도를 하는 새 책은 용돈에서 능력껏 구입한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형편이 되면 살 수 있고, 없으면 돈을 빌리기도 했다. 종종 하영이가 억지를 부리기도 하지만, 에누리 없다. 꼭 필요한 책을 사는 것이고, 빌린 돈은 다음 주까지 꼭 갚든지 아니면 용돈에서 제하도록 되어 있다. 처음 얼마간은 익숙하지 않았지만, 나중에는 저희들끼리 돈을 빌리기도 하고, 선물로 대신 구입해주기도 했다. 돈을 쓸 줄 아는 요령을 하나씩 연구해가는 모습들이 기특해보였다. 카운터에 가서 직접 계산하는 법도 배우고, 포인트를 적립하는 것도 알게 되었다.

 

다시 자전거를 탄 아이들과 함께 가는 행선지는 ‘효자문’이 있는 거리 ‘나무라디오’라는 커피숍이었다. 한옥을 개조해서 만든 이 카페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몇 가지 이유 중 커피 맛과 분위기도 있지만 주인의 고집스러움이 좋아서였다. 코끼리 유치원 학부형으로 인연을 맺었지만, 나는 어느새 이 카페의 단골손님이 되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는 널부러져 뒹굴 수 있는 다락방 같은 공간이 있다는 것이 더없이 좋았다. 어린 시절 어른들에게 혼나고 나면, 숨어들던 다락방이 지금 우리 집에는 없다. 울다 지쳐서 잠을 들다가 저녁 먹을 시간을 넘기고서야 나타나면 모든 것이 달라져 있던, 그 마법의 공간을 대신 찾아줄 수 있어서 이곳을 좋아한다. 더블토스트를 시켜놓고 각각 한 조각씩을 먹고 나면, 나머지 한 조각을 두고 신경전을 벌인다. 어떻게 분배를 해야 할 지 보통은 하영이 차지가 되기도 하지만 그냥은 안 된다. 제가 먹어야 할 이유를 그렇듯하게 말하면 하록이와 나는 때론 절반을 때로는 나머지 모두를 주곤 했다. 다시 두어 시간 뒹굴며 비사벌 서점과 교보문고에서 구입한 책들 속에 빠져든다. 방금까지 더블토스트 한 조각을 두고 시끄럽던 아이들이 다시 조용해진다.

 

특별한 날엔 특별한 이벤트가 있었다. 더블토스트 대신에 아이스크림이 얹혀진 와플을 시켜 먹는 날도 있었다. 주로는 생일이 끼거나 하록이가 상을 받았다든가 하영이의 칭찬스티커가 20개를 넘긴 날 주어지는 보너스였다. 가끔씩은 DVD방에 가서 영화를 보기도 했고, 전주천을 따라 산책을 나가기도 했다. 7시가 다 되어갈 즈음이면 집에서 전화가 걸려온다. 저녁밥을 따로 하지 않기로 한 날이므로 우리는 ‘옴시롱감시롱’에 들러 그날 기분에 따라 떡복이와 순대, 김밥과 오뎅을 적당히 섞어서 사들고, 다시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또 다시 시간이 얼마쯤 흐르면, 구도심도 더 변해갈 것이다. 풍년제과에서 빵을 시켜놓고 미팅을 하던 아빠는 아이들의 생일 케익을 사러 파리바케트를 간다. 민중서관에서 참고서를 골랐던 세대는 이제 학부형이 되어 아이들과 함께 교보문고를 찾는다. 시간이 조금만 더 더디게 흐르면 좋겠다. 아이들에게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어서 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잊혀져 가는 것들을 놓치 못하는 나는 ‘구도심 지표’를 만들기도 하고, ‘재래시장 상품권’을 구입하기도 한다. 우리 집도,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도 아직 구도심에 있다.

IP *.130.159.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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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주
2010.10.25 10:26:36 *.42.252.67

가을이라서 인가보다. 옛일을 추억하며

그 때 그 시절이 좋았는데…… 라는 아쉬움이 담긴 칼럼이네.

그래 10원짜리 삼립 크림빵에 20원짜리 뽀바이 과자 한 봉지의 행복.

아버지가 퇴근 할 때 사들고 오신 셈베이 과자 한 봉이면

최고였던 시절인데 요즘은 최고급 크림치즈 케익와 피자에도

감동이 적은 것 같아.

 

아이들이 만족을 모르는 것 같아. 나도 아이들과 어제

통화를 하면서 너무나 놀랐어. 요즘 40대들이 하는 말을

20대가 하고 있으니 그들이 사는 세상은 얼마나 힘들고

재미없는지를 말이야.

추억의 칼럼으로 옛 시간으로 데려다 놓는 글은

쌀쌀한 가을 내 가슴에 불을 지펴 놓았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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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철
2010.10.27 09:37:11 *.186.57.58
그 가슴에 지펴진 불은 누가 끄누?
누나도 어쩔 수 없는 같은 세대다...ㅎㅎ
It's good day to die...isnt 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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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옥
2010.10.25 17:37:55 *.10.44.47
일상을 테마파크처럼 즐기시는군요.  ^^
하영이의 웃음이 그렇게나 맑은 이유를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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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철
2010.10.27 09:42:21 *.186.57.58
사실은 얘들때문에 나도 맑아져.. 알잖아.. 내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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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2010.10.26 01:48:27 *.129.207.200
글쓰기는 잘 되시나요?

그림 그리면서, 그림을 잘 그리기 위해서는 많이 망쳐보아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시도하고, 망치는 과정속에서 조금씩 발전이 있지요. 글쓰기도 같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글과 그림은 양이 질로 직결되지 않을까요?

앞으로도 형의 글 많이 읽고 싶네요. 

아이들과 지내시는 모습이 눈 앞에 선합니다. 형의 글은 전원일기 타이틀 같아요. 농촌풍경과 펼쳐지는 섹스폰 소리. 생각해보면, 농촌과 섹스폰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데, 참 혁신적인 발상이네요. 구수하면서도, 정감어리지만, 세련된...

자기 스타일, 자기 주제 찾아가는 과정. 그 모습이 조금씩 드러나는 것 같아, 저도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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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철
2010.10.27 09:38:55 *.186.57.58
나도 인건이 글이 다듬어져가는 과정을 보는 것이 너무 좋던데..ㅎㅎ
고마워..김사장...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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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성
2010.10.26 23:44:32 *.34.224.87
은주의 댓글에 공감이 많이 간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자주 사오셨던 셈베이...과자..
난 그게 꽤 추억이었거든..
개인사에도 썼었고....
부럽다..니가...요즘은 아이들과 많이 시간을 보내지 못해서 너무 아쉬워
찰스핸디의 어머니가, 교수가 된 찰스에게
'아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지낼 수 있는거니?' 하고 질문했다는 장면이
더욱 생각난다...

너야말로, 카르페 디엠.. 잘 사는 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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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진철
2010.10.27 09:41:24 *.186.57.58
형, 그냥 주어진 시간을 가장 잘 즐길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찰스 핸디처럼.. 남들보다 나은이 아닌 남들과는 다른 뭔가를 찾는 재미가 솔솔해요.
많은 시간을 함께 하지는 못하지만, 주어진 시간만큼은 기다려지는 순간들로 가슴벅차게..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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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7 16:15:41 *.230.26.16
음, 나도 큰 아이와 단둘이 데이트를 하곤 해요.
옛날 시간에 쫒기며 살땐 결코 할수 없었던, 아니 그런 생각조차 못했지요.
그런데 내가 찬찬히 그 아이를 바라다보니, 단둘이 시간을 함께 하고 싶은 맘이 마구 생기더라구요.
둘이 살짝 학교 앞 정문에서 만나서 단둘이 손잡고 함께 맛난 거 사먹고 책방에도 가고 나무아래 앉아 이야기하는 시간... 지금 이때가 아니면 결코 누릴 수 없는 최고의 순간이예요.
지난 주에는 둘이서 붕어빵을 먹으며 낙엽을 바라보았지요. 
음, 난 결코 그 시간을 잊지 못할 거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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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7 22:04:51 *.186.57.58
그려진다. 그 그림들이... 블로그에 잠시 들렀다 왔어..
옆집으로 이사들려고 이웃신청했다. 떠들지 않을테니, 받아줄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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