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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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른쪽 뇌 속에는 쌀집에서 쓸 법한 간단한 계산기가 하나 들어있다. 계산기는 내가 깨어있는 동안 자동으로 움직인다. 품을 들이면 계산기에 음수가, 그 대가를 받으면 양수가 각각 더해진다. 계산한 값이 0보다 크면 평화가 지켜진다. 그러나 아무리 이리저리 더해도 손해가 확실해지면 계산기는 공연히 버튼들을 촤륵촤륵 소리가 나도록 건드리며 나를 성가시게 닦달한다. 계산기는 내가 손해 보는 일을 절대 눈감아주지 않는다.
모질게 사는 사회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터득하면서 나는 계산기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실제로 계산기는 나를 원하는 곳에 있게 도와주었다. 학교에서 나는 괜찮은 등수를 유지했고, 좋은 대학에 갔고, 비교적 안정적인 직장에 근무하고 있다. 그것은 내 실속을 차려야 한다는 계산기의 독촉에 내가 대부분 수긍했기 때문이었다. 계산기의 순기능 다른 한가지는 행동의 좋은 동기가 된다는 점이다. 나는 겁이 많다. 그러나 내가 어떤 행동을 했을 때 얻게 될 심적/물적 보상과 들일 노력과 두려움을 대차대조표 그리듯 분명하게 보여주면 나를 설득시키기가 훨씬 쉽다.
게다가 이 계산기는 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성적인 인간이라면 득실을 따져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나는 잇속에 밝은 사람은 못되니 나보다 더 빠릿한 계산기의 화신들이 세상에는 많이 있을 것이다. 어쨌든 어떤 인간이든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이 계산기가 반드시 필요하며, 득이 되는 것을 선택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정말 가끔 계산기의 말 따위는 들리지 않게 될 때가 있다. 마음의 소리가 아주 강하게 자신보다 남을 위하도록 소리칠 때 그렇다. 나는 예전에 장애가 있는 어린이와 여름캠프를 동행했을 때 그런 기분을 처음 느꼈었다. 최근에는 엄마와 함께 간 단체여행의 중반에 나의 기대와 안위의 충족보다 이 사람들과의 즐거운 여행에 초점을 맞췄을 때 그렇게 했다. 모든 사람들에게 순간적일지라도 비슷한 경험이 하나, 둘씩은 있을 것이다.
계산기가 꼼짝없이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마음의 소리가 외치는 곳, 그 자리를 깊이 파보면 공통적으로 도달하는 존재가 바로 어머니의 존재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다음 이야기를 읽어보자.
하루는 자기 집 동쪽 시냇가에서 놀다가 수달 한 마리를 잡았다. 살을 발라내고 뼈는 동산에다 버렸다. 아침에 보니 그 뼈가 없어졌다. 핏자국을 따라 찾아보자 뼈는 제 굴로 돌아와 새끼 다섯 마리를 안고 쭈그리고 있었다. 멍하니 바라보고 오랫동안 놀라워하다가 깊이 탄식하며 머뭇거렸다. 문득
속세를 버려 출가하기로 하고, 이름을 바꾸어 혜통이라 했다. –P.607,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삼국유사, 일연
어미수달뿐 아니라 현대의 어머니도 자신보다 자식을 먼저 위하는 마음은 뒤지지 않는다. 새벽 미사와 시원한 산행을 포기하면서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출근길을 데려다 주는 것, 관절이 약해지고 다리를 절뚝거려도 손녀를 돌보러 딸의 집으로 가는 것은 그의 어머니니까 가능한 일이다. 그런 정성스러움은 다른 관계에서는 극히 드물다. 어머니는 자식의 입장을 생각한다. 그 입장의 고단함과 불쌍함을 볼 수 있다. 모성의 눈에서부터 모든 관용과 자비는 우러나온다. 그리고 이 부드러운 모성이 우리를 구한다.
여기까지 써놓고 오래 망설이다가 아래 두 문단을 추가한다. 내가 쓴 글을 내가 지킬 자신이 도저히 안 생기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머니의 마음으로 살자는 숭고한 이야기를 해도 나는 분명 자꾸 내 인생에 얼굴 내미는 당황스럽고 뻔뻔하며 몰상식하며 완고한 타인을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사르트르는 오죽하면 타인은 지옥이라는 말까지 했다. 게다가 이제는 속에서 끓어 넘치는 말 한 마디를 참고 지나가기가 힘들다. 친구를 만나 흉도 보고, 모자란 소리 하는 얼굴에 예의 바르게 반격을 날리고, 상한 기분을 그대로 타며 컴플레인도 해야 조금 성이 풀린다.
그러나 통쾌한 응징도 잠깐, 뒤돌아서면 미안한 마음이 든다. 특히 매일 보는 사이에 불편한 사람이 있으면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얼굴을 보면 기실 바뀌는 건 없다. 머릿속을 채우는 분노에 집중하기 보다는 오히려 돌아서서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생각해보면 꾹꾹 눌러 참아둔 마음을 살살 어루만져 녹여내는 것은 약간의 체념 섞인 푸념이다. ‘으이그, 그렇게 살다 죽으라지. 불쌍한 놈. 근데 죽을 때까지 저렇게 살아야 한다니 진짜 불행한 인생이다. 킥킥 아이고 꼬시다.’ 나에게 누구를 끌어안고 관용과 자비를 보이고 하는 것은 아직도 너무 꿈같은 이야기다. 그릇이 간장 종지보다도 조그맣다. 그래도 간장 종지조차 늘리다 보면 밥그릇만치는 커질 수 있지 않을까. 좀 길고 넉넉하게 시간을 잡고 이것 저것 한껏 담아보려 한다. 다행히 나에게는 엄마의 마음이라는 실마리가 있다. 그리로 방향을 잡고 가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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