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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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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0월 16일 10시 15분 등록

전전하며 쓰다



한글날이라고 마음편지를 건너뛰는 게 아니었다. 그간 마음을 다해 써왔던 라오스 글을 마무리하며 감정적 소진이 컸던 모양인지 한계 투구 수를 넘긴 투수처럼 글 쓰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마침 한글날이었고 이곳 사이공에선 휴일은 아니었지만 예고 없이 빨간 날뒤에 숨어 마음편지를 한 주 쉬어갔다. 지나고 보니 글의 날에 글을 쓰지 않은 어리석은 짓이었다는 걸 알게 됐다. 한 주를 쉰 마음편지는 다시 전원을 켜고 스위치 하나하나 올려가며 재가동을 시작하는 발전소처럼 조금은 느리지만 힘차게 엔진의 크랭크 샤프트를 움직이려 한다. 글 없는 한 주를 살았더니 글이 그리워졌다. 다시 시작하는 글에는 쓰지 않은 글에 대한 미안함을 담아 글에 관해 써서 달래야겠다고 생각했다. 응원해 주시는 독자님의 추천으로 산도르 마라이라는 헝가리 작가를 알게 된 건 행운이다. 그가 이 힘겨운 발전發電에 관해 말할 때 나는 무릎을 쳤다.

 

아침이고 저녁이고 글을 쓰기 전의 망설임, 거듭되는 준비와 마음의 각오, 게으름, 담배, 독서, 그리고 혹시 마지막 순간에라도 방해하는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남모르는 은밀한 기대, 게다가 실제로 방해하는 일이 일어날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 아무리 훈련을 하고 경험을 쌓아도 나아지지 않는 가슴 두근거림. 그러다가 정말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순간이 온다. 그렇게 당신은 글을 쓰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서서히 중압감과 불안이 사그라든다.” –산도르 마라이, ‘하늘과 땅중에서-

 

나는 회사에서 쓴다. 사무실, 특유의 긴장감이 맴도는 그곳을 알레르기처럼 싫어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정신적 수축이 나에겐 글을 나아갈 수 있게 하는 힘이다. 사무실 안에서의 긴장과 이완을 반복하며 글은 완성된다. 글 쓰는 데 관련된 자료를 찾거나 사실관계를 확인할 때, 빠르고 편리한 사무실 인터넷 환경이 도움을 준다. 손에 익은 자판이 있어 좋다. 무엇보다 널브러진 일 더미 사이에서나는 딴짓하고 있다는 소심한 반자본 투쟁 같은 느낌을 가지며 더러는 비장하게 더러는 세상에 엿 먹이는 재미도 느껴가며 쓴다. 연구원 시절 악랄하기로 유명했던 스승의 과제도 대부분 회사에서 시작하고 끝을 냈다. 통근버스에서 글 읽는 시간은 하루 중 나의 유일한 해방구였고, 사무실 책상에서 머리를 쥐어 뜯어가며 썼던 칼럼은 저 친구 일을 아주 열심히 하는 모양이야로 비춰지는 의문의 1승이었다. 영화 복수는 나의 것의 한 장면으로 기억하는데, 고통으로 신음하는 옆집 여성의 비명에 성적 흥분을 상상하는 주인공처럼 같은 상황의 다른 해석이겠다.

 

가끔 전체주의적인 기업과 자본을 욕하는 내 글이 회사에서 제공된 시간과 공간에 힘입어 쓰였으므로 일상적 파시즘 체제 내에서 생산된 글이라는 자폐적 회로에 빠진 건 아닐까 하고 스스로 경계한 적이 있었다. 걱정은 길지 않았다. 그렇거나 말거나 주어진 일은 틀림없이 해 내고 있으니 딴짓에 대한 부채감은 없다(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일은 언제 하는가? 글을 쓰기 위해 일을 빨리 끝내는 방법을 끊임없이 고민했으므로 결국 회사의 혁신을 담당하는 부서의 수장으로까지 이르게 된 건 어디까지나 단지 글 쓰기 위해 벌어졌던 해프닝의 결과였다면 너무 가벼운가. 요약이 지나쳤나. 어쨌든 그랬다. 결과적으로 혐의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글 쓰고 싶은 월급쟁이가 택한 궁여지책이 눈물 겹다.

 

이 고생을 했으므로 글을 내려놓긴 어려울 것 같다. 글이 지나간 자리에 사유가 생겨나고 삶에 색깔이 입혀지고 비로소 언어에 의미가 얻어지는 것이니 어쩌면 글이 또는 단어가 나를 살았는지 모른다. 읽었기 때문에 썼지만 쓰는 동안 단어에 의해서 글은 나아가고 단어가 없으면 끊기고 말았으므로 그때는 내가 거길 가지 않은 것이 되거나 살지 않은 것이 된다. 짐작건대 스승이 매일 새벽에 썼던 이유도 글을 써서 비로소 하루를 살게 된 게 아닌가 하는 것이다. 스승은 말한다.

 

나는 새벽에 글을 쓴다. 아직 어두운 새벽에 글을 쓰기 시작하여 아침노을이 붉게 물들고 이내 태양이 솟아오를 때까지 나는 글을 쓴다. 새벽이 아침에게 시간을 넘겨줄 때 책과 글을 덮고 나의 삶을 맞이하기 위해 나는 책상에서 일어난다.” -구본형 칼럼, ‘나의 작가론 2’ 중에서-

 

그렇다고 매일 써야 하는가. 분명 사람은 정신적인 매장량이 한정돼 있을 텐데 끊임없이 씀으로써 고갈되는 정신적 미성숙을 나는 우려한다. 쓴다는 것은 정신적인 노동이자 육체적 노동이므로 쉴 새 없이 써 내리는 건 지적으로 소진되는 그러니까 자기 밑천을 드러내는 일일 수도 있는 문제다. 읽거나 혹은 살아서 얻어지는 자득의 깨달음 없이 마구 써대기만 하는 것은 마치 날아오는 질문에 같잖은 답을 미리 정해놓은 사람처럼 곧바로 주고받는 경박함과 같다. 나는 내가 싸질러 놓은 글에 대해 의견이 다를 때가 종종 있다. 그때 쓴 글은 지금의 내 사유와 다를 때도 있는데 그를 두고 나 스스로 생각을 무마하거나 변명하기엔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너무도 다르다는 것이다. 글이 많아지거나 말이 많아지면 이런 간극은 커지고 과거의 나와 싸우는 일이 잦아질 테다. 그런데도 글을 쓰지 않으면 지금 나로 영원히 남게 된다. 정신적 함량 미달이 계속되는 것이다. 결국, 미성숙을 깨기 위해 써야 하고 쓰게 되면 또 과거의 자신과 생각의 괴리는 깊어지게 된다. 트랩에 빠지고 만다. 애초에 읽지 말 것을 읽으니 쓸 수밖에 없고, 쓰지 말 것을 쓰자니 고통이로다. 그리하여 문제는 어떻게 써야 하는가로 옮아간다. 당나라 문장가 한유가 자고로 글은 이렇게 써야 한다고 이르지만, 말처럼 쉬운가. 재미있는 건 한유와 같이 쓰려면 또다시 죽도록 써서 연습해야 한다는 것, 돌고 돈다.

 

풍부하나 한 마디도 남기지 않고 豊而不餘一言(풍이불여일언)

간략하되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는다. 約而不失一辭(약이부실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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