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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층 구내식당에는 천사가 있다. 하늘에서 쫓겨나 숨어있는 천사인 것 같지는 않다. 배가 고파서 식당에 숨어있는 것도 아니다. 천사이기는 한데 천사의 모습은 아니다. 우선 날개가 없다. 흔히 천사하면 떠올리는 날개는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 혹시 어디 숨겨놓지 않았을까하고 슬쩍슬쩍 살펴보기도 했지만 날개는 찾지 못했다. 날개를 찾기는커녕 이상한 인간으로 소문날 뻔 했다. 옷도 예쁘고 고운 천의 고급스런 옷이 아니다. 그냥 하얀색 가운이다. 섬섬옥수의 손을 지닌 것도 아니다. 얼굴도 영화에 나오는 천사처럼 예쁘지 않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얼굴이다.
그게 무슨 천사냐고? 천사 맞다. 천사라고 다 예쁘고 날개가 달려야 하는 건 아니지 않는가. 당신에 열애에 빠져 눈에 콩깍지가 씌워졌던 연애시절, 그 여자는 천사처럼 보이지 않던가. 지금 그 여자와 함께 살고 있다면 한번 돌아보라. 지금도 그 여자가 천사처럼 보이는지.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된 일인가. 그 때 그 시절 당신은 천사의 탈을 쓴 악마에게 속았던 것인가? 더 말하지 말자.
세상 많은 일이 그렇다. 생각하기 나름이다. 그녀는 천사일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나는 천사라고 부른다. 물론 속으로 혼자서 하는 생각이다. 아마 천사가 아닐까하고… 그녀는 천사의 날개와 옷 대신에 하얀 가운을 입고 손에는 고무장갑 그리고 장화를 신고 있다. 천사의 복장치고는 참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지만 당신은 이제 살짝 그녀가 무슨 일을 하는지 눈치 챘을 것이다.
그녀는 구내식당에서 설거지를 한다. 구내식당에서는 점심과 저녁을 제공하는데 그녀는 점심시간에만 설거지를 하는 파트타임 노동자다. 그녀를 천사라고 하는 이유는 단 한가지다. 미소 때문이다. 그녀는 천사의 미소를 가지고 있다. 천사의 날개와 천사의 옷은 없지만 그녀는 그보다 빛날 것 같은 미소를 가지고 있다.
수백 명이 식당을 이용하는 점심시간. 사람들이 끊임없이 몰려든다. 식사를 마친 사람들은 식판을 들고 그릇을 반납하는 곳으로 몰린다. 식판에는 먹고 남은 음식들이 쌓여있다. 사람들이 먹고 남은 음식을 아무리 깔끔하게 갈무리 한다고 해도 지저분할 수밖에 없다. 국물이 넘쳐서 흐르기도 하고 순식간에 쌓인 식판은 여기저기서 흔들거리다 와장창 소리와 함께 떨어지기도 한다. 설거지 창구를 혼자 맡고 있는 그녀는 그런 상황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다. 식판을 가져다놓으면 웃어주고, 밀려있는 식판을 조금 밀어주거나 정리해주면 ‘고맙습니다’하고 큰 소리로 말하며 활짝 웃는다.
서비스 정신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교육을 받은 게 아닐까 하고 생각도 했다. 그렇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밥과 반찬을 배식하는 창구에는 웃음이 없다. 그녀만 그런 것이다. 뭐 대단한 일이라고 서비스 정신을 발휘할 것도 아니고 누가 교육을 시킨 것도 아니다. 그럼 도대체 뭘까. 도대체 뭐가 즐거워서 저렇게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일할 수 있을까. 식당의 설거지라는 일. 파트타이머. 고된 삶이라는 생각이 먼저 떠오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래도 그녀는 항상 웃는다. 최소한 점심을 먹고 식판을 가져다주는 그 순간은 항상 웃고 있다.
흔히들 하듯이 ‘내가 저 자리에 있다면’이라고 생각을 해봤다. 나는 웃을 수 있을까. 형식적으로라도 웃을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아마 절대 웃지 못 할 것이다. 짜증내고 인상 쓰는 일이 일상이리라. 그 일이 뭐가 즐거워서 웃으며 일하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고되고 힘든 삶을 누가 좋아할까. 피곤한 삶은 상상만으로도 짜증을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정작 그 한가운데서 웃고 있는 그녀는 도대체 무얼까.
천사가 여기에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웃음의 의미, 삶의 의미를 알려 주려고 하늘에서 잠깐 내려온 천사가 아닐까. 삶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는 것이고, 그 순간 또한 생각하기에 따라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 주려고 내려 온 것은 아닐까. 분명 그녀보다 형편이 훨씬 좋을, 그녀와 비교하면 행복해서 쓰러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도 그렇게 활짝 웃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웃기는커녕 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미소조차 모른다. 뜻밖에 그녀가 그렇게 웃고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었다. 묵묵히 밥을 먹고 묵묵히 돌아서서 묵묵히 또 일을 하러 갈 뿐이었다. 그들의 눈에 웃음은 보이지 않았다.
한 끼의 밥을 먹고 그 웃음을 볼 때마다 가끔씩 생각하곤 한다. 부럽고 부끄럽다고. 그래도 웃는 게 부럽고, 웃음을 아예 잊어버린 듯 사는 게 부끄럽다고. 그 웃음을 볼 때는 무언가 배웠다고 생각하지만 몸을 돌려 돌아서면 다시 똑같은 자리로 돌아가는 게 부끄럽다고.
누가 되었건 현대의 경쟁구도 속에서 사람들은 무엇이든 더 많은 것을 차지하기 위해 온 힘을 다 기울인다. 무언가를 더 가졌을 때 환호하고 기뻐한다. 그리고 크게 웃는다. 무엇이든 가진 것이 적으면 괴로워하고 자책한다. 패배자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인상을 찌푸리고 고심에 빠진다. 웃음은 찾아볼 수 없다. 무언가를 더 갖기 위한 방책을 짜내려는 것이다. 이미 가진 것이 적지 않음에도 누구누구보다 적다는 이유만으로 그렇다. 자신이 처한 환경과 능력에 관계없이 많은 사람들이 남들과 같은 행로를 걸으려 한다. 더 많은 크기의 소유를 추구한다.
그런 세태 속에서 만난 적게 가진 자의 밝고 큰 웃음은 뜻밖이다. 불가사의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그 웃음은 더 가슴에 와 닿는다. 산속에서 수련하는 선승들이 쓴 책보다 더 큰 울림을 주는 것은 그런 이유가 있는 까닭이다. 적게 가지고도 크게 웃는 자. 나는 아직 그 웃음의 의미를 다 이해하지 못했다. 그 웃음의 깊이는 언감생심 가늠해볼 생각도 하지 않는다. 식당에서는 오늘도 인간들이 묵묵히 밥을 먹고 천사가 웃으면서 설거지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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