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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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버스를 타고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었다. 난 버스 뒷자리에 앉아 비몽사몽(非夢似夢) 상태에 있었다. 다음 정거장에서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여학생 한 무리가 탔다. 이내 그 여학생들은 비어있는 뒷자리를 채웠고, 여학생들의 대화는 왁자지껄하게 이어졌다. 여학생들의 분주한 수다에 도저히 잠을 청할 수 없었다.
그런데 조용히 여학생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선생님의 뒷담화부터 남자친구문제까지 여러 화제의 이야기가 오갔다. 그런데 대화의 중심은 단연 연예인 이야기였다. 물론 내가 알 수 없는 연예인들의 이야기였지만. 과거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중고생들의 상상 속 주인공은 바로 ‘연예인’인 것 같다.
최근 한국고용정보원이 전국 중•고•대학생 300명을 대상으로 지난 8월 직업 인식 및 선호도를 조사한 결과를 발표했다. 대다수 중•고등학생들과 대학생들은 직업 선택의 기준으로 '돈'과 '보람'을 꼽았다. 그들이 꼽은 선호하는 직업순위는 1위 의사, 2위 교사, 3위 연예인이었다.
의사와 교사는 전통적으로 강세를 보여왔던 직업이었지만, 3위 연예인은 뜻밖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예인이라는 직업이 새롭게 떠오르는 유망직종인 것 같다. 실상 연예인 만큼 우리에게 친숙하게 다가오는 존재가 또 있을까? 만인의 친구이자 애인 그리고 신화 속 영웅의 역할을 그들은 대신하고 있다.
그런데 연예인들 자신들이 특히 선호하는 역할이 있다고 한다. 특히 쇼 프로그램의 MC를 한번 맡아보는 것이라 한다. 연예인들 사이에서 ‘꽃’은 바로 MC인 것이다.
그런데 국내 최고의 MC는 누구일까? 유재석? 신동엽? 박명수?
국내 기자들과 방송PD 그리고 작가들이 꼽은 최고의 MC는 바로 ‘강호동’이다.
그는 과거 씨름선수였다. 182cm, 125kg의 타고난 신체조건. 그는 천하장사 5회, 백두장사 7회라는 괄목할만한 성과를 이룬 씨름계의 풍운아(風雲兒)였다. 한국 씨름계의 간판스타 이만기를 넘어선 이도 ‘그’다.
그런데 1992년,
그는 성공의 정점에서 돌연 은퇴를 선언했다.
나이 22세. 그리고 선택했다.
‘연예인’. 주위의 적극적인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로부터 1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그는 방송가의 최고의 MC로 자리매김했다.
난 솔직히 ‘강호동’이라는 연예인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상대방을 압도하는 커다란 덩치, 느끼한 외모와 웃음, 한 옥타브 높은 목소리, 여자 연예인들과의 수많은 스캔들. 요즘 표현으로 강호동이라는 인물은 ‘비호감’(非好感), 그 자체였다.
그런데 최근 신문사와의 인터뷰 기사는 그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연예부 기자가 자신의 성공에 대한 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대본을 받아 들고, 하얀색 대본이 검은색 대본이 될 때까지 볼펜으로 줄 치면서 외웠습니다. 학교에 다닐 때도 안 해본 짓을 처음 한 것이지요. 눈앞에 깜깜한 벽이 서있는 것 같았습니다. 정말 고민 많이 했지요. 그런 고민이 결코 나쁘게만 작용한 것은 아닙니다. 저를 자만이나 방심에 빠지지 않게 만들었지요. 못 배워 좋은 점은 '똥고집'이 없는 거죠. 제 의견이 없어요. 배우지 못한 자로서의 혜택인 거 같아요. 백지(白紙)를 내보이죠. '알아서 잘 칠해 주십시오'라고, 완전히 저 자신을 맡겨버립니다. "
최정상에서 자신의 기득권을 버리고 새로운 곳으로 떠났던 ‘그’.
그런데 그는 새로운 배움과 성장 위해 철저하게 자신을 낮췄던 것이다.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내세우기보다, 자신을 비우고 새 부대에 새 술을 담았던 것이다.
나 또한 한 분야에 몸을 담은지 10년이 넘었다. 어떤 이가 내 분야에 대해 견해를 피력하면, 쉽게 그 의견을 재단(裁斷)해서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나도 읽을 만큼 읽었고, 해 볼만큼 해봤다는 식의 ‘태도’(Attitude)말이다. 이러한 태도는 실상 많은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는 진풍경이기도 하다.
어떤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설 수 있다는 것. 그것은 분명 대단한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 안에 존재하는 너무도 많은 ‘나’를 비워내는 것이 필요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문득 불가의 일화 하나가 생각났다. 노스님께서 깨달음의 지혜를 얻기 위해 찾아간 대학교수 앞에서 말없이 차를 넘치도록 따랐다는 이야기. 지혜과 지식를 채우기 전에, 당신을 가득 채우고 있는 모든 잡념(雜念) 덩어리들을 먼저 내려 놓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말이다. 매 순간 어린 아이와 같은 백지의 상태에서 하나하나 채워나갈 수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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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새로운 것을 받아드리는 자세로 성실함으로 일관하며 온전히 박박길 수 있는 것, 자신의 아집을 버리고 텅 빈채로 깨끗하게 담아 수용하고 채우며 자신의 것으로 체화시켜 나가는 것, 그리하여 수렴과 발산 등의 과정을 거치며 마침내 자신만의 차별성의 길로 나아가는 것. 이것이 연구원들이 나아가야할 자세가 아닐까 합니다.
박박기기 어렵지요? 절대 쉬운 일이 아니지요? 비우기 쉽지 않지요? 그래도 처음의 약속을 상기하며 끝까지 가다보면 이 과정을 통해 그리고 어느덧 시나브로 변화되는 스스로의 힘으로 원하는 소기의 목적에 도달할 수 있을 겁니다. 약속을 상기하며 줄창 나아가는 힘만 있다면 그리 어려울 것도 없을 겁니다. 그대라면, 그대들 무시무시한 귀신도 안 잡아 간다는 4기라면 아무 염려 없지요. 안 그런가? 아우님. 앗싸라비야!
박박기기 어렵지요? 절대 쉬운 일이 아니지요? 비우기 쉽지 않지요? 그래도 처음의 약속을 상기하며 끝까지 가다보면 이 과정을 통해 그리고 어느덧 시나브로 변화되는 스스로의 힘으로 원하는 소기의 목적에 도달할 수 있을 겁니다. 약속을 상기하며 줄창 나아가는 힘만 있다면 그리 어려울 것도 없을 겁니다. 그대라면, 그대들 무시무시한 귀신도 안 잡아 간다는 4기라면 아무 염려 없지요. 안 그런가? 아우님. 앗싸라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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