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로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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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연구
찰스 핸디(Charles
Handy: 1932.07.25 ~ ) 아일랜드에서 대대로 목사인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기숙학교에서 교육받고 영국의
옥스포드 대학교에서 고전문학, 철학을 공부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국제적 석유 회사인 “셸”에서
마케팅을 했는데, 이 때 말레이시아와 싱가폴 등지에서 근무하며 국제 비즈니스 감각을 익혔다. 하지만 그런 장점 외에도 셸은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으니 그처럼 창조적인 사고를 하는 “디오니소스”형 인간에게 “아폴로”형인 거대 기업 셸은 전혀 맞지 않는 일터의 형태였다.
셸을 떠난 후에는 런던비즈니스 스쿨의 창립 멤버로 교육 프로그램, 커리큘럼 등을
만드는 일을 했다. 이런 일을 배우기 위해 미국의 MIT, 슬론
경영대학교에서 1년 유학을 했는데 이때의 경험이 유럽과 미국의 자본주의의 차이를 깨닫고 자본주의의 성공, 미래 등에 대해서 깊이 있는 사고를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10년간 런던비즈니스 스쿨에서 일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본인이
가르치는데 재능이 있으며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후 윈저성의 세인트 조지 하우스 학장, 왕립 예술학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
그러다 마흔아홉번째 생일이던 1981년 7월 25일부터 자발적 실업 상태, 즉 본인 스스로 이름붙인 “포트폴리오 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저술 활동과 강연, 방송(BBC, ‘투데이’의 오늘의 사색 코너 진행) 등을 하며, 일과 취미, 배움, 가정, 자원 봉사 등이 잘 조화된 균형 있는 삶을 살고 있다. 마음을 무찌르는 글귀 들어가는 글_인생의 중간에서 새로 시작하기
– 되돌아본 미래 11 1981년 7월 25일, 마흔아홉
번째 생일날 아침에 나는 일찍 깨어났다. 평상시 같았더라면 특별하달 것도 없는 날이었겠지만 그날은 좀
달랐다. 그날은 바로 자발적으로 실업 상태가 된 내가 제 2의
인생을 시작하는 첫날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그것을 실업 상태라고 부르지 않는다. 내가 그로부터 2년 전에 만들어낸 말에 따르면 나는 비로소 ‘포트폴리오 인생’이 된 것이다. 같은 자발적 실업을 하더라도 이렇게 창조적으로 사는 사람도 있다.
반성하자. 14 나는 모든 진리가 3단계를 거친다는 철학자 아르투르 쇼펜하우어의 말로 나 자신을 위로했다. 그에
따르면 진리는 첫째 조롱을 받고, 둘째 반대를 받다가, 셋째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16 이것은 정말 새로운 세계이다. 나는 자유를 얻기 위해 안정을 내팽개치고 바로 그 새롭고 무모한 모험의 세계를 선택한 것이다. 22 “경제가 활성화된
나라에서 일하는 것은 아주 신나는 일이야.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말이야.
경제가 낙후된 나라에서 사는 게 더 좋을지도 몰라. 그런 나라에서는 말이야, 손쉽게 택시를 잡을 수 있고, 어렵지 않게 식당의 좌석을 잡을 수
있고, 좋은 연극을 볼 수 있고 또 대화는 늘 철학적이지. 한마디로
여유 있게 숨쉬며 살 수가 있는 거라고.” 얼마 전부터 많이 하는 생각이다. 특히 지금처럼 돈벌이
보다는 쉼에 집중하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고 나면 그런 생각을 많이 한다. 하지만 현실을 보자. 그들은 지금 휴가 중이다. 경제가 활성화된 나라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난 후에 이와 같은 쉼과 여유를 얻고 즐길 수 있었다. 23 하지만 1981년에 이르자 사정이 달라졌다. 은퇴에서 사망까지 18개월이 아니라 18년의 세월이 떡 버티고 서 있는 것이었다. 텔레비전 시청, 이런저런 여행, 골프
치기 등 아무리 많은 여가 활동을 동원한다고 하더라도 18년은 간단히 채울 수 있는 세월이 아니다. 게다가 국가 연금이라는 것은 그런 사치를 허용해줄 것 같지도 않다. 사람들은
그런 시간 간격을 장밋빛으로 포장하기 위해 ‘제3시대 (Third Age)’라는 말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이름만 그럴듯하게
갖다 붙이면 뭘 하는가. 오늘날 우리는 이 20년이라는 긴
세월을 어떻게 처분해야 할지, 또 그 기간 동안의 생활비는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정말 난감한 것이다. 24 석유기지 운영 매뉴얼, 기지 건설 규정, 판촉물, 보고서
양식 등은 이 수로의 땅, 현지 석유기지의 자세한 위치, 그
운영 상황 등을 전혀 모르는 런던 본사의 책상물림 간부가 고안했다. 나는 실상에 맞지 않는 것은 과감히
무시하고 내 나름대로의 기지 운영 디자인을 만들었고 단지 본사에서 감사반이 내려오지 않기만을 빌었다. 그런
경험으로 인해 나는 개인의 창의력이 정말 중요하다는 사실에 눈뜨게 되었고 또 런던 본사에 앉아서 세계 경영을 하겠다고 큰소리치는 것이 얼마나 쓸데
없는 짓인가를 깨닫게 되었다. 큰 회사에서 일하게 되면 이런 생각을 하고 깨달음을 얻게 된다.
유럽 회사도 다를 바 없다. 물론 나는 한국에 있는 유럽 회사였던지라 저자보다 더 크게, 빨리 깨달았을 거다. 몇 번 겪고 나면 그냥 상사가 시키는 대로, 상사의 취향대로 하게 되더라. 24 클로버는 세 잎이면서도
여전히 한 잎이다. 바로 그것 때문에 성 패트릭은 기독교의 삼위일체를 설명할 때 클로버를 구체적인 예로
들었다 26 토지나 물건보다는 지식과
노하우에서 가치가 생성되는 이 시대에 자본주의의 미래는 무엇이며 그것(자본주의)은 어떻게 바뀔 것인가? ~ 인터넷에 의해 영토의 개념이 애매모호해지는 버추얼(virtual) 세계에서 우리
사회는 어떻게 적응할 것인가? 조세는 어떻게 징수할 것인가? 국가는
과연 존속할 것이며, 사회는 회사와 마찬가지로 극대화와 극소화를 동시에 경험할 것인가? 27 이미 흘러가버린 과거의
세상, 혹은 자기가 원하는 어떤 세상을 목표로 하여 자신의 인생을 준비한다는 것은 정말 어리석은 짓이다. 현실을 그렇지 않은데도 개인에게 과거처럼 살아갈 것을 가르치는 것은 부도덕한 짓이다. 그게 드라마 학교이든 또는 요리 학교이든 불문하고 말이다. 내가 받은 학교 교육도 과거의 유산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었고 그래서 벼룩의 삶 (내가
맞은 제 2의 인생)에는 하등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었다. 28 코끼리에서 벼룩으로의
전환은 앞으로 많은 사람들이 겪게 될 변화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올지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벼룩의 삶을 선택하면서 고용의 의심스러운 안전보다는 무소속의 자유를 더욱 높이 평가할 것이다. 16년 전에 예측했던 건데 그의 예측은 잘 들어맞고 있다. 나도 그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아직 우리나라의 경우, 무소속의 자유보다는
의심스러울지라도 고용의 안정을 더 중요하고 좋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곧 달라질거라고 본다. 29 아무튼 학습은 학창 시절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런 사실에 고마움을 느껴야 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나중에 배운 학습이 훨씬 더 재미있으니까. 나는 교과서보다는
화랑, 극장, 영화관, 연주회장
등에서 더 많은 것을 배웠다. 여행도 크게 도움이 되었다. 다른
문화권에서 한동안 살아본 경험은 자신의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는 렌즈를 마련해 주었고, 너무 익숙하여
아무런 의문도 들지 않았던 사물을 새롭게 돌아보게 했다 31 자유롭게 자기 시간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 포트폴리오 생활의 큰 축복이다. 개인의 성향에 따라 축복이자 저주가 될 수도 있다. 언제나
축복은 양면성을 갖는 것 같다. 32 “포트폴리오 인생으로
간다면 자네 자신의 직함은 어떻게 되는 건가?” 내 친구가 물었다. “전(前) 학장이라고 둘러대는 것도 잠시밖에 안 될 텐데.” “그냥 찰스 핸디가 되는
거지.” 내가 말했다. “얼마나 멋져요.” 아내가 그렇게 말했지만 별로 위안이 되지 못했고 설득력도 없었다. 정말 대회나
행사장 같은 데 참석해서 내 이름 밑에 아무런 기관명도 붙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지나야 했다. 나는 발가벗은 느낌이었다. 언젠가 대기업의 과장으로 퇴직해서 강사로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인 명성으로 보나)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는 사람으로부터 비슷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과장으로 퇴직했기 때문에 10년이 훨씬 넘게 지난 그때까지
아직도 “과장님”으로 불리고 있다고 했다. 친구들은 부장, 이사 등이라며 차장이라도 달고 퇴직할 걸 그랬다고
자조적으로 웃었다. 아직까지 우리나라는 직함을 중시해서 그런 것 같다.
33 벼룩들도 대리인이 필요하다. 물론 그 대리인의 이름은 고용기관, 임시직 관리회사, 직인(職人) 협동조합 등 다양하다. 이 점에 있어서 나는 운이 좋은 편이다. 여러 출판사들이 나를 일종의 브랜드로
정착시키려고 애쓰고 있으니까. 제 1부 포트폴리오 인생의 시작 1장 시작으로
되돌아가서 40 우리의 과거는 불가피하게
우리의 현재와 미래의 일부분이다. 생애의 후반기에 접어들어 벼룩의 생활을 영위하려면 먼저 나 자신에게
충실해져야 한다. 자기가 아닌 다른 어떤 것을 염원하거나 가장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50 하지만 나는 돈을 빌려와서
더 많은 돈을 벌어 되갚는 것보다는 먼저 돈을 축적하고 그 다음에 쓰는 것을 더 좋아한다. 이런 태도는
나의 아버지로부터 배운 것인데 아버지는 수입 이상의 지출을 간통보다 더 나쁜 죄악이라고 여겼다. 바로
이런 유산 때문에 나는 모험적인 사업가 혹은 떼부자는 되지 못한다. 50 여러 해가 지나나 뒤에
생각해 낸 것이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돈 또는 어떤 필요에 소용되지 않는 돈, 그러니까 그저 쌓아놓기만 한 돈은 낭비된 돈이라는 것이다. 나는 아직도 이 상태인 것 같다. 56 마술적인 소설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Gabriel Garcia Marquez)가 자신의 자서전에서 말했듯이 “인생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은 당신에게 실제로 벌어진 일이 아니라, 당신이
기억하고 있는 일과 당신이 그것을 기억하는 방식이다.” 60 나는 이 ‘조용한’ 사람에게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달려온 수백
명이 사람들이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고개를 돌리며 생각에 잠겼다. 과연 내 장례식에 눈물을 흘리면서 찾아줄 사람이 있을까? 성공이란 무엇이며 나와
내 아버지 중 누가 더 성공한 사람인가? 인생은 무엇을 위한 것이며 우리가 이 지상에 존재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61 “네 자신을 알라”는 델피의 아폴로 신전에 새겨진 고대 그리스의 명언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알려면 먼저 자기 자신이 아닌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62 “왜 부자가 되려고
하세요? 우리는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어요. 당신도 일하고
나도 일하니까요. 또 필요하다면 당신은 경영학 과정에 다시 나가서 임시 강사를 할 수도 있어요.” “그건 너무 리스크(위험)가 많아.” “어차피 인생은 리스크예요. 난 피곤에 찌든 직장인과 함께 사는 게 지겨워졌어요.” 그렇게 하여 나의 포트폴리오 인생, 벼룩 생활이 시작되었다. ~ 지출 칸은 연초에는 늘 더 커보였지만 연말에 가면 수입 난이 그 정도로 커져 있었다. 나는
걱정을 해야 하는 순간에도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남의 결재를 받기 위해 내 어깨 너머를 쳐다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 난생처음으로 내 인생을 내 마음대로 주무른다는 것, 내가
아닌 그 어떤 것으로 위장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그런 상태를 편안히 여긴다는
것 등등이 너무나 좋았다. 나도 그랬던 것 같다. 왜 돈을 버는지, 왜 부자가 되려고 하는지, 그러면 얼마나, 어떻게 일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서 묻고 답하다 지금과 같은 삶을 선택했다. 찰스 & 엘리자베스 핸디와 다른 점은 그냥 나는 내가 묻고 답함. 잘 한건지 답은 지금도 찾고 있는 중. 63 우리는 어딘가에 소속될
필요를 느낀다. 자유의 차변(借邊)에는 늘 혼자서 해내야
한다는 고독감이 기재되어 있다. ~
그러나 행복이라는 저울대에서 무게를 달아본다면 거기에는 일말의 의심도 있을 수가 없다. 자유는
그 어떤 것보다도 무겁고 그래서 늘 이기는 것이다.
2장 나는
무엇을 배웠나 71 나는 학교 생활을 하면서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것과 입을 다무는 것이 몸보신의 2대 요령이라는 것을 배웠다. 나도 그랬는데… 아일랜드나 영국도 그렇구나. 요즘도 그런걸까? 아니면 찰스 핸디가 학교 다니고 일했던 시절에만
그랬던걸까? 나는 사실 한국에서 겪었던 대로 남의 눈에 띄지 않고 입을 다무는 삶을 살려다가 외국(홍콩, 안티구아, 유럽
모두) 회사나 미국 학교에 다닐 때 처음에 ‘잘 적응을 못하는(거나 일을 잘 못하는) 사람’으로
“오해”받았었다. 이후에
상사나 팀메이트로부터 전해 듣고 바뀌었는데… 72 사람은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뭐든지 잘하게 되어 있다. 꼭 그런건 아니지만 재미없는 걸 잘하는 건 정말 어려운 것 같다.
73 지금와서 돌이켜보니 열두
살 혹은 열다섯 살에 학생의 미래를 결정해 버리는 것은 너무 이르다는 생각이 든다. 인생은 길다. 그러니 우리의 선택을 가능한 한 오래도록 미루는 것이 좋다. 매우 동의한다. 특히 미래를 직업적인 면에서만 선택할
경우 더욱 그렇다. 요즘은 미래, 즉 꿈을 직업이 아니라
어떤 삶을 살 것인지 “삶의 형태, 또는 가치관”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또한 특정 직업으로 40대 정도까지 살았더라도 그 후에 다시 자신의 삶을 찾으려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나도 그 중의 한명이다. 78 어느 학기에는 친한 친구들끼리
한 학기 동안 일기를 쓰기로 약속했다. 최근에 나는 우연한 계기로 그 일기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당시의
내 생활이 너무나 사소한 것들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는 것을 알고서 깜짝 놀랐다. 나도 그랬다. 중,고등학교
때야 그렇다고 쳐도 어느 정도 정신적으로 성숙하고 안정됐다고 생각했던 대학시절에도 그렇다. 그 때 썼던
일기를 몇 페이지 읽다가 덮어버렸다. 너무 어둡고 음울한, 지금의
나로서는 생각도 못할 내가 있었다. 불과… 그러고 보니 20년도 더 전이구나… 암튼 그런데 지금과 너무 다른 모습이라서 깜짝
놀랐다. 나는 내가 원래 밝고 긍정적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어쨌든 누가 볼까 무서워 꼭 태워 버려야지라고 결심했었다. 82 하지만 나는 무기력한
느낌이 들었다. 내 능력이라고는 고작해야 영어에서 그리스어로 혹은 그 반대 순서로 번역을 할 수 있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학과 내용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사실 나는 그 내용 따위는 오래 전에 이미 잊어버렸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생각하는 과정이었다. 내 스스로의 힘으로 사물을 분류하여 변화를 도모할 수 있는 능력이 중요한
것이었다. 86 프랑스는 동일 연령 집단의 75펴센트가 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추가 교육을 받도록 배려한다. 영국도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교육 시설을 제공해야 한다. 파트타임 연수, 개방대학 같은 장기 교육 시설, 야간 강좌 등을 널리 설치하여 사람들이
일하면서 배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현재의 일류 대학들은 점차적으로 대학원 대학이 되어야 하고, 각종 연구 기금의 지원을 받으면서 공부하고 또 대학원 학위를 따면 나중에 학비를 되갚을 수 잇는 학생들에 의해
채워져야 한다. 89 나는 가끔 농담 삼아
MIT의 슬론 경영대학원에서 내가 배운 것이 있다면 내가 그 학교에 갈 필요가 없었다는 것뿐이었다고
말한다. 그런 다음 “하지만 그것을 알아내가 위해 거기에
갈 필요가 있었다”고 재빨리 덧붙인다. ~ 하지만 경영대학원에서 가르치는 내용의 대부분은 이미 내가 알고 있는 것임을 발견하고서 깜짝 놀랐다. 나는 그 동안 경험으로 그런 것을 다 체득했던 것이다. 단지 그런
체험에 그럴듯한 용어를 붙이지 않은 것뿐이었다. 몰리에르(Moliere)의
연극에 나오는 므슈 주르댕처럼 내가 의식만 하지 못했을 뿐 실은 관리자의 문장(文章)을 구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 그렇다고 1년간의 유학 기간이 시간 낭비였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무엇보다 나는 자신감이 엄청나게 커지게 되었다. 바쁜 관리자들의
교육은 그들의 경험과 직접적으로 연결될 대 최대 효과를 거둔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