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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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희야, 지금은 대구에 있는 이모 집에서 이 글을 쓰고 있어. 어제 친한 고등학교 동창 중에 가장 먼저 결혼 한 유진이의 딸 지원이의 첫 생일 잔치가 있는 날이었거든. 너도 친구들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일이 생기면 알게 되겠지만, 돌잔치를 위해서 지방까지 내려갈 일은 그리 많지는 않은 것 같아. 보통은 돈만 보내주고 말아 버리는 경우가 많지. 그런데 절친의 결혼식에 함께하지 못해 2년이란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미안한 마음이 남아있던 나는 이번에는 꼭 가리라 마음 먹고 있었거든. 덕분에 대구에 놀러 오는 거지. 보고 싶은 다른 친구들도 볼 겸해서 말이야.
월요일인 오늘은 오후에 잘 다니던 회사를 때려 치우고, 본인이 하고 싶어하는 요리를 배우기 위해 학교 다닐 때 단골집 이태리 음식점에서 매니저로 일을 하고 있는 혜욱이가 일하는 가게에 가기로 했어. 마침 혜욱이네 가게에 꿈벗 멤버인 동훈오빠의 화가 친구가 전시를 하게 되어서 부산에서 오는 은주언니와 함께 가기로 했지. 아침에 언니에게 연락을 해 일정을 맞추는데, 혼자 올라오는 게 아니더라고. 어떤 분들과 만나게 될까 약간의 기대를 가지며 경북대로 출발. 언니의 친구 두 분과 인사를 나누고, 우리는 식당으로 향했어. 멀리 빨간색 배경에 하얀색 글씨로 쓰여진 "림터"가 보이는데, 이태리 레스토랑으로 떠올렸던 더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는 아니었고, 대학교 앞이라 그런지 매우 투박하게 생겼더라. 6명이서 4개의 메뉴를 시켜서 먹었는데, 밀가루 음식을 그다지 즐기지 않는 나는 크림소스와 토마토 소스를 섞은 로지소스로 만든 스파게티가 가장 맛있었어. 물론 토마토가 살아있는 피자도. 혜욱이가 왜 그렇게 극찬을 하며 굳이 거기에서 매니저로 일 하려고 했는지 알겠더라고! 식탁 위로 배고픈 메뚜기떼가 훅 지나가 금새 빈 접시만 남고, 대학가답게 럭셔리한 후식인 마지막 더치커피까지 즐긴 후, 은주언니는 동대구역에서 가져 온 대구 관광지도를 펼쳤어. 아, 참 오늘 새롭게 만난 은주언니의 친구들 세 명의 얘기를 빠뜨릴 수가 없다. 친구 한 명이 아웃도어 매장을 시작했어. 직원이 필요했지. 그래서 친한 친구들 두 명을 끌어들이고, 그들과 함께 일을 하고 있다는 거야. 그리고 오늘은 한 달에 한 번 쉬는 그들의 휴일이라는 것. 그래서 월요일에 친구들 모두가 대구로 함께 올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너무 재미있는 친구들이라 생각했다. 재미있지? 친구들이랑 이렇게 함께 일 하고, 함께 놀러 다니는 삶이라니, 왠지 신난다아!
다시 대구 관광 얘기로 돌아와서... '대구 관광이라니? 나는 대구에서 19년이나 살았는데?' 라고 생각했지만, 늘 학교와 집 그리고 가끔 친구들과 놀기 위해 갔던 동성로, 혹은 경북대 근처 빼고는 가본 데가 없더라. 어릴 적, 학창시절 소풍으로 갔던 달성공원과 우방타워 정도? 지금은 전혀 기억에 남아 있지 않은 곳들이지. 오히려 대구에서 대학생활을 하며 다양한 활동을 한 혜욱이가 대구 곳곳에 좋은 곳을 많이 알고 있는 덕분에 은주언니와 머리를 맞대고, 지도를 보며 가보면 좋을 곳들을 추천해 줬어. 그래서 결정된 우리의 첫 번째 목적지는 문화 예술의 거리라 불리는 방천시장.
도착한 방천시장. 입구에는 '방천 문화의 거리'라는 플랜카드가 걸려 있었고, 컴퓨터 본체로 엮고, 알록달록하게 칠을 한 입구의 네모난 문이 무척 인상적이었어. 그 문을 지나 자그마한 골목길 초입에는 가수 고 김광석이 기타를 치며 앉아 있는 동상이 있었어. 알고 보니 그 길이 '김광석 길'이더라고! '대구에 이런 곳이???' 놀라웠다. 골목길을 따라 벽면에는 김광석을 추억할 수 있는 노래 가사들과 그것들을 떠올릴 수 있는 그림들이 그려져 있고, 전시되어 있었어. 첫 번째 골목길에서 만난 유칼립투스 갤러리. 사람들이 드나들어도 별 상관 하지 않고, 작은 우쿠렐레 모양의 간판을 손수 제작하고 있던 주인장. 지구별여행사진작가라는 이름을 가진 김원섭 사진가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어, 사진을 구경하고 갤러리 곳곳에 카메라를 들이댔더니, 어디서 왔냐고 주인장이 물어보더라. 부산과 서울에서 왔다고 하니까, 토요일에 오면 볼거리도, 들을거리도 훨씬 많다고 아쉬운 표정을 지으시더라고. 그러면서 2층 작업실을 구경시켜주시겠다고 하셨어. 가파르고 아주 좁은 철계단을 오르니, 자그마한 바와 턴테이블, 악보와 가사집들이 테이블 위에 널려있고, 쌓여있는 온갖 악보들이 있더라. 알고 보니 주인장은 기타를 치는 분이고, 2층은 작곡을 하는 작업실이었어. 그런데 음악 작업을 하다가, 비가 오고 센티멘탈해지는 그런 날에는 술이 땡겨서, 술집도 함께 차렸다 했지. 비가 오는 날에는 이 Bar를 찾는 손님들이 꽤 많데. 나도 언젠가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이면 그 곳에 가서 술 한잔 하고 싶더라. 김광석의 "서른즈음에"를 LP판으로 크게 틀어놓은 채 말이야. 처음 본 재미있는 주인장과의 짧은 만남을 뒤로 하고, 우리는 다시 방천시장의 김광석 길을 걸었어. 걷고 또 걷다가 길 끝에 이르러 또 다시 골목길로 들어가고. 골목 구석구석을 다니며 33도의 뜨거운 햇빛 아래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에 땀을 식힐 수 있었지. 그러다가 우리는 팥빙수집을 찾기 시작했어. 아까 유칼립투스에서 나오는데, 팥빙수를 배달하던 어떤 분을 봤거든. 그 집을 찾아 2500원짜리 팥빙수 세 개를 주문했더니, 보라, 연두, 파랑 각기 다른 색깔의 그릇에 팥빙수를 담아 주신 주인 할머니의 센스가 돋보이는 팥빙수가 우리 앞에 도착! 옛날 초등학교 앞에서 사먹던 팥빙수의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붉은색 색소로 물든 얼음과 팥으로 꽉찬 팥빙수! 더워서 허겁지겁 한 입 크게 입안에 밀어넣었다가, 순간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저릿함이 지나갔다. 그 때 내 앞에 있던 바다 작가님이 한마디 하셨지.
"그 분이 오셨군요." ㅋㅋㅋ..
우리의 두 번째 방문지는 혜욱이가 강력 추천했던 '녹향'이었어. 녹향. 이름부터 무언가 남다르지 않니? 나도 처음에는 뭔가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도착할 때까지도 어떤 데인지 전혀 몰랐어. 방천시장에서 골목 골목을 누비며 도착한 녹향이 있는 골목의 입구에는 '녹향 음악감상실'이라는 푯말이 서 있었어. 그 푯말이 향하는 곳으로 50미터 가량 걸어가니 아주 허름한 건물 한켠에 나보다 훨씬 더 오래된 듯 보이는 간판에 초록색으로 녹향이라 쓰여진 간판이 있었지. 계단을 따라 올라가자마자 왼쪽에 보이는 시골 다방스러운 나무로 된 문. '입장료 5000원'이라고 쓰여진 책상을 지나서 캄캄한 곳으로 들어서니, 이게 웬일이야. 정사각형의 공간 앞쪽에 옛날 70-80년대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나팔모양의 아주 오래된 스피커가 양쪽에 있고, 오른쪽 벽에는 피아노가 놓여 있었지. 그리고 무대의 왼편에는 티비 한 대가 놓여 있어, 클래식 공연 실황이 중계되고 있었어. 그리고 양쪽으로 무대를 향해 놓여 있는 푹신해 보이는, 20-30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빈티지 소파들. 그 곳에서 주인장이 틀어주는 연주곡들과 오페라를 들으며, 5명은 각자가 편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음악을 온 몸으로 감상하기 시작했지. 듣고 싶은 곡이 있으면 얘기하라는 주인장의 말씀에 '아는 클래식이 없어서' 안타까움을 느끼며 말이야. 얼마 전부터 클래식을 좋아하기 시작하긴 했으나, 여전히 그저 듣고 좋아하기만 할 뿐, 곡의 이름, 작곡가 등 세세한 정보들은 아는 게 없어서 말이야. 이제 클래식을 조금 더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더라고. 준희야, 좀 부끄럽지만 나는 늘 이런 식이야. 뭔가 막연하게 좋아해. 하지만 어느 것 하나 푹 빠져서 깊게 파고드는 게 없거든. 그래서 습자지 같이 아주 얇은 지식들로 점철된 나의 인생이라고나 할까? 이런 나의 성향이 어디 가서 잘 아는 척을 할 수는 없지만, 어디 가서든 누구에게든 늘 배움에 열려 있고, 즐거운 마음으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장점일지도 모르겠다.
저녁에 오래간만에 대구 친구들을 만나기로 해서, 7시쯤 아쉬운 마음으로 '녹음처럼 음악의 향기가 우거진' 녹향에서 나왔어. 준희야, 나는 '대구'라는 공간을 난생 처음으로 '사랑스럽다'고 생각했어. 대구를 떠난 스무 살 이후로 대구 올 때마다 이틀 정도 지나면 늘 '아, 빨리 서울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이번에는 '떠나기 아쉽다.'는 마음이 드는거야. 내 인생의 절반 이상의 시간을 보냈고, 꽤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내 고향 대구에 모르고 있던 공간들을 찾게 되니까, 새로운 발견을 하게 되는 이런 여행 참 흥미롭게 다가온다. 그래서 이번 여행을 계기로 -사실 지난 주부터 생각하긴 했지만- 결심했어! 주말에는 알바하니까, 주중 5일 중에 하루는 여행을 다니기로!! 국내에 곳곳에 있는 보물 같은 곳들을 찾아 다니고 싶어졌다. 정보를 어디서 얻을 수 있을 지는 모르겠지만, 뜻이 있으면 또 길이 생기겠지? 앞으로 펼쳐진 나의 여행 프로젝트도 기대해 주렴~!!! 와우, 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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