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상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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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져나갈 길이 있습니다.”
“늦었어요. 그들이 오고 있어요.” 그녀는 체념한 듯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당신을 믿습니다. 일단 여기를 벗어나야 합니다.”
“아뇨. 믿으면 길이 보이나요? 나는 내 몸이 이끄는 대로 가요.” 그녀의 머리 뒤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녀에게 걸어갔다. 단호하게 그녀의 손목을 잡고 오던 길로 돌아섰다. 몸이 공중으로 한 바퀴를 돌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를 뿌리친 그녀는 갈대 숲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갈대무리 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녀는 벌써 저만치 앞서 가고 있었다. 그녀가 모퉁이를 돌기 전에 어깨를 잡았다. 어깨가 돌아가며 그녀의 눈과 마주쳤다. 뻘겋게 충혈된 눈. 포효하는 그녀는 야수였다. 퍼렇게 날이 선 어금니 사이로 허연 입김이 새어 나왔다. 움찔한 사이 야수는 목덜미에 얼굴을 들이밀고 으르렁거렸다. 쿵쾅거리는 심장소리가 경동맥을 타고 얼굴 전체로 퍼졌다. 그녀가 뱀파이어라니. 다리가 풀려 쓰러질 것 같았다. 귓속이 멍한데 새 울음소리가 정적을 깼다. 갈대 줄기가 한쪽으로 쏠리는 걸 본 순간 다리가 풀리며 주저앉고 말았다. 한 순간에 비워진 머릿속을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잎 소리가 채웠다. 눈앞에 스물 둘 분례의 얼굴과 송곳니를 드러낸 뱀파이어가 겹쳐졌다. 2층 창문의 메모, 운주사에 갔을 때 밥 한 술 뜨지 않던 그녀, 가게에 들이닥친 건달들의 줄행랑, 하얀 눈길 위에 엎어진 검은 코트의 그녀가 슬라이드 사진처럼 이어졌다. 비로소 그녀가 피를 수입한 이유가 이해되었다. ‘당신이 당신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그녀를 안다고 했을 때 그녀는 얼마나 콧방귀를 뀌었을까. 누군가를 제대로 안다는 건 소금기둥이 될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다.
상황이 정리되었다. 그녀가 경찰에 체포되면 정체가 드러나는 것은 시간 문제다. 그녀는 UFO 처럼 국민대중의 공익과 사회의 안녕을 위해 정부의 비밀관리대상이 되겠지. 뱀파이어의 존재가 알려지면 신비를 풀어보자고 메스를 들이대거나 구제역의 주범으로 몰아 화형에 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스물 둘 분례로 살아가기는 어렵겠지만 탈출 이외에 방법은 없다. 어차피 그녀는 제이미로 나오코로 아이링으로 살아오지 않았을까. 관객이 감정 이입하는 대상은 배역이지 배우는 아니니까. 그럼 배우의 생얼을 봐버린 나는 뭔가. 그녀의 정체를 알고서도 나는 여전히 그녀와의 동행을 상상한다. 창살 너머의 맹수를 바라볼 때 느끼는 연민? 야수와 만화 캐릭터를 혼동해 우리 안으로 겁없이 들어간 아이가 나인가? 머릿속은 혼란스러운데 다리는 그녀를 좇고 있었다. 산 아래쪽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루가 시작된 것이다. 빠른 걸음이 달리기가 되었고, 달리기는 생각을 따라가지 못했다. 푸른색 수의가 눈에 들어왔다.
“분례씨.” 그녀는 돌아보지 않았다.
달리기에 지쳐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뛰어도 뛰어도 그녀와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잠깐, 한 마디만 합시다.” 숨을 고르고 간신히 말을 꺼냈다.
이윽고 그녀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다행히 분례의 얼굴이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햇빛을 받아 엷은 밤색으로 분화되고 있었다.
“나를 믿으세요. 방법이 있습니다.”
그녀의 완고함이 살짝 동요한 틈을 타 한마디를 더했다.
“이 옷으로 갈아 입고 당신 옷을 주세요.”
그녀가 그대로 서 있는 것을 확인하고 지체 없이 배낭에서 등산복을 꺼냈다.
“사냥개들이 오고 있어요. 산 위로 주의를 끌 테니 그 사이에 피하세요.”
멍한 표정 뒤로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깃발처럼 날렸다.
“나는 괜찮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아니라는 거 알죠?” 등산복을 그녀에게 건넸다.
“왜 나를 돕죠? 내가 누군지 보여줬잖아요.” 그녀가 말했다.
“지금은 분례라는 거 압니다.” 사냥을 포기하고 레토르트 식품으로 연명하는 뱀파이어는 야수일까 사회적 존재일까. 서로들 발톱을 숨기고 아슬아슬하게 공생을 유지하는 사회에서 출신성분으로 추방을 논하는 건 합당한 일인가. 그녀가 그들 속으로 들어가고자 한다면 그것이 그녀에게 어울리기 때문이리라.
“신발이 맞을지 모르겠네요.” 등산화를 마저 그녀에게 건네주고 뒤로 돌아섰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조심스럽게 옷 벗는 소리가 들렸다. 갈대무리가 바람을 받아 산 아래쪽으로 누웠다. 사냥개 짖는 소리가 계곡을 타고 메아리 쳤다. “다 됐어요.” 옷을 갈아 입은 그녀는 그새 등산복 모자에 달린 끈을 빼서 말총머리를 하고 있었다. 그녀가 가지런히 접은 수의를 수줍게 내밀었다. 수의를 받은 반대 손으로 탈출로가 표시된 해운산 지도를 그녀에게 주었다. “행운을 빕니다. 어디에 가든 잘 사세요.”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녀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마뜩잖게 악수를 했다. 그녀의 손은 차가왔지만 작고 보드라왔다. 그녀의 어느 구석에 뱀파이어의 본능이 숨어 있는지. 피부의 감촉이 안고 싶은 충동을 일으켰다. 참았다. 그녀를 보내기 싫어질 것 같았다. “저들이 능선으로 올라오고 있으니 계곡으로 내려가세요.” 돌아선 채 나를 바라보는 그녀에게 어서 가라고 손짓을 했다. 능선 아래로 그녀의 머리가 잠기고서야 그녀를 향했던 시선이 풀어졌다.
사냥개들의 코를 유혹하기 위해서 좀 더 확실한 방법을 써야겠다. 배낭 끈에서 스위스칼을 뽑았다. 손바닥을 지긋이 긋자 갈라진 피부 사이로 피가 맺히며 한 방울이 똑 떨어졌다. 정상까지는 대략 10km가 남았다. 중간에 잡히지 않는다면 세 시간 정도가 걸릴 것이다. 그녀는 두 시간이면 산을 빠져나갈테니 그때까지는 버텨야 한다. 피가 맺힌 손바닥을 지압하며 백 미터 간격으로 두세 방울씩 떨어트렸다. 가파른 오르막에 접어들자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이 핏방울과 엇박자로 땅에 떨어졌다. 한 시간여를 걸어 큰 바위 언덕에 이르렀다. 낭떠러지 아래 구름 사이로 마을이며 저 멀리 지평선이 길게 펼쳐졌다. 숨이 턱에 차올라 바위돌에 주저 앉았다. 날숨으로 폐를 비우고 공기를 들이마시려는 찰나 개 짖는 소리가 들숨을 대신했다. 그들은 예상보다 가까이 와 있었다. 일어나 시계를 보았다. 지금 잡히면 모든 게 허사다. 오솔길에서 방향을 틀어 암벽 앞에 섰다. 로프 없이 오를 수 있는 경사 같았다. 양손 바닥에 흙을 묻히고 오른발을 바위틈에 걸쳤다. 예닐곱 발은 순조롭게 올랐다. 하지만 그 다음에는 발을 지탱할 틈이 마땅히 없었다. 발을 디딜만한 곳까지 도달하려면 손가락을 바위틈에 걸고 손의 힘만으로 5m정도를 오른쪽으로 이동해야 했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잡히든가 오르든가. 호흡을 한번 고르고 점프하며 크랙을 잡았다. 크랙에 두 손을 걸고 대롱대롱 매달렸다. 마음속으로 하나 둘을 외치며 오른팔과 왼팔을 차례차례 움직였다. 목표한 지점에 도달했을 때는 손가락이 저려 얼얼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발 디딜 곳까지 거리가 밑에서 보던 것보다 두 배는 멀었다. 거기를 통과하려면 바위틈에 자란 소나무 가지를 이용해 곡예쇼처럼 공중으로 몸을 튕긴 다음 직진하는 몸을 비틀어 바위에 달라붙어야 했다. 머뭇거리면 다음은 없었다. 한번의 성공을 위해 내 인생에 가장 찬란한 순간이 필요했다. 눈을 감았다. 1769년이라고 적힌 슬레이트가 크랭크인을 알리자 지난 시절이 전광석화처럼 지나갔다. 그 중에 선택된 한 장면이 밤안개를 헤치고 돌진하는 자동차처럼 머릿속에 펼쳐졌다. 하늘과 바다가 구별되지 않는 짙은 밤이었다. 구름에 가려 별은 보이지 않았고 토막 난 달은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 누군가 내 손을 잡고 바닷속으로 들어가려 했다. 나는 무섭고 서러워 한 동안 울었다. 형체를 드러 내지 않은 거대한 괴물이 요상한 소리를 내며 아가미로 숨을 쉬고 있는 느낌이었다. 내 손을 잡았던 이는 나를 안고 엉덩이를 토닥이다가 울음을 멈춘 나를 모래사장 위에 내려 놓았다. 신기하게도 눈물을 쏟아내자 마음이 평온해졌다. 파도소리가 엄마의 숨결처럼 정겨웠다. 나는 어느새 발가벗은 몸으로 바닥이 보이지 않는 바닷속을 유영하고 있었다. 가끔 고래처럼 얼굴을 내밀고 서늘한 밤공기를 폐에 가득 담아내기도 했다.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물장구를 칠 때마다 바다는 까르르 웃고 하늘은 겨드랑이를 박박 긁었다. 느꼈다. 천 개의 눈이 지켜보는 평온한 밤이었다.
눈을 떴을 때 나는 공중에 있었다. 정지화면을 이어 붙인 것처럼 착지하기까지의 모든 움직임을 나는 기억한다. 정확히 목표했던 지점에 발을 딛고 암벽에 붙은 모습이 마지막 사진에 찍혔다.
암벽을 거의 올랐을 때 경찰과 사냥개가 암벽 옆 오솔길에 모습을 드러냈다. 사냥개들은 암벽에 묻은 피 냄새와 배낭을 싼 수의에서 발산되는 체취에 광분했다. 그들이 오솔길을 택했으니 20분을 벌었다. 암벽을 지나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가팔라진 경사가 한 눈에 느껴졌다. 길 옆 이정표를 보았다. 정상 3.5km. 산행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상현님이 경주에서 정체성에 대해 말씀하셔서 그런지 턱..하고 걸려듭니다.
내 자신에 대해서도 그렇고, 타인에 대해서도 그렇고
겹겹이 둘러싼 무언가가 떨어져 나간 알맹이가 보인다는 거, 그리고 그것을 사랑한다는 건
또 다른 생으로 이어짐을 뜻하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여러 모습의 삶을 살아야 하는 분례지만, 결국 분례 안의 씨앗은 고유한 정체성을 지니고 있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자처럼요..^^
짧지만 대화를 나눌 수 있어 좋았습니다.
그리고 대화에서 느낀 상현님이 글에서도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상현님의 정체성은 이렇게 오롯이 글로 표현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계속 애독자가 될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덧: 경찰을 유인하는 남자주인공의 모습이 처절합니다. 어딘가 분례의 삶과 겹쳐지는 모습입니다.
단순히 재미있음을 한걸음 더 나아가는 무언가가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